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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 초기 최고위직 명칭에 대한 고찰 2018.11.30.솔내 김영환
익원공(金士衡, 이하 翼元公이라 칭함)은 우리가 보통 시호(諡號)로 말한 때는 익원공(翼元公), 관직명으로 말할 때는 좌정승(左政丞)이라고 말하고 당시에는 좌정승(左政丞)과 우정승(右政丞)만 있으므로 좌정승(左政丞)이 최고위 관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이 맞는 말일까 다시 한번 찾아보기로 하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할 때의 관제개편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은 개국하면서도 고려를 계승한다고하여 고려의 직제를 그대로 썼다. 고려후기 최고위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고려 전기 도병마사(都兵馬使)의 후신으로 일명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도병마사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중추원(中樞院)의 양부(兩府)에서 임명된 판사(判事)와 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으로 구성되어 양계(兩界)의 국방·군사 문제만을 논의하던 임시회의기관이었다.
그런데 고려 중기에는 변경뿐만 아니라 전국 인민의 가난을 구휼하는 방법까지 의논하는 등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고종 말년에는 도당이라 칭하고, 재추(宰樞) 전원이 회의에 참석해 국정전반에 걸친 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하였다.
1279년(충렬왕 5)에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어 구성과 기능이 더욱 확대, 강화되었다. 즉 그 구성에는 재추 이외의 삼사(三司) 요원뿐만 아니라 정식 직사자(職事者)는 아니지만 재상으로 국정에 참여하는 상의(商議)까지도 포함되어 있으며, 고려 말에는 그 수가 70∼80인에 이르렀다.
고려의 도평의사사는 조선 건국 후에도 영향을 주어 1392년(태조 1) 7월에 개정된 도평의사사의 직제는 고려 말의 것을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가 의정부로 개칭되고, 이듬 해 태종 1년 문하부를 통합해 백규서무(百揆庶務)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도평의사사는 소멸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평의사사 [都評議使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로 보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태조때에는 유지되다가 정종2년(1400년)에 의정부(議政府)로 개칭되었고 태종1년(1401년)에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여 의정부(議政府)에 통합함으로써 최고의 정무기관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러면 조선초기의 최고위 관직명은 무엇이었는가를 실록을 통하여 살펴보자.
태조 1년 7월 17일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 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 (王大妃)에게 아뢰었다.
태조 1년 7월 28일 문무 백관의 관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는 판사(判事)가 2명인데 시중 (侍中)이 맡고,
문하부(門下府)는 영부사(領府事) 1명, 좌시중(左侍中) 1 명, 우시중
(右侍中) 1명, 이상은 정1품이고, 시랑찬성사 (侍郞贊成事) 2명은 종1품이
삼사(三司)는 영사사(領司事) 1명은 정1품이고, 판사사 (判司 事) 1명 종1품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는 감관사(監館事) 1명, 시중(侍 中) 이상이 겸무
경연관(經筵官)은 영사(領事) 1명, 시중(侍中) 이상이 고, 지사(知事) 2명
태조 1년 7월 28일 홍영통(洪永通)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 事),(安 宗 源)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배극렴 (裵克廉)을 익대 보조공신 문하 좌시중(翊戴補祚功臣門 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으로, 조준(趙浚)을 좌명 개국 공신 문하 우시중(佐命開國功臣門下右侍中) 평양백(平 壤伯)으로,
태조 1년 8월 20일 개국 공신의 위차를 정하다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김사형(金士 衡)·정도전(鄭道傳)·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안백(義安 伯) 이화(李和)·
태조 1년 12월 13일 조준(趙浚)을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 김사형(金士衡)을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 상락백(上洛伯) 으로 삼고, 식읍(食邑)은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은 3 백 호로 하고,
태조 3년 10월 10일 시중(侍中)을 정승(政丞)으로 고치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의정부(議政府)로 개편되고 그 최고위관직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라고 하였다.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았던 조선은 점차 관제를 정비하면서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事司)를 1400년(정종 2) 4월에 의정부로 개편하고, 그 최고 관직을 영의정부사라 하였다. 이후 의정부의 기능이 점차 강화되고 관제가 정비됨에 따라 영의정 부사는 다시 영의정으로 개칭되어 직제로서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466년(세조 12)『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따라 성문화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의정 [領議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태종1년 7월13일 실록을 보면 “하윤(河崙)으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이서(李舒)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김사형(金士衡)으로 좌정승(左政丞), 이무(李茂)로 우정승(右政丞)을, 조영무(趙英茂)로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를, 이원(李原)으로 대사헌(大司憲)을, 유관(柳觀)으로 승녕부 윤(承寧府尹)을 삼았다. ”라고 되어 있다.
이로 보아 태종1년의 최고위직을 영사평부사-영의정부사-좌정승-우정승 , 이런 순서인 듯 하지만
그후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0월 4일[ 김사형(金士衡)으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하윤(河崙)으로 좌정승을, 성석린(成石璘)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
여기에는 영사평부사 -좌정승 -영의정부사 순으로 쓰여 있고 또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7월 16일 [조준(趙浚)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삼고, 이거이(李居易)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이무(李茂)로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를, 이첨(李詹)으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윤저(尹柢)로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를, 정탁(鄭擢)으로 청성군(淸城君) 겸 판한성부 ...]라고 하여 영의정부사-영사평부사 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실록에 쓰인 순서가 직위의 순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로는 계속 영의정부사-영사평부사로 기록하어 있으나 영사평부사는 태종3년윤11월15일 기사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영의정이라는 말은 태종3년4월3일자에 [ 영의정(領議政)은 비록 상부 (相府)의 우두머리에 ..’]라고 되어 있어 영의정부사를 영의정으로도 호칭하였음을 알수 있다. 그후 공식명칭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약칭 영의정(領議政)으로 계속 사용되어 온다
세종 즉위년 9월 3일 [심온을 영의정부사, 한상경을 서원 부원군으로 삼다]라고 되어 있고
이후 영의정부사 유정현을 약칭 영의정으로 계속 되었고 ,
세종 7년 1월 24일에 [영의정부사 이직이 황제의 우후한 예우를 받고 북경에서 돌아오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윤7월 24일 신유 3번째기사 / 임금의 병환이 심하자 대신들이 종묘 사직과 산천에 기도하다"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신 이직 등은.... 라고 영의정부사라고 하였으며,
이직이 죽은 후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 9월 3일 [황희를 영의정으로 삼고, 맹사성을 좌의정으로, 권진을 우의정으로,..] 라고 기록되어 영의정부사라는 말이 사라지고 이후 계속 영의정으로 기록된다.
정리해보면
태조 1년 7월 17일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등이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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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1년 7월 28일 홍영통(洪永通)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 事)로, 안종원(安宗源)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배극렴 (裵克廉)을 익대 보조 공신 문하 좌시중(翊戴補祚功臣 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으로, 조준(趙浚)을 좌명 개국 공신 문하 우시중(佐命開國功臣門下右侍中) 평양 백(平壤伯)으로..삼았다.
태조 1년 8월 20일 개국 공신의 위차를 정하다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 中)조준(趙浚)·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김사 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흥안군(興安君)이제(李濟)·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
태조 1년 12월 13일 조준(趙浚)을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으로 삼고, 김사형(金士衡)을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 상락백(上洛伯)으로 삼고, 식읍(食邑)은 1천 호(戶), 식 실봉(食實封)은 3백 호로 하고,
태조 3년 10월 10일 시중(侍中)을 정승(政丞)으로 고치었다.
태종1년 7월 13일 영사평부사(하륜),영의정부사(이서)-
좌정승(김사형)-우정승(이무)
태종1년 11월7일 고려문하시중 정몽주를 영의정부사 추증
태종1년 12월9일 영의정부사 이서
태종2년 4월 18일 이거이 영의정부사
태종2년 6월 26일 영의정부사 이거이(李居易)· 영사평부사 하윤(河崙)· 좌정승김사형(金士衡)· 우정승이무(李茂)·.
태종2년10월4일 김사형(金士衡)으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河崙)으로 좌정승을, 성석린(成石璘)으로 영의정부 사(領議政府事)
태종 2년 11월 17일 이거이(李居易)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 事)를, 성석린(成石璘)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겸 판개성유후사사(判開城留後司事)를,
태종 3년 7월 16일 조준(趙浚)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를 삼고, 이거이(李居易)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이무(李茂)로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를
태종 3년 7월 16일 조준(趙浚)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를 삼고, 이거이(李居易)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이무(李茂)로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
태종 5년 6월 27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평양 부원군(平 壤府院君) 조준(趙浚)이 죽었다
태종 5년 7월 3일 성석린(成石璘)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 事)를 삼고,
태종 6년 12월 8일 이서(李舒)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삼아 그대로 치사(致仕
태종 7년 1월 19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성석린(成石璘) 이 상서(上書)하여
태종 7년 7월 4일 하윤(河崙)·조영무(趙英茂)를 파하고,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성석린(成石璘)으로 좌정승을, 이무(李茂)로 우정승을
태종 8년 1월 3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화(李和)가 사면 (辭免)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 8년 2월 11일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세자사(世子師)를
태종 9년 8월 10일 하윤(河崙)으로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을, 이서(李舒)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조영무(趙 英茂)로 우정승(右政丞)·영삼군사(領三軍事)를
태종 9년 10월 11일 이서(李舒)를 파(罷)하여 안평 부원군 (安平府院君)을 삼고, 하윤(河崙)을 영의정부사(領議政 府事)로
태종 12년 8월 21일 성석린(成石璘)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 府事)를, 하윤(河崙)으로 좌정승(左政丞)을,
태종 14년 4월 17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성석린(成石 璘)을 파하여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으로 삼고, 하윤(河崙)을 영의정부사로,
태종 15년 5월 17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을 파직시켜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태종 15년 10월 28일 성석린(成石璘)을 영의정부사(領議政府 事)로, 하윤(河崙)을 좌의정(左議政)으로, 남재(南在) 를 우의정(右議政)으로
태종 16년 5월 25일 하윤(河崙)을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으로, 남재(南在)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유정현 (柳廷顯)을 좌의정(左議政)으로, 박은(朴訔)을 우의정 (右議政)으로
태종 16년 11월 2일 유정현(柳廷顯)을 영의정부사(領議政府 事)로, 박은(朴訔)을 좌의정(左議政)으로, 한상경(韓尙 敬)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세종 즉위년 8월 13일 임금이 상왕전에 나아가 영의정 한상 경(韓尙敬)과 우의정 이원을 불러
결론
조선초기(태조-태종)에는 좌시중-우시중, 영의정부사-좌정승-우정승으로 사용되다가 영의정부사-좌의정-우의정으로 쓰이다가 세종때 비로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익원공께서 역임하신 좌정승(左政丞)이 최고위직이라고 말 할 수 없음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증할 수 있다.
익원공께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도 역임하셨으므로 영의정과 같은 직급이 아니냐하는 문제는 별도이다. 영사평부사는 사평부(司平府)의 최고직이다. 사평부를 고전용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사평부[ 司平府 ]
조선 태종 원년(1401) 7월에 삼사(三司)를 고친 이름. 전곡(錢穀)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는데, 태종 3년(1403) 6월 관제를 고칠 때 개편된 바 있고, 동왕 5년(1405) 1월에 혁파되어 호조에 합쳤음.
[네이버 지식백과] 사평부 [司平府]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조선초기 태조때부터 세종초까지 사용되던 고위직 명칭인 시중(侍中), 좌시중(左侍中), 우시중(右侍中),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영의정(領議政), 좌정승(左政丞), 우정승(右政丞),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모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조선조의 최고위 등급이다. 단 정1품 최고위등급에서 맡은 소임이 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