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첫 장면은 서사예술의 시작이 아니다.
첫 장면의 중요성
첫 문장, 첫 장면은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장면은 소설 전체를 함축하고 규정한다. 한 편의 서사가 제대로 만들어졌는가는 첫 장면만 마주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서사 예술에서 첫 장면은 압도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첫 장면은 전체의 첫걸음일 뿐만 아니라 전체의 압축이기 때문이다.
첫 장면의 역할
첫 장면의 중요성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전체 서사에서 첫 장면이 차지하는 기능과 역할, 그 효과를 포괄하여 설명해야 한다. 첫 장면이 어떻게 다음 이야기를 유발하고 서사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능을 하는가, 또 중심 사건에서 어떤 단서로 기능하는가? 첫 장면은 이 모든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첫 장면이 실패하면 끝 장면도 실패할 확률이 높다. 반면, 첫 장면이 그럴듯하다고 해서 그 작품의 성공 확률이 대단히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 뒤에도 풀어야 할 많은 숙제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예시로 네팔의 오래된 민담인 「죽음은 왜 보이지 않는가」를 들 수 있다.
제4장 첫 장면의 아홉 가지 유형
독자를 마중하는 첫 장면
첫 장면은 독자나 관객이 실제 세계와 서사 세계 사이에 놓인 경계에서 자연스럽게 서사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다.
배경 제시형
배경 제시형 첫 장면은 사건이 벌어질 시·공간에 대한 설명과 묘사로 이뤄진다. 여기서 형상화된 정조는 서사 전체의 분위를 결정한다. 간혹, 밝음과 어둠이나 조용함과 소란스러움 등 정조의 대비를 통해 서사의 긴잔감을 높이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톨스토이의 『부활』,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을 들 수 있고, 영화로는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사운드 오브 뮤직》이 대표적이다.
일상 제시형
일상 제시형의 첫 장면은 인물이 어떤 사건에 던져지기 전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묘사한다. 대체로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이 그려지는데, 이 경우 독자나 관객은 서사 세계로 들어가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후, 일상 유지와 일상 파괴의 경계에서 독자와 관객들은 더 깊숙한 서사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대표적으로 박경리의 『토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오정희의 『동경』 등이 있고, 드라마로는 오수연 극본을 쓰고 윤석호가 연출한 드라마 『가을 동화』 등이 있다.
인물 제시형
인물 제시형 첫 장면은 인물의 성격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와 관객에게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짐작하게 하고 사건의 전개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첫 장면을 채택한 서사들은 인물의 성격이 운명을 지배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존 쿳시의 『추락』,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윤흥길의 『완장』 등이 있고, 영화로는 임상수 감독의 《봄날은 간다》, 스텐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등을 꼽을 수 있다.
회상형
모든 이야기의 본성은 지나간 일들에 대한 회상이다. 작가들에게 회상의 형식이란 이야기의 본성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상투적인 형식으로 여겨진다. 대다수 작가들은 회상형 첫 장면의 사용을 피하지만, 뛰어난 작가들은 이 낡은 형식을 사용하여 소박하고 진솔한 회상의 효용성을 극대화 한다. 대표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르 끌레지오의 『사막』, 밀란쿤데라의 『농담』 등을 들수 있고, 영화로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가을의 전설》을 꼽을 수 있다.
전체 압축형
전체 압축형 첫 장면은 서사 전체의 문제의식을 아우르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거나 은유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훈의 『남한산성』,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등이 있고, 영화로는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마이클 만 감독의 《라스트 모히칸》을 꼽을 수 있다.
독자를 유혹하는 첫 장면
사건 발생형
사건 발생형 첫 장면은 인물과 배경에 대한 설명이나 인과 관계의 제시는 뒤로 미루고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을 먼저 제시한다. 이를 접한 독자나 관객은 사건에 매혹되어 자연스럽게 다음 페이지로 시선을 옮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등이 있고, 영화로는 카비르 칸 감독의 인도영화 《카불 익스프레스》를 꼽을 수 있다.
행동형
행동형의 첫 장면은 인물의 습관적인 행위에 집중한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행위라 할지라도 반복성을 띄면 사건을 추동하고 국면을 전환하며 의미와 상징성을 획득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등이 있고, 영화로는 대니 보일 감독의 《트레인스포팅》이다.
대비 상징형
대비 상징형 첫 장면은 인물이나 사물, 이미지의 대비와 충돌을 통해서 서사 건개에 필요한 추동력을 얻는다. 흔히 인물 간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서 필연적인 갈등을 암시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 등이 있고, 영화로는 니나가와 미카 감독의 《사쿠란》이다.
의문 유발형
의문 유발형 첫 장면은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단서를 친절하게 제공하기보다 비일상적인 사건이나 상황을 기술하여 독자를 매혹한다. 드물지만 자연법칙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사건이나 상황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오상원의 『모반』, 레이몬드 카버의 『제리와 모리와 샘』, 조해일의 『매일 죽는 사람』 등이 있고, 영화로는 마크 웹 감독의 로맨스 영화 《500마일의 썸머》의 첫 장면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