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주일설교
누가 예수를 배척하는가?
(마태복음 13:53~58)
오늘 설교 제목은 여러분이 듣자마자 불편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 한 번도 ‘님’자 없이 불러본 적이 없는데 오늘 설교 제목은 예수님에서 ‘님’을 빼버려서 감히 예수님을 향해 “예수를”이라고 하다니,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 제목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맞게 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님’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는 제목에는 이미 정답도 있습니다. 누가 예수를 배척하는가? 예수님에게 ‘님’을 붙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영어에서는 사람 이름에 ‘님’을 붙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예수님도 다 이름을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고 이름 대신에 직함을 부릅니다. 직함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아저씨, 아줌마라고 하는 것도 좀 무례한 것 같아서 사장님, 사모님, 선생님, 고객님으로 부릅니다. 아파트 계단 청소하는 분도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고 여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나라입니다.
그런데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논문에서는 다른 박사나 교수의 의견을 인용하거나 반박할 때 그냥 이름 석 자를 쓰는 것이 관행입니다.
하지만 그 상대방이 나의 지도교수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 지도교수를 인용할 때는 이름 석 자만 부르기가 미안하고 부담스러워서 이름 뒤에 직함을 붙이게 됩니다. 우리가 이순신이나 안중근은 그냥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친아버지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도 관계 때문입니다.
이런 관행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이름 뒤에 ‘님’을 붙이지 않고 부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직계 스승이나 주인님으로 생각하기보다 역사적 인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어 Jesus said를 우리말로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다.”입니다 이를 “예수가 말했다.”라고 하면 순 상놈입니다.
오래전 20대에 부산에 있는 한 통합측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는데 부목사가 설교 시간 내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는 대신에 “예수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벌떡 일어나서 “야, 이 건방진 목사야, 예수가 네 친구냐? 너같이 건방진 목사 설교는 도저히 들어 줄 수가 없구나.”라고 소리를 빽 지르고 나와버리려고 했는데 내가 20대 초반이어서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만 하면 화가 납니다. 그 목사가 정말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지 의심됩니다. 예수님에 ‘님’을 안 붙이는 건방진 목사도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을 그냥 부르면 좋아하지 않겠죠?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생애 도중에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 마을에 가서 설교하실 때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두 부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너무 잘 나서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 즉 대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은 율법과 율법 해석에 대해서는 최고의 권위자입니다. 이 사람들을 자기들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시시한 존재로 보았기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기준으로 평가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웠던 것과 비슷한 일이 현대사회에도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대학 교수들입니다.
신학대학 교수라면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 교수들은 성경을 비평하고 예수님을 공격하면서 전문가 행세를 하고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비평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 단지 역사적 인물로만 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초대 교회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제자 공동체가 만들어낸 문서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그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머리가 좋고 학문에서는 매우 뛰어나서 그들의 언변을 따라갈 사람이 거의 없어 하려한 말로 신학생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름은 신학자이고 목사이지만 성경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들은 불신자이며 이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우리 주님으로 믿지 않고 그냥 “예수”라는 인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너무 익숙해서 배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나 대제사장의 이야기, 또 현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들의 이야기는 성도 여러분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인 가운데 너무 익숙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고향 나사렛 마을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알아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뭐든지 익숙하면 귀한 줄 모르는 것, 그것이 사람의 한계이며 불행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했고 결국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익숙하고 잘 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들은 30년 전부터 예수님이 자라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 예수는 자기 친구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형입니다. 예수님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 출신의 청년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54절을 보면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과 능력 행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놀랐습니다. 놀랐다면 인정해야 하고 메시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57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이유가 없이 다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배척한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성경과 예수님이 너무나 익숙해서 성경을 생명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불신자는 아니지만 오래 신앙생활을 했기에 오히려 예수님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들은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단순히 지식을 전해주는 도구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 예수님을 계명을 읽고도 벌벌 떨지도 않습니다.
제가 4만 원짜리 교통범칙금 통지서를 받으면 기분이 좀 나쁘지만 벌벌 떨지는 않습니다. 50킬로 기준에서 61킬로 지나갔다고 벌금을 내야 하니 기분 나쁘죠. 그런데 어떤 신자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명령을 4만 원짜리 범칙금 통지서보다 더 가볍게 여깁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옛날 왕정 시대 사람들이 왕의 명령을 받을 때는 예복을 갖춰 입고 정자세로 앉아서 조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어떻습니까? 편한 복장으로 동화책 읽는 자세로 앉아서 성경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과 가까워지고 성경에 익숙한 것은 좋게 해석할 수도 있고 나쁘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친하면 잠옷 입고 아버지와 뒹굴거나 아버지와 농담을 주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들도 설날에는 정복을 입고 세배를 합니다. 또 가족의 행사가 있으면 격식을 갖춰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오래 믿다 보면 신앙생활이 익숙해서 성경도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읽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옛날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엄위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이 담긴 언약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좋다고 하여 예수님의 상투를 잡아당겨서는 안 됩니다.
익숙하다고, 잘 안다고 성경과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두고 성경은, 58절에서 “믿지 않음”이라고 규정합니다. 믿지 않음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믿는 부모의 자녀를 모태신앙 인이라고 부릅니다. 모태로부터 믿는 신자는 굉장한 저력이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정상적인 패턴은 모두 모태신앙 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6:4의 쉐마를 보면 이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자녀에게 율법을 가르쳤고 가정 안에서 신앙이 전수되었습니다.
그런데 모태신앙 인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태인앙 인 가운데 어떤 이는 너무 익숙해서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나쁜 경우를 두고 조롱하는 말이 있죠. “못 해 신앙” 혹은 “못된 신앙”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제 아들 가운데는 “못 해 신앙”도 없고 “못된 신앙”은 더더욱 없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너무 익숙하여 하나님을 무시한 불쌍한 사람이 나오는데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그 못된 놈들은 제사를 멸시하고 삶은 고기가 아니라 구워 먹겠다고 제물을 생고기로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이 너무 익숙해서도 그렇지만 아버지 엘리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은 영향도 큽니다. 하지만 우리 가정은 함께 하나님을 잘 섬기므로 제 아들들은 홉니와 비느하스 같이 될 걱정은 없습니다.
하여간 모태신앙 인이나 오래 신앙생활을 해서 하나님을 너무 잘 알고 예배가 너무 익숙한 사람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이 주시는 조서로 받는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도 온 e-mail이나 문자 메시지처럼 받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을 ‘예수’로 취급하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시시하게 여기고 예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성경을 e-mail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일 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예수님의 능력을 입을 수 없습니다.
누가 예수를 배척하는가? 예수님에게서 ‘님’자를 빼버리는 사람입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찬송가에 그렇게 되어 있다고 예수님을 편한 친구로 착각하면 큰일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서 교회, 예배, 성경이 너무 익숙한 여러분은 예수님을 너무 편하게 여긴 것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고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