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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출 17:8-13, 눅 18:1-8
말세가 되면 나타나게 될 여러 가지 징조들에 대하여 복음서들은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사랑이 식어지거나, 거짓교사나 거짓 그리스도가 여기저기 많이 생기며 불법이 성행한다고 주님이 친히 경고하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내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며, 말세에는 참 믿음을 볼 수 없다고 탄식을 하신다. 이 말은 믿음이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다 거짓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거짓 믿음, 가짜 믿음이라는 말이다. 오늘날처럼 거짓이 많은 때는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짓이 범람하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내쫓는다는 말처럼 거짓이 너무 많아서 진짜를 알아보기 힘든 시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서에 써 있는 것처럼 가짜 그리스도까지 생겨 판을 치고 있다. 가짜 목사, 가짜 박사, 가짜 신자들이 무성한 시대여서 주님은 ‘내가 진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믿음의 모양은 있으나 실은 믿음이 아닌 것이 대단히 많다. 그래서 신자인가 불신자인지를 구분하기가 퍽 어렵게 되었다. 주님은 지금도 진짜 신앙인을 찾고 계신다. 그러면 주님이 찾으시는 참 신앙이 무엇인가를 성서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께 의뢰하는 신앙을 찾고 계신다.
성서 원어에서는 본래 ‘믿음’을 ‘신뢰, 맡김, 의탁함’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신앙이란 본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무엇을 맡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귀중품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다. 그것은 진심으로 믿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어느 처녀가 애인에게 자기의 장래를 다 밑기고 결혼을 요청해 온다는 것은 그만큼 피차 잘 알고 깊이 사랑하며 믿을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이란 오늘이나 내일이나 미래 전부를 맡기는 신앙이다. 귀중한 재산, 계획이나 꿈, 그리고 자녀들의 문제까지도 다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 다 맡기는 것은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우주를 지배 관할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이 있을 때 가능하다. 영적 교제나 깊은 성서공부를 통해,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비로소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가능하게 된다.
한번은 신문기자가 아인슈타인의 부인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부인께서는 남편의 그 유명한 과학이론을 다 이해하고 계십니까?’그때 부인은 깜짝 놀란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 ‘천만에요. 내가 어떻게 내 남편의 과학이론을 이해하겠어요? 그러나 나는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있지요. 바로 내 남편이 아인슈타인이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옳다. 우리가 삼위일체니 하나님의 속성이니 하는 여러 가지 신학적 깊은 교리를 알면 신앙에 도움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꼭 알아야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자들의 과제이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나를 택해 주셨고, 천지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분이어서 내 모든 문제를 능히 다 처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만 알면 족하다. 그래서 복잡한 학문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린이와 같은 단순한 신앙이 요구된다. 이런 단순하고 확실한 신앙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의심없이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다 맡긴다는 것은 신앙의 최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신앙의 시작이요 근본이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 롬 8:28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확신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어떤 현실을 만나도 불평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개인의 현재와 장래를 다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예찬하는 믿음의 사람들, 곧 요셉이나 욥, 다니엘과 같은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살았기 때문에 어떤 형편에서도 굴함이 없이 용맹스러웠다. 이런 사람은 현실을 초월한 미래지향적인 신앙을 갖게 된다. 믿음을 정의한 히브리서 기자의 말과 같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새 개념을 갖고, 없는 현실 가운데서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게 된다. 모든 것이 제대로 안되는 현실에서도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는 적극성과 가능성을 갖고 살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기대와 희망으로 산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인의 묘미가 숨어 있다. 한나라는 여자는 본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가진 여인이다. 아이 없는 설움과 학대 속에서도 주님께 다 맡기고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귀한 아들을 주시리라고 믿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은 비록 없지만 장래에는 꼭 생길 것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신앙이다. 한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삼상 2:6-8절하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한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결국 하나님은 불쌍하고 천대받던 그 여인을 높이 들어 주셨다. 그녀는 마침내 유명한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어떤 의사가 있었다. 이 사람은 본래 어린 시절 이북에서 살 때부터 할머니의 돈독한 신앙심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배운 것도 별로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전능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신앙인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로부터 이 의사는 막연하게나마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리라는 신앙심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1.4후퇴 때 월남하여 어린 시절에 대구에 있는 어느 다리 밑에서 거지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죽음의 위험 앞에 서서 하나님께 ‘내가 이 무서운 병에서 고침을 받고 다시 살게 된다면, 장차 커서 이 무서운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옵소서’ 하며 헌신을 약속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그 후 미국에 유학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꿈꾸던 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된 후 그가 인종 차별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궁핍한 자를 들어 올려 귀족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늘 믿고 살았다고 한다. 한번은 시카고 근교의 큰 병원 앞을 지나면서 ‘주님, 제가 언젠가는 저 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옵소서’ 하며 자기의 소원을 주님께 아뢰었다고 한다. 몇 년 후에 주님은 다시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는 그 병원에 채용이 되었다. 그러나 백인 의사들이 키 작은 동양인 의사를 여러모로 차별하고 궂은 일만 시키는 등 정신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한나와 같이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그런 신앙심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동안 주님은 한나의 경우처럼 그를 높이 드셨다. 그래서 지금은 그 병원의 산부인과 과장이 되었다. 이제는 그를 우습게 보았던 백인 의사들은 다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시고자 하시면 못하실 일이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사람은 꿈을 갖는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엉뚱하게 보이거나 개꿈으로 보일지라도 먼 미래에는 반드시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 꿈을 귀하게 여기며 꾸준히 살아가야 한다. 이런 꿈이나 기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어린아이가 모든 것을 부모님께 맡기듯이 우리도 현재 일이나 미래 일을 주님께 다 맡길 수 있다.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심을 주님은 지금도 찾고 계신다.
2. 주님께서는 행동하는 신앙을 찾고 계신다.
사실 신앙생활에는 말이 별로 필요없다. 먼저 행함으로 믿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말이 많고 요란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은 믿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보아도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해 예언할 때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42:2)라고 했다. 주님은 조용한 분이셨다.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에서는 큰소리가 날 필요가 전혀 없다. 믿음이 좋다고 자랑하며 말을 많이 하며 떠드는 사람들은 실속없는 껍데기일 경우가 많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기도할 때마다 큰소리로 떠들던 바리새인들은 결국 믿음이 없는 무리들이라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믿음과 말은 서로 상반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쪽이 많으면 다른 한쪽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들은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라고 선언한 야고보의 말은 참으로 진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일 수 있는 믿음’이란 사랑을 동반한 행동을 뜻한다. 가깝게는 이웃과 교회 안의 형제를, 그리고 좀더 넓은 의미로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아선상에서 고생하는 모든 불쌍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심없고 이기적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옛날 고린도교회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특히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무조건 잠잠하라고까지 엄명한 사실을 보면 여자들이 많이 떠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처럼 행함은 없이 믿음이 많다고 떠드는 것을 ‘울리는 꽹과리요, 소리만 내는 징과 같다’라고 바울은 비난하고 있다. 사실 행실로 믿음을 증거하는 이들은 말이 별로 없다. 그저 조용히 주님을 섬길 뿐이다. 우리 교히는 그렇지 않지만 교회를 통해 봉사도 잘 안하고 헌금도 정성껏 내지 않는 무리들 가운데 불평만 하고 잡음만 내면서 목사와 교인들에 대하여 수군수군거리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는 신앙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징소리와 꽹과리 소리만 점점 더 요란해지고 있는 것 같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이란 말보다 실제 사랑과 봉사의 행실로 보여주는 믿음이다.
한 늙은 할머니가 영국 런던 시ㅐ에 있는 구제선교본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많은 빈민들이 와서 식사를 제공받곤 했다. 그 할머니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어서 물질적으로도 많이 구제하고 또 실제로 시간을 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파를 통해 많은 빈민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많은 직원들 가운데 왜 하필 이 할머니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할머니는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순회 목사가 이 할머니에게 그같은 성공적인 전도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수화로 대답하기를 ‘저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웃음으로 영접하고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 환한 웃음으로 전송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사실 가장 효과적인 전도법은 말보다는 예수님의 거짓없는 사랑과 웃음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말대신 행동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여인이 있었다. 그 남편이 다니는 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도시는 종교 도시를 방불케 하는 퍽 보수적인 곳으로 눈에 띄일만큼 기독교의 종교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 미국 사람들은 말은 별로 안했지만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나타내는 훌륭한 분들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아이를 돌보아 주던 중년 부인이 자기 남편이 공부하던 학과의 과장 부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유학생이 차 사고로 오랫동안 입원했다가 집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한달 이상이나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루도 빠짐없이 만들어 주는 부인도 있었다고 한다. 고생하는 유학생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서 도움을 준 분들이 알고 보니 모두 교회에 다니는 교수 부인들이요 여신도회 회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통해 희생적인 사랑을 접하게 되었고 이 사실에 감동하여 부근에 세개나 한인교회가 있었지만 말뿐이고 사랑이 없는 한인교회 대신 미국인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주님께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보다 회개의 열매를 맺고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직분을 제대로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간곡히 요구하고 있다.
3. 주님께서는 말씀에 절대 복종하는 신앙을 찾고 계신다.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과 순종은 동의어이다. 요한일서 기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2:3-5)라고 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그의 계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시금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벌씨는 ‘영적 성장의 황금률은 곧 복종이다’라고 말했다. 신약성서 중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는 히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써 자기들의 믿음을 증거해 보였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허황하게 보이는 주님의 명령에도 미련할 만큼 복종하였다. 노아는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홍수에 대비해서 12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주님이 말씀을 굳게 믿고 방주를 지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이라고 칭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근처에 이르러 광야생활이 어려워지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되었다. 차라리 애굽에 그냥 있었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이 물려 죽게 되었다. 모세는 그 무서운 불뱀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높은 장대에 매달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그 뱀을 쳐다보도록 명하셨다. 불뱀에 물려죽게 된 많은 사람들이 구리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여 산 사람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다. 그는 손종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문하거나 이유를 물은 일이 없었다. 자기에게 당장 손해가 되거나 마음에 고통을 주거나 도저히 복종하기 어려운 명령이라도 그는 이유없이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할 때 두말 하지 않고 즉시 떠났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그는 100세가 다 된 늙은 나이에 독자 이삭을 얻게 되었다. 이삭은 앞날이 창창한 아들로 온갖 사랑을 다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이삭이 장작을 짊어질 때쯤 되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양처럼 잡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것은 철헉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육신의 아버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며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명령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와 의논조차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아들을 묶어 재단 위에 놓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양을 대신 잡아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 무섭고 어려운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신앙인으로서 금보다도 더 값진 신앙체험을 얻게 된다. 곧 ‘여호와 이레’이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두셧다’는 뜻이다. 이 신앙만 갖게 된다면 세상에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 고귀한 신앙체험은 절대적인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믿음의조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이 우리에게 손해가 되고 희생이 따르고 순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무조건 순종하면 우리는 ‘여호와 이레’를 만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놀랍도록 자라게 된다. 복종의 생활을 계속할 때 얻어지는 그런 신앙체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에녹이나 아브라함처럼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사자 굴 앞에서도 눈하나 깜빡이지 않았던 다니엘이나, 타오르는 풀무불 앞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 불속으로 던짐을 받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이나, 돌에 맞아 죽은 순교자 스데반의 신앙은 다 이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산 신앙의 체험에서 얻어진 결과들이다. 살아 역사하시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다는 것은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신앙의 최고 축복이다. 이는 넘기 어려운 복종의 문턱을 넘어야만 얻게 되는 산 신앙의 열매들이다. 우리는 성서가 제시한 모든 계명이나 주님의 말씀들을 하나씩 지키고 복종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런 복종이 실습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점점 자라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재림할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라고 물으실 때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맡길 수 있는 신앙, 말보다 조용히 행동하는 신앙, 그리고 무조건 복종하는 신앙을 찾고 계신다. 이런 귀한 신앙을 가짐으로 주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