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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같아야 / 창 2:18-24, 막 10:2-16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가장 중요한 세가지 만남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 부모와의 만남이다. 부모를 만나는 것으로 인종이 결정되고, 성이 부여되며, 용모와 재주, 총명, 성격 등이 좌우되기도 한다. 둘째, 일생을 해로할 배우자와의 만남이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결혼이야말로 신중하게 잘해야 하는 것으로, 배우자를 잘못 만나면 평생 골치가 아프게 된다. 셋째, 이생과 저생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생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은 저생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게 될 것이며, 이생에서 주님을 거역하고 불신 가운데 살던 이는 저생에서 하나님을 심판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인 결정은 영원을 어디에서 보낼 것인가의 중요한 사건이며, 이 세상에서 ‘누구와 일생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결혼 상대자의 선택은 인생의 행, 불행의 열쇠가 되며, 자손 대대에 영향을 주는 관건이 된다. 출생과 사망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듯, 결혼도 인간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아니다. 사람들이 편리한대로 둘씩 둘씩 짝을 지어 결혼하여 살기로 결정해서 세워진 제도가 아니고, 이 세상에 단 한사람의 남자와 단 한사람의 여자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주례자가 되시고 축복하심으로써 세우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가나 혼인잔치에 가셔서 인간의 혼례 행사를 축하하시고, 지상의 첫 기적으로 맹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시기까지 축복해 주셨다. 이렇게 결혼제도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최대의 관심과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신 사건인 것이다. 성서의 인간사의 출발이 창세기에서 결혼으로 시작되는데, 인류 역사의 마지막 또한 결혼으로 장식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고대하던 신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지상의 신령한 신부인 교회와 영원한 결혼식을 하는 것으로 인류 역사의 절정이 장식될 것을 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이 증언하면서 성서의 종막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가정을 잘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은 이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가정들이 엄청난 수가 파괴되고 있다. 1980년도에 24,000쌍이 이혼을 했는데 1990년도에는 57,000쌍이 이혼했다. 10년 사이에 이혼률이 2.3배로 증가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혼증서만 써주면 이혼할 수 있었다. 이혼증서는 ‘이 여자는 주인없는(남편없는) 여자’임을 입증하는 문서였다. 이혼증서를 허락한 모세는 이혼을 막아보려고 만든 법이다. 본래는 이혼이 안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이혼 문제가 있은 다음에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이 나온다. 자기 편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하던 어른들도 어린아이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내용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막 10:1-12절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혼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던 그런 내용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어 10:17-22절을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로 와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오라’고 하셨다. 이 부자 청년은 가진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갔다는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했던 사실과 한 부자 청년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말씀 사이에 끼어있는 내용이 바로 에수님을 찾아온 어린아이들을 축복하고 있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자기 아이에게 안수해 주기를 바라고 예수님께 찾아왔다. 제자들은 이 아이들을 거절했다.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을 위한다는 뜻에서 그랬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1-12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정신적으로 많이 괴롭혔고 또 예수님이 피곤하셨기 때문에 아이들이 와서 시끄럽게 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14-15절에 보면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후 아이들을 안고 머리에 안수해 주셨다. 이때 안수받은 아이들이 후에 초대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어린아이들의 존엄성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지는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엄청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4절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나와 있다. ‘어린아이들의 것이다. 어린아이들 같은 자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비밀은 어린아이 같아야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이 본문 속에 들어있다고 저는 확신한다. 몇가지만 생각해 보자.
1. 어린아이 같이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 18: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서는 분명 해석을 붙이고 있다. ‘자기를 낮추는 자, 겸손한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하라.’ 여러분, 이 시간 ‘어린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이 겸손한가?’ 이런 질문들이 생길 것이다. 많은 학자들의 글에 의하면 ‘아이들의 겸손은 알고자 하는 겸손이다.’라고 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질문형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을 길러보신 분들은 다 알 것이다. 아기들이 조금씩 말을 배우게 되고 조금 철이 들게 되면 질문이 많아진다. ‘엄마, 이게 뭐야?’ 해서 대답을 하고 나면, 또 ‘그건 뭐야?’ 한다. 그래서 또 대답을 하고 나면 ‘저건 뭐야?’ 한다. 전부가 ‘뭐야? 이게 뭐야? 왜 그렇게 되었어? 왜 그렇게 생겼어? 어디서 왔어?’ 질문 투성이인 것이다. 친절하게 끝까지 가르치는 것,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떤 때는 질문에 대답을 못해서 아이들을 윽박지르는 경우가 있다. ‘시끄러워, 쓸데없는 질문하지마! 크면 다 알게 돼!’ 아이들을 보고 핀잔을 주는 경우도 있다. 대단히 어려운 질문형의 존재 양태가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나보다 아는 무리에게 배우려고 하는 앎을 향한 겸손, 알고자 하는 겸손, 바로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특별히 아이들을 기르시는 분들은 아이들이 질문할 때 최선을 다해 대답하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자녀교육,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의 5단원 소제목이 ‘나는 오래 참고’인데 거기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아이들이 알고 싶어서 질문할 때에 오래 참는 부모가 되라는 것이다. 오래 참으면서 끝까지 기르쳐 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인내가 부모로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아이들과 같아야 한다는 말씀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대해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한 자라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 되겠다. 벧전 2:2절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배우려고 하는 이런 겸손이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을 우리 한번 더 되돌아 보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노인대학 선생님이 서예전을 했다. 노인대학 학생들인 노인들이 서로 조금씩 모은 축하금을 가지고 와서 ‘우리 선생님, 우리 선생님’ 하는 것이 꼭 유치원 아이들이 자기 선생님을 찾는 그런 모습이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이 젊은 선생님을 향하여 ‘우리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모습에서 하나의 겸손을 배울 수 있다. 배우려고 하는 자는 겸손하다. 배우려고 하는 자는 갈급하다. 배우려고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알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진리를 터득하려고 노력하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아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 바로 겸손이다. 우리가 정말로 이 사회생활을 할 때 겸손했는가 생각해 보기 바란디.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착하고 훌륭한 선생님도 계시지만 나쁜 사람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 나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장차 자라서 저렇게 하지 않겠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 링컨은 말하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스승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다 배울게 있다는 말이다. 배우려고 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겸손을 소유한다는 이 진리를 우리 생활에 옮긴다면 우리의 삶은 풍요해 질 수 있다.
2. 어린아이 같이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린아이 같이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믿음은 신뢰이다. 믿음은 맡기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다 맡기는 것이다. 의지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한다. 무엇을 주든지 먹고 마신다. 심지어는 부모가 주는 것이 독한 약이라 할지라도, 그걸 먹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받아 먹는 것이 어린아이이다.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신뢰는 생존본능의 신뢰이다. 조금씩 알게 되고 철이 나게 되어도 의존하려고 하는 요소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어린아이인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어디에선가 읽은 글이지만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공놀이를 했는데 잘못 차는 바람에 공이 언덕 밑으로 굴러 내려갔다. 그러다가 중간 풀숲에 걸렸는데 누군가 내려가야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재빨리 줄을 가져왔다. 누구든지 밧줄을 허리에 매고 내려가면 우리가 붙들어 주겠다고 하면서 용기있는 아이에게 ‘네가 내려가라’고 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내려가려고 하다가 뒷짐을 지고 가만히 서서 하는 말이 ‘아니야, 내가 내려가는 건 좋은데 너희들이 받줄을 잡는다는 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더니 가까이 있는 자기 집으로 가서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아버지가 받줄을 잡아주시면 내가 그 중턱에 내려가 떨어진 공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버지가 잡으면 안심이 된나는 것이었다. 시 23:1, 4절상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주님 떠난 이 생명은 한시도 살지 못하니 예수님 내주여, 내 품에 오셔서 영원토록 계시옵소서.’ 생명적 관계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의지하는 것은 적극적인 신뢰이다. 생명적 관계구조이다. 부모는 곧 자녀의 생명이다. 아버지가 받줄을 잡아주시면 어떤 위험도 내가 감행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아이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확인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아야’라는 말은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보다 더 강한 믿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쏟아놓을 때에 그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우리의 믿음이,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신뢰하는 그 일상의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3. 어린아이 같이 순종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아이들은 심부름을 잘한다. 타의든 자의든 순종의 상징이 어린아이들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아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삶의 표현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행동하는 신앙, 행동하는 양심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훌륭한 행위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려면 먼저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앞장서서 빛과 소금이어야 하며, 우리 행동을 통해서, 우리 말을 통해서, 우리 삶의 기본 자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고 그 뜻을 드러내려고 애쓰는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이다. 성서의 진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어떻게 우리들이 생활을 통하여 전할 수 있을까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 시대인 김영삼 정권 문민정부를 문민시대라고 말한다. 문민시대란한 말은 군사정권이 다스리던 시대가 지나갔다고 하는 상대적인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오히려 행동하는 시대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알려고 하고, 알았으면 전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예수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삶의 승화가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 같아야’ 하는 것이다. 순종하며 행동할 줄 아는 삶을 삶으로써 천국 시민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사는 삶을 보여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 같아야’ 하는 말이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결론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인도의 케리 여사는 현대인이 짓는 죄가 세가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가 있고, 둘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죄가 있고, 셋째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바르게 행하지 않는 죄를 우리는 많이 범하고 있다. 어린아이처럼 배우는데 겸손하자. 어린아이가 부모에 대해 신뢰를 가지는 것처럼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어린아이처럼 순종하고 행동하는 믿음을, 행동하는 신앙을 보여주어야 하겠다. 이런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되려면 역시 우리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우리를 새롭게 하고 바르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항상 의존하기 바란다. 그 도우심을 매일매일 요청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배우는데 겸손해야 한다. 또 ‘어린아이 같아야’ 하는 말은 배우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가 철저하게 겸손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