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곡 이근갑
월요일 오후, 아파트 14층 뒤 베란다의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일산 가좌동의 가을 들 논이 눈부시다. 파란 하늘 맑은 햇살에 빛나는 황금빛 물결 위에 붉은색의 '자탈형(自脫型) 콤바인(combine)' 한 대가 미끄러지듯 느리게 전진하고 있다. 문득, 콤바인은 단순한 농기계가 아니라, 이 시대 농부의 필수 파트너이자, 고된 육체 노동을 사라지게 하는 마법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가 멀어도 콤바인의 투박한 무한궤도 기계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대지의 리듬에 맞춘 랩소디(rhapsody)처럼 가슴을 두드렸다. 콤바인이 지나가는 곳은 벼가 전부 베어져 탈곡의 과정을 거치면, 볏집은 논바닥에 펼쳐지고 알곡들만 수확된다. 놀라운 자동화 농기계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줌으로 영상을 찍고 사진을 캡쳐했다. 한동안 콤바인이 움직이는 모습을 봤다. 벼 수확 도중에 콤바인이 빠르게 이동하더니 농로에 있는 트럭의 톤백(포대)에 긴 팔('오거 auger')을 통해서 알곡들을 토해 냈다. 신기했다. 갑자기 콤바인의 구조와 작동 원리가 궁금하기도 했다. 암튼, 황금빛 벼 폭포수가 포대에 차곡차곡 담길 때, 한 해 농사의 수고로움의 결실이 수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고향의 가을, 어릴 적의 옛 풍경이 흑백 사진처럼 스친다. 붉은 고추잠자리가 춤추고, 식구들은 새벽부터 낫 들고 논으로 나갔다. 벼를 베고 한 움큼씩 묶여 논바닥에 늘어놓고 햇살에 말렸다. 벼가 마르면 지게나 수레로 마당에 옮겨서 멍석 위에 늘어놓고, 도리깨질 타작마당을 벌였다. 언제부터인가 발로 밟아 돌리는 페달형 탈곡기가 나와서 편해졌지만, 왕겨와 먼지는 뿌옇게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와르르, 탈탈탈…’ 요란한 탈곡기 소리와 함께 알곡들이 넓게 펼친 멍석이나 방수 갑바 위로 튀었다. 그 튀어 오르는 알곡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귀했던 시절이었다.
엄니는 바람개비(풍구)로 쭉정이를 날려 보내고, 깨끗해진 알곡을 가마니에 채우셨다. 겨와 먼지와 땀범벅이 된 얼굴에서 공매해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묻어나곤 했다. 아이들은 벼 까끄라기도 아랑곳없이 볏집 사이에서 실컫 뒹굴고 놀았었다. 어린 시절, 집에서 벼농사를 지어도 정작 쌀밥은 거의 먹지 못했다. 수확한 벼는 전부 공매로 나갔으니까... 해거름에 논으로 가서 떨어진 벼 이삭을 주워 오곤 했었다. 부엌의 무쇠솥 두껑을 열 때 뽀얀 수증기와 함께 쌀밥 냄새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아득한 추억의 정겨운 편린이다. 당시의 벼 품종은 '통일벼'였다. 정부 주도로 개발한 품종인데 맛은 별로였지만, 식량 자급자족에는 큰 전기가 되었다. 이후에 개량 품종이 계속 나오면서 통일벼는 사라졌다.
콤바인에서 쏟아지는 알곡들을 보고 있자니, 그때의 가족과 고향 동무들이 새삼 그립다. 암튼, 자동화 농기계 콤바인은 힘든 '육체의 노동'을 지워버렸다. 낫도, 지게도, 도리깨도, 멍석도, 가마니도 그 모든 그리운 풍경들은 이제 박물관으로 가거나 추억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콤바인은 농부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넓은 들 논을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작업한다. 이것은 분명 눈부신 영농기계화의 발전이며, 농촌의 고령화 속에서 식량 주권을 지켜내는 유일한 도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편리함 뒤로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고향에 갈 때마다 보이는 것은 잡초가 무성한 논밭과 갈수록 걱정에 깊어진 노인들의 주름이다. '이제 농사는 누가 지을꼬?' 큰 근심꺼리다. 콤바인이 벼를 베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볏짚은 따로 집초기가 볏짚을 모으고, 베일러(baler)가 압축해서 둥글게 말고, 랩핑 진공포장해서 '볏짚(곤포) 사일리지(silage)'를 만든다. 이는 겨울철 가축들의 사료가 된다. 추수가 끝난 논마다 보이는 하얀 뭉치들이 그것이다. 갈수록 사람의 온기가 사라지는 농촌은 기계의 굉음만이 그 아쉬움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운 시절, 사람이 그리운 가을이다. 우연히 벼 수확하는 콤바인을 보면서 향수에 젖었다가 이 글을 썼다. 어쩌면, 콤바인은 단순한 농기계가 아니라 우리가 잊어버린 '공동체'와 '땀의 의미'를 기억하는 마지막 증인이 아닐까. 추수가 끝나고 벼 그루터기만 남은 텅 빈 논에서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선 아버지의 얼굴을, 탈곡기 소리에 맞춰 땀을 흘리던 가족들의 소리를, 풍구로 쭉정이를 날리고 가마니에 벼를 채우던 어머니의 손길을 되새겨 본다.
여전히 콤바인은 넓은 황금 들녘을 가르며 전진한다. 그 광경에서 옛 추억이 깃든 아련한 가을의 향수가 실려 오고 있다. 여러 모로 편리해진 시대,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가을, 나는 어느새 붉은 기계의 랩소디를 들으면서 고향의 논두렁을 걷고 있다. 그 시절 그 냄새와 그 따뜻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