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꿀벌
뜰 윤창환
지구를 돌아
5만 6천 송이의 꽃
근( 斤 ) 반의 꿀을 모았더니
단물만 쏙 빼갔어
설탕물 먹고 토한 노랑물까지
바람 난
꽃과 열매의 반란
내 책임이래
오호라
눈썹도 까닥하지 않고
내 탓 이래
하늘이시여
저 꾀쟁이놈들의 면상을 치소서
그들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니이다
예끼 이 놈아
미풍 불면
하늘이 정해준 대로 날아라
너
구관이 명관 됐다.
2.
주저하지 말고
뜰 윤창환
바지랑대로 떠받친 가을 하늘엔
온갖 이야기들이 매달려 종알거렸다
저 골짜기 갈참나무 의연하더니
갈바람 그년 눈웃음에 광까지 털려
이미 얼굴이 노랗더라
자기는 사랑으로 익었다고
고추잠자리
저렇게 빨갈 것 까지야
실 같은 허리에 빨간 융단을 감고
댓바람에 나대는 꼴이
한로가 쓴 일기를 훔쳐 보았구나
입안의 혀처럼 굴어도
무서리 몇 방이면
강가의 물안개처럼 내려앉을
허무한 계절
가을이 누군데
모른 척 하기는
눈 몇 번 끔뻑하고
겨울에 들러붙어
주저하지 말고
3.
11월
뜰 윤창환
엄마 먹을 거 없어?
엄마 얼굴 보름달이던 어린 날
꽃과 나무가 보채는 얼굴을 몰랐다
떠나는 시월 서러워
몇 줄의 김밥을 등에 지고 산에 오른 날
왔던 길인데 왜 이리 멀꼬
스무 살 봄이 몇 천리
향기로운 그대가 웃어도 난 못 가네
쌉싸름한 바람이 훑고 지나간 계곡
맛집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초겨울 나뭇잎마다 손을 내밀고
내 동생 끝순이처럼 칭얼거리고 있었다
엄마 내 얼굴이 말랐어
햇볕 한 움큼만
아니한 숟가락만
4.
홀로 남는다는 것
뜰 윤창환
부드럽던 바람마저 등보인 언덕
청옥 눈물이 흐르는 하늘가에
싸늘한 고독이 매달렸다
여름내 못 받은 품삯
홍엽에 새겼더니
도적 같이 와버린 설야(雪野)
계절 끝은 그러려니
섣달 정월 삭풍이 나를 후리고
얼음장 초승달이 멋대로 기울어
미풍으로 간지리던
꽃잎 날리던 날의 맹서
눈으로 숨은 가지마다 침묵한다
춘삼월이 저당한 들판에
알맹이 내어준 잔챙이 가을이
당황스레 서성이는 밤
손등으로 훔치다가
눈꽃으로 피고 마는 고독한 눈물
그렇게 겨울은 홀로 남아
봄에게 받아낼 백지수표를 접는다.
5.
찔레
뜰 윤창환
가을이 달아놓은 빨간 등불
겨울 초병으로 뽑혀 근무 중
한설 서러워 떠는 애 오면
몇 개 따서 손에 쥐어 주고
굴뚝새 파고 들거든
몇 알만 꾸어 줘
빨간 입술을 지우면 안 돼
언덕 넘어 나풀나풀
봄 그 애가 깨금발로
흘금흘금 훔쳐보고 있더라.
카페 게시글
시, 시조
18호 문예지 시 3편~5편
뜰 윤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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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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