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없는 재주 / 허숙희
내가 고교 시절이었던 1970년대는 교육 대학을 지원하면 교과별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2차로 음악, 미술, 체육과 관련한 실기와 면접을 잘 봐야 최종 합격 되었다. 1차 시험을 잘 치렀어도 예체능 실기에 실패해서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교육 대학에 응시하여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실기를 앞두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체육은 달리기, 높이 뛰기, 멀리 뛰기, 뜀틀 등 어떤 것이든 자신 있었으나 노래 부르기가 걱정되었다. 듣기 부담스럽게 갈라지는 목소리에다 높낮이는 제멋대로이며 박자도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나도 들어 줄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여러 사람 모인 자리에서는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초등 교사가 되려면 비켜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여러 날 고심한 끝에 가장 많이 부른 노래라 생각한 ‘애국가’를 부르기로 했다. 며칠 동안 반복해서 연습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가창력 평가가 있는 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긴장과 함께 목청을 돋우어 ‘동해 물과’ 첫 마디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소절을 부르기도 전에 듣고 있던 교수님이 벌떡 일어나며 “아니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그만!” 난 노래를 멈추었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합격이었다. 아마 다른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학교에 발령받고 음악 시간을 걱정하였으나 학급 담임하는 동안 별문제 없이 무사히 잘 해냈다. 학기 초마다 시업식이 끝나면 반드시 ‘우리 반 노래 선생님’을 뽑았다. 교과서에 소개된 동요 수에 맞추어 단원별로 선발했다. 아이들의 호기심으로 어려움 없이 선출이 끝난다. 그 단원을 공부할 때까지 자신이 맡은 노래를 익혀서 선생님 대신 부르도록 한 것이다. 의외로 성과가 컸다. 대도시에 근무할 때는 피아노 배우는 어린이들이 있어 반주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나중에는 경쟁이 치열하여 한 단원에 두 명 이상 정해 주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주도적 학습’ 진행 방식이 아니던가?
예전에 회식 문화는 빠짐없이 노래 부르기를 폭력적으로 강요하였다. 학년 초 환영식이나 학년말 송별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또, 1년에 한두 번 방학을 이용하여 전 직원이 참여하는 현장 연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떠나는 날 버스에 오르면 친목회장은 으레 마이크를 돌리며 재촉했다. 난 그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로 피해 가곤 했다. 심지어는 그 시간이 부담스러워 가지 않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옮길 때마다 합창부 지도교사가 될까 봐 걱정되어 미리 가장 힘든 일인 새끼 교무(교무부장을 돕는 교무보조 업무)를 자청하여 학교에서 나오는 인쇄물을 정서하고 그것을 철필로 원지(얇은 종이에 파라핀과 기름을 먹여서 만든 종이)에 긁어 등사 준비하는 일을 모두 맡아 하였다. 근무 시간 내에 다 하지 못해 집에 가지고 가서 해야 하는 날이 많아 힘든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합창부는 절대 맡을 수 없어 나서서 했다.
1991년 부산에서 시작한 노래방은 흥 많은 우리 민족을 들썩이게 하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마침내 우리 집 근처에도 ‘신바람 노래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문을 연 곳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의식하지 않고 맘껏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 반가웠다. 이용료는 한 시간에 만원이었고 열다섯 곡 정도 부를 수 있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여유 있게 시간을 더 주기도 했다. 음악적 감각이 무디어 음을 바르게 소리 내지 못하는 음치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딱 두 곡만 연습하기로 했다. 한 곡은 애창곡으로 그때 한참 인기 있는 김○희 가 부른 흥을 돋우는 ‘남행열차’로 골랐다. 또 하나는 혹시 앙코르 받을 것을 생각해 애절함이 느껴지는 ‘잃어버린 정’이라는 차분하고 느린 멜로디로 정했다. 틈만 나면 달려가 연습하였다. 여러 달 지나 충분히 연습한 것 같아서 녹음해 보았다. 집에 돌아와 들어 보니 기대와 달리 내가 듣기에도 너무 부담스러웠다. 내 딴에는 최선을 다 했건만. 실망이 컸다. 그 이후 노래방 출입은 다시 하지 않았다. 역시 내게는 노래 부르는 재주가 없었다.
돌이켜 보니 한때 안타까운 추억이었다. 음정과 박자 모두 맞지 않아도 용감하게 끝까지 부르는 사람도 많이 봐 왔지만 난 지금도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피하고 있다.
첫댓글 동지를 만난 기분입니다. 그간의 선생님 기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도전도 해보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그랬어요. 무슨 행사만 있으면 노래를 그렇게 불렀어요. 선생님 고충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잘 하려고 연습해 녹음까지 한 걸 보면 조금 더 노력하면 잘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제가 대신 부르면 안될까요?
전 제 차례가 너무 늦게 돌아와서 불만이 많답니다. 노래방에서 연습하는 선생님, 대단하세요.
하하하!
선생님, 노래 말고는 다 잘 하시지요? 저도 18번을 만드려고 같은 노래를 계속 반복하여 따라 부르며 연습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선생님 노력형이시군요. 저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나중에 며느리나 사위를 맞이하면 제일 먼저 노래 실력부터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노력형이시군요. 저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나중에 며느리나 사위를 맞이하면 제일 먼저 노래 실력부터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끝까지 노력 하면 된답니다. 저도 음치탈출을 위해 고생 많이했어요.
응원합니다.
와, 의외입니다. 선생님 흥이 많아 보이셔서 노래 잘 할 거 같았거든요. 저도 노래방 엄청 싫어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