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佛法)은 애초부터 각기 다른 관점에서 인간을 볼 수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묘사하고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런 상호 존중과 관용의 바탕은 다름 아닌 연기(緣起,
파팃차사핍파다:paṭiccasamuppāda)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연기의 원리야말로 불법역사
가운데 여러 형태와 이름으로 출몰한 모든 부파를 불법(佛法)이라는 이름으로 유지케 한 이른바
정체성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불법(佛法) 교리 체계는 크게 연기라는 특유의 세계관과 거기에 걸맞은 삶의 제시 및 실현 방법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 연기의 원리는 가장 단순하게는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신 권선징악 이야기의
뼈대인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로부터 최신 현대 물리학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어서
때로는 종잡을 수 없는 ‘X’가 되기 일쑤다. 《
대연경(마하-인다나 숫타:Mahā-nidāna sutta)》의 도입부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이런 사정은
우리 같은 말법(末法) 시대 중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던가 보다.
세존께서 꾸루(Kuru)족 고을 깜마싸담마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가 예를
올리고 한쪽에 앉아 말했다.
“희유한 일입니다, 깊고 깊어 보이던 연기(緣起)가 이리 명료하게 드러나니 실로 부사의 한 일입니다.”
“그리 말하지 마라, 아난다여, 그리 말하지 마라! 이 연기는 실로 깊으며, 또 그렇게 드러난다.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문자 풀처럼 얽히고설키어서
고통스럽고 불행한 윤회를 벗어나지 못 한다,”
아난다 존자가 공언한 것처럼 연기가 유리 상자처럼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이었다면 불법 경전은
아마 현재의 십분의 일의 양에 미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입멸 이후에도 오랜 세월 고타마 붓다의
입을 빌려 설해진 많은 경전들의 성립과 변천이 실은 그 연기설의 심화, 확장 과정이었으며, 일견
분방해 보이는 그 창작 활동의 성과로 남은 것들이 바로 대승경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동적인 운동들이 아무런 지향도 없이 마구잡이로 벌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보존, 회자되고 있는 대승경전들은 기실 그 내용에 있어 붓다의 가르침의 핵인 연기의 세계관과 그에
맞는 삶의 길, 대 자유 해탈의 길을 열어 주고 있기 때문에 불법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법에서 벗어났거나 법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타마 붓다의 원음을 비교적 잘 보전하고 있다는 빠알리 니까야에서는 법(佛法)이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아래에서는 빠알리 경전에서 법의 정의(定義)로 빈번히 반복되는 정형구
(定型句)를 거울삼아 우리 모습을 비춰보려 한다.
법(法)−붓다의 가르침을 교라고 하지만 엄연히 법이다. 교는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며 부연설명으로
바뀌는 수도 있다, 그러나 법이라고 정의 하는 것은 불변의 법칙을 드려내어 표현하지만 불가변이며
원칙에 딱 맞은 것이기에 법이라 한다.
여기 세존께서 잘 설하신 법이 있으니; [이 법은 곧] 당장 눈앞에 드러난 것(산딧티까:sandiṭṭhika),
시간이 지체되지 않는 것(아까리까:akālika), 와서 보라는 것(에히빳시까:ehipassika), 향상으로
이끄는 것(오빠나이까:opanayika), 슬기로운 자 스스로 체험해야 하는 것(빳짯땅:paccattaṁ
웨-디땁보-:veditabbo 윈뉴히-:viñūhi)이라.
1)산딧티까 sandiṭṭhika
위에서 ‘당장 눈앞에 드러난 것’이라고 옮긴 이 용어는 문맥에 따라 ‘보이는 것’ ‘보여진 것’ 혹은
시간적으로 ‘현재의’ ‘금생(今生)에 관한’ 등 여러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다 담아내는
하나의 단어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청정도론(위수띠 막가:Visuddhimagga)》
에서는 이를 ‘지금 여기 보이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즉, 탐 진 치 삼독에 물들지 않은 슬기로운
이에게 붓다의 가르침(정도:正道)이 바로 보이듯이 법은 그렇게 현재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로부터 유추할 수 있고, 또 경전에서 그렇게 쓰이는 의미 가운데 하나가 불법은 ‘현실적인 것’
‘검증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몽상가의 사변이 아닌 우리 인간의 현실적인
고[苦]의 통찰과 그 소멸의 길을 제시하고 인도한다.
세계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유한하든 무한하든, 신[身](사리라:sarīra)과 명[命](자바:jīva)이 같건
다르건, 여래의 사후가 어찌됐든 청정한 수행의 길이 그러한 견해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여기 생[生](자띠:jāti), 노[老](자라:jarā), 사[死](마라나:maraṇa)가 있고, 우[憂]
(소까:soka), 비[悲](빠리데와:parideva), 고[苦](둑카:dukkha), 뇌[惱](도마낫사:domanassa)가
있다. 나는 오로지 현재 여기에 있는(빠띠 바 담마:diṭṭhe va dhamme) 고[苦]의 지멸[止滅]
(니까타:nighāta)을 가르칠 뿐이다.
말룽캬 뿟따, 따라서 밝히지 않은 것(무기:無記)은 밝히지 않은 대로, 설명한 것은 또 그대로 알라.
내가 밝히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세계가 영원한가. 따위다. 무슨 까닭인가? 말룽캬 뿟따, 그것은
[수행의] 목적과 무관하며 청정한 삶의 바탕이 되는 것도 아니다. 또 그러한 견해가 염리(厭離),
이탐(離貪), 적멸(寂滅), 적정(寂靜), 통찰지(洞察智), 정각(正覺)과 열반(涅槃)으로 향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룽캬 뿟따, 내가 밝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공언한 것은 고[苦]와 고[苦]의 발생, 고[苦]의
소멸, 고[苦]소멸의 길이다. 이것이야말로 목적과 부합하며, 청정한 삶의 바탕이다. 또한 이 가르침이
염리, 이탐, 적멸, 적정, 통찰지, 정각과 열반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설해진 것이다. 따라서, 말룽캬
뿟따, 밝히지 않은 것은 밝히지 않은 대로, 밝혀 설명한 것은 설명한 대로 알라.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지금 여기서 문제의 핵과 해답을 찾지 못하고 늘 밖으로 치닫는다. 눈앞에
놓인 문제의 발생 조건과 전개 과정을 면밀히 따져 보기보다는 먼 옛적 좋았던 시절, 혹은 가당찮은
미래의 환상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전생의 업이나 내생에서의
응보로 돌려 버린다. 오랫동안 그렇게 배우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불법이 윤회설을 수용하고 있고, 또 연기설이 면면히 이어지는 업의 상속, 윤회설을 설명하는 틀로
쓰인 것은 사실이다. 경전에 연기가 언급될 때면 대부분 생(生)·노사(老死)로 마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경전에 나오는 생·노사를 오로지 한 생명체의 생물학적 발생과 소멸로만 보는 데는
약간의 무리가 따른다.
‘일일일야 만생만사(一日一夜 萬生萬死)’ 한다 하지 않는가? 목숨이 붙어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거듭 죽고 되살아난다. 성성하게 깨어 있지 못한 것이 죽은 것이요, 헛된 것들을 쫓아 허둥대는 것이
죽은 것이다. 잠시 제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죽음을 넘나든다.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죽어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중생들의 삶이 아닌가! 너나없이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윤회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빠알리 경전 속에 연기가 윤회 구조를 다루고 있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연기를 다룬 모든 경전이 한 결 같이 전생, 금생 그리고 내생으로의 윤회를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삼세양중(三世兩重) 인과설이 후대 교학자들의
버전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되기도 했던 것이다. 한 예로, “숫타니파타:Suttanipāta에는 우빠디:
upadhi(집착),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에는 아사와:āsava(누:漏, 번뇌:煩惱)가 무명
(無明) 앞에 놓여 있는 경전도 있다.
게다가 더 오래된 리스트에는 표준화된 12지(支)에 사나:saññā(상:想)와 대승불교의 구원론에서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는 빠빤짜:papañca(망상:妄想, 허론:戱論)가 더해진 경우도 있다. 더 이상의
차이점은 논외로 하고, 제일 중요한 점은 가장 오래된 형으로 보이는 연기 틀에는 (4)명색(名色),
(5)육입(六入), (11)생(生), (12)노사(老死)의 4지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1)무명(無明), (2)행(行), (3)식(識), (6)촉(觸), (7)수(受), (8)애(愛), (9)취(取), (10)유(有)가
남게 되는데, 생략된 네 가지(4, 5, 11, 12)는 정확히 개체의 윤회를 구체화하고, 윤회하는 생명체의
운명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본래 이 틀은 윤회의 문제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보이며, 삼세양중 인과설은 후대 교학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일 수도 있다. 나머지 8지(1~3, 6~10)는 어느 때라도 작동하는 정신적 조건의
바탕으로, 이것들은 곧 고(苦)와 잘못된 인식의 발생과 소멸에 관계된 항목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본래 연기 틀은 아마도 생명체의 재생과 무관하게, 단지 고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주장
등이다. 수행자가 성성하게 깨어 있다는 것은 매 순간 일어나는 감각과 마음의 흐름을 주시함으로써
갈애와 집착으로 연결되지 않게 지키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보는 일이 곧 여실지견(如實智見,야타부따-냐나닷사나:
yathābhūta-ñāṇadassana)이다. ‘사물을 있는바 그대로 통찰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물의 무상성
(無常性)과 비실체성(非實體性)을 본다는 말이고, 이는 곧 사물의 연기 성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아무 내력 없이 어느 날 문득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의 선물이 아니다.
《반야심경》 첫 줄에 나오는 ‘조견(照見)’의 예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 풀이는 거의
‘비추어 보아’로 되어 있지만 그게 무얼 어떻게 한다는 건지 아리송할 수밖에 없다. 산스끄리뜨
바이-아바-로오까야타:‘vi-ava-lokayati’를 조견(照見)이라고 푼 것인데, 이는 아주 탁월한 역어의
선택으로 보인다.
먼저 ‘아바-로오까야타:ava-lokayati’는 동사 내려다보다(見)이다. 문제는 접두사 바이:‘vi-’의
기능인데, 동사에 ①분할, ②분리의 의미를 덧붙인다. 즉, ①쪼개서 보다(분석적 시각), ②떨어져서
보다(객관적 시각)가 된다. 또 하나 중요한 기능은 동사의 의미를 강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③꿰뚫어
보다(통찰, 직관)가 된다. 따라서 ③을 써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통찰이란 ① & ②라는 과정을 통해 일어난 결과이고, 거기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곧장 통찰지가
생긴다고 말하지 않는다. 점진적인 훈련(상윳다-사깔아:anupubba-sikkhā), 점진적인 실행
(상윳다-까라야:anupubba-kiriyā), 점진적인 행로(상윳다-파타-파다;anupubba-paṭi-padā)에
통찰지의 성취(아나-아라바나;aññā-ārādhanā)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