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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며... イエスを見つめながら…。( 2025년 11월 9일 주일예배)
본문 히브리서 12:1~3
히 12: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1 こういうわけで、わたしたちもまた、このようにおびただしい証人の群れに囲まれている以上、すべての重荷や絡みつく罪をかなぐり捨てて、自分に定められている競走を忍耐強く走り抜こうではありませんか、2 信仰の創始者また完成者であるイエスを見つめながら。このイエスは、御自身の前にある喜びを捨て、恥をもいとわないで十字架の死を耐え忍び、神の玉座の右にお座りになったのです。3 あなたがたが、気力を失い疲れ果ててしまわないように、御自分に対する罪人たちのこのような反抗を忍耐された方のことを、よく考えなさい。
지난 주일에는 우리 주변의 “현실”과 각자의 “생각”이나 “의지”보다 훨씬 뛰어나고 좋으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나”의 가치에 대해서 뚜렷하고 또렷하게 가르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믿음을 채우시기에, 복음이 믿어지게 하시는 삶의 조각들이 언젠가 간증의 열매로 맺어지는 씨앗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인생, 든든하고 활기찬 인생으로 즐겁고 보람찬 하루하루의 일상을 기쁨으로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앞서 11장에서 증언하였던 증인들과 우리가 가진 믿음의 뿌리이며,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를 우리는 어떻게 실제적으로 마주하고 믿을 수 있는지를 매우 간단하게 정리해 주고 계십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앞서 말한 “증인들이 구름떼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구절인데요. 이는 영적인 표현입니다. 단순히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영적인 현실에 대한 고백이지요.
어떤 목사님이 이 구절을 실제로 체험한 간증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요. 그 목사님이 어떤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인 집회의 강사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집회설교를 위해서 강단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면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집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중에 무언가 마음에 쿵하고 다가오는 감동이 있었다고 하지요. 준비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서 앞에 보이는 회중석을 보게 되는 순간, 오늘 본문의 1절에서 “구름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구절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마침 집회가 연합으로 모였기에 빌린 장소가 큰 실내체육관이라서 관객석을 회중석으로 사용했기에 집회에 참석하신 성도들이 강단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강사 목사님은 모든 관람석을 채운 성도들이 구름처럼 모인 증인들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영적인 군대의 모습을 보았던 이가 있었는데요. 바로 예언자 엘리사의 사환이었습니다. 주변의 수많은 적군들이 엘리사가 있던 거처의 언덕을 에워싼 모습을 보면서 떨며 두려워하는 사환에게 엘리사가 하늘의 군대를 볼 수 있게 영의 눈을 열어 주었지요.
...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 6:16-17)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는 현실의 난관과 고난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그 환경에 짓눌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영적인 눈을 열어 자신을 보호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와 그 기세를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히브리서의 11장과 성경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증언하는 “구름과 같이 수많은 증인”들은 단순히 문학적인 표현이나, 비유적인 문자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들의 존재와 증언은 곧 우리의 현실에서 함께 숨쉬며 실재하는 든든한 소망이며, 능력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증인들을 버팀목으로 하여 우리는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달려 나아갈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각자에게 현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각종 현실의 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크고 작은 짐을 만나면 그 짐을 자기가 짊어지고 살려고 애를 쓰는데요. 짐이 점점 무거워지면 자연스레 허리를 숙이게 됩니다. 허리를 숙이게 되면 앞을 보며 살아야 할 시선이 땅만 향하여 발 앞의 작고 초라한 걸림돌들만 보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현실에서 자기의 짐이 생길 때마다 주님 앞에 내려 놓고 맡길 수 있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굳이 등에 매고 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교만이기도 한 것이지요.
시선은 지평의 넓이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가까운 것에만 고정되어 있으면 지평은 좁아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먼 곳까지 열려 있으면 지평은 한없이 넓어집니다. 시선과 지평에 대한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제 지인 목사님의 이야기인데요. 자신이 목회하는 성도님이 꿩을 키우는 농장에 가 본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농장에서는 꿩을 실내에서 키우지 않고 방목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자연산 꿩고기의 맛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꿩을 가둬 놓은 우리를 보니 조금 색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울타리는 든든히 둘러처져 있는데, 공중으로는 그물조차 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대신에 꿩들에게 반쯤 잘린 눈가리가 붙어 있는 모자를 씌워 놓았다고 하지요. 그렇게 하면 위쪽으로 보려는 시야가 가려져서 날개짓을 하더라도 울타리 위로는 날아오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론 꿩에게는 약 1미터 남짓한 울타리를 뛰어넘고도 남을 비행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야가 가려서 그 위로는 날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경주마에게 앞만 보고 달리도록 시야를 가리는 판을 머리에 씌운 것과 같았습니다.
단지 동물과 가축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인간도 육체적으로는 최대 상하좌우로 180도까지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려 있지만, 내면의 시야와 지평이 넓게 열려있지 않다면 결국 반만 열린 눈가리개가 붙은 모자를 쓰고 열심히 땅에 있는 벌레나 잡아먹으며 사육되는 꿩과 다를 것이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지평을 가리고, 영적인 수많은 증인의 존재를 체감하지 못하게 하는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지 못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인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곧 죄인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수많은 짐과 수고를 벗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곧 축복으로 풍성한 일상을 사는 인생인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을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오늘의 본문은 짐과 죄를 벗고 달려가자고 권유하는데요. 그냥 무작정 달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달려가는 방향과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바라보며 달려가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권유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무엇인가를 위해, 혹은 어디론가를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태어나면서 이미 시작된 경쟁의 연속”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세상은 우리를 경쟁하게 하고 질주하도록 판을 짜 놓았다는 것이지요.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서 그 정도가 다를 뿐 인간은 태어나면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경쟁하고 질주합니다. 혹은 그러한 경쟁과 경주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흥분하기까지 하지요.
사람의 육신은 본성적으로,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승리를 갈망하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경쟁에서의 승리나 혹은 다툼에서의 승리를 열망하지요. 각종 스포츠 경기가 얼마나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지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지금은 꼭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들의 기원은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 옛날 지중해 지역의 고대 올림피아드 경기에서도 승리를 위해서 우상에게 풍요를 위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모였던 것이 오늘날의 올림픽 경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스모도 실은 일본신화를 배경으로 신에게 힘을 바치는 종교적 의식을 지키던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하지요. 오늘날의 종합격투기 경기의 원조에 해당하는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치러진 격투사들의 싸움도 당시에 신격화된 로마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열렸던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지요.
그렇다고 모든 스포츠는 우상숭배이니 배척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인간의 내면세계에 경쟁과 힘겨루기에서 승리하려는 욕망이 실재하고 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포츠의 인기가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포츠나 운동을 가볍게 여길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이렇게 운동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육신을 단련하는 이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바로 절제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모습을 배우는 것이지요. 일반적인 절제와 노력도 승리자의 관을 얻을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그 육신의 관은 썩어 없어질 나뭇가지와 풀로 엮어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 시대의 운동경기에서는 승리한 우승자에게 이런 월계관(실제로는 올리브 나뭇가지로 만든 관)을 씌워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승자의 상징이겠지만, 아무리 아름답고 생기로운 월계관이라고 할 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곧 시들고 썩어버릴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8)
단지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의 아름다운 풀과 꽃만 시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와 문제, 그리고 실력과 그 결과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위의 구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24-25)
그렇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찬사와 승리의 환희라도 복음의 약속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2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온 인류를 구원함으로 만끽하는 기쁨과 영광은 십자가의 수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잠깐의 부끄러움과 아픔을 견딤으로 모두의 축복을 받는 승리와 영예로운 자리를 마다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잠깐의 수치를 견디시고, 영생의 보좌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승리를 위해서 인내와 절제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면 예수님의 심성과 인격이 내 안에 임재하셨다는 것을 믿어도 된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것”과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우리 안에 와 계시지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4)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그렇습니다. 복음을 믿는 우리는 이미 영생의 상급과 비교하면 미미한 인생의 문제라는 고통과 수치를 능히 인내하고, 영생의 놀라운 능력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자리에 살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면서 찡그리고, 한숨 쉬고, 혀를 차던 습관을 이제는 가볍게 던져 버려도 됩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또한 주님의 시선을 기억하는 것이고, 주님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 앉으셔서 나를 주목하고 계시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되도록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가르쳐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만일 기억이 나지 않으면 성경을 펼쳐 소리내어 읽으며 주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럼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힘도 주시고, 돕는 손길도 보내주십니다.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고 몸부림치고 힘쓰고 노력하다 보면 반드시 나를 얽매는 죄에 휘둘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이 그렇게 해서 이렇게 망가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든 한 방에 해결해 보겠다고 나름 애쓰고 노력하다가 사기꾼에게 걸려서 큰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자신도 그 범죄의 일원이 됩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가 있었다고 최근에 뉴스에 보도가 되었지요.
삶의 어려움을 해결해 보겠다고 젊은이들이 이런저런 방법을 찾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자기 욕심으로 얻게 된 문제를 또 다른 쉬운 방법으로 찾으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으로 충만하게 살면 그런 쉽고 편한 방법만 찾지 않습니다. 인내하고 절제하며 충성스레 주님의 뜻에 합당한 방법을 구하게 됩니다. 고난을 괴로움으로만 여기지 않고 밝고 건전하고 경건한 자신을 지키는 견고한 반석으로 여길 수 있게 되지요. 그 능력이 곧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에서 샘솟는 것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이란 고민거리가 잘 풀려도 문제가 생기고, 잘 해결되지 않아도 문제가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어떻게 잘 해결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문제를 마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를 어떤 시선, 즉 누구의 시선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이들은 이미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이 문제와 죄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눈앞의 현실적인 문제를 뛰어넘는 능력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문제와 고통, 그리고 여러 가지 괴로움의 원인을 주목하던 시선을 이제 주님의 가르침으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로 흔들리는 내면에 복음의 약속과 성경말씀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복음을 믿는 영생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시고, 아무런 부작용이나 뒤탈이 없는 해법을 가르쳐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주님께 시선을 모으고, 그분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행복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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