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욱 님글 퍼옴 이승만이 1956년에 6월 6일을 현충일로 제정했다. 왜 6월 6일일까?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 첫째는 이승만의 충견 김창룡이 1956년 1월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김구나 여운형이 죽었을 때도 뜨뜨미지근하고 미적대던 이승만이 김창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잠옷바람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자신 대신 죽었다면서 애통해했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영원히 기억하자면서 일제 시대에도 해방 이후에도 독립군 토벌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는 데 광분하고 또 반민특위 해체 일등공신인 김창룡을 좌익척결의 공로자로 포장하고 기억하고자 1956년 국무회의에서 6월 6일을 현충일로 제정하였다. 두 번째 숨은 의미는 이승만은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위원장 김상덕을 비롯하여 특위위원을 모두 체포 연행 고문 수감하고 사무실을 강제로 봉쇄했다. 반민특위 강제 해체는 이승만이 자행한 씻을 수 없는 대표적 만행이다. 바로 이 만행을 저지른 날 6월 6일을 덮고자, 이 날을 현충일로 제정했다고 역사가 배기성은 말한다. 나는 김상덕평전을 읽고 1949년 6월 6일의 아픈 역사를 알았다. 그래서 순국선열을 기리는 현충일이 실상은 현대사에서 이 나라 민족정기를 최소한으로나마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결정적으로 삭제한 날인 것을 알아 버렸다. 현충원에는 독립군 유해도 모셔져 있지만 독립군 토벌에 광분한 김창룡의 묘도 여전히 있다. 뒤죽박죽인 이 나라 현대사가 언제나 정화될까. 우리의 숙제이긴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절을 끝내고 미국 식민지로 들어간 나라 현실에서 정화의 기회가 오기는 할까. 참으로 다행인 것은 봉오동대첩의 날이 1920년 6월 6일이다. 이 또한 역사의 우연이긴 하지만 6월 6일을 현충일로 제정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날이다. 우리의 의식과 해방을 향한 실천이 깨어 일어난다면 우연적으로 보이는 해방의 은총이 또한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