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 민영익 후원… 신청 한 달 만에 허가
알렌은 병원 설립 인가요청을 혼자 하지 않았다
민영익 치료로 알렌은 위상이 높아지면서 당시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병원을 설립하는 데는 반대가 많았다.
알렌은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병원을 세우는 데 혼자 이름으로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고종 임금의 신임을 받고 있던 미국 대리공사 포크와 함께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알렌이 미국인임에도 미 공사관을 통하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게 주제넘어 보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알렌의 사리 판단은 정확했다.
알렌은 또 병원을 세우는 데 한국 조정이 자주독립의 명분을 세울 수 있도록 힘썼다. 병원 이름을 기독교나 미국 선교사의 병원이 아니고 ‘한국정부의 병원’이라고 명명하겠다고 했다.
당시 병원 설립을 방해하는 복병이 있었다. 바로 야심찬 세력가 뫼렌돌프였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병원 설립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알렌은 뫼렌돌프에게 간곡하게 편지를 썼다. 그동안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고, 병원 설립이 결국 뫼렌돌프가 오래 품어온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존대가 넘친 글이었다. 알렌의 절묘한 경륜을 볼 수 있다.
알렌이 1885년 1월27일 민영익을 통해 조정에 제출한 병원 설치 건의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우선 민영익 치료 이후 그야말로 떼를 이뤄 밀려든 불쌍한 환자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다 돌보기는 현재 머무는 작은 집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과 알렌 자신은 한국인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끝까지 헌신하겠다는 다짐이 포함돼 있었다. 또한 한국 청년들에게 탁월한 서양 의료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것, 병원 운영을 할 때 책임자인 알렌 자신은 나라의 봉록을 절대 받지 않겠다는 것, 다만 병원의 운영비나 약재는 나라가 예산을 지급하고, 조정은 공기가 잘 통하고 깨끗한 커다란 집 한 채를 장만해 주는 것, 그러면 미국에서 곧 유능한 의사들을 더 초청하겠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미국과 기독교가 대세가 된다면
병원을 짓는 데 반대한 것은 독일공사관 부르터였다. 병원이 선교기관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조정이 종교에 관계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구실이었다. 실제로 병원 설립을 진행하던 1885년 봄 미국에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 선교사 여럿이 입국해 그 세력이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한국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러 나라 특히 일본이나 중국, 독일, 러시아 등이 있음에도 세력 균형이 미국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통적인 의료기관 혜민서나 활인서의 관리들이 직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서양식 병원 설립에 반대가 있었다.
광혜원의 설립
그 시기 고종이 먼저 알렌에게 서양식 병원 설립을 권유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권세가인 민영익의 후원은 끝이 없었다. 마침내 조정은 1885년 2월 29일자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현 외교부)을 통해 병원 설립을 허가한다. 신청한 지 한 달 만의 일이다.
조정은 병원 건물로 재동에 위치한 홍영식의 옛 고대광실 집을 마련해 주었다, 홍영식은 우정국의 총판으로 개화파의 거두인데 갑신정변 때 거리에서 백성들에게 참혹하게 육살당했다. 그의 집은 온 집구석이 핏자국으로 흥건했다. 그렇게 흉가로 남아 있던 집을 조정이 몰수했다가 거기에 알렌이 병원을 설치하도록 한 것이다. 흉가가 기독교 덕분에 희망과 사랑의 집으로 바뀐다.
고종실록에 보면 그 병원의 설립일자는 1885년 4월 14일이고, 그때 조정이 지어준 이름은 ‘광혜원’이다. 넓게 혜택을 준다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다.
우리는 4월 14일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한국에 기독교 기관이 조정과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세워진 날이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의 입국이 같은 해 4월 5일이었으니 그해 4월은 한국 기독교에 참으로 역사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광혜원 첫해의 업적
홍영식의 집은 비록 흉가가 되었어도 고관대작의 집이었기에 규모가 방대했다. 병원으로 개조해 쓰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병원은 외래진료실 환자실 수술실 약국조제실 일반병실 외과병실 여자병실 특등실을 갖추었다. 병상 수는 430상이었다.
여기서 ‘병원’이라 하지 않고 ‘광혜원’이라 한 데 주목해야 한다. ‘병’자를 안 쓴 것이다. 생각을 깊이 한 것이 보인다. 광혜원의 첫 공식 영어 명칭은 ‘로열 하스피털(Royal Hospital)’ 곧 왕립병원이었다. 그러나 설치 허가공문에는 확실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 박사의 주관’이란 글귀가 있다.
고종 임금은 광혜원 개원 후 12일이 지난 4월 26일 광혜원을 ‘제중원’이라 개칭했다. 여러 민중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제중원에서 첫해에 치료한 환자는 외과수술 환자 150명, 외래 치료 394명 등 총 1만460명이다. 알렌 혼자서 다 한 것이다.
[출처]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9) 광혜원의 설립 과정|작성자 뱅갈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