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결혼(1) - '떠남'의 원리
추부길(크리스찬 가정사역센터 간사)
성경적 결혼의 원칙중에서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이 '떠남'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그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로 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결혼 축사에서도 분명히 언급된 이 '떠남'의 원리가 유교적 전통을 가진 우리 한국 교회에서 참으로 갈등의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이 '떠남'은 누군가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도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떠난다는 것은 부모의 양육을 받던 자녀의 관계에서 완전한 성인으로서의 관계 전환을 의미한다. 즉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아닌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최우선이 되는 일대 혁신을 의미한다. 이는 단지 분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부모보다는 배우자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그 부부의 관계가 다른 무엇을 앞서는 최우선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이 어렵게 되는 것은 우선 부모로 부터 떠나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그렇다고 효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두사람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인도해 주며 방향을 제시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부부 사이에 아무도 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부모들은 자녀들 곁에 있어야 하나(Beside them), 자녀들 사이에 있어서는 안된다(Not between them)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후에 부모의 의사를 존중하기는 하되 부모의 영향에서 얼마나 독립된 한 가정을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결혼이 성공적이느냐 아니냐가 구분된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여 출가시킴에 있어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되 이 둘 사이에 서서 조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리모트 컨트롤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탯줄을 끊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 태중으로 부터 독립하면서 탯줄을 한번 끊었을때 독립적인 생명이 된 것처럼 결혼을 하면서는 그동안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여러가지 영향을 입고 자라왔지만 이제는 그 영향으로 부터 벗어나는 정신적인 탯줄을 끊으면서 부모의 영향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살아가야 한다. 떠나지 않았을때 갈등이 시작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부간의 갈등이다.
'우리 어머니는 안그러던데 당신은 왜 그래?', '당신은 우리 엄마 솜씨 따라 갈려면 아직 멀었어!' 이러한 말들이 바로 부모를 떠나지 못한 데서부터 나오는 말이다. 또 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내가 너의 시부모인데....', '얘야, 내방에 건너와서 자거라.' 이런 말들은 자녀를 떠나 보내지 못해서 나오는 말들이다. 이렇듯 떠나보내지 못해서 생기는 갈등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멍들고 있는지 모른다. 아내와 며느리가 갈등이 있을 때 남편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아내편을 들자니 어머니가 서운할게고, 어머니 편을 들자니 아내가 난리칠테고, 그래서 '모르겠다. 차라리 늦게 들어가자', 또는 '아내야 어찌되든 일단 엄마 편을 드는게 옳지'하고 일방적 응원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아내가 속으로 병들어 가는 것은 모르고 말이다.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들이여. 결혼한 자녀들을 제발 떠나 보내자. 그들만의 공간과 생각을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 한다. 손자가 아들네 방에서 아무리 울어 제치더라도 그들 방앞에 가서 '내가 봐주랴?'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며느리를 외인 취급하지 말고(요일4:7-11), 있는 그대로 용납해야 한다(엡 4:2).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자녀를 품어주고 사랑해 주어야 한다.
남편과 아내들이여, 부모를 공경하되 주안에서 공경하라. 그러나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단지 예수님만 빼고는 말이다. 결코 부모가 끼어들어서도 안된다. 일단은 부부 관계가 최우선임을 잊지 말자. 그 다음이 자녀, 그리고 부모의 순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 이다. 생각해 보라. 나는 과연 떠나 있는가? 나의 우선 순위 1번이 과연 배우자인가?
성경적 결혼(2) - '영속성'의 원리
'그 아내와 연합하여'(창 2:24중). 성경적 결혼의 2번째 중요한 원리가 바로 이 '연합'이라는 원리이다. 여기에서 연합한다는 것은 '들러붙다, 고착시키다, 계속 그대로 지속되다'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연합의 원리, 즉 영속성의 원리란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 까지', '끝까지' 이런 뜻이다. 그래서 결혼 서약의 내용이 '나 누구 누구는 남편(아내)은 맞이함에 있어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라는 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결혼의 서약은 '다른 성격이 보일 때까지',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까지', '사랑이 식을 때까지', '폭력이 있을 때까지' 같은 시한부 결혼 생활을 하는 것같다. 통계청이 발표한 92년 가정 현황 조사를 보면 이혼율이 1년전보다 급증하여 8쌍중 1부부에서 7쌍중 1부부로 늘어나고 있으며, 이혼 부부중 5년내 이혼이 36%나 차지할 정도로 파경 기간이 세계에서 가장 짧다는 것이다. 이혼 평균 연령도 남자 37세, 여자 33세로 점차 연령이 낮아지는 추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측 하객이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 앉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양 가문의 세 과시를 위해서 일까? 아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언약'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언약(맹약)으로 창조된 제도이다(말 2:14, 잠 2:16-17). 언약은 '자르다, 가르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Beriyth'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승을 반으로 갈라 마주 놓은 고기 사이를 계약 당사자가 지나감으로서 맺어지는 계약으로 이 언약을 파기하면 갈라 놓은 짐승과 같이 죽게 됨을 각오하고 이 언약에 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나뉘어 앉는 신랑, 신부의 가족, 친지들은 신랑, 신부가 이 결혼 서약에 들어갈 때에 양쪽에 정돈해 놓은 성경상의 희생 제물(갈라 놓은 짐승)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신부의 베일과 서명부 작성 등에는 구원과 천국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결혼식은 단순한 '식'이 아니라 '구원'의 의미가 담긴 천국 잔치의 한 모형인 것이다. 여기서 결혼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
결국 결혼은 결혼이후 사람의 의지로는 나눌 수가 없는 언약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합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아교풀로 두장의 종이를 붙인 상태여서 이 둘을 나누려면 나뉘지 않고 찢어져 버리고 만다. 그런데도 요즘 일부 여권운동가들에 의해 '이혼'을 부추기는 책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이혼을 절망이라 했는가?'라는 투의 '이혼은 또다른 시작이다'라고 말하면서 '불행한 결혼 생활보다는 이혼을 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이다'라는 유혹을 하고 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나 원리를 안다면 입밖에도 꺼내지 못할 말들을 함부로 하고 있다.
성공적 결혼이란 부부 피차간에 원칙적으로 일생에 단 한번, 상대방에게 영구한 헌신을 드린다는 자세로 살아갈 때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말라기 2:14에서 선지자는 아내(조강지처)를 가리켜 '그는 내짝이요, 너와 맹약(covenant)한 아내'라고 말하고 있다. 누가 이 부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가? 죽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배우자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적 결혼의 독특성은 바로 결혼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사이에 둔 언약으로 이해한다는 데 있다.
혹시 지금의 결혼 생활이 고통스러워서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가 부정하고 사랑이 식어 있을 때도, 또는 간음하던 때도 신랑이신 하나님은 애정이 변치 않았음을 볼 수 있다(사 54:8,10, 겔 16:6-10). 결혼의 목적은 분명히 서로가 상대방을 '--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데 있다(엡 5:25, 딛 2:4). 하나님은 지금도 말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아,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할 수 있으며,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릴수 있느냐?'(호 11:8).
성경적 결혼(3) - '하나됨'과 '친밀성'의 원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 성경적 결혼의 세번째 원리가 이 '하나됨'의 원리이다. 여기서 '하나됨'이란 우선 가장 친밀한 연합, 즉 '性'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부부간의 성적 교제는 부부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성적인 연합은 결코 육체적 사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로 全存在的 사건이요, 정신적 合一과 영적 合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에서 만큼은 '1+1=1'이 되는게 원칙이다. 특히 남자에게는 이 정신적, 영적 합일이 없어도 만족이 있을지 모르나 여자에게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부부가 완전히 한몸이 되는 이때, 두사람은 자녀를 낳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부부가 완전히 하나되었을 때 잉태된 자녀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자녀는 그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과연 하나인가? 모든 것이 하나인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
또 하나, 하나되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 경제 문제이다. 요즘 상당수의 부부들이 딴 주머니를 차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가 아니다. 언제든지 갈라 설 것을 전제로 한 결혼이라면 모르되 그렇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투명해야 되고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가치관에 있어서도 하나이어야 하고 주거지도 하나이어야 하며 비전도 하나이어야 한다. 부부의 삶, 그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가 되지 않고는 온전한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어떤 것에도 우리는 하나일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부부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부가 공유하는 부분이 많아야 서로 마음이 통할 수 있다. 부부가 서로 통하면 지루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게 된다. 예전에는 아내가 일방적으로 참았으나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부부는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그것이 결혼에 있어서 중요한 세번째 원리인 '하나됨'의 원리이다.
'두사람이 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더라' 성경적 결혼의 네번째 원리가 바로 이 '친밀성'의 원리이다. '친밀성'의 원리란 결혼 생활에 있어서 허물이나 결점이 결코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허물이나 결점을 문제 삼는 것이야 말로 가장 비겁한 행위이다. 하나님은 그것때문에 돕는 배필로서 결혼을 만드셨고 또 함께 살도록 배려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곧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정서적(감정적) 친밀함도 있다. 정서적 친밀감은 상대방을 아주 깊히 이해할 때, 그리고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과 삶에 대한 태도를 나눌 때 생겨난다. 이 정서적인 친밀감은 다른 모든 형태의 친밀감의 밑바탕이자 최선의 형태이기도 하다. 이 정서적 친밀감을 위해 부부는 우선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말을 가로막지 말아야 하며, 배우자의 느낌을 존중해 주어야 하고, 배우자를 소유하려 들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결혼의 커다란 목표중의 하나는 서로간의 완전한 개방과, 몸과 마음 전체에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친밀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 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부가 이 일치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가야 하는 것이다.절대적으로 율법대로 잘잘못을 밝히려고 하지 말고 용납하는 것을 훈련해야 한다. 율법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관계가 되면 부부 사이가 살벌해진다. 거저 주는 은혜(Grace)의 관계, 이 은혜는 시간적으로 지속적이며 공간적으로도 변함이 없다. 구원이 은혜이듯 배우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결혼의 이 네가지 원리를 붙잡고 살자. 거기에 하나님의 결혼에 대한 중요한 설계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