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신 (1302-1382)
주요 활동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원(元) 평장사(平章事)인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랐다. 태정황제(泰定皇帝, 1323-1328년 황제)를 시종하여 총애를 받다가 고려에 들어와 어머니를 만나 보고, 다시 원으로 건너가 상의사(尙衣使)가 되었다. 1333년(충숙왕 복위 2), 다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귀국을 요청해 정동성낭중(征東省郎中)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염제신은 동료들의 횡포를 억제하는 한편, 토지와 노비의 소송은 모두 관계 당국에서 처리하도록 하여 충숙왕(忠肅王)의 신임을 받았다. 충숙왕 사후, 다시 원으로 가서 익정사승(翊正司丞)이 되었다. 뒤이어 절강성(浙江省)주4에 가서 중정원(中政院)의 돈과 재화의 회계를 감사하며, 관리들이 뇌물을 주어 매수하려 하는 것을 모두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원 순제(順帝)가 특별히 등용하려 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다시 귀국하였다.
충목왕(忠穆王) 때 삼사좌사(三司左使,정3품)주5에 임명되고 수성익대공신(輸誠翊戴功臣)으로 봉해졌다. 뒤이어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종2품)가 되었고, 1349년(충정왕 1)에 찬성사(贊成事, 정2품)가 되었으며 이듬해 하정사(賀正使)주1로 원에 갔다. 1349-1303=46세에 정2품.
1354년(공민왕 3)에 좌정승(左政丞, 51세)이 되었다가 곧 우정승(右政丞, 51세)이 되었다.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에 봉해지고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되었다. 그때 원에서 난을 일으킨 고우성(高郵城)의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해 고려의 군대를 요구하니, 염제신이 유탁(柳濯) 등과 함께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원나라에 갔다가 그해 10월에 공민왕(恭愍王)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한 뒤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원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겸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 문하시중(門下侍中,영의정 57세)이 되었으며, 1361년(공민왕 10)에 관직과 명망이 최고위에 이르자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363년(공민왕 12, 60세))에 우정승이 되었으나, 홍건적의 난 때 어머니를 버리고 피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신(告身)주2에 서경(署經)주3되지 못하고 파면되었다. 김용(金鏞)이 처형당하자 김용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364년(공민왕 13)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가 되었을 때, 신돈(辛旽)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다. 1371년(공민왕 20)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정벌할 때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이기고 돌아와 곡성백(曲城伯)에 봉해졌다. 그해 딸이 공민왕의 비인 신비(愼妃)로 책봉되었다.
(1371-1303=68세, 딸 16세. 52세애 딸이 출생)
분석: 1363년 60세에 우정승이 나이에 비추어 적합, 그 이전에는 엄청 빠른 출세가도를 달렸음. 1302년 생.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
단행본: 용선 편, 『고려묘지명 집성』(한림대출판부, 2001)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으로 가던 사신. 동지와 정월이 가까이 있으므로 동지사(冬至使)가 정조사를 겸하였다.
주2: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
주3: 임금이 새 관원을 임명한 뒤에 그 성명, 문벌, 이력 따위를 써서 사헌부와 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