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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학: 말하는 기쁨 - 석주영, “제주도 수필”
처음에는 말하는 기쁨이 있었으리라. 한 사람이 말한다는 것 자체가 한사람이 그 자리에 스스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인데, 이렇게 스스로 있음을 표현하는 바, 스스로 있음의 즐거움이 있었겠다. 이러한 말은 오해와 왜곡은 불러일으킬 수도 없을 만큼 단순했다. 그래, 처음에는 아기들의 옹알이가 그러하듯이, 어머니 대신 생태(生態)를 앞에 두고, 그저 혀를 움직이는 것에 취해서, 지금 우리가 무의미하다고 말할지라도, 오롯이 말함 자체를 의미로 삼는 가장 공허하게 충실한 말들을 자기자신에게 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의 시작은 이렇게나 맹아(萌芽)와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드러내놓고자 한다는 것은 드러내놓을 바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리낼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알아가던 이 유아(唯我)론의 시기는 유아(乳兒)기가 그렇듯이 매우 아주 짧았을 것이고, 사람은 순식간에 말을 한다는 것은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기가 더 힘들었다.
그리하여 어떤 기호들보다 자신이 있고 싶은 방식을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을 오가며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말함이라는 것을 반갑게 깨달은 사람들이 말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다. 말하는 기쁨 없이, 신음과 같은 말하는 슬픔이 바탕에 있다면, 말은 지금처럼 풍성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근근이 연명하다가 최소한 미래 언제라도 시들어서 죽어버릴 만큼 허약하다는 것일 터인데, 그렇지 않다.
이와 달리, 우리 신체가 자연의 바이며, 자연의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임으로서 자연을 움직이는 방식일 수 있다는 사실은 즐거운 정념을 불러일으켰으니, 이때 말은 사실 개념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일 것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자아의 신체에 머무는 것이다. 몸짓(le gest)이 다른 몸체에 반응이 예측되는 신호이듯이, 이러한 몸짓을 말로 내보낼 수 있는 것은 공통의 기호의 첫걸음이었지만, 이 몸짓으로서 말이 다른 몸체와 몸체의 바깥의 추상적인 것을 주제로 삼기에는 더 시간이 걸려야 했고, 유인원의 소리들이 지금도 그러하듯이 이때에는 다른 몸체를 향해 나 자신을 자세하게 설명(logos)하려는 욕망조차도 늘 내 몸체로 잠겨들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움직임으로서 언어의 역사는 말의 본체를 우리의 몸체와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의 심층이다.
이 순박하게 즐거운 정념을 두 번째로 밀어놓기 시작했던 것은 내가 내 몸체를 닫힌 내 몸체로서만이 아니라, 변용들의 계열을 운영하는 열린 몸체로서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넓게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그때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 바깥의 다른 몸체들,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깡그리 무시하는 말과 소통이 말의 선구자들에게는 있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말은 생각하기조차도 힘들다. 다만 과거의 과거인 그들은 눈앞에 있는, 혹은 있었던 무엇에 대해서 단순한 소리로 바로 가리켜보이는 식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탐사해볼 수 있는 과거인 인류처럼 눈앞에 있었든지 없었든지 다른 몸체에게 언제나 그 몸체를 그림으로, 혹은 기호로, 혹은 말로 가리켜 보이고 싶어할 만큼은, 내 몸체가 일으키는 변용의 초점잡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기호를 창안한 그들은 내가 세계에 미치는 어떤 영향들을 훨씬 더 넓게 고려했고, 그만큼 더 세밀하게 조정하고 싶어 했고, 말에 대해서도 그에 따라 땅과 깊이를 확대했다. 자기 바깥의 그 몸체들을 자기 바깥의 관념들로 보면서, 내 안의 몸체와 내 안의 관념들이, 이것들을 올바르게 일컬어서, 만날 수 있게 되는 개념을 하나하나 고안해나갔다. 이는 내 몸체로 돌아오고 있는 그 순간의 정념의 기쁨을 바깥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감정의 즐거움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내 몸체에 은둔하게 했던 기쁨을 이렇게 나를 즐겁게 하는 대상으로까지 활보하게 할 수 있을 때, 이에 따라 나는 개념화작용을 늘려가면서, 더 많은 것에서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기쁘게 할 수는 있더라도 나 자신을 바로는 기쁘게 하지 않는 것들부터, 나 자신을 전혀 기쁘게하지 않는 것들까지, 어쩌면 이런 생각 아래에서 내 힘을 줄어들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들인, 내 가족과, 내 가족의 친구와, 내 친구의 가족과 그들의 동물들 등등을 명명하고 사고하기 시작한다. 물론 사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어느 순간에나 있었고 있듯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러한 내 존재성과 함께 이들이 있다는 것을 확보하게 해주는 공통개념을 만들어낸다. 내가 이 개념을 기억한다면 이 개념은 나와함께 있는 것이다. 말하는 그 순간 나는 내 목소리가 있듯이 그들이 존재한다는 쾌감에 빠지고, 이 쾌감을 지속하기 위해 말의 강도, 즉 리듬들, 멜로디들, 악센트들 등을 조율한다.
그리하여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하려는 것은 함께 증대된다. 나와 타인과 타자들 이 모두에 공통된 자연 속의 자연을 한 번에 일컬을 수 있는 것, 즉 개념을 말하는 것은, 닫힌 나를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기에, 우리는 이러한 영역을 찾아내서 더 자세하게 말하고자 한다. 공통 개념을 구사하고자 하는 이러한 말의 욕망은 아직까지도 예컨대, 문학을 추동하는 것이다. 어떠한 문학이든 그 문학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을 전제하는데, 이는 단순히 문학이 글자를 알아보는 사람을 대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문해력을 넘어서 그 글이 현존한다는 것 자체 때문에 독자가 자기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한 공통개념의 공통영역을 앞서 갈망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을 위해서 글쓰기는 스스로 문학적 투쟁자체가 되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문학의 저항성이다. 이렇게 볼 때 소설의 리얼리즘은 각자 생활의 구석을 뒤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연의 요철을 불현듯 밝히는 데에 있다.
공동체의 기호와 개념에 대한 이러한 탐구는 사유의 흐름들을 만든다. 이때 언어는 이 공통성이 자연 전체 속성의 시사일 수 있게끔, 내 공동체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속성을 말할 수 있게끔, 요컨대, 자연 전체를 넉넉히 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일반적이어야 한다. 일반적인 만큼 현존의 생생함, 달리 말해 현존의 일의적인 표현들을 담을 수 있다. 그 만큼 이는 본질에 대한 말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이렇게 말의 거듭된 확장으로서 형성된 일반성은 추상적이지는 않다. 원래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있는 정삼각형과는 달리, 이 일반관념들은 언제나 몸체와 몸체 그리고 몸체와 몸체들의 연관을 핵으로서 갖는다. 모든 개념들이 우리의 비매개적 사물처럼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동떨어진 어떤 개념이라면 이 핵에서 멀어진 것들로서 어디쯤 자리 잡힌다. 이러한 바가 일반성을 넘어, 공상을 통과하여, 망상으로 치달으려는 일반 관념의 말을 저지하고 자연 자체의 실증으로서 있도록 만든다.
우리가 이 작업, 사유의 말을 만드는 일, 즉 말로 사유하는 일을 충실히 해나간다면, 그는 무한정한 기쁨을 느낄 것이다. 자기자신으로서 있음의 즐거움이, 세계 자체로 있음의 즐거움으로까지 강화되니 말이다. 그런데 명심하십시오. 세계를 파악하는 이 즐거움은 말로 할지언정, 단순히 세계를 분절화하고, 단위화하는 이성의 유용성이 증식하는 사태와는 무관한 즐거움이다. 반대로 이는 다의적인 표현들의 나열에서 도약해서, 이 일의적인 표현하기의 흐름을 깨달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 마치 신화의(mythique) 길이 있는 것처럼 이러한 일이 실제로 실재 이루어진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모든 관념을 항상 물리적인 것들로부터, 혹은 실재적 존재자들로부터 연역하는 것이 우리에게 특히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될 수 있는한 원인들의 계열을 따라 하나의 실재적 존재자로부터 다른 실재적 존재자로 진행해가면서, 더욱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들로 넘어가지 말고, 그래서 이것들로부터 실재적인 무언가를 도출하지도, 혹은 실재적인 무언가로부터 이것들이 도출되지도 않게끔 하면서 말이다.” (스피노자,『지성교정론』(1677), 김은주 옮김, 2020., [99]. 105쪽.)
이러한 말은 단순히 학설이 아니라, 존재의 삶을 배반하지 않는 내 삶과 우리 자연의 징표[symptôme, σύμπτωμα]이다. 이 심층으로의 하강의 길을 따르기에, 기표의 기표, 말의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 그 자체의 권능을 따라서 자연 그 자체로서 자연을 기쁘게하는 표현하기를 할 수 있다는 것, 말 잘하며 살 수 있다는 것, 이 표현하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바로 말을 통해서 멈추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생장 그 자체로서 입증되는 일의성들의 흐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역설적이게도, 분절된 언어에서 흐름으로의 도약 자체가 지금 이 언어 존재의 필연성을 갈급하게 요청한다.
예를 들어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이 있다. 석주명은 한국의 나비를 개체별로 수만 마리 이상을 수집하여 일일이 관찰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참된 경험론’(베르그송)아래에서 분절된 생체 개념들을 연구하면 할수록, 자연의 어떠한 흐름이 도도(滔滔)히 흐르고 있고, 개체는 환경에 적응하되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흐름을 찬찬(燦燦)히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체는 결로서 포괄될지라도, 이 결은 소박한 것이 아니다. “이 곤충상에 의한 육지 구분, 즉 곤충 분포에 따른 육지 구분은 인위적인 구분과도 도저히 일치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이 깊은 사유는 이 흐름들이 다른 기호, 특히 언어로도 창발 될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고, 결국 그는 ‘국학’과 특히 제주도 ‘방언학’을 제안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방언과 곤충 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지방차와 개체 차이로 보아 공통점-이 많아서 방언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곤충을 연구할 수도 있 겠고 또 곤충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방언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석주영의 방언학은, 언어가 움트고 있는 자연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자연사에서 일어난 한 흐름의 사건이라는 사유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때문에 언어에는 역사가 있는 법이다. 언어가 단순히 말들의 질서 안에서 맴돌면서, 그 표면의 말들만의 세계에 자기 감금하는, 창백하게 비어 있는 수동적인 사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곤충상에 의한 육지 구분, 즉 곤충 분포에 따른 육지 구분은 인위적인 구분과도 도저히 일치되지 않는 것으로, 어떤 구분선은 대륙을 중단(中斷) 도 하고 소지역에 있어서도 행정구역과는 일치가 안 된다. 또 비교적 분포 가 넓은 곤충 종류는 동일종임에도 불구하고 산지(産地)에 따라 지방적 차 이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고, 같은 지방에 나는 같은 종의 곤충에 있어서 도 그 종류의 개체 간에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만하면 방언과 곤충 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지방차와 개체 차이로 보아 공통점-이 많아서 방언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곤충을 연구할 수도 있 겠고 또 곤충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방언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해방 전에 경성대학 제주도시험장에 2개년여나 체재해 있었는데, 제주도의 독특한 방언을 들을 때 곧 방언과 곤충을 연결시킬 수가 있었다. 나는 내가 전공으로 하는 나비류를 종별로 지도상에 분포상태를 표시하는 방법을 방언에도 응용하여, 약간의 단어를 선택하여 그 분포를 지도 위에 표시하려고 기도하였었다. 그러나 문헌을 약간 조사하는 중 이 방법은 벌써 Gilliéron이 불란서 언 어지도를 작성한 이래 언어지리학이 수립되어 방언학에서 취급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일본에서도 벌써 이 방법에 의한 업적이 많음을 알고는 불 원간 조선에서도 널리 사용되리라 기대하고, 방언학은 나의 전문도 아니니 그만 중지하고 말았다.]
『국학과 생물학』 중 ‘4. 방언과 곤충’(석주명, 1991 : 80-81)
석주명(1991), 나비 채집 이십년의 회고록, 신양사. 에 실림.
[비사야어 Visaya어는 300여개의 필리핀 제어(諸語) 중에서 tagaloc어의 다음으로 가는 세력있는 말인데 그 말 가운데는 제주어 내지 한국어와는 공통되는 것이 필리핀 여러 언어 중에서는 가장 많고 더우기 형용어 에는 특별히 많아서 Visaya족의 감정이 우리 한국과 통하는 바가 많 음을 알 수가 있겠다. 사실 그곳에서 수십년 간 생활한 최무읍(崔武揖) 에 의해도 그러하다고 한다.
‘사람’의 고어 먼저 연대순으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사ᄅᆞᆷ : 훈민정음《訓民正音乂 1446, 관동별곡(關東別曲),1580 ; 노계가〈蘆 溪歌), 1630경.
사롬 :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1565. 제주도 방언.
살ᄅᆞᆷ : 고산구곡(高山九曲), 1577.
ᄉᆞ람 : 강촌별곡(江村別曲), 선조조(宣祖朝), 1500경.]
석주영, 『제주도 수필』(1968), 2008., 서귀포 문화원, 90쪽.
* 나는 “제주도 수필”을 읽었는데, 이 책에서 수필은 우리가 생각하는 에세이의 개념이 아니라, 메모의 한자어에 가까운 것이라서, 사전 식으로 항목이 나열되어 있기에, 적절한 문구를 찾아오기 힘들었다. 그래서 ‘강영봉’의 ‘석주명의 제주어 연구 의의와 과제’라는 논문을 읽었고, 여기서 재인용한 것이 위의 문장이다. 『나비 채집 이십년의 회고록』을 면밀히 읽어본 뒤에 더 즐거운 글을 기쁘게 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