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개황: 복잡하고 다양
시리아는 복잡하고 다양한 나라이다. 단일민족·단일언어의 한국인들은 시리아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관용은 민주주의의 기초이니까. 권위주의 정부下의 시리아가 활기 차고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것은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한 인종적·종교적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리아는 우선 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터키, 이라크. 공식언어는 아랍語이지만 아람語, 쿠르드語, 아르메니아語, 시르카시안語, 그리고 프랑스語가 쓰이고 있다.
인종구성도 복잡하다. 아랍人이 90%이지만 쿠르드族, 아르메니안 등 他민족이 약 10%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수니派 이슬람 신도가 74%, 시아派·알라위派·두르제派 등이 15%, 기독교인이 10%, 유태교인도 있다.
시리아의 면적은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18만5,180km²이다. 국토의 약 25%는 경작이 가능하다. 인구는 북한보다 약간 적은 1,888만 명. 여기엔 이라크 난민 60만 명, 팔레스타인 난민 30만 명이 포함된다. 평균수명은 남자가 69세, 여자는 71.7세이다. 문맹률은 23%.
구매력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000달러이다. 연간 2.9% 경제성장률을 보이지만 실업률이 12.5%이다. 시리아를 여행해 보니 할 일 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외환보유고는 55억 달러. 최근 外貨(외화)를 유로貨로 바꾸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하루 40만 배럴의 기름이 나온다. 23만 배럴을 국내에서 소비하고 나머지는 수출한다. 시리아의 기름 소비량은 한국의 약 10분의 1이다.
GDP의 분포를 보면 농업과 석유가 거의 절반이다. 노동인구의 분포는 농업 26%, 공업 14%, 서비스업 60%이다. 70억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66억 달러어치를 수입한다. 군사비 지출은 국민소득의 약 6%이고 복무기한은 30개월이다. 인터넷 사용자는 110만 명, 휴대전화기가 약 313만 대이다.
시리아에서 가장 높은 헤르몬山은 2,814m이다. 겨울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눈발이 날릴 때도 있다. 인구는 거의 지중해 연안에 몰려 산다.
自爆테러의 등장
1982년 시리아는 곤경에 처했다. 시리아는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과 대결하고 있었다. 레바논 베카 계곡 상공에서 일어난 공중戰(전)에선 이스라엘 전투기를 한 대 격추시키고 시리아 전투기는 80여 대가 격추되었다. 터키는 시리아가 터키內 쿠르드族의 반란을 사주한다고 軍 동원령을 내려 위협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무슬림 聖戰派(성전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런 시기에 시리아內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의 테러가 격화되었다. 그들은 공무원과 아사드를 배출한 알라위派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때 처음으로 목베기 수법이 나왔다. 1979년 6월 형제단은 알레포에서 사관생도들을 공격해 83명을 죽였다. 1980년 8월부터 11월까지 다마스쿠스에선 자동차 폭탄 테러로 수백 명이 죽었다.
이들의 목표는 아사드 대통령이었다. 1980년 6월26일 다마스쿠스를 방문한 말리 대통령 환영만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슬림 형제단이 잠입해 아사드를 향해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아사드는 발 앞쪽으로 굴러오는 수류탄을 발로 차냈다. 경호원 한 사람이 다른 수류탄 위로 몸을 날려 대통령을 보호하고 爆死(폭사)했다.
아사드의 보복은 빨랐다. 감옥에 있던 수백 명의 형제단원들을 불러내 처형했다. 형제단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는 법을 공포했다.
1982년 2월 무슬림 형제단은 원리주의자인 수니派가 많이 사는 古都(고도) 하마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전국적인 봉기를 선동했다. 하마를 해방구로 선포했다. 아사드는 군부대를 투입하여 강경진압에 나섰다. 형제단에 대해서 최후통첩을 하고, 「일반 시민들도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2월2일 진압군은 전투기와 탱크까지 동원해 하마市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심부의 골목이 좁아 탱크가 진입하지 못하자 폭격해 길을 텄다.
2주간 계속된 시가戰으로 쌍방에서 1만 명 이상이 죽었다. 그 뒤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라크에서 유행이 된 自爆(자폭)테러가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하마 중심부에 있었던 옛 궁전과 모스크가 사라졌다. 진압군은 하마 시내를 뒤지고 다니면서 부상자들까지 찾아내 확인사살했다.
이 무자비한 봉기와 진압은 그러나 시리아에서 원리주의자들의 반란을 근절시키는 효과를 보았다. 아사드의 진압은 많은 시리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형제단은 테러수법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다. 내가 만난 한 시리아 여성은 『서방세계는 아사드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사건 뒤 「하마의 교훈」이란 말이 유행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아사드가 하마에서 했던 식으로 하는 것이란 뜻이었다.
바트당
오랜 역사와 문화적 축적으로써 中東의 지식인 사회를 이끌었던 시리아는 한때 中東을 풍미했던 汎아랍주의 바트黨을 만들어 냈다. 1947년에 창당한 바트黨은 汎아랍주의-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하면서 공산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를 반대했다. 시리아의 바트黨은 中東의 여러 나라에 지부를 두었다. 집권에 성공한 것은 시리아와 이라크이다.
작년에 처형된 이라크의 후세인이 바트黨 출신이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은 이라크 군대와 함께 바트黨을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권력의 공백을 초래해 이라크의 시아派-수니派 내전을 통제불능사태로 몰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바트黨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이슬람 원리주의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아사드와 후세인은 무자비한 탄압과 反美정책으로 미국을 괴롭혔지만 동시에 이슬람 원리주의를 억제했다. 이라크가 종교내전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후세인을 그냥 두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랍 사람들과 이슬람 문화는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어 운영해 본 경험이 日淺(일천)하다. 이슬람은 교리상 종교공동체를 강조하므로 종교와 계급의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국민국가와는 맞지 않는 면이 많다. 그 점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와 공산당式 계급투쟁을 다 같이 거부하는 바트黨은 상당히 진보적이다.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바트黨이나 아사드와 후세인의 그런 역할을 看過(간과)하는 경향이 강했다. 中東을 지배해 본 경험이 있는 영국 사람들은 비교적 정확한 시각을 갖고 있지만 세계를 움직일 힘이 없다.
시리아에 대한 오해
시리아에 와서 여행해 보면 「그동안 많이 오해했구나」 하는 부분이 보인다. 한국인은 시리아를 주로 성경, 이스라엘, 미국의 시각에서 보아 왔다. 그런 시리아는 反기독교, 親北, 독재, 테러지원국가이다. 그런 면이 있지만 과연 「惡의 축」이라고 불릴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리아의 지난 100년 역사만 알아도 언론에서 얻은 선입관이 달라질 수 있다. 시리아(오늘의 레바논 포함)와 팔레스타인(오늘의 이스라엘) 지역은 1516년부터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독일 편에 섰다.
영국은 오스만 튀르크를 中東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아랍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했다. 영국의 정보장교 T.E.로렌스가 아랍 추장들을 설득해 反튀르크 독립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이 지원下는 아랍 군대는 파이잘 부족장의 지휘하에 튀르크領 시리아를 점령하고 1918년에 정부를 세웠다. 파이잘은 大시리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때 大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뿐 아니라 레바논과 이스라엘 땅을 포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은 戰後 처리 차원에서 시리아에 대한 위임통치를 프랑스에 맡겼다. 프랑스는 아랍세력이 세운 파이잘을 쫓아내 버리고 레바논을 大시리아에서 떼내어 다른 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레바논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이들이 프랑스를 설득하여 분리 독립하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시리아인들이 봉기하자 프랑스는 다마스쿠스를 폭격하는 등 강경 진압했다. 프랑스 위임통치 기관은 시리아의 알렉산드리타市를 터키에 떼어 주는 공작을 했다.
1940년 프랑스 본국이 독일軍에 항복한 뒤 시리아는 비시 정부(나치 독일이 프랑스의 남부지방에 설치한 괴뢰정부) 통치下로 넘어갔다. 1941년 6월 이후엔 영국軍과 자유프랑스軍이 지배하게 되었다. 레바논에서는 기독교인과 이슬람인들이 인구비율에 따라 권력을 나눠 갖기로 합의해 독립국가를 만드는 준비에 들어갔다. 1943년에 합의된 것은, 대통령은 기독교인, 총리는 수니派 이슬람, 군대는 기독교, 의회 의석은 기독교가 6 이슬람이 5의 비율로 하기로 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영국軍과 프랑스軍이 물러난 1946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시리아에서는 독립 후 여러 차례의 쿠데타가 있었다. 1950년대 중반이 되면 시리아의 권력은 군대 안의 바트黨員들에게 넘어갔다. 바트黨 세력은 시리아와 이라크로 확산되면서 아랍통일국가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민족주의派 장교단을 대표하는 나세르가 쿠데타로 親英派(친영파) 왕을 내쫓고 이집트에서 집권한 직후인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종의 국가연합식 통일아랍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을 결성했다. 이집트는 그러나 시리아를 북부의 속주처럼 대접했다. 다시 이에 불만을 품은 시리아 군인들이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뒤 시리아는 主權(주권)을 되찾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汎아랍주의 바트黨 세력이 반격한 것이 1963년의 쿠데타였다. 이를 계기로 공군 장성인 아사드가 바트黨의 핵심멤버로 등장한다. 같은 해 이라크에서 바트黨 군인들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이집트·시리아·이라크 세 나라를 통일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이라크에선 그해 11월에 바트黨이 쿠데타로 失權(실권)했다.
시리아의 집권세력이 된 바트黨은 사회주의 및 汎아랍정책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반발을 사고 黨이 분열되었다. 1966년 당내의 강경사회주의자들이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때는 아사드가 주모자였다. 이 바트黨 정권은 두 가지 큰 패배를 맛보았다.
1967년 6월 中東전쟁에서 이집트·요르단과 연합해 對이스라엘戰에 참전했던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빼앗겼다. 1970년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국내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인다. 이때 시리아는 아라파트가 이끌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지원했으나 이들은 쫓겨나고 말았다. 아사드는 시리아 정부의 팔레스타인 지원정책을 반대했었다. 그는 1970년 11월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그 이듬해 대통령이 되었다.
1973년 10월 사다트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기습하여 제4차 中東전쟁이 일어났다. 아사드의 시리아軍이 참전하였으나 이스라엘의 반격에 무너졌다. 일시 수복했던 골란고원을 내주고 다마스쿠스까지 빼앗길 뻔했다. 이스라엘軍은 다마스쿠스를 35km 앞둔 지점에서 휴전했다.
주변국에 뜯어먹힌 나라
아사드는 2000년 6월10일에 죽을 때까지 30년간 철권통치를 했다. 그는 戰後 중동의 최장기 집권자였다. 아사드는 수니派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리아에서 소수파인 시아派 중 이단시되어 왔던 알라위派 출신이다. 시리아에서 알라위派는 전체 인구의 11.5%에 지나지 않는다. 아사드는 군대·관료·정보기관에 알라위派 출신들을 많이 배치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알라위派는 오랫동안 탄압을 받아 오다가 프랑스가 위임통치할 때 우대를 받았다. 아사드 정권을 바트黨 정권이 아닌 알라위派 정권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아사드에 대한 개인숭배는 시리아를 여행해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자리 좋은 언덕, 산꼭대기마다 오른손을 든 아사드의 石像(석상)이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있었던 이 석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大兄(대형)을 연상시킨다.
그는 생전에 아들인 바시르 알 아사드를 후계자로 지명해 놓고 있었다. 바시르는 런던에서 안과의사로 일했다. 그가 34세 때 아버지 아사드가 죽었다. 당시 헌법은 40세 이상만 대통령이 될 수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개헌이 이뤄져 제한연령이 34세로 변경되었다.
시리아는 레바논內의 反이스라엘 헤즈볼라軍을 지원하고 레바논의 國政에 간섭하며, 최근에는 前 총리의 암살에 관여했다고 해서 국제적 압력을 많이 받고 있다. 암살사건 이후에는 레바논으로부터 철군했다. 시리아 입장에서 보면 레바논은 원래 시리아 땅인데 기독교인들이 프랑스를 구워삶아 분리독립해 나간 나라이다. 따라서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의식이 강하다. 시리아는 터키·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에 의해 국토가 여기저기 찢기고 떼어먹힌 나라이다.
출처 : 조갑제의 시리아 紀行 (월간조선 200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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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갑제가 보는 눈은 있구나.
멘트가 멋집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