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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스크랩 에니어그램과 잃어버린 목소리
바다 추천 0 조회 18 12.06.24 17: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거울아 거울아: 자존감의 비밀
Ernst Lim 

                     ‘동냥은 못 줄지언정 쪽박은 깨지 말라’

   허름한 청년이 깡통을 발로 툭툭 차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소리가 요란했는지 서있던 경찰이 신경질 적으로 물었다. “야 너 지금 뭐하는 거니?” “이사 가는데요?” 그 거지 청년에게 깡통은 이삿짐 전부 였던 것이다. 유머지만 좀 마음이 짠하다. 그런데 거지들이 깡통을 든 것은 비교적 최근일이다. 이전에는 바가지를 들고 다녔다. 그런데 심술궂은  사람들이 거지가 음식을 얻으러 올 때에 동냥은 주지 않고 바가지를 빼앗아 깨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나 보다. 이런 속담이  있는 것이! 왜 그랬을까? 쪽박은 거지에게는 유일한 생계의 수단인데 말이다. 아마 그 쪽박이 그의 양심을 고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지가 내미는 바가지가 자신의 욕심을 부끄럽게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핑계를 대서 쪽박을 깨버린다. ‘게을러 빠져서!’ ‘ 가난은 나라님도 못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뭐 땅 파서 먹고 사는 줄 아나보지!’ '동냥 주면 버릇만 나빠져.' 주는 것이 아까우니까 괜히 그럴 듯한 핑계를 대고 쪽박을 깬다.

  이 말은  야곱과 빌헬름 그림 형제의 백설 공주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한 아름다운 여왕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여왕은 매우 아름다웠고 요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찾던 여왕이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그러면 거울은 항상 이렇게 답했다. ‘여왕님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공주가 점점 자라서 일곱 살이 되었고 백설 공주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여왕보다도 더 아름다워 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여왕이 거울에게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거울은 이렇게 답했다. ‘여왕님, 여왕님은 무척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어린 백설 공주님이 한 천배는 더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동화를 백설 공주를 죽이려는 분노의 결국을 보여 준다. 동화에 나오는 여왕의 반응은 의외다. 보통은 거울의 말을 인정하지 않고 거울을 깨버린다. 디즈니랜드에서 만든 백성 공주 영화에서는 여왕이 거울을 내팽개치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이 것을 시기심이라고 하는데 뒤에 질투와 시기심, 등등을 구분하여 설명해 놓았다.

  상담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대담자 앞에 마음을 비추어주는 거울을 놓는 일이다.  상담의 대부분은 대담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도록 돕는 일이다. 즉 내담자 앞에 깨끗한 거울을 놓고 이 것이 나의 진실한 내면의 모습이구나 인정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진짜 모습이 싫어서 보통은 거부를 한다. 많은 경우에 거울을 힐난한다.  ‘이 거울 중국산 아니요?’  중국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가까 달걀, 가짜 소고기까지 만들어 파니까 이런 오해쯤을 받을 수 있겠다.  ‘어디서 이런 엉터리 거울을 가지고 와서 사람 마음을 심난케 합니까?’ ' 이것은 내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고 거부 한다. 거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화를 낸다. 상담가를 엉터리라고 비난을 한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처럼 거부 한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화를 내고 거울을 깬다고 자신의 모습이 예뻐지는 것은 아니다. 깨도 깨도 거울은 얼마든지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숫자만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은 많다. 거울을 보고 자신을 다듬는 것이 훨씬 쉽다. 요즘 여성들은 워낙 똑똑하다. 거울을 보고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어리석게 묻지 않는다. 거울보고 트집 잡지도 않는다. 거울을 깨지도 않는다. 오히려 더 좋은 거울 사려고 한다. 미세한 잡티까지, 땀구멍까지 잡아내서 다듬으려고 한다.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을 깰 것이 아니라 거울을 보고 먼지 묻은 것은 닦아내고, 지워진 화장은 새로 하면 된다. 주름이 있으면 보톡스 주사를 맞든지, 아름다움 표정을 짓기 위해 웃는 노력을 하면 된다. 화장해도 안 되면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을 고치면 된다. 이렇게 거울을 보고 얼굴을 고치는 것은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한다. 그런데 마음에 상처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의 상처도 치료하면 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힐난한 것이 쪽박을 깬 것과 같다.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을 깬 것이다. 그래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던 사람들은 거울을 깨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뒤틀린 모습을 인정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쪽박을 깨려 했던 마음을 예수께 들킨 것이다. 이제 할 일은 군중들이 자신의 마음을 고치면 된다. 이들이 돌아가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쪽박은 깨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 그래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상담가도 내담자나 성도들 앞에 마음의 거울을 놓는 일이 참 어렵다.  거울 앞에 자주 앉는 일이 현명한 일인데 그렇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보고 틀렸다고 할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거울 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믿고 사는 것도 괜찮은 일 같은데  주변 사람들을 기도 없이 살기(?) 어렵게 하니  문제다.  거울 앞에 자주 앉는 일이 현명한 일인데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괴로움을 회피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같다. 세상에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은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있는데도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미 하나님 조차도 자기 식으로 해석해버렸기 때문이다. 성서는 이것을 우상이라 한다. 에니어그램 킬럼을 통해서 이 것을 한번 살펴보기를 원해서 칼럼을 쓰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강의를 해야 하는 것인데!

  질투와 시기, 자존감, 자신감, 등은 내면의 명령권자 그 목소리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정서들인데 용어를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많은 겨우에 혼돈하여 쓰기 때문이다.  백성 공주를 죽이려 했던 왕비의 마음에 질투가 있었는가? 시기가 있었는가? 흔히 질투와 시기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자 브리슨 (Bryson)에 따르면 질투는 크게 질투 (Jealousy)와 시기 (Envy), 경쟁심 (Rivalry)의 세 가지로 나뉜다. 질투는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제3자가 나타나 그 중 한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고자 할 때 나머지 한사람에게 나타나는 정서다. 아리랑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리.”는 노랫말은 질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님과 나 사이에 한 여인(이런 때는 ‘어떤 년’이라 표현해야 맞겠다.)이 끼어들더니 님이 그 여인에게 마음이 끌릴 때에 내 마음에 일기 시작한 불편한 감정/분노/ 억울함/ 배신간이 질투다. 우리 속담에 「여자는 질투심과 허영심을 빼면 두 근도 안 된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여기서 '시기'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나보다 덜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 사람이 상사의 인정을 받을 때 생기는 부당하다는 느낌도 질투다. 부서의 홍일점 여직원이 나보다 젊은 후배에게 미소를 보이면 속이 쓰려오는 것도 질투의 감정이다. 그런에 내면의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질투의 감정이 다르다. 성격 유형에 따라 느끼는 질투의 표현도 다르고 강도도 다르다.

   베니스의 용병장군 오셀로와 그를 사랑해 비밀 결혼식을 올리는 데스데모나,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파국으로 이끌 음모의 모략꾼 이아고. 이들의 질투와 배신, 그리고 살인과 파국을 그린 작품 <오셀로>는 사랑의 어두운 뒷면인 ‘질투’라는 열정이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질투에는 항상 상대방이 있으며, 질투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분노를 안겨준다. 그러나 질투는 고통과 분노 속에서도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도록 동기화해 주거나, 발전적인 경쟁관계를 통해 서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 그 동기가 분노에서 시작해서 행복으로 나아가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질투를 ‘배우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배우자가 제3자와 관계를 맺었거나 맺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표현되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질투를 ‘사랑에서 비롯되어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는 생존 본능의 감정’이라고 정의 한다.  질투를 느끼지 않는 것도 문제다.  물론 성격 유형에 따라 다르긴 하다. 처용처럼 말이다.

  진화 심리학적인 면에서 살펴볼 때에 사랑에 빠진 인간에겐 두 가지의 위험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하나는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거나 성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성적 배신의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자를 의심하는 질투라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을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설명해서 수긍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질투를 뜻하는 영어 ‘jealousy’는 라틴어 ‘zelosus’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열정과 강한 욕망’이라고 한다. 프랑스어로 질투를 뜻하는 ‘jalousie’는 질투라는 뜻과 함께 커튼 대신 사용하는 창 가리개인 ‘베네치아 블라인드’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즉jalousie’ 뒤에 숨어 지켜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정신과 의사인 닐스 레터스톨은 이것이 아내를 의심하게 된 남편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현장을 잡으려고 블라인드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상황에서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면에 시기는 다른 사람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을 부러워하거나 획득하고자 하는 어떤 사람의 욕망이다. 백성 공주가 왕비보다 더 아름다움을 소유한 것 때문에 불편해진 감정이니까 시기라 해애 맞을 것 같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배 아픈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속담  즉 ‘(이웃)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시기를 표현한다.  시기심은 유목민족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농경 정착민족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원초적 감정이기도 하다. 유목님은 대체적으로 땅을 소유하지 않아서, 사촌이 땅을 살 이유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이동이 많아 만나고 헤어짐이 많고, 또 생존에 위협이 많아서 그런지 관계를 중요시하고, 남이 관계에 끼어는 것은 참지 못하는 질투가 훨씬 심한 것 같다. 유목민 사회였던 이슬람 지역에서 자신의 여자를 남이 넘보지 못하도록 평생을 얼굴을 가리고 살게 하니까 말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궁정 악장인 살리에르는 이 세상에서처럼 하늘에도 정의가 없다고 신을 원망한다.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만을 위해 살며 장인정신을 갖고 철저하게 기술을 갈고 닦았음에도 불구하고 철없고 게으르고 방탕하기만 한 모짜르트의 음악을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알고 있는 살리에르는 여태껏 다른 예술가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던 시기심을 느낀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은데 살리에르가 탄식하는 장면이다. “하나님, 왜 모차르트에게 놀라운 재능을 주시고 제게는 그의 능력에 감탄할 능력만 주셨나요?” 사실 살리에르는 당대 최고 음악가인데 모차르트가 등장하면서 시기의 화신이 된다. 어쩌면 질투에도 해당이 되겠다. 자신이 왕과 귀족들 사이에 독보적인 존재 였는데 어느날 애송이 한명이 나타나 사랑을 빼앗아가버렸으니 말이다. 재능만 부러워 했다면 시기과 왕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 때문이면 질투라하겠다.

   경쟁심은 두 사람이 어느 누구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할 때 갖게 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경쟁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기 때문에 생존에 건강한 면도 있다. 동양의 고전 「삼국지」에서 묘사된 촉의 제갈량과 오의 주유의 관계가 그러하다. 지략 싸움에서 항상 한수 위였던 제갈량은 늘 주유를 골탕 먹이곤 했으나 주유가 젊은 나이에 죽자 제갈걍이  『이제 세상에서 누가 날 알아줄 것인가』고 한탄하며 통곡했다.  주유는 죽어가면서 『하늘이여, 이 세상에 왜 주유를 만들고 또 제갈량을 만들었습니까』고 외쳤다.  이쯤 되면 시기가 되겠다.

  열등(劣等)이라는 용어는 '하위' '하급' '열세' '조악'과 유사어이며, 국어사전적 의미로 열등감은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사람으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을 뜻한다. 이는 영어로 inferiority[infìəriɔ́(ː)rəti, -ɑ́r-]인데 여기서 -ior는 라틴어계 형용사의 비교급(한컴사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속에 이미 다른 대상과의 비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내면에 질투와 시기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 중국어로 열등감은 "스스로 비천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는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열등감이란 자신의 체격, 용모, 능력, 학벌 등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뒤떨어진다고 생각하거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비하시키며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건전하지 못한 자아개념으로 인하여 자존감이 낮아진 심리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자존감은 어려서 결정이 된다.  열등감 역시 그 목소리가 만든다.  열등감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와 많은 상관관계는 없다. 뒤에 나오는

  심리학자 죠지 허버트 미드에 의하면, 갓난아이는 자아에 대한 개념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성장해 가면서, 그는 점차로 서로 다른 점을 가려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화상을 얻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자아개념(self-concept)들이 태어날 때부터 완전하게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경험들에 의해서 서서히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부모나 타인들이 존중하며 사랑으로 수용하며 대했다면 그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를 소중한 존재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하는 부정적인 자아개념을 가지기가 쉬울 것이다. 이렇게 자존감을 형성하는 사람을 심리학에서 중요한 타자라고 한다. 자존감 역시 그 목소리의 영향이다.

그럼 자존감 자존심은 어떻게 다른가?  자존감이란 ‘가치’와 관련이 있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자신의 인생과 존재에 대한 자부심을 말한다. 따라서 자존감이 높은 자신은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온 삶과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든든한 자부심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 활력이 있다. 건강한 자아상에 근거하여 살아갈 날들에 대한 밝은 전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자존감은 내면에 자리 잡은 것이라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감이 있고 행복하다.  자존감은 학벌과도 별로 상관이 없다. 외모와도 별로 상관이 없다. 재산의 유무와도 별로 상관이 없다.

반면 자존심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보통 말한다. 그래서 간혹 자존심 상했다는 말은 하지만 자존감이 상했다는 말은 잘 안한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갔는데 자기보다 공부 못하던 친구가 큰 부자 되어서 나타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있고 속이 불편한 사람이 있다. 그 때에 마음이 상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아서 기분이 상한 것이다. 그런 감정을 자존심이라고 표현한다. 자존심(自尊心)의 사전에서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스스로를 가치 있게 생각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상대방의 지위, 돈, 학벌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낮은 자존감이란 남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자학적인 견해를 갖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열등의식, 무력감, 죄책감, 허풍이나 과장, 남을 비판하는 것, 자기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그럼 자신감과 자존감은 어떻게 다른가? 자신감self-confidence은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고 자존감self-esteem은 '자신만이 지닌 특별한 가치에 대한 인식’이다. 자신감은 어떠한 능력이나 믿음에 나오는 것으로 일의 성과에 의해서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반면 자존감은 환경이나 일의 성과와 상관없이 자신 내면에 형성된 가치감으로 내면에서 온다. 자신감은 때에 따라 또는 주변 환경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자존감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어린 시절에 확고하고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로 설명을 하면 “너는 사랑스러운 아이다. 너는 사랑받을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그 목소리가 이미 마음에 있어서 누가 뭐라해도 별로 상처를 받지 않는다.

  썰렁한 유머로 설명을 해보자. 썰렁한 유머라 한 것은 재미 있는 유머도 내가 하면 썰렁해지기 때문이다. 어느날 맹구가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한 과목만 미를 받았고, 나머지는 전부 양이었다. 그런데 철수가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한 과목만 우를 받았고, 나머지는 전부 수를 받았다.  누가 자존감이 높겠는가?  성적표만으로 누가 자존감이 높고 낮은지 말 할수 없다. 유머에서 성적표를 본 맹구 아빠가 뭐라 했을까?  "얘야 너무 한 과목만 열심히 하지 말라." 그런데 철수 아빠가 "야 조금만 더하면 전부 수를 받았을 텐데! 좀 더 열심히 해라. " 라고 말했다면 자존감은 맹구가 너 높을 수 있다.  철수는 '더 열심히 해라'는 메시지를  받았고, 맹구는 '너무 한과목만 열심히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철수와 맹구 중에 누가 더 열심히 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맹구 아빠는 열심히 했다고 격려를 했지만 철수 아버지는 격려가 빠졌다. 자존감은 이와 같다. 어려서 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면 높아진다. 물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격려를 받으면 자존감이 아니라 자만심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옆집 영수는 전부 수를 받았다고 하더라. 너도 조금만 더 전부 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철수의 경우 비교 대상이 존재해서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 자만심, 우월감, 열등감 이 될수 있다. 다음에 영수보다 잘하면 자만심 또는 우월감을 갖고 다음에도 영수 보다 못하면 열등감을 갖는다.  이래서  명문대 생들이 자만심은 크지만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럼 이런 정서적 감정을 만드는 그 목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점차 다룰 것인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성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자존감을 키워준다. ‘세상에서 너는 유일하고 가장 소중한 존재다''하나님은 너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지금 너를 너무나 사랑하시니 너는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이렇게 중요한 타자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지 않는 것이 자존감이다.  성서에서 비교해서 사랑하신 일이 있는가? 없다.

  하나님이 지으신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 존재가 충분히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방식으로 살기도 한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말씀 한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불하고 살만큼 가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예쁘니?”라고 물으면 “당신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존귀하니?” “당신입니다.” 그렇게 답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 시샘은 없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만나면 내면 아이도 성장하고, 부정적인 그 목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이 대신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는 사랑하노라. 성도는 존귀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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