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소 선녀탕 청춘홀 칠선폭포 합수(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 볼만. 초암릉 국골과 칠선계곡 사이 암릉은 바위봉우리 연속으로 위험하다.
추성동은 칠선계곡과 동떨어진 들머리. 의탄마을은 계곡따라 올라가는 들머리. ........................................................
이조시대 칠선계곡 들머리는 의탄마을. 그곳부터 출발해야 계곡미 진수를 감상.
...............1472년 유두류록 속의 의탄마을................ 1471년 함양 원님 김종직은 이듬해 음력 4월 지리산 등반. 제자 유호인 조위 한인효과 휴천계곡을 거쳐 의탄마을 당도
'서너 모퉁이 돌아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은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담쟁이 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은 아래 개울이 바위에 부딪치며 꺾여 힘찬 소리.
그야말로 동산(東山: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 성 싶다.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살면 바로 무릉도원이 될 듯.'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
김종직이 동행한 제자 유호인에게 심중을 드러낸 말이다.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은 칠선계곡 청정계류가 흐르는 명소. 김종직 일행은 의탄마을에 도착하기 앞서 용류담을 지나친다.
김종직 보다 17년 후 두류산에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
'못은 남에서 북으로 깊이 패어 아득하고 바윗돌이 기이 인간 세상에서 멀리 천리나 떠나온 듯 했다... 못가의 돌들 고기 비늘무늬를 새긴듯 반질반질하고 독처럼 움푹 파이고 솥모양을 닮아 보이기도 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경.' .....................................................................................
칠선계곡은 7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의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 7은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상징하며, 한반도 민족에겐 행운의 숫자. 불교 단체에서 중요한 행사는 대부분 7의 배수 날자로 정하고 있다.
함양경찰서 소속의 마천 산악구조대의 구조활동 주무대. 칠선계곡 들머리 의탄, 한신계곡과 백무동 들머리 강청리, 벽소령 들머리 삼정리를 활동 지역으로 산악 인명구조를 한다.
구조대가 가장 바쁜 때는 방학과 휴가철이 맞물리는 7, 8월. 해마다 이 때면 하루 24시간 비상근무로 숨돌릴 틈조차 없다. 구조대 창설 초기에 비해 요즘은 산악사고가 감소 추세에 있다.
94년 1월 칠선계곡 동계훈련 특전사 군인 척추부상 사고 95년 한신계곡의 급류에 갇힌 등산객 3명을 밤새도록 구조. 칠선계곡 일대는 구조대가 상주할 만큼 조난사고 다발지역.
지난 7년간 자연 휴식년제로 묶여있던 곳. 2006년부터 단계적으로 개방하고 있는 코스. 지방 지자단체와 환경단체 등이 첨예하게 대립.
이곳은 야생곰, 노루,삵 등 야생 포유류의 서식처. 다양한 우리나라의 고산 희귀 동식물 씨앗 저장고.
'공단 지리산 관리사무소 고병준 소장.'
2006년 이후 자연 휴식년제는 그대로 연장 적용. 추성리 매표소에서 선녀탕까지 3km 출입구간 허용. 선녀탕,옥녀탕,비선담 안전시설 및 보완공사 완료.
추성리 주민들은 칠선계곡 개방을 요구.
"주말에 등산객 한 명도 없을 때도 있고, 주로 벽송사 관광객들이 주 수입원이지요. 하루 속히 천왕봉까지 등산로를 개방했으면.."
그러나, 반달가슴곰 관리팀의 한상훈 팀장
“치밭목에 방사한 연해주산 반달곰 6 마리중 일부가 내년쯤 칠선계곡으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 하여, 칠선계곡 상류를 개방하면 안될 것이라 주장."
........ 두지터. .........
수직에 가까운 골짜기가 깊고도 깊은 칠선계곡. 국내 3대 계곡 중 하나인 함양 마천의 칠선계곡.
칠선계곡에서는 마지막 산마을..두지터
2.5km 아래에 있는 추성동마을 느티나무 점방. 두지터 주민에게 온 우편물은 그곳까지만 배달. 우편물은 먼저 본 사람이 주민들에게 배달한다.
1970년 대에 전기가 들어왔고 1990년 대에 전화가 가설됐지만 아직까지 도로는 뚫리지 않은 때문.
하여, 두지터 5가구 주민 운송수단은 지계. 자동차 대신 집집마다 두 세개 지계가 있다. 원래, 두지터는 이헌상 남부군 사령부가 있던 곳.
백무동의 인민군 사령부 벽송사 인민군 야전병원 그 중간에 위치한 두지터.
김일성이 격려차 보낸 해당화. 그 씨앗이 퍼져 해당화 자생지. 아무튼 해당화가 지천에 널린 곳.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두지터.'
가락국 식량창고인 뒤주가 있었다는 전설의 고향. 1970년대 산림녹화사업으로 이곳에 지어진 집 한채 부엌 2개 딸린 주택에 이주시켰던 지리산 화전민들.
현재, 두지터 주민은 5가구에 10명.
................두지농장............ 1980년대 은퇴 후 내려온 여균호씨, 1만 2천평 농원에는 1천구루 호두나무.
1/3은 야생동물들의 먹이감이고 1/3은 오가는 등산객들의 몫이라 1/3은 그의 몫은 오육십 만(?)원.
호두 수확이 한창이던 2006년 9월 중순에 현장답사 겸 여균호씨 집에서 하룻밤 민박. 순박한 부부의 넉넉한 인심이.. 느껴지는 곳.
이젠 하룻밤 묶어가도 후회없을 규모의 사설 산장. 멧돼지가 농사지은 수확물을 다 먹어치울까봐 걱정. 한겨울엔 아무리 감춰 놓아도 밤새 다 찾아 먹는단다.
등에서 지계를 내려놓을 틈이 없는 여균호씨. 그 바쁜 틈에도 찐고구마 접시를 내미는 부인. .................................................
.................허정 씨................ 연하천 옛 산장지기 허정씨 칠순부부. 산나물 반찬이 별미인 두지터.. 민박집 약초꾼 문상희씨 따라서 이곳에 정착했다. ...............................................
................약초꾼 문상희 씨................ 추운 겨울에는 산바람이 매우 거센 곳. 장작때는 불편 탓에 외지에서 겨울내기. 지난 겨울에는 문씨 혼자 마을을 지켰다.
올해는 두어 명이 더 남아 외롭지 않다단다. 문씨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다인(茶人)이었다. 진주 경상대 시절(1981년) 진주에 다람 전통찻집
1983년 화개 다우당 찻집에서 차와 다구를 생산. 지금 화개골 찻집이 80곳이지만 당시 세곳에 불과. 차주걱과 다포(찌꺼기를 거르는 체)는 그가 처음 개발.
서울 인사동 다구들도 거의 대부분 그의 작품. 198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다구 전시회도 개최.
전국에 차와 관련된 지명(897개)을 조사 그의 대학 졸업 논문 ‘한국 야생차의 연구' 한동안 다도를 즐기는 이들의 지침서로 통했다.
지리산과 차에 미쳐 대학을 9년만에 졸업한 그. 한때 쌍계사에서 출가해 내원암에서 3년간 스님. 그가 두지터에 들어와 정착한 시기는 1993년 경.
중국차가 몰려오자 미련없이 화개골을 떠난 그. 칠선계곡 두지터에서 약초차를 만들고 싶은 마음 이 일대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약초를 캤던 곳.
“칠선계곡엔 한국의 약초들이 거의 다 있어요. 헛깨나무가 지천인 이곳 약초의 약성은 강한 편.”
흙으로 지은 담배막 ‘흙내’라는 나무간판 그곳에서 차 연구에만 몰두해왔던 문상희 씨.
다구 깎는 조각칼도 버리고 심마니가 된 그. 그렇게 꼬박 4년 연구 끝에 개발한 차..‘초향’
둥굴레, 오가피, 두충, 산작약, 당귀, 산다래, 구지뽕, 의성초, 오미자, 솔잎, 감잎, 칡순 등 봄에 나는 100가지 안팎 약초 새순으로 만든 차.
양이 많지 않고 찾는 이가 많아 봄이면 만들자마자 동이 난단다. 요즘‘백초정’이란 효소를 연구.
“약초찾는 사람 중에는 사형선고 환자가 많아요. 아무리 귀한 약초라도 돈 욕심을 낸 적은 없어요. 귀한 약초는 연이 닿아야 하고 주인이 따로 있는 법.”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제작팀들도 그를 많이 찾는다. 몇해 전 지리산 반달곰을 카메라에 담은 MBC 제작팀 ‘반달곰은 살아있다’ 제작팀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문씨는 요즘 금낭화, 개불알꽃 등 야생화를 재배. 산은 사람에게 쉽사리 품을 열지 않는다고 하지만 유독 자신은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말하는 문상희씨.
그가 받은만큼 산을 지키고 싶다는 문상희씨. - 2004.04.29.~8시 / KBS1 피플세상 속으로 - ....................................................
......... 선녀탕. .........
추성리에서 등산로를 따라서 곧장 가면 계곡에서 처음 만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에 용소가는 길을 표기했지만 안전을 고려, 등산로와 동떨어져 있다.
계곡 따라 5백m를 오르면 만나는 용소 산신제 때 산 돼지를 집어 넣는 곳이다. 그곳에서 2 km 더 오르면 두지동(두지터).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 하여, 붙여진 지명 두지동은 화전민들의 마을이다. 현재 담배건조장과 농막만 남은 등산객 휴게소
담배 건조장은 찻집으로 변해있고 창암능선 넘으면 백무동으로 가는 길.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아래에서 들릴듯 말듯 전망 좋은 쉼터 추성망. 여기서부터는 험난한 계곡 길의 연속. 추성동에서 4km 지점, 선녀탕부터 험로.
선녀탕 전설에는 칠선계곡의 유래가 담겨있다. 7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 돌과 모래로 메워져 선녀 목욕장소로는 초라한듯.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7선녀가 목욕할만한 곳. 선녀탕 바로 위에 선녀들이 몸씻기 적당한 너럭바위. 옥녀탕에서 샤워처럼 너럭바위로 쏟아지는 두 줄기 폭포.
그 앞 너럭바위는 선녀가 샤워하기 알맞는 장소. 선녀탕에서는 선 바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곳. 선바위와 두 줄기 폭포 사이에 있는 너럭바위 공간.
선녀들이 몸을 숨기고 목욕하기에 적당한 장소. 그 아래 선녀탕은 선녀들이 뛰어놀기에 안성맞춤. 아득한 옛날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오늘날 등산로.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는 선녀탕 목욕처.
7선녀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듯한 선녀탕 인근 등산로. 그렇다면, 이곳이 선녀탕이라 불리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일단, 선녀탕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 이곳 풍경을 음미해보자
.................. 칠선계곡 선녀탕의 전설............................ 7 선녀가 목욕 중 잃어버렸던 옷을 되찾아 준... 사향 노루. 그 옷을 훔쳐 바위 틈 나무가지에 숨기고 몰래 훔쳐 본... 곰. (오늘날 등산로로 이용되는 그곳 나무숲 사이의 너덜바위 지대)
목욕을 마친 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옷을 찾아 헤멘 선녀들.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 있던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었다. 곰이 바위 틈 나무가지에 옷을 숨긴 곳이 우연히 잠든 노루의 뿔.
그 후 선녀들은 사향 노루를 그곳에서 살게 했고 곰은 국골로 추방.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메는 모습을 숲속에 숨어 엉큼하게 엿본 죄값. 선녀에게 옷을 돌려 준 착한 노루는 칠선계곡에서 행복하게 살았단다. .................................................................................................
옥녀폭포와 여신폭포에서 약수터까지 흘러내린 물을 음수, 선관이 변한 독주폭포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을 양수라 하여 그 양수와 음수의 조화로 <오색약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칠선계곡에 7명 선녀가 살았다는 유래를 뒷받침 해주는 선녀탕. 선녀탕 위에는 수십 평 소와 매끈한 암반으로 둘러싸인 '옥녀탕' 자연의 빚은 '오줌싸개 소녀'인듯 곧게 쏟아져 내리는 힘찬 물줄기.
'그 물줄기가 흘러내려 이루어진 옥녀탕.'
남자 여럿이 희희낙낙 목욕을 해도 좋을 만한 옥녀탕. 가장자리는 얕지만 그 가운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 마치, 여성의 성기를 연상하게 하는 풍경이 담겨진 옥녀탕.'
옥녀탕 위로 선녀들이 하늘을 날아다닐듯한 비경의 극치 '비선담'. 선녀가 하늘로 날아서 올라갈 것만 같은 곳이라 붙여진 이름 같다.
비선담에서 한시간 거리인 <칠선폭포>는 칠선계곡을 대표할 비경. 비선담 지나 목기막터가 있는 산죽밭 지나 오른편 계곡 건너 바위굴. 과거 목기를 만들던 인부들이 지내던 곳으로 알려졌기에... '청춘 홀'.
..........................'청춘홀 위치............................. 선녀탕 0.5km 전 지점에 좌측 <탐방로 아님>표지판. 그 옆 희미한 길이 있고 옛날 마을터 같은 초암 능선 단풍나무 드리워진 옥녀탕 우측으로 가면 일반 등산로.
청춘홀 가려면 비선담 통과후 좌측 계곡을 건너야 한다. 두지터를 지날 경우에 다리를 통해 계곡을 두 번 건넌다. 칠선폭포 못미쳐 계곡 우측으로 우뚝 솟아오른 검은 바위.
' 흰색 페인트 글씨 - '청춘홀. 지리산악회.' 일반 등산로와 동떨어져 찾기 어려운 곳이다. ................................................................
암반 위로 흐르다가 물이 고이면,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이고 물줄기가 떨어지면, 칠선폭포, 대륙폭포, 마폭 이름이 붙었지만 이름 없는 소와 폭포가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칠선계곡.
마폭 - 천왕봉 거리는 1.6km이고 표고차 700m 급경사 오르막. 오르막 곳곳마다 주목, 야생화, 고사목, 제석봉, 중봉이 보인다. 이 계곡 곳곳의 지명을 보면, 개척시기가 짧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선녀탕을 제외하고 나면, 전설이 뒤따르지 않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지명에 유래나 전설이 없는 곳은 곧 역사적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하여,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보고서'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김경렬 씨 개척 보고서. ............................
칠선계곡 등산로는 1964년 11월 하순과 12월 초순에 개척되었다. 부산 산악인, 학계인사들인 김경렬, 성산, 곽수웅 등 17명 개척단. 이곳 담과 폭포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굳어져 있다.
6개 중 높이 10m 쯤 폭포는 부산일보의 이름을 본 따 부일폭포. 그 다음 폭포는 대륙 산악회의 이름을 본 따 '대륙폭포'라고 명명. 자일산악회, 동아대 산악회 단체 명칭을 본 따 자일폭포, 동아폭포.
개척단은 목기 제작자들이 토벌한 세아름 300 년생 고목도 발견. 해발 1,500m 원시림에서 함지박이 쌓여 있는 목기 제작소도 발견.
스무개 정도 함지박이 초벌갈이가 된 채 돌담 안에 포개져 있을 뿐, 아무 기구도 눈에 띄지 않았고 목기꾼들은 연장을 챙겨 도망친 모양. 개척단이 들어갔을 때, 마을주민들은 이미 그곳을 자유롭게 왕래했다.
청춘홀부터는 점차 경사가 심하고 길바닥은 험악한 돌밭의 연속이다.
돌밭길을 지나 칠선폭포를 거쳐 10분 후 왼쪽 계곡을 건너면 중봉과 하봉에서 흘러온 개울이 칠선계곡 본류가 만나는 합수골. 폭포가 무려 3 개나 몰려 있어 폭포수골인 합수골은 도벌꾼들 초막.
이곳은 산장설립을 추진했다가 반대에 부딪쳐 흐지부지된 곳. 칠선계곡은 자연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칠선계곡은 험하고 깊어 다른 곳보다 등산로 개척이 늦어졌다.
'칠선계곡은 등산로 개척 이전부터 도피자들이 은둔처.'
일제시대엔 징병, 징용을 피한 젊은이와 지식인 수백명이 은신. 남한유격대 총책임자로 최후의 빨치산으로 불린 남도부(南道富). 본명 '하 준수' 그는 일제의 만행에 맞서 민족 자주운동을 펼쳤지만, 해방 후 월북하여 강동 정치학원 교관을 거쳐 빨치산 수괴가 되었다.
칠선계곡은 세석고원을 지켰던 우천 허만수씨 사라진 곳. 그는 평소늘 흔적없이 칠선계곡으로 사라지겠다고 말했다. 법계교 옆 추모비에도 평소 그가 한 말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륙폭포, 3층 폭포 이정표를 지나면 평범한 길이 계속되다가 마지막으로 통천문 쪽의 중봉, 천왕봉 계곡이 합쳐지는 마 폭포. 마폭에서 계곡과 동떨어진 급경사 등산로는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마폭포 - 천왕봉 3㎞는 거의 일직선형의 산길에 표고차 500m 60∼70 도 바위 틈새로 길이 이어뎠고 원시림 고산식물의 연속. 침엽수림엔 주목도 많고 음습한 토양 탓에 강렬한 고산식물 냄새. 쓰러진 고목이 길을 가로막고, 산사태 난 곳이 많아 가슴 아팠다.
이 길은 서두르지 말고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안배할 필요가 있다. 64년 개척단은 이곳에서 일행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비에 봉착했다, 정글 숲, 한 길 넘는 눈속을 피해 때론 산사태 지역을 올라가야 했다. 표고 1,700m 쯤 올랐을 때 바람이 일고, 사태난 절벽에서 낙석(落石)
천왕봉 바로 밑인 것 같은데, 작은 봉우리들이 쭈볏쭈볏 앞을 막았다. 눈비로 산사태가 일어난 곳이 여러군데라 목표를 제석봉으로 바꿨다.
눈과 낙엽, 구상나무 군락, 잡목 숲에서 베낭이 걸리고 옷이 찢어졌다. 잠깐 멈취 쉬면 등산화가 꽁꽁 얼어붙어 부득이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이 가까와진 것 같아 한숨 놓으려 했지만 능선은 보이지도 않았다. 1, 2 팀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무전기에 아무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중 략...............................
1964년 개척 전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던., 칠선계곡. 기업형 도벌꾼들 이전부터 칠선계곡은 은둔자의 천국.
...........최초의 빨치산.,남도부................... 부산 산악인들이 '칠선계곡 학술조사대'를 조직 칠선계곡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가 1964년이다. 그들은 학술조사 보다는 등산로 개척이 주 목적
소와 폭포에 산악회 이름을 본따 명명한 것이 본보기 이 학술조사대는 칠선계곡 중턱에서 목기제작소를 발견 수령 200~300년 거목들로 만들어진 함지박들을 보고 경악.
선발대로 학술조사대보다 먼저 칠선계곡을 찾은 성산 님 기업형 도벌꾼들 '목마로(木馬路)' '도벌댐'을 보고 충격 칠선계곡은 전란후 이미 도벌꾼들의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부산 산악인 학술조사대의 첫발'이란 말이 민망할 정도. 그런데 도벌꾼 훨씬 전에부터 산막 치고 살았던 은둔자들 학병이나 징병을 피해 도망친 이들이 군데군데 산 흔적들.
그런 사람들이 이미 수백명에 이르렀던 칠선계곡.
사실 그들에게는 훤히 뚫린 산길이 필요하지 않았을듯. 산길이 훤히 열려 있었다면 마음 놓고 숨지도 못했을듯. 어쨌든 칠선계곡은 오랫동안 지리산 최대 은신처였던 곳.
일제 징병을 피해 이곳에 숨은 남도부(본명 하준수) 1921년 경남 함양 태생인 그는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 중 징집을 피해 칠선계곡에 은둔
사향 효과는 얼음 위에 대나무 잎 잠자리를 깔 정도. 신라 귀부인이 사향을 복용한 시기는 792년 이전인듯. 당시 신라에 합병된 해상왕국 가락국으로부터 유래된듯.
'곰에 얽힌 구혼'과 '곰에 대한 경계심'이 담긴 전설. 칠선계곡은 파고들수록 전인 미답의 신비를 품은 계곡.
국골
함양 마천면 추성리 마을 뒤로 오르면 국골 들머리. 약 2시간 오르면, 물길을 둘로 가르는 산자락 험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등산로이지만 아직도 거친 편.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오르기까지 약 2시간 남짓.
가끔 움직이는 돌이 있어 낙석 위험이 도사린 코스 적요함이 감도는 숲속 오솔길 지나 국골 4거리 팻말 지리산 동부능선 분기점 이곳까지 약 4시간 30분 거리.
국골4거리에서 진행방향 왼쪽, 암봉이 두류능선 깃점. 두류능선 코스는 생각보다 거리가 먼 짭짤한 암릉 코스, 이곳 동쪽 산사면으로 허공달골(다리골), 어름터, 향운대
..................향운대..................... 智異山 十臺(지리산 10대) 수도처 중 한 곳. 뒤로는 높은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는 샘터. 절벽 틈 사이에는 수도자가 기거할 만한 공간. ...............................................
국골에서 쑥밭재 거쳐 동부능선으로, 오른쪽 오름길은 하봉을 거쳐 주능선. 국골 4거리에서 곧장 오르는 암봉은 말봉 그 능선 중간에 평평한 봉우리가 1432(두류)봉
요즘 그곳 이름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누군가가 말봉에 두류봉이란 팻말을 꽂았기 때문. 하지만, 그 지역 사람 대부분은 말봉이라고 부른다.
동부능선 왕등재 야영 후, 쑥밭재 지나 국골4거리 멀리 반야봉의 낙조와 함께 펼쳐지는‘말봉의 낙조’ 그 뒤로 오른쪽 하늘금을 이루고 있는 달뜨기 능선,
정면 방향으로 왕산과 필봉산의 뚜렷한 모습. 말봉 옆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얀 독바위 동부능선 새봉, 좌 왕산 우 필봉산. 달뜨기능선
말봉에서 7~8분 내려서면 오른쪽 산사면에 향운대 숲향 짙은 숲속 길, 암릉을 번갈아가면 1432(두류)봉 함양 방향의 첩첩 능선과 중봉부터 천왕봉까지 마루금
1432봉 부드러운 숲길따라 무덤 2기를 지나 집수정 그곳 외딴 집 마당을 거쳐 내려가면 성안마을 임도 잣나무,밤나무,호도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자락 사이
추성리-국골들머리-국골4거리 -말봉-1432봉-성안마을-추성리
지리산 계곡과 봉우리들 중 '나라 國' 자 쓰는 유일한 지명. 이곳 지명에 나라 국(國)을 써야 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가락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애환이 깃든 지리산의 숨은 계곡.
가락국은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김해평야에 터전 잡았던 나라. 기원전 108년에 한(漢)에게 멸망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후예들. 가락국은 국가 형성 이전부터 '고구려'와는 구혼이 많은 듯 보인다. 가락국은 역사 상 기록을 보면, 친 신라의 노선을 걸었던 나라이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의 뿌리는 고조선이고 고조선은 단군환웅의 자손. 가락국은 기원 전 108년에 한(漢)에 멸망 당한 위만조선 후예라지만 가락국 조상은 양자강 남쪽 인도 또는 아랍에 가까운 고대중국 같다.
가락국은 단군신화와는 전혀 다른 김수로왕 탄생 신화의 나라. 가락국은 곰을 천시하고 호랑이를 토템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 '하여, 칠선계곡의 선녀탕에서 곰이 국골로 쫓겨난 것은 아닐까?'
'국골은 칠선계곡에서 쫓겨난 곰이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가락국의 10대 '마지막 구형 왕이 추성산성을 축조했다는 곳. 국골에서 신라 침공에 대비 군마를 이끌고 훈련 시켰다는 구전. 국골은 가락국 구형왕의 마지막 피난처였다는 설에서 유래된 지명.
'추성산성 축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국골.'
국골 험한 산세가 천연적인 산성 역활을 한 것은 아닐까? 군사들과 군마를 훈련시킨 장소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국골. 가락국이 군마를 훈련시켰다면 그 비밀 장소는 어느 곳일까?
혹시, 군사훈련장은 세석평전 아닐까?
국골과 추성산성은 가락국 구형왕의 방어 기지. 훗날 백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 하여, 신라 진골 귀족이 된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
전란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이끌고 신라에게 나라를 넘겨준 비운의 왕.
가락국 영토를 식읍으로 받은 구형왕 나라는 잃었지만 통치권은 유지했던듯
지리산 동부 권역인 산청군 일대에는 구형왕에 얽힌 지명과 유적지들이 많다.
추성 산성터 주변의 두지 터(식량 저장고) ,얼음 터, 국골을 포함하여 왕등재 토성과 산청군 금서면 왕산 그곳에 있는 구형왕릉과 그 왕릉 입구에 있는 덕양전
덕양전은 구형왕 증손자 김유신 장군의 활터.
아울러, 이 일대는 2400 종류 약초 자생지이고 이조시대 명의 <유의태>가 의술을 폈던 고장이다. 하여, 옛날부터 한의학 의술이 발달되었던 곳이다..
'가락국의 유적들이 유난히 많은 국골 일대.'
개국 과정부터 베일에 가려진 역사가 정립되지 못한 가락국 구형 왕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신비감을 갖게 하는...국골. 구형 왕은 국골요새에 추성산성을 쌓아 신라와 항전했다는 <학설>.
왕등재에 토성을 쌓고 신라에 항전 하봉과 중봉 사이 천연적인 요세 국골. 지리산은 1,500 년전후에는 가락국 영역.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532년)에게 양왕 칭호를 받은 인물. 신라와의 전쟁에서 구형왕의 마지막 항전처는 국골이었던듯. 국골은 가락국 군사요충지이자, 선녀탕 전설 속에 등장하는 곳.
선녀들의 노여움을 샀던 칠선계곡의 곰. 칠선계곡에서 쫓겨나 살게 된 곳이 국골. 국골은 그렇게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골짜기.
칠선계곡 지류 국골은 중봉과 하봉 사이에 있다 칠선계곡은 추성동에서 오르는 3 계곡 중 가운데.
혹시 선녀탕은 구형왕 후궁들의 목욕처 아닐까?'
사향은 왕의 관심을 끌려는 후궁들이 몸에 지녔던 취음제. 사향 노루를 가까이 둔 선녀들은 '왕의 여자'로 짐작된다. 선녀탕은 인적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적 드문 위치.
'왕의 여자'들은 7선녀 처럼 목욕했던걸까?
왕의 여자들의 목욕을 훔쳐보면 국골로 추방했을 듯 싶다. 곰은 잘 참다가도 충동을 못 참는 젊은 병사를 뜻하는 듯. 선녀탕의 전설에서 사향노루는 왕과 후궁들의 측극을 의미.
하지만, 이러한 짐작들은 어디까지나 추측. 좀 더 가락국 역사 흔적을 찾아보기로 하자.
하봉 능선 깊숙하게 이어진 국골 등반객 인적이 거의 끊어진 골짜기. 국골은 깊은 골짜기에 원시림이 가득.
체력과 등반기술 및 장비가 필요한 곳. 국골은 천왕봉- 하봉 - 쑥밭재- 왕등재. - 유령계곡 또는 오봉리 하산 코스가 안전.
쑥밭재는 일제의 애국지사 석상용 선생 묘가 있는 곳. 아울러 이곳은 빨치산과 토벌군들이 저지른 양민학살 현장. 빨치산은 토벌군에 협조한 양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학살.
토벌군은 빨치산에 협조한 양민들을 죽인 후에 매장한 곳. 쑥밭제는 마지막 남부군 활동무대지만 전략상 마을을 폐쇠.
그곳 인근 국골은 지리산 동쪽 끝 북사면 외딴 곳이지만 전략적 요충지. 인적 드문 골짜기이며 지형 자체가 산성이고, 위급할 때 쑥밭제 탈출로. 구형왕이 신라에 맞서 석성을 쌓고 항전했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국골.
........... 상원사골. ............
지리산 최대의 골짜기 칠선골은 천왕봉의 버팀목 천왕봉의 웅장하고 위대함도 칠선골이 있어서일듯. 골이 깊은 만큼 숨겨진 역사의 깊이도 끝이 없는듯.
과연, 국골에 피난 도성은 존재했던걸까? 옛부터 국골 깊숙히 궁궐이 있었다는 구전. 추성리 주민들이 궁궐터라 믿고있는 상원사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 칠선골의 지류인 상원사골 대궐터. 그동안 난무해왔던 궁궐터 구전들.
“그 협소한 국골에 무슨 궁궐터..???”
전설 따라 그곳을 찾아간 '지리 99' 팀. 칠선골을 거느린 초암능선의 턱밑에 위치 상원사골 상부에, 기와 파편 및 축성 흔적들.
석성의 위치는 골의 물줄기가 끝나는 지점. 능선과 능선을 가로지르는 석성을 쌓아 위장. 계곡을 틀어 막아 밑에서 보면 물길이 없는 듯.
130m간격으로 똑같은 형태로 또 하나의 성을 축성 피난 도성의 축성 안에 궁궐터 지대를 상하로 구분. 편의 상 아랫 궁과 윗 궁으로 분류해서 이름 붙인다.
토기조각과 기와파편들이 있는 아랫 궁은 군주의 거처. 궁의 우측 지능에 주민들이 부르는 성문“남대문호매기” 수비군 초소 흔적으로 보이는 윗터는 수비군들의 막사터.
아랫 궁에서 윗터의 꼭지점 초암능선 날등까지는 200m, 초암능 등산로에서 내려다 보면 수목 사이로 윗터 축성 골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윗터 축성에 가려진 궁궐터.
윗 궁 아랫 궁을 합치면 궁궐 몇 채 들어설 면적 지리산 지형 특성상 너덜지대 여건이 아닌, 궁궐터 궁궐터 들머리 너덜지대는 궁궐터를 은폐하려는 흔적.
초암능선 1474 고지에서 분기한 지능이 남쪽 방어선 손에 잡힐 듯한 천왕봉, 내장을 다 드러낸듯한 중봉골, 합수골의 속살 등 발아래 다람쥐도 포착이 될 듯한 요새.
사람이 지나갈 길이 없는 요새지 남릉 주위 탐구팀이 고도 200m 낮추는데 무려 2시간 소비 그러나, 끝내 탈출을 시도해야 했을 정도로 요새
공중으로 날아들지 않고는 뚫고 들어갈 길은 없는 지형 초암능 날등을 따라 전략적인 특공대 진입이나 가능할듯. 옛부터 전해오는 구전이나 문헌상으로도 일치하는 궁궐터.
1485년 (성종 16년)에 편찬한 신동국여지승람의(권 31) 함양군 형승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 의탄소(義呑所)와 5~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
추성은 두류능선 들머리 성안마을에 있는 성터, 박회성은 대궐터의 성터를 말한 것으로 사료된다.
1719년 천왕봉을 등정한 <신명구>의 “유두류일록”내용 “천왕봉 수리에 고성이 있어 지금도 성터의 바위틈에서 투구나 창 도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대궐터에서 초암능선 날등만 넘으면 국골. 예전부터 국가가 있었다고 전해오는 국골. 군량미를 보관했던 뒤주가 있었다는 두지터.
추성리 산 93번지 두류능선 들머리 성안마을 삼국시대 축성한 것으로 알려진 추성산성 석축 두류능선 영감절터(향운대)좌측 골짜기 어영골
어영(御迎)은 임금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어영청은 신라시대 왕궁을 수비하는 기관
국골에서 군마를 훈련시킨 곳으로 알려진..말달릴평전. 두류능선상 말달릴평전 망루 역할을 했던 곳..망바위.
국골은 어느 시대 누구를 위한 대궐이었을까?
세간에서는 가야국 <구형왕>의 대궐터라고 전해온다. 그러나, 그 후손 김유신이 훗날 삼국통일 신라의 주역 함양은 6세기 초반 가야 연맹 중 소국인 <졸마국> 영역.
'국골은 베일 속 수수께끼를 간직한 '전설의 고향'.
............... 성내(城內)마을 ...............
칠선골과 국골 사이에 초암릉이라 부르는 긴 능선. 이 능선 중턱에 초암이란 암자와 상원사란 옛 대찰 일제 시대 지리산 북쪽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지름길
길은 비교적 뚜렷한 편이지만, 암릉 구간이 많은 편.
추성리 추성산장 안마당에서 좌측 산쪽으로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은 두류능선으로 오르는 길. 우측길로 10분 오르면 좌측에 국골 성안마을 가는 길.
초암릉 들머리는 추성선장 옆 칠선교를 지나 두지동 못 미쳐 좌측 용소 방향 이정표 갈림길. 좌우길 모두 염소농장 가는 길이고 앞에는 용소
'추성산장에서 하봉까지 4시간 30분 소요.'
추성리 산 93번지 두류능선 초입 성안마을. 국골에 옛 도성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마을. 우리나라 전략적 요충지마다 있는 성내마을.
우리나라 성내마을은 어떤 역활을 했을까? 운남면 성내마을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자.
...........운남면 성내마을............. 서해 무역 항로의 검문소가 있었던 마을 운남면 성내리 성안에 있어., 성내 마을
원래 성내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4km 떨어진 곳 현재는 16세대 25명이 거주하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이조시대에 만호(萬戶)가 거주한 규모의 성안 마을
마을 입구에 당산목 홰나무(괴목) 두 그루 그 앞에 옛 영광군수 홍대중의 '영세 불망비' 중국과의 교역 항로를 지키기 위한 성안 마을
중국과의 교역과 한양으로 곡물 수송을 할 때 '영산강 - 목포진 - 다경포진 - 임치진' 항로 중종 10년(1515년) 축성한 후 1895년 폐진(廢鎭)
그 규모는 둘레 980척, 높이 12척의 돌로 쌓은 성 중선 4척 별선 4척 병사479명이 배치된 규모의 성 동문과 서문, 객사, 동헌, 내아, 사령청, 장교청 등
현재 성안은 네 가구 민가가 들어서 있으며 무덤 2기 사슴을 기르는 축사 한동이 있고 나머지는 개간한 밭. 장보고의 완도 청해진의 말목보다도 더 굵고 큰 말목
고대 다경진성은 서해안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곳인듯. 패총, 돌도끼, 돌칼, 삼각형석도편 등이 발견되는 곳. .......................................................
마천 추성리는 옛부터 중국과 왜를 잇는 교역 운송로 국골 성내마을은 교역 운송로를 지키는 역활을 했던듯. 지금은 몇 가구 살지 않지만 옛날에는 큰 마을이었을듯.
왕 등 재
지리산 동쪽 끝자락에 왕등치(王登峙)에서 비롯된 지명. 즉, 왕이 올랐다고 하여 붙여진 고개마루의 우리말 이름. 천왕봉·중봉·하봉에서 웅석봉 사이 정남향에 있는 명당.
해발 1000m급 높이지만 산청과 함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욕의 역사를 안고 도도히 흐르는 경호강이 발 아래 있다. 천왕봉 용틀임 산세가 그대로 뻗어내린 지리산 동쪽 끝자락.
천왕봉과 동쪽 웅석봉 산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 멀리 아스라이 다가오는 다도해의 물결도 한눈에 담겨진다. 지리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가을의 억새 능선
왕등재는 구형왕이 토성을 쌓고 항전하다 왕산으로 쫓겨 최후 그 흔적으로 왕등재와 오른쪽 1030m 고지를 원형으로 싼 토성. 토성은 외성, 내성을 겹으로 쌓았는데 원래 높이는 약 3m일 듯.
'구형왕이 백제 침공을 막으려 쌓았다는 추성산성 터.'
추성산성을 축조하고 국골에서 병마를 훈련했다는 흔적들. 얼음터, 두지터, 토성과 성문, 왕등재 남쪽의 935m 깃대봉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이다.
왕등재를 궁으로 삼고 유평계곡을 요새로 삼은 듯 보인다. 쑥밭재를 사이에 두고 남북에 요새를 구축한 이유는 뭘까?
왕등재는 해발 1000m 지점에 신비하게도 대규모 늪지대 넓이 70m 가량에 2백여m 가량 길게 펼쳐진 왕등재의 늪. 사철 물기가 서려 나무는 한 그루도 자라지 못 하고 풀밭
'왕등재 일원은 늪지대를 중심으로 광활한 분지.'
마치 세석평전과 흡사하고 1030m 고지와 아울러 천연요새. 왕등재 가는 쉬운 길은 승용차로 유평계곡 도로로 외곡마을 그곳에서 걸어서 30분이면 충분히 왕등재에 도착할 수 있다.
왕등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1030m 고지를 거쳐 밤머리재 왼쪽으로 가면 외고개와 새재·쑥밭재를 따라 하봉·천왕봉.
지리산 동쪽 자락에는 유난히도 고개가 많다. 함양군 마천과 유평계곡을 잇는 쑥밭재·새재 금서와 유평을 잇는 외고개·왕등재·밤머리재 왕등재와 외고개는 아직도 그대로 수수한 모습
가락국에 관한 역사나 문화적으로 연구가치가 높은 곳. 옛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해 함양과 산청을 넘나들던 재. 지리산 태극종주 코스로 알려진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왕등재와 웅석봉을 연결하는 고개마루인 '밤머리재'도 유명하다.
2004 년 4월 27일 왕등재(935.8m) 중턱에 4가구가 사는 외곡 마을. 이곳은 대원사 계곡으로 유명한 경남 산청군 유평리 맨 꼭대기 마을. 반달곰이 외곡마을 염소 3 마리를 공격, 염소주인은 24 마리라고 주장.
환경부는 지리산에 반달곰을 올해부터 6 마리, 총 30 마리 방사할 계획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밀렵을 우려해 반달곰을 방사한 활동영역을 비밀 반달곰은 산딸기, 도토리, 밤 등의 나무열매와 연한 산나물, 풀잎을 먹고 개미, 벌 등의 벌레를 잡아 먹는데 토종벌 농가를 습격하는 경우도 있다.
2003년에는 벌꿀 등에 대한 피해 보상으로 1억원 보험금이 지급됐다. 2001년에 방사한 반달곰 4 중 3 마리는 화엄사 입구 우리에 갇혀 있다.
산청군은 포수를 동원해 농작물을 습격하는 왕등재 멧돼지를 붙잡는다. 2002년 29 마리, 2003년 36 마리, 2004년 23 마리를 포수들이 구제했다. 태극종주 코스 초입 왕등재에서는 산행 중 야생 멧돼지를 조심해야 한다.
왕등재 일대는 가야를 애워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경계선이 되는 위치. 가야의 유적지들 대부분은 교통의 중심지가 아니면, 해상무역의 중심지. 가야의 유적지는 전략적 목적보다 경제적인 효용가치가 높은 곳에 있다.
가야국의 발원지 김해에는 가야의 유물들이 많다. 부산 가야동도 가야의 옛터. 즉 가야국의 지명이다. 김해에서 부산으로 편입된 가락동 역시 가야의 옛터.
서부산. 인천. 우포늪. 교통의 중심지. 상권의 중심지. 가야 터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해상 무역항, 선착장들. 우선, 비야 가야의 도읍 창녕 우포늪 일대부터 살펴보자.
..............우포 늪의 공룡 발자국 및 창녕 일대.......................... 우포 늪은 1억 1천∼2천만년 전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 빗방울 무늬 화석과 곤충 화석 그리고 약 6,000 년 전에 빙하 흔적. 한반도 육지의 해안선, 낙동강,우포늪은 빙하가 녹아 흘러나간 흔적.
지구가 점점 따뜻해지자 육지의 빙하가 서서히 녹기 시작했던, 당시. 낙동강은 지금보다 좁았고, 화왕산에서 시작된 토평천 규모도 작았다. 빙하는 강바닥을 깎아내리고 그 깎인 돌멩이 모래가 바다로 흘러갔다. 빙하가 녹아 높아진 해수면 역류현상이 일어나자 강주변으로 둑이 형성. 그후 낙동강과 토평천 주변 둑이 오목한 그릇모양을 만들어 고인 우포 늪.
우포는 우포늪 목포늪 지포늪 쪽지벌 4개로 나누어진다. 그중 제일 큰 우포늪 소벌은 '물 마시는 소'라는 의미이다. 우포는 예전부터 소를 많이 키운 곳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소가 풀을 뜯고 물을 마시기 적당한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목포늪은 한자로 표기하면 木浦가 되는데, 원이름은 나무벌 여름엔 하천을 따라 땔감이 많이 떠내려 와 붙여진 지명이다.
사지포늪을 한자로 표기하면 砂旨浦가 되는데, 목포늪과 동일. 사지포늪은 가장 모래가 많이 있어서 모래늪벌이라 불렀단다. 마지막으로 쪽지벌은 4늪 중 가장 규모가 작아 붙여진 이름.
우포는 행정구역상 경남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 대지면 (동경 128°25′북위 35°33′), 직선거리로 주남 저수지와는 약 36㎞,
을숙도와는 약 70㎞ 정도 떨어져 있고 현재 '자연 생태계 보전지역 전체 면적은 약 8.54 ㎢(약 854 ㏊) 여름엔 약 2.314 ㎢(약 231.4 ㏊) 우포에 물이 가득찬 면적은 서울의 여의도공원과 그 크기가 비슷하다.
습지가 제공해 주는 경제적인 가치는 정확히 평가할 수 없지만, 수자원 확보로 어업 및 수산업의 산실로서 막대한 수입원이 된다. 그 외에 농업, 목재 생산, 이탄과 식물자원 에너지 자원, 야생동물 교통수단, 휴양 및 생태관광을 제공하는 높은 경제적 가치가 있다.
비야 가야의 도읍지였던 창녕군 일대 곳곳은 석기시대 고인돌 유물들. 선사시대에 화산으로 알려진 화왕산(火旺山)억새풀 태우기, 큰줄다리기 그곳 박물관엔 철 무기류와 은과 금으로 만든 말 장식과 여성용 장신구류 창녕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문화재로 돌정승, 20분 거리의 부곡 유황온천
창녕은 낙동강 하류와 '교통의 중심지' 대구를 잇는 중간지점 위치에 있다. 비야 가야가 이곳에 도읍지를 정한 이유는 우포 선착장이 있기 때문 아닐까? 지금은 이곳에 큰 배가 들어올 수 없지만, 옛날에는 가능했을런지도 모른다.
빙하가 뒤덮혀 있었던 6천년 전까지는 좁았을 낙동강과 토평천 강폭.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이후로는 넓어졌을 강폭. 빙하가 녹아 높아진 바닷물의 역류현상이 일어난 후로는 메꿔진 강바닥. 533년전 이조 이륙의 '유두류록'을 보면 지리산은 현재 날씨보다 추웠다.
2000년 대 이후로 한반도는 아열대성 기후에 돌입한 징후가 역력하다. 육,칠천년 전엔 빙하로 덮혔던 한반도! 그후 아시아의 몇 안되는 부동항.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부동항의 가치가 높았던 한반도.
항해술이 발달되면서 한반도는 역사 상에서 강대국의 침략이 빈번했다. 그 옛날 가야국은 부동항을 찾아서 한반도로 민족이동을 한 것은 아닐까?
경남 산청의 웅석봉은 이름 그대로 '곰바위산' 으로 불린다. 곰이 정상 북쪽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 실제로 그곳은 워낙 낭떠러지라 그 전설이 실감나게 들린다. 산청읍에서 본 웅석봉은 곰처럼 둔중하고 뚝심있게 솟아있다.
천왕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 줄기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에서 동쪽으로 용틀임. 왕등재, 깃대봉 거쳐 웅석봉에서 솟구친 후 경호강 웅석봉은 경호강 남북으로 또 다른 산괴를 이룬다.
남릉은 수양산(502m)을 거쳐 덕천강으로 뻗어간다. 정상 중심으로 뻗어 내린 곰골과 어천계곡, 청계계곡, 닥밭실골 이외에도 남릉에서 발원하는 백운동과 실골 경관이 뛰어나고 물이 맑기로 유명한 청정 계곡들이다.
웅석봉은 빼어난 산세를 지녔지만 비교적 한적한 편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리산 천왕봉으로 인파가 몰리는 탓. 산악인들은 웅석봉에도 지리산 못지않은 애착을 갖고 있다. 천왕봉을 조망할 전망대로서 웅석봉 만한 곳을 드물기 때문.
최근 웅석봉은 백두대간의 시작 또는 끝머리로 조명 받는다. 이제 웅석봉은 백두대간의 일부 구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웅석봉은 산청읍에서 접근해 지곡사에서 오르는 것이 일반적.
하지만 산청읍과 시천면을 잇는 59번 국도가 포장되자 변화 그동안 웅석봉은 험한 산세라 천왕봉보다 오르기 힘들던 산. 산청읍 쪽에서 접근할 경우 1,000m 고도차를 올라야 하는 탓. 하지만, 밤머리재(570m)에서 출발을 하면 운치있는 능선 길 천왕봉 동쪽 사면의 조망도 뛰어나 인기 있는 들머리로 각광.
웅석봉은 1983년 11월 23일 경남 산청군 군립공원으로 지정. 산청읍, 삼장면, 단성면에 걸쳐있는 지리산을 잘 볼 만한 위치.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으로 이어져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서 다시 한 번 치솟는 산이 웅석봉이다. 산청읍에서 웅석봉을 보면 마치 산청읍을 감싸고 있는 담장같다.
지리산을 막아선 듯 버티고 서서 산청읍을 휘감는 경호강 일대. 웅석봉 들머리는 산청읍 내리에 있는 지곡사에서부터 밤머리재 성심원, 홍계마을, 대한촌, 어천마을, 마근담 마을 등등 산행코스. 원점 회기 산행코스 : 지곡사 - 선녀탕 -웅석봉 정상 - 내리 저수지 .
웅석봉(熊石峰)은 산세가 급하고 곰을 닮아 일명 곰바위산. <한국 자연 보존협회>에서 선정한 ‘한국 명수 1백선’ 선녀탕. 웅석봉의 선녀탕은 두 계곡이 만나는 지점의 바로 위에 있다. 선녀탕은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어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좋다.
선녀탕에서 두 갈래 중 오른쪽 계곡은 경사가 완만한 코스 왼쪽은 경사가 급해 곰이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의 고향. 정상은 소나무 숲과 헬기장 주변 초원지대에 곰을 그린 표시판. 산행 소요시간은 <3시간 거리, 휴식 1시간, 하산 2시간>, 총 6 시간.
웅석봉은 독립된 산이면서도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진 33km 코스. 가락국의 전설이 깃든 깃대봉과 왕등재가 주는 신비가 예사롭지 않다. 구형왕릉 뒤 왕산과 더불어 왕등재 늪지대에 아직 옛 성터가 남아있고 가락국과 관련된 이런 저런 전설들이 주민들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다.
현재 웅석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일대는 야생동물의 천국. 야생 멧돼지가 자주 출현하는 곳이고 반달곰을 방사한 지역이다. 그 일대를 고구마 형태의 타원으로 둘러싼 산줄기가 천연 울타리.
옛부터 곰의 자생지라 지리산 일대를 통털어 가장 인적 드문 곳. 웅석봉은 <지리산 태극종주 코스>의 첫 들머리인 곳이기도 하다.
경호강
진주에서 승용차로 30~40분 거리에 있는 경호강. 옛부터 경호강은 지리산에 인접한 최고의 휴양지. 유두류록을 보면 영남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
경남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산청읍, 신안면, 단성면) 예전 심거나루터 언저리인 어천계곡 입구 시멘트 다리 적벽산 아래 단성교까지가 래프팅 장소로 알려져 있다.
굽이치는 물결따라 요동치는 배타고 모험을 즐기는 곳. 산청(山淸)의 경호강은 '거울같이 맑은 호수'라는 의미. 경호강 주변은 산청 선비들의 멋드러진 풍류가 가득하다.
강이 산을 맞아 굽이를 도는 곳마다 선비들이 남긴 싯귀 골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와 정자.
경호강 본류와 엄천강이 만나는 곳의 지명이 강정(江亭). 경호강과 양천강이 만나 합류하는 지점에 엄혜산이 있다. 옛 선비들이 뱃놀이를 하며 시 한수 읊었던 유서깊은 곳.
적벽산과 엄혜산이 달빛에 어울려 일렁이는 경호강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뱃놀이 즐기던 어느 원님이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다 관인을 강물에 빠뜨려 파직당했다는 일화
경호강은 크게 네 곳의 물줄기가 세 번에 걸쳐서 만난다. 본류는 함양군에 속하는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화림동계곡 안의면를 지나 수동면에서 병곡면 백운산에서 시작해 상림 함양읍을 거쳐온 물줄기가 만나는 첫번째 합수지점이 있고,
두번째 만남은 지리산 자락에서 시작해 용유담과 자혜나루, 주상나루를 지나 온 엄천강이 산청군 생초에서 경호강 유입. 세번째는 산청군 생비량면에서 흘러온 양천강과의 만남이다.
경호강은 본류와 엄천강이 만나는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부터 산청읍을 거쳐 양천강과 만나는 신안 단성면 진주에 있는 진양호까지의 80리 물길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본류와 엄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강정은 너른 백사장 낮에는 경호강의 맑은 물에 세상사에 찌든 피로를 씻어내고 밤에는 은빛비늘 눈부신 민물고기를 낚아 달빛 아래 매운탕
달빛 벗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여름철 피서객이 많은 휴양지. 함양에서 시작된 경호강은 강정에서부터 산청의 물과 만난다. 생초면의 계남천, 초곡천, 월곡천, 생초천과 금서면의 대포천, 특리천, 금서천 물이 경호강으로 흘러들며 더 큰 강을 이룬다.
산청읍에 이르러서는 송경천 물을 받아 들이면서 천장암(千丈岩) 낭떠러지가 물길을 가로막고 섰다. 경호강이 산청 읍내로 치닫지 못하게 하는 수문장역
용소 선녀탕 청춘홀 칠선폭포 합수(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 볼만. 초암릉 국골과 칠선계곡 사이 암릉은 바위봉우리 연속으로 위험하다.
추성동은 칠선계곡과 동떨어진 들머리. 의탄마을은 계곡따라 올라가는 들머리. ........................................................
이조시대 칠선계곡 들머리는 의탄마을. 그곳부터 출발해야 계곡미 진수를 감상.
...............1472년 유두류록 속의 의탄마을................ 1471년 함양 원님 김종직은 이듬해 음력 4월 지리산 등반. 제자 유호인 조위 한인효과 휴천계곡을 거쳐 의탄마을 당도
'서너 모퉁이 돌아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은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담쟁이 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은 아래 개울이 바위에 부딪치며 꺾여 힘찬 소리.
그야말로 동산(東山: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 성 싶다.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살면 바로 무릉도원이 될 듯.'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
김종직이 동행한 제자 유호인에게 심중을 드러낸 말이다.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은 칠선계곡 청정계류가 흐르는 명소. 김종직 일행은 의탄마을에 도착하기 앞서 용류담을 지나친다.
김종직 보다 17년 후 두류산에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
'못은 남에서 북으로 깊이 패어 아득하고 바윗돌이 기이 인간 세상에서 멀리 천리나 떠나온 듯 했다... 못가의 돌들 고기 비늘무늬를 새긴듯 반질반질하고 독처럼 움푹 파이고 솥모양을 닮아 보이기도 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경.' .....................................................................................
칠선계곡은 7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의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 7은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상징하며, 한반도 민족에겐 행운의 숫자. 불교 단체에서 중요한 행사는 대부분 7의 배수 날자로 정하고 있다.
함양경찰서 소속의 마천 산악구조대의 구조활동 주무대. 칠선계곡 들머리 의탄, 한신계곡과 백무동 들머리 강청리, 벽소령 들머리 삼정리를 활동 지역으로 산악 인명구조를 한다.
구조대가 가장 바쁜 때는 방학과 휴가철이 맞물리는 7, 8월. 해마다 이 때면 하루 24시간 비상근무로 숨돌릴 틈조차 없다. 구조대 창설 초기에 비해 요즘은 산악사고가 감소 추세에 있다.
94년 1월 칠선계곡 동계훈련 특전사 군인 척추부상 사고 95년 한신계곡의 급류에 갇힌 등산객 3명을 밤새도록 구조. 칠선계곡 일대는 구조대가 상주할 만큼 조난사고 다발지역.
지난 7년간 자연 휴식년제로 묶여있던 곳. 2006년부터 단계적으로 개방하고 있는 코스. 지방 지자단체와 환경단체 등이 첨예하게 대립.
이곳은 야생곰, 노루,삵 등 야생 포유류의 서식처. 다양한 우리나라의 고산 희귀 동식물 씨앗 저장고.
'공단 지리산 관리사무소 고병준 소장.'
2006년 이후 자연 휴식년제는 그대로 연장 적용. 추성리 매표소에서 선녀탕까지 3km 출입구간 허용. 선녀탕,옥녀탕,비선담 안전시설 및 보완공사 완료.
추성리 주민들은 칠선계곡 개방을 요구.
"주말에 등산객 한 명도 없을 때도 있고, 주로 벽송사 관광객들이 주 수입원이지요. 하루 속히 천왕봉까지 등산로를 개방했으면.."
그러나, 반달가슴곰 관리팀의 한상훈 팀장
“치밭목에 방사한 연해주산 반달곰 6 마리중 일부가 내년쯤 칠선계곡으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 하여, 칠선계곡 상류를 개방하면 안될 것이라 주장."
........ 두지터. .........
수직에 가까운 골짜기가 깊고도 깊은 칠선계곡. 국내 3대 계곡 중 하나인 함양 마천의 칠선계곡.
칠선계곡에서는 마지막 산마을..두지터
2.5km 아래에 있는 추성동마을 느티나무 점방. 두지터 주민에게 온 우편물은 그곳까지만 배달. 우편물은 먼저 본 사람이 주민들에게 배달한다.
1970년 대에 전기가 들어왔고 1990년 대에 전화가 가설됐지만 아직까지 도로는 뚫리지 않은 때문.
하여, 두지터 5가구 주민 운송수단은 지계. 자동차 대신 집집마다 두 세개 지계가 있다. 원래, 두지터는 이헌상 남부군 사령부가 있던 곳.
백무동의 인민군 사령부 벽송사 인민군 야전병원 그 중간에 위치한 두지터.
김일성이 격려차 보낸 해당화. 그 씨앗이 퍼져 해당화 자생지. 아무튼 해당화가 지천에 널린 곳.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두지터.'
가락국 식량창고인 뒤주가 있었다는 전설의 고향. 1970년대 산림녹화사업으로 이곳에 지어진 집 한채 부엌 2개 딸린 주택에 이주시켰던 지리산 화전민들.
현재, 두지터 주민은 5가구에 10명.
................두지농장............ 1980년대 은퇴 후 내려온 여균호씨, 1만 2천평 농원에는 1천구루 호두나무.
1/3은 야생동물들의 먹이감이고 1/3은 오가는 등산객들의 몫이라 1/3은 그의 몫은 오육십 만(?)원.
호두 수확이 한창이던 2006년 9월 중순에 현장답사 겸 여균호씨 집에서 하룻밤 민박. 순박한 부부의 넉넉한 인심이.. 느껴지는 곳.
이젠 하룻밤 묶어가도 후회없을 규모의 사설 산장. 멧돼지가 농사지은 수확물을 다 먹어치울까봐 걱정. 한겨울엔 아무리 감춰 놓아도 밤새 다 찾아 먹는단다.
등에서 지계를 내려놓을 틈이 없는 여균호씨. 그 바쁜 틈에도 찐고구마 접시를 내미는 부인. .................................................
.................허정 씨................ 연하천 옛 산장지기 허정씨 칠순부부. 산나물 반찬이 별미인 두지터.. 민박집 약초꾼 문상희씨 따라서 이곳에 정착했다. ...............................................
................약초꾼 문상희 씨................ 추운 겨울에는 산바람이 매우 거센 곳. 장작때는 불편 탓에 외지에서 겨울내기. 지난 겨울에는 문씨 혼자 마을을 지켰다.
올해는 두어 명이 더 남아 외롭지 않다단다. 문씨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다인(茶人)이었다. 진주 경상대 시절(1981년) 진주에 다람 전통찻집
1983년 화개 다우당 찻집에서 차와 다구를 생산. 지금 화개골 찻집이 80곳이지만 당시 세곳에 불과. 차주걱과 다포(찌꺼기를 거르는 체)는 그가 처음 개발.
서울 인사동 다구들도 거의 대부분 그의 작품. 198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다구 전시회도 개최.
전국에 차와 관련된 지명(897개)을 조사 그의 대학 졸업 논문 ‘한국 야생차의 연구' 한동안 다도를 즐기는 이들의 지침서로 통했다.
지리산과 차에 미쳐 대학을 9년만에 졸업한 그. 한때 쌍계사에서 출가해 내원암에서 3년간 스님. 그가 두지터에 들어와 정착한 시기는 1993년 경.
중국차가 몰려오자 미련없이 화개골을 떠난 그. 칠선계곡 두지터에서 약초차를 만들고 싶은 마음 이 일대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약초를 캤던 곳.
“칠선계곡엔 한국의 약초들이 거의 다 있어요. 헛깨나무가 지천인 이곳 약초의 약성은 강한 편.”
흙으로 지은 담배막 ‘흙내’라는 나무간판 그곳에서 차 연구에만 몰두해왔던 문상희 씨.
다구 깎는 조각칼도 버리고 심마니가 된 그. 그렇게 꼬박 4년 연구 끝에 개발한 차..‘초향’
둥굴레, 오가피, 두충, 산작약, 당귀, 산다래, 구지뽕, 의성초, 오미자, 솔잎, 감잎, 칡순 등 봄에 나는 100가지 안팎 약초 새순으로 만든 차.
양이 많지 않고 찾는 이가 많아 봄이면 만들자마자 동이 난단다. 요즘‘백초정’이란 효소를 연구.
“약초찾는 사람 중에는 사형선고 환자가 많아요. 아무리 귀한 약초라도 돈 욕심을 낸 적은 없어요. 귀한 약초는 연이 닿아야 하고 주인이 따로 있는 법.”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제작팀들도 그를 많이 찾는다. 몇해 전 지리산 반달곰을 카메라에 담은 MBC 제작팀 ‘반달곰은 살아있다’ 제작팀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문씨는 요즘 금낭화, 개불알꽃 등 야생화를 재배. 산은 사람에게 쉽사리 품을 열지 않는다고 하지만 유독 자신은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말하는 문상희씨.
그가 받은만큼 산을 지키고 싶다는 문상희씨. - 2004.04.29.~8시 / KBS1 피플세상 속으로 - ....................................................
......... 선녀탕. .........
추성리에서 등산로를 따라서 곧장 가면 계곡에서 처음 만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에 용소가는 길을 표기했지만 안전을 고려, 등산로와 동떨어져 있다.
계곡 따라 5백m를 오르면 만나는 용소 산신제 때 산 돼지를 집어 넣는 곳이다. 그곳에서 2 km 더 오르면 두지동(두지터).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 하여, 붙여진 지명 두지동은 화전민들의 마을이다. 현재 담배건조장과 농막만 남은 등산객 휴게소
담배 건조장은 찻집으로 변해있고 창암능선 넘으면 백무동으로 가는 길.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아래에서 들릴듯 말듯 전망 좋은 쉼터 추성망. 여기서부터는 험난한 계곡 길의 연속. 추성동에서 4km 지점, 선녀탕부터 험로.
선녀탕 전설에는 칠선계곡의 유래가 담겨있다. 7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 돌과 모래로 메워져 선녀 목욕장소로는 초라한듯.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7선녀가 목욕할만한 곳. 선녀탕 바로 위에 선녀들이 몸씻기 적당한 너럭바위. 옥녀탕에서 샤워처럼 너럭바위로 쏟아지는 두 줄기 폭포.
그 앞 너럭바위는 선녀가 샤워하기 알맞는 장소. 선녀탕에서는 선 바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곳. 선바위와 두 줄기 폭포 사이에 있는 너럭바위 공간.
선녀들이 몸을 숨기고 목욕하기에 적당한 장소. 그 아래 선녀탕은 선녀들이 뛰어놀기에 안성맞춤. 아득한 옛날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오늘날 등산로.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는 선녀탕 목욕처.
7선녀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듯한 선녀탕 인근 등산로. 그렇다면, 이곳이 선녀탕이라 불리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일단, 선녀탕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 이곳 풍경을 음미해보자
.................. 칠선계곡 선녀탕의 전설............................ 7 선녀가 목욕 중 잃어버렸던 옷을 되찾아 준... 사향 노루. 그 옷을 훔쳐 바위 틈 나무가지에 숨기고 몰래 훔쳐 본... 곰. (오늘날 등산로로 이용되는 그곳 나무숲 사이의 너덜바위 지대)
목욕을 마친 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옷을 찾아 헤멘 선녀들.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 있던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었다. 곰이 바위 틈 나무가지에 옷을 숨긴 곳이 우연히 잠든 노루의 뿔.
그 후 선녀들은 사향 노루를 그곳에서 살게 했고 곰은 국골로 추방.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메는 모습을 숲속에 숨어 엉큼하게 엿본 죄값. 선녀에게 옷을 돌려 준 착한 노루는 칠선계곡에서 행복하게 살았단다. .................................................................................................
옥녀폭포와 여신폭포에서 약수터까지 흘러내린 물을 음수, 선관이 변한 독주폭포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을 양수라 하여 그 양수와 음수의 조화로 <오색약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칠선계곡에 7명 선녀가 살았다는 유래를 뒷받침 해주는 선녀탕. 선녀탕 위에는 수십 평 소와 매끈한 암반으로 둘러싸인 '옥녀탕' 자연의 빚은 '오줌싸개 소녀'인듯 곧게 쏟아져 내리는 힘찬 물줄기.
'그 물줄기가 흘러내려 이루어진 옥녀탕.'
남자 여럿이 희희낙낙 목욕을 해도 좋을 만한 옥녀탕. 가장자리는 얕지만 그 가운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 마치, 여성의 성기를 연상하게 하는 풍경이 담겨진 옥녀탕.'
옥녀탕 위로 선녀들이 하늘을 날아다닐듯한 비경의 극치 '비선담'. 선녀가 하늘로 날아서 올라갈 것만 같은 곳이라 붙여진 이름 같다.
비선담에서 한시간 거리인 <칠선폭포>는 칠선계곡을 대표할 비경. 비선담 지나 목기막터가 있는 산죽밭 지나 오른편 계곡 건너 바위굴. 과거 목기를 만들던 인부들이 지내던 곳으로 알려졌기에... '청춘 홀'.
..........................'청춘홀 위치............................. 선녀탕 0.5km 전 지점에 좌측 <탐방로 아님>표지판. 그 옆 희미한 길이 있고 옛날 마을터 같은 초암 능선 단풍나무 드리워진 옥녀탕 우측으로 가면 일반 등산로.
청춘홀 가려면 비선담 통과후 좌측 계곡을 건너야 한다. 두지터를 지날 경우에 다리를 통해 계곡을 두 번 건넌다. 칠선폭포 못미쳐 계곡 우측으로 우뚝 솟아오른 검은 바위.
' 흰색 페인트 글씨 - '청춘홀. 지리산악회.' 일반 등산로와 동떨어져 찾기 어려운 곳이다. ................................................................
암반 위로 흐르다가 물이 고이면,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이고 물줄기가 떨어지면, 칠선폭포, 대륙폭포, 마폭 이름이 붙었지만 이름 없는 소와 폭포가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칠선계곡.
마폭 - 천왕봉 거리는 1.6km이고 표고차 700m 급경사 오르막. 오르막 곳곳마다 주목, 야생화, 고사목, 제석봉, 중봉이 보인다. 이 계곡 곳곳의 지명을 보면, 개척시기가 짧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선녀탕을 제외하고 나면, 전설이 뒤따르지 않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지명에 유래나 전설이 없는 곳은 곧 역사적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하여,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보고서'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김경렬 씨 개척 보고서. ............................
칠선계곡 등산로는 1964년 11월 하순과 12월 초순에 개척되었다. 부산 산악인, 학계인사들인 김경렬, 성산, 곽수웅 등 17명 개척단. 이곳 담과 폭포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굳어져 있다.
6개 중 높이 10m 쯤 폭포는 부산일보의 이름을 본 따 부일폭포. 그 다음 폭포는 대륙 산악회의 이름을 본 따 '대륙폭포'라고 명명. 자일산악회, 동아대 산악회 단체 명칭을 본 따 자일폭포, 동아폭포.
개척단은 목기 제작자들이 토벌한 세아름 300 년생 고목도 발견. 해발 1,500m 원시림에서 함지박이 쌓여 있는 목기 제작소도 발견.
스무개 정도 함지박이 초벌갈이가 된 채 돌담 안에 포개져 있을 뿐, 아무 기구도 눈에 띄지 않았고 목기꾼들은 연장을 챙겨 도망친 모양. 개척단이 들어갔을 때, 마을주민들은 이미 그곳을 자유롭게 왕래했다.
청춘홀부터는 점차 경사가 심하고 길바닥은 험악한 돌밭의 연속이다.
돌밭길을 지나 칠선폭포를 거쳐 10분 후 왼쪽 계곡을 건너면 중봉과 하봉에서 흘러온 개울이 칠선계곡 본류가 만나는 합수골. 폭포가 무려 3 개나 몰려 있어 폭포수골인 합수골은 도벌꾼들 초막.
이곳은 산장설립을 추진했다가 반대에 부딪쳐 흐지부지된 곳. 칠선계곡은 자연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칠선계곡은 험하고 깊어 다른 곳보다 등산로 개척이 늦어졌다.
'칠선계곡은 등산로 개척 이전부터 도피자들이 은둔처.'
일제시대엔 징병, 징용을 피한 젊은이와 지식인 수백명이 은신. 남한유격대 총책임자로 최후의 빨치산으로 불린 남도부(南道富). 본명 '하 준수' 그는 일제의 만행에 맞서 민족 자주운동을 펼쳤지만, 해방 후 월북하여 강동 정치학원 교관을 거쳐 빨치산 수괴가 되었다.
칠선계곡은 세석고원을 지켰던 우천 허만수씨 사라진 곳. 그는 평소늘 흔적없이 칠선계곡으로 사라지겠다고 말했다. 법계교 옆 추모비에도 평소 그가 한 말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륙폭포, 3층 폭포 이정표를 지나면 평범한 길이 계속되다가 마지막으로 통천문 쪽의 중봉, 천왕봉 계곡이 합쳐지는 마 폭포. 마폭에서 계곡과 동떨어진 급경사 등산로는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마폭포 - 천왕봉 3㎞는 거의 일직선형의 산길에 표고차 500m 60∼70 도 바위 틈새로 길이 이어뎠고 원시림 고산식물의 연속. 침엽수림엔 주목도 많고 음습한 토양 탓에 강렬한 고산식물 냄새. 쓰러진 고목이 길을 가로막고, 산사태 난 곳이 많아 가슴 아팠다.
이 길은 서두르지 말고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안배할 필요가 있다. 64년 개척단은 이곳에서 일행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비에 봉착했다, 정글 숲, 한 길 넘는 눈속을 피해 때론 산사태 지역을 올라가야 했다. 표고 1,700m 쯤 올랐을 때 바람이 일고, 사태난 절벽에서 낙석(落石)
천왕봉 바로 밑인 것 같은데, 작은 봉우리들이 쭈볏쭈볏 앞을 막았다. 눈비로 산사태가 일어난 곳이 여러군데라 목표를 제석봉으로 바꿨다.
눈과 낙엽, 구상나무 군락, 잡목 숲에서 베낭이 걸리고 옷이 찢어졌다. 잠깐 멈취 쉬면 등산화가 꽁꽁 얼어붙어 부득이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이 가까와진 것 같아 한숨 놓으려 했지만 능선은 보이지도 않았다. 1, 2 팀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무전기에 아무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중 략...............................
1964년 개척 전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던., 칠선계곡. 기업형 도벌꾼들 이전부터 칠선계곡은 은둔자의 천국.
...........최초의 빨치산.,남도부................... 부산 산악인들이 '칠선계곡 학술조사대'를 조직 칠선계곡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가 1964년이다. 그들은 학술조사 보다는 등산로 개척이 주 목적
소와 폭포에 산악회 이름을 본따 명명한 것이 본보기 이 학술조사대는 칠선계곡 중턱에서 목기제작소를 발견 수령 200~300년 거목들로 만들어진 함지박들을 보고 경악.
선발대로 학술조사대보다 먼저 칠선계곡을 찾은 성산 님 기업형 도벌꾼들 '목마로(木馬路)' '도벌댐'을 보고 충격 칠선계곡은 전란후 이미 도벌꾼들의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부산 산악인 학술조사대의 첫발'이란 말이 민망할 정도. 그런데 도벌꾼 훨씬 전에부터 산막 치고 살았던 은둔자들 학병이나 징병을 피해 도망친 이들이 군데군데 산 흔적들.
그런 사람들이 이미 수백명에 이르렀던 칠선계곡.
사실 그들에게는 훤히 뚫린 산길이 필요하지 않았을듯. 산길이 훤히 열려 있었다면 마음 놓고 숨지도 못했을듯. 어쨌든 칠선계곡은 오랫동안 지리산 최대 은신처였던 곳.
일제 징병을 피해 이곳에 숨은 남도부(본명 하준수) 1921년 경남 함양 태생인 그는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 중 징집을 피해 칠선계곡에 은둔
사향 효과는 얼음 위에 대나무 잎 잠자리를 깔 정도. 신라 귀부인이 사향을 복용한 시기는 792년 이전인듯. 당시 신라에 합병된 해상왕국 가락국으로부터 유래된듯.
'곰에 얽힌 구혼'과 '곰에 대한 경계심'이 담긴 전설. 칠선계곡은 파고들수록 전인 미답의 신비를 품은 계곡.
국골
함양 마천면 추성리 마을 뒤로 오르면 국골 들머리. 약 2시간 오르면, 물길을 둘로 가르는 산자락 험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등산로이지만 아직도 거친 편.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오르기까지 약 2시간 남짓.
가끔 움직이는 돌이 있어 낙석 위험이 도사린 코스 적요함이 감도는 숲속 오솔길 지나 국골 4거리 팻말 지리산 동부능선 분기점 이곳까지 약 4시간 30분 거리.
국골4거리에서 진행방향 왼쪽, 암봉이 두류능선 깃점. 두류능선 코스는 생각보다 거리가 먼 짭짤한 암릉 코스, 이곳 동쪽 산사면으로 허공달골(다리골), 어름터, 향운대
..................향운대..................... 智異山 十臺(지리산 10대) 수도처 중 한 곳. 뒤로는 높은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는 샘터. 절벽 틈 사이에는 수도자가 기거할 만한 공간. ...............................................
국골에서 쑥밭재 거쳐 동부능선으로, 오른쪽 오름길은 하봉을 거쳐 주능선. 국골 4거리에서 곧장 오르는 암봉은 말봉 그 능선 중간에 평평한 봉우리가 1432(두류)봉
요즘 그곳 이름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누군가가 말봉에 두류봉이란 팻말을 꽂았기 때문. 하지만, 그 지역 사람 대부분은 말봉이라고 부른다.
동부능선 왕등재 야영 후, 쑥밭재 지나 국골4거리 멀리 반야봉의 낙조와 함께 펼쳐지는‘말봉의 낙조’ 그 뒤로 오른쪽 하늘금을 이루고 있는 달뜨기 능선,
정면 방향으로 왕산과 필봉산의 뚜렷한 모습. 말봉 옆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얀 독바위 동부능선 새봉, 좌 왕산 우 필봉산. 달뜨기능선
말봉에서 7~8분 내려서면 오른쪽 산사면에 향운대 숲향 짙은 숲속 길, 암릉을 번갈아가면 1432(두류)봉 함양 방향의 첩첩 능선과 중봉부터 천왕봉까지 마루금
1432봉 부드러운 숲길따라 무덤 2기를 지나 집수정 그곳 외딴 집 마당을 거쳐 내려가면 성안마을 임도 잣나무,밤나무,호도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자락 사이
추성리-국골들머리-국골4거리 -말봉-1432봉-성안마을-추성리
지리산 계곡과 봉우리들 중 '나라 國' 자 쓰는 유일한 지명. 이곳 지명에 나라 국(國)을 써야 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가락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애환이 깃든 지리산의 숨은 계곡.
가락국은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김해평야에 터전 잡았던 나라. 기원전 108년에 한(漢)에게 멸망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후예들. 가락국은 국가 형성 이전부터 '고구려'와는 구혼이 많은 듯 보인다. 가락국은 역사 상 기록을 보면, 친 신라의 노선을 걸었던 나라이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의 뿌리는 고조선이고 고조선은 단군환웅의 자손. 가락국은 기원 전 108년에 한(漢)에 멸망 당한 위만조선 후예라지만 가락국 조상은 양자강 남쪽 인도 또는 아랍에 가까운 고대중국 같다.
가락국은 단군신화와는 전혀 다른 김수로왕 탄생 신화의 나라. 가락국은 곰을 천시하고 호랑이를 토템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 '하여, 칠선계곡의 선녀탕에서 곰이 국골로 쫓겨난 것은 아닐까?'
'국골은 칠선계곡에서 쫓겨난 곰이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가락국의 10대 '마지막 구형 왕이 추성산성을 축조했다는 곳. 국골에서 신라 침공에 대비 군마를 이끌고 훈련 시켰다는 구전. 국골은 가락국 구형왕의 마지막 피난처였다는 설에서 유래된 지명.
'추성산성 축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국골.'
국골 험한 산세가 천연적인 산성 역활을 한 것은 아닐까? 군사들과 군마를 훈련시킨 장소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국골. 가락국이 군마를 훈련시켰다면 그 비밀 장소는 어느 곳일까?
혹시, 군사훈련장은 세석평전 아닐까?
국골과 추성산성은 가락국 구형왕의 방어 기지. 훗날 백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 하여, 신라 진골 귀족이 된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
전란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이끌고 신라에게 나라를 넘겨준 비운의 왕.
가락국 영토를 식읍으로 받은 구형왕 나라는 잃었지만 통치권은 유지했던듯
지리산 동부 권역인 산청군 일대에는 구형왕에 얽힌 지명과 유적지들이 많다.
추성 산성터 주변의 두지 터(식량 저장고) ,얼음 터, 국골을 포함하여 왕등재 토성과 산청군 금서면 왕산 그곳에 있는 구형왕릉과 그 왕릉 입구에 있는 덕양전
덕양전은 구형왕 증손자 김유신 장군의 활터.
아울러, 이 일대는 2400 종류 약초 자생지이고 이조시대 명의 <유의태>가 의술을 폈던 고장이다. 하여, 옛날부터 한의학 의술이 발달되었던 곳이다..
'가락국의 유적들이 유난히 많은 국골 일대.'
개국 과정부터 베일에 가려진 역사가 정립되지 못한 가락국 구형 왕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신비감을 갖게 하는...국골. 구형 왕은 국골요새에 추성산성을 쌓아 신라와 항전했다는 <학설>.
왕등재에 토성을 쌓고 신라에 항전 하봉과 중봉 사이 천연적인 요세 국골. 지리산은 1,500 년전후에는 가락국 영역.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532년)에게 양왕 칭호를 받은 인물. 신라와의 전쟁에서 구형왕의 마지막 항전처는 국골이었던듯. 국골은 가락국 군사요충지이자, 선녀탕 전설 속에 등장하는 곳.
선녀들의 노여움을 샀던 칠선계곡의 곰. 칠선계곡에서 쫓겨나 살게 된 곳이 국골. 국골은 그렇게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골짜기.
칠선계곡 지류 국골은 중봉과 하봉 사이에 있다 칠선계곡은 추성동에서 오르는 3 계곡 중 가운데.
혹시 선녀탕은 구형왕 후궁들의 목욕처 아닐까?'
사향은 왕의 관심을 끌려는 후궁들이 몸에 지녔던 취음제. 사향 노루를 가까이 둔 선녀들은 '왕의 여자'로 짐작된다. 선녀탕은 인적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적 드문 위치.
'왕의 여자'들은 7선녀 처럼 목욕했던걸까?
왕의 여자들의 목욕을 훔쳐보면 국골로 추방했을 듯 싶다. 곰은 잘 참다가도 충동을 못 참는 젊은 병사를 뜻하는 듯. 선녀탕의 전설에서 사향노루는 왕과 후궁들의 측극을 의미.
하지만, 이러한 짐작들은 어디까지나 추측. 좀 더 가락국 역사 흔적을 찾아보기로 하자.
하봉 능선 깊숙하게 이어진 국골 등반객 인적이 거의 끊어진 골짜기. 국골은 깊은 골짜기에 원시림이 가득.
체력과 등반기술 및 장비가 필요한 곳. 국골은 천왕봉- 하봉 - 쑥밭재- 왕등재. - 유령계곡 또는 오봉리 하산 코스가 안전.
쑥밭재는 일제의 애국지사 석상용 선생 묘가 있는 곳. 아울러 이곳은 빨치산과 토벌군들이 저지른 양민학살 현장. 빨치산은 토벌군에 협조한 양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학살.
토벌군은 빨치산에 협조한 양민들을 죽인 후에 매장한 곳. 쑥밭제는 마지막 남부군 활동무대지만 전략상 마을을 폐쇠.
그곳 인근 국골은 지리산 동쪽 끝 북사면 외딴 곳이지만 전략적 요충지. 인적 드문 골짜기이며 지형 자체가 산성이고, 위급할 때 쑥밭제 탈출로. 구형왕이 신라에 맞서 석성을 쌓고 항전했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국골.
........... 상원사골. ............
지리산 최대의 골짜기 칠선골은 천왕봉의 버팀목 천왕봉의 웅장하고 위대함도 칠선골이 있어서일듯. 골이 깊은 만큼 숨겨진 역사의 깊이도 끝이 없는듯.
과연, 국골에 피난 도성은 존재했던걸까? 옛부터 국골 깊숙히 궁궐이 있었다는 구전. 추성리 주민들이 궁궐터라 믿고있는 상원사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 칠선골의 지류인 상원사골 대궐터. 그동안 난무해왔던 궁궐터 구전들.
“그 협소한 국골에 무슨 궁궐터..???”
전설 따라 그곳을 찾아간 '지리 99' 팀. 칠선골을 거느린 초암능선의 턱밑에 위치 상원사골 상부에, 기와 파편 및 축성 흔적들.
석성의 위치는 골의 물줄기가 끝나는 지점. 능선과 능선을 가로지르는 석성을 쌓아 위장. 계곡을 틀어 막아 밑에서 보면 물길이 없는 듯.
130m간격으로 똑같은 형태로 또 하나의 성을 축성 피난 도성의 축성 안에 궁궐터 지대를 상하로 구분. 편의 상 아랫 궁과 윗 궁으로 분류해서 이름 붙인다.
토기조각과 기와파편들이 있는 아랫 궁은 군주의 거처. 궁의 우측 지능에 주민들이 부르는 성문“남대문호매기” 수비군 초소 흔적으로 보이는 윗터는 수비군들의 막사터.
아랫 궁에서 윗터의 꼭지점 초암능선 날등까지는 200m, 초암능 등산로에서 내려다 보면 수목 사이로 윗터 축성 골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윗터 축성에 가려진 궁궐터.
윗 궁 아랫 궁을 합치면 궁궐 몇 채 들어설 면적 지리산 지형 특성상 너덜지대 여건이 아닌, 궁궐터 궁궐터 들머리 너덜지대는 궁궐터를 은폐하려는 흔적.
초암능선 1474 고지에서 분기한 지능이 남쪽 방어선 손에 잡힐 듯한 천왕봉, 내장을 다 드러낸듯한 중봉골, 합수골의 속살 등 발아래 다람쥐도 포착이 될 듯한 요새.
사람이 지나갈 길이 없는 요새지 남릉 주위 탐구팀이 고도 200m 낮추는데 무려 2시간 소비 그러나, 끝내 탈출을 시도해야 했을 정도로 요새
공중으로 날아들지 않고는 뚫고 들어갈 길은 없는 지형 초암능 날등을 따라 전략적인 특공대 진입이나 가능할듯. 옛부터 전해오는 구전이나 문헌상으로도 일치하는 궁궐터.
1485년 (성종 16년)에 편찬한 신동국여지승람의(권 31) 함양군 형승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 의탄소(義呑所)와 5~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
추성은 두류능선 들머리 성안마을에 있는 성터, 박회성은 대궐터의 성터를 말한 것으로 사료된다.
1719년 천왕봉을 등정한 <신명구>의 “유두류일록”내용 “천왕봉 수리에 고성이 있어 지금도 성터의 바위틈에서 투구나 창 도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대궐터에서 초암능선 날등만 넘으면 국골. 예전부터 국가가 있었다고 전해오는 국골. 군량미를 보관했던 뒤주가 있었다는 두지터.
추성리 산 93번지 두류능선 들머리 성안마을 삼국시대 축성한 것으로 알려진 추성산성 석축 두류능선 영감절터(향운대)좌측 골짜기 어영골
어영(御迎)은 임금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어영청은 신라시대 왕궁을 수비하는 기관
국골에서 군마를 훈련시킨 곳으로 알려진..말달릴평전. 두류능선상 말달릴평전 망루 역할을 했던 곳..망바위.
국골은 어느 시대 누구를 위한 대궐이었을까?
세간에서는 가야국 <구형왕>의 대궐터라고 전해온다. 그러나, 그 후손 김유신이 훗날 삼국통일 신라의 주역 함양은 6세기 초반 가야 연맹 중 소국인 <졸마국> 영역.
'국골은 베일 속 수수께끼를 간직한 '전설의 고향'.
............... 성내(城內)마을 ...............
칠선골과 국골 사이에 초암릉이라 부르는 긴 능선. 이 능선 중턱에 초암이란 암자와 상원사란 옛 대찰 일제 시대 지리산 북쪽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지름길
길은 비교적 뚜렷한 편이지만, 암릉 구간이 많은 편.
추성리 추성산장 안마당에서 좌측 산쪽으로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은 두류능선으로 오르는 길. 우측길로 10분 오르면 좌측에 국골 성안마을 가는 길.
초암릉 들머리는 추성선장 옆 칠선교를 지나 두지동 못 미쳐 좌측 용소 방향 이정표 갈림길. 좌우길 모두 염소농장 가는 길이고 앞에는 용소
'추성산장에서 하봉까지 4시간 30분 소요.'
추성리 산 93번지 두류능선 초입 성안마을. 국골에 옛 도성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마을. 우리나라 전략적 요충지마다 있는 성내마을.
우리나라 성내마을은 어떤 역활을 했을까? 운남면 성내마을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자.
...........운남면 성내마을............. 서해 무역 항로의 검문소가 있었던 마을 운남면 성내리 성안에 있어., 성내 마을
원래 성내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4km 떨어진 곳 현재는 16세대 25명이 거주하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이조시대에 만호(萬戶)가 거주한 규모의 성안 마을
마을 입구에 당산목 홰나무(괴목) 두 그루 그 앞에 옛 영광군수 홍대중의 '영세 불망비' 중국과의 교역 항로를 지키기 위한 성안 마을
중국과의 교역과 한양으로 곡물 수송을 할 때 '영산강 - 목포진 - 다경포진 - 임치진' 항로 중종 10년(1515년) 축성한 후 1895년 폐진(廢鎭)
그 규모는 둘레 980척, 높이 12척의 돌로 쌓은 성 중선 4척 별선 4척 병사479명이 배치된 규모의 성 동문과 서문, 객사, 동헌, 내아, 사령청, 장교청 등
현재 성안은 네 가구 민가가 들어서 있으며 무덤 2기 사슴을 기르는 축사 한동이 있고 나머지는 개간한 밭. 장보고의 완도 청해진의 말목보다도 더 굵고 큰 말목
고대 다경진성은 서해안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곳인듯. 패총, 돌도끼, 돌칼, 삼각형석도편 등이 발견되는 곳. .......................................................
마천 추성리는 옛부터 중국과 왜를 잇는 교역 운송로 국골 성내마을은 교역 운송로를 지키는 역활을 했던듯. 지금은 몇 가구 살지 않지만 옛날에는 큰 마을이었을듯.
왕 등 재
지리산 동쪽 끝자락에 왕등치(王登峙)에서 비롯된 지명. 즉, 왕이 올랐다고 하여 붙여진 고개마루의 우리말 이름. 천왕봉·중봉·하봉에서 웅석봉 사이 정남향에 있는 명당.
해발 1000m급 높이지만 산청과 함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욕의 역사를 안고 도도히 흐르는 경호강이 발 아래 있다. 천왕봉 용틀임 산세가 그대로 뻗어내린 지리산 동쪽 끝자락.
천왕봉과 동쪽 웅석봉 산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 멀리 아스라이 다가오는 다도해의 물결도 한눈에 담겨진다. 지리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가을의 억새 능선
왕등재는 구형왕이 토성을 쌓고 항전하다 왕산으로 쫓겨 최후 그 흔적으로 왕등재와 오른쪽 1030m 고지를 원형으로 싼 토성. 토성은 외성, 내성을 겹으로 쌓았는데 원래 높이는 약 3m일 듯.
'구형왕이 백제 침공을 막으려 쌓았다는 추성산성 터.'
추성산성을 축조하고 국골에서 병마를 훈련했다는 흔적들. 얼음터, 두지터, 토성과 성문, 왕등재 남쪽의 935m 깃대봉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이다.
왕등재를 궁으로 삼고 유평계곡을 요새로 삼은 듯 보인다. 쑥밭재를 사이에 두고 남북에 요새를 구축한 이유는 뭘까?
왕등재는 해발 1000m 지점에 신비하게도 대규모 늪지대 넓이 70m 가량에 2백여m 가량 길게 펼쳐진 왕등재의 늪. 사철 물기가 서려 나무는 한 그루도 자라지 못 하고 풀밭
'왕등재 일원은 늪지대를 중심으로 광활한 분지.'
마치 세석평전과 흡사하고 1030m 고지와 아울러 천연요새. 왕등재 가는 쉬운 길은 승용차로 유평계곡 도로로 외곡마을 그곳에서 걸어서 30분이면 충분히 왕등재에 도착할 수 있다.
왕등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1030m 고지를 거쳐 밤머리재 왼쪽으로 가면 외고개와 새재·쑥밭재를 따라 하봉·천왕봉.
지리산 동쪽 자락에는 유난히도 고개가 많다. 함양군 마천과 유평계곡을 잇는 쑥밭재·새재 금서와 유평을 잇는 외고개·왕등재·밤머리재 왕등재와 외고개는 아직도 그대로 수수한 모습
가락국에 관한 역사나 문화적으로 연구가치가 높은 곳. 옛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해 함양과 산청을 넘나들던 재. 지리산 태극종주 코스로 알려진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왕등재와 웅석봉을 연결하는 고개마루인 '밤머리재'도 유명하다.
2004 년 4월 27일 왕등재(935.8m) 중턱에 4가구가 사는 외곡 마을. 이곳은 대원사 계곡으로 유명한 경남 산청군 유평리 맨 꼭대기 마을. 반달곰이 외곡마을 염소 3 마리를 공격, 염소주인은 24 마리라고 주장.
환경부는 지리산에 반달곰을 올해부터 6 마리, 총 30 마리 방사할 계획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밀렵을 우려해 반달곰을 방사한 활동영역을 비밀 반달곰은 산딸기, 도토리, 밤 등의 나무열매와 연한 산나물, 풀잎을 먹고 개미, 벌 등의 벌레를 잡아 먹는데 토종벌 농가를 습격하는 경우도 있다.
2003년에는 벌꿀 등에 대한 피해 보상으로 1억원 보험금이 지급됐다. 2001년에 방사한 반달곰 4 중 3 마리는 화엄사 입구 우리에 갇혀 있다.
산청군은 포수를 동원해 농작물을 습격하는 왕등재 멧돼지를 붙잡는다. 2002년 29 마리, 2003년 36 마리, 2004년 23 마리를 포수들이 구제했다. 태극종주 코스 초입 왕등재에서는 산행 중 야생 멧돼지를 조심해야 한다.
왕등재 일대는 가야를 애워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경계선이 되는 위치. 가야의 유적지들 대부분은 교통의 중심지가 아니면, 해상무역의 중심지. 가야의 유적지는 전략적 목적보다 경제적인 효용가치가 높은 곳에 있다.
가야국의 발원지 김해에는 가야의 유물들이 많다. 부산 가야동도 가야의 옛터. 즉 가야국의 지명이다. 김해에서 부산으로 편입된 가락동 역시 가야의 옛터.
서부산. 인천. 우포늪. 교통의 중심지. 상권의 중심지. 가야 터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해상 무역항, 선착장들. 우선, 비야 가야의 도읍 창녕 우포늪 일대부터 살펴보자.
..............우포 늪의 공룡 발자국 및 창녕 일대.......................... 우포 늪은 1억 1천∼2천만년 전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 빗방울 무늬 화석과 곤충 화석 그리고 약 6,000 년 전에 빙하 흔적. 한반도 육지의 해안선, 낙동강,우포늪은 빙하가 녹아 흘러나간 흔적.
지구가 점점 따뜻해지자 육지의 빙하가 서서히 녹기 시작했던, 당시. 낙동강은 지금보다 좁았고, 화왕산에서 시작된 토평천 규모도 작았다. 빙하는 강바닥을 깎아내리고 그 깎인 돌멩이 모래가 바다로 흘러갔다. 빙하가 녹아 높아진 해수면 역류현상이 일어나자 강주변으로 둑이 형성. 그후 낙동강과 토평천 주변 둑이 오목한 그릇모양을 만들어 고인 우포 늪.
우포는 우포늪 목포늪 지포늪 쪽지벌 4개로 나누어진다. 그중 제일 큰 우포늪 소벌은 '물 마시는 소'라는 의미이다. 우포는 예전부터 소를 많이 키운 곳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소가 풀을 뜯고 물을 마시기 적당한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목포늪은 한자로 표기하면 木浦가 되는데, 원이름은 나무벌 여름엔 하천을 따라 땔감이 많이 떠내려 와 붙여진 지명이다.
사지포늪을 한자로 표기하면 砂旨浦가 되는데, 목포늪과 동일. 사지포늪은 가장 모래가 많이 있어서 모래늪벌이라 불렀단다. 마지막으로 쪽지벌은 4늪 중 가장 규모가 작아 붙여진 이름.
우포는 행정구역상 경남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 대지면 (동경 128°25′북위 35°33′), 직선거리로 주남 저수지와는 약 36㎞,
을숙도와는 약 70㎞ 정도 떨어져 있고 현재 '자연 생태계 보전지역 전체 면적은 약 8.54 ㎢(약 854 ㏊) 여름엔 약 2.314 ㎢(약 231.4 ㏊) 우포에 물이 가득찬 면적은 서울의 여의도공원과 그 크기가 비슷하다.
습지가 제공해 주는 경제적인 가치는 정확히 평가할 수 없지만, 수자원 확보로 어업 및 수산업의 산실로서 막대한 수입원이 된다. 그 외에 농업, 목재 생산, 이탄과 식물자원 에너지 자원, 야생동물 교통수단, 휴양 및 생태관광을 제공하는 높은 경제적 가치가 있다.
비야 가야의 도읍지였던 창녕군 일대 곳곳은 석기시대 고인돌 유물들. 선사시대에 화산으로 알려진 화왕산(火旺山)억새풀 태우기, 큰줄다리기 그곳 박물관엔 철 무기류와 은과 금으로 만든 말 장식과 여성용 장신구류 창녕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문화재로 돌정승, 20분 거리의 부곡 유황온천
창녕은 낙동강 하류와 '교통의 중심지' 대구를 잇는 중간지점 위치에 있다. 비야 가야가 이곳에 도읍지를 정한 이유는 우포 선착장이 있기 때문 아닐까? 지금은 이곳에 큰 배가 들어올 수 없지만, 옛날에는 가능했을런지도 모른다.
빙하가 뒤덮혀 있었던 6천년 전까지는 좁았을 낙동강과 토평천 강폭.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이후로는 넓어졌을 강폭. 빙하가 녹아 높아진 바닷물의 역류현상이 일어난 후로는 메꿔진 강바닥. 533년전 이조 이륙의 '유두류록'을 보면 지리산은 현재 날씨보다 추웠다.
2000년 대 이후로 한반도는 아열대성 기후에 돌입한 징후가 역력하다. 육,칠천년 전엔 빙하로 덮혔던 한반도! 그후 아시아의 몇 안되는 부동항.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부동항의 가치가 높았던 한반도.
항해술이 발달되면서 한반도는 역사 상에서 강대국의 침략이 빈번했다. 그 옛날 가야국은 부동항을 찾아서 한반도로 민족이동을 한 것은 아닐까?
경남 산청의 웅석봉은 이름 그대로 '곰바위산' 으로 불린다. 곰이 정상 북쪽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 실제로 그곳은 워낙 낭떠러지라 그 전설이 실감나게 들린다. 산청읍에서 본 웅석봉은 곰처럼 둔중하고 뚝심있게 솟아있다.
천왕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 줄기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에서 동쪽으로 용틀임. 왕등재, 깃대봉 거쳐 웅석봉에서 솟구친 후 경호강 웅석봉은 경호강 남북으로 또 다른 산괴를 이룬다.
남릉은 수양산(502m)을 거쳐 덕천강으로 뻗어간다. 정상 중심으로 뻗어 내린 곰골과 어천계곡, 청계계곡, 닥밭실골 이외에도 남릉에서 발원하는 백운동과 실골 경관이 뛰어나고 물이 맑기로 유명한 청정 계곡들이다.
웅석봉은 빼어난 산세를 지녔지만 비교적 한적한 편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리산 천왕봉으로 인파가 몰리는 탓. 산악인들은 웅석봉에도 지리산 못지않은 애착을 갖고 있다. 천왕봉을 조망할 전망대로서 웅석봉 만한 곳을 드물기 때문.
최근 웅석봉은 백두대간의 시작 또는 끝머리로 조명 받는다. 이제 웅석봉은 백두대간의 일부 구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웅석봉은 산청읍에서 접근해 지곡사에서 오르는 것이 일반적.
하지만 산청읍과 시천면을 잇는 59번 국도가 포장되자 변화 그동안 웅석봉은 험한 산세라 천왕봉보다 오르기 힘들던 산. 산청읍 쪽에서 접근할 경우 1,000m 고도차를 올라야 하는 탓. 하지만, 밤머리재(570m)에서 출발을 하면 운치있는 능선 길 천왕봉 동쪽 사면의 조망도 뛰어나 인기 있는 들머리로 각광.
웅석봉은 1983년 11월 23일 경남 산청군 군립공원으로 지정. 산청읍, 삼장면, 단성면에 걸쳐있는 지리산을 잘 볼 만한 위치.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으로 이어져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서 다시 한 번 치솟는 산이 웅석봉이다. 산청읍에서 웅석봉을 보면 마치 산청읍을 감싸고 있는 담장같다.
지리산을 막아선 듯 버티고 서서 산청읍을 휘감는 경호강 일대. 웅석봉 들머리는 산청읍 내리에 있는 지곡사에서부터 밤머리재 성심원, 홍계마을, 대한촌, 어천마을, 마근담 마을 등등 산행코스. 원점 회기 산행코스 : 지곡사 - 선녀탕 -웅석봉 정상 - 내리 저수지 .
웅석봉(熊石峰)은 산세가 급하고 곰을 닮아 일명 곰바위산. <한국 자연 보존협회>에서 선정한 ‘한국 명수 1백선’ 선녀탕. 웅석봉의 선녀탕은 두 계곡이 만나는 지점의 바로 위에 있다. 선녀탕은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어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좋다.
선녀탕에서 두 갈래 중 오른쪽 계곡은 경사가 완만한 코스 왼쪽은 경사가 급해 곰이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의 고향. 정상은 소나무 숲과 헬기장 주변 초원지대에 곰을 그린 표시판. 산행 소요시간은 <3시간 거리, 휴식 1시간, 하산 2시간>, 총 6 시간.
웅석봉은 독립된 산이면서도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진 33km 코스. 가락국의 전설이 깃든 깃대봉과 왕등재가 주는 신비가 예사롭지 않다. 구형왕릉 뒤 왕산과 더불어 왕등재 늪지대에 아직 옛 성터가 남아있고 가락국과 관련된 이런 저런 전설들이 주민들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다.
현재 웅석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일대는 야생동물의 천국. 야생 멧돼지가 자주 출현하는 곳이고 반달곰을 방사한 지역이다. 그 일대를 고구마 형태의 타원으로 둘러싼 산줄기가 천연 울타리.
옛부터 곰의 자생지라 지리산 일대를 통털어 가장 인적 드문 곳. 웅석봉은 <지리산 태극종주 코스>의 첫 들머리인 곳이기도 하다.
경호강
진주에서 승용차로 30~40분 거리에 있는 경호강. 옛부터 경호강은 지리산에 인접한 최고의 휴양지. 유두류록을 보면 영남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
경남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산청읍, 신안면, 단성면) 예전 심거나루터 언저리인 어천계곡 입구 시멘트 다리 적벽산 아래 단성교까지가 래프팅 장소로 알려져 있다.
굽이치는 물결따라 요동치는 배타고 모험을 즐기는 곳. 산청(山淸)의 경호강은 '거울같이 맑은 호수'라는 의미. 경호강 주변은 산청 선비들의 멋드러진 풍류가 가득하다.
강이 산을 맞아 굽이를 도는 곳마다 선비들이 남긴 싯귀 골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와 정자.
경호강 본류와 엄천강이 만나는 곳의 지명이 강정(江亭). 경호강과 양천강이 만나 합류하는 지점에 엄혜산이 있다. 옛 선비들이 뱃놀이를 하며 시 한수 읊었던 유서깊은 곳.
적벽산과 엄혜산이 달빛에 어울려 일렁이는 경호강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뱃놀이 즐기던 어느 원님이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다 관인을 강물에 빠뜨려 파직당했다는 일화
경호강은 크게 네 곳의 물줄기가 세 번에 걸쳐서 만난다. 본류는 함양군에 속하는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화림동계곡 안의면를 지나 수동면에서 병곡면 백운산에서 시작해 상림 함양읍을 거쳐온 물줄기가 만나는 첫번째 합수지점이 있고,
두번째 만남은 지리산 자락에서 시작해 용유담과 자혜나루, 주상나루를 지나 온 엄천강이 산청군 생초에서 경호강 유입. 세번째는 산청군 생비량면에서 흘러온 양천강과의 만남이다.
경호강은 본류와 엄천강이 만나는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부터 산청읍을 거쳐 양천강과 만나는 신안 단성면 진주에 있는 진양호까지의 80리 물길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본류와 엄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강정은 너른 백사장 낮에는 경호강의 맑은 물에 세상사에 찌든 피로를 씻어내고 밤에는 은빛비늘 눈부신 민물고기를 낚아 달빛 아래 매운탕
달빛 벗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여름철 피서객이 많은 휴양지. 함양에서 시작된 경호강은 강정에서부터 산청의 물과 만난다. 생초면의 계남천, 초곡천, 월곡천, 생초천과 금서면의 대포천, 특리천, 금서천 물이 경호강으로 흘러들며 더 큰 강을 이룬다.
산청읍에 이르러서는 송경천 물을 받아 들이면서 천장암(千丈岩) 낭떠러지가 물길을 가로막고 섰다. 경호강이 산청 읍내로 치닫지 못하게 하는 수문장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