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비극적인 4·3사건이 왜 일어났을까?
제주도는 일제 강점기부터 항일 운동을 전개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이 많이 퍼진 곳이었다.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1946년 8월 인민위원회 사이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가 행정구역상 도로 승격하면서 부터였다.
1947년 3·1 기념 행사 후 남로당의 계획대로 불법 가두시위를 하던 중 기마경찰과 주민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군중들이 동요하자 경비경찰이 발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남로당제주도당은 주민들을 선동하여 투쟁과 파업에 적극 참여토록하여 관공서의 관리들까지 가담한 관민 총파업을 일으켰다.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세력을 색출, 체포·구금하고 조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불상사가 일어났다. 1948년 2월 26일 자유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에서만 총선거 결정이 내려졌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제주도당위원회 중심으로 단선·단정 반대 구국투쟁을 한다는 구실로 무장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다. 남로당인민유격대는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습격과 테러를 계속했으며 5·10총선거가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가로막는 선거라고 선전하여 투표를 거부하였는데 지하선거에는 적극 참여하여 통일정부라고 주장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하였다. 또 선거 방해로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두 군데에서는 국회의원도 선출하지 못하였다.
**사진설명: 보병 제2연대가 한라산 정상에 세운 남로당반란군 평정 기념비(1949. 07. 23)
** 1949년 7월 23일 한라산 백록담 서벽 정상에 2연대가 ‘평정기념비’를 세웠으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1958년에 찍힌 평정기념비 마지막 모습으로 이후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임종 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