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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고종 폐하
원제목은 “His Majesty the King” 로써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왕실은 폐가로 변해버린 상황이 글의 배경이다. 게일은 1895년 을미사변이 벌어진 다음날 아침 처음으로 고종을 알현해서 기록을 남겼고, 이후 1899년 영국왕실의 훈장을 증정하는 예식에서 두번째 알현했다. 이후 치욕의 20년을 견뎌내던 1919년에 무참하게 독살 당한 고종황제를 그렸다. 유영식 저, 착한목자 pp159-166
최근에 세계무대에서 왕들이 가장 깜짝 놀란 모습으로 황급(遑急)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제정 러시아의 차르 황제,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는 왕 중의 왕으로 여겨졌던 왕이었다. 어두컴컴한 감방과 암살자의 탄환 냄새가 아마 저간의 사정을 말해줄 것이다. 독일의 황제 카이저, 그는 지금 어떠한가? 그는 살아있지만 철창 뒤에서 발돋움을 하고서 밖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는 틀림없이 “이처럼 산송장 같은 상태로 사는 것보다 마치 차르가 소름끼치는 ‘다섯째 조례’ 에 따라 죽어 사라진 것처럼 차라리 나도 그렇게 죽어 버리기라도 했으면!" 하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페르디난드 칼 황제와 그 패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름값을 못하는 황제들이기 때문이다.
중국에도 또한 황제가 있었다. 강시(Kang-shi) 황제, 그보다 더 위대한 황제가 있었던가? 서양의 황제들처럼 동양의 황제들도 다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들의 후광(bones) 이나 탐내는 자들, 또는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개처럼 으르렁거리는 형편없는 녀석들만이 득실거리고 천손(天孫: Son of Heaven)을 숭배하는 그곳에 중국의 왕조가 서 있는 것이다. 왕들이 사라진 반면, 우리 앞에는 천년왕국이 이제 막 도래하려고 하고 있으니, 세상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차르(Tsar)도 아니고 카이저도 아닌, 동양에서 가장 쇠진(衰盡)한 왕 중의 하나인 전설적인 왕, 조선의 황제에 대한 회고담을 쓰려고 한다.
언젠가 나는 황제의 사촌 집을 방문했다. 그 집은 우리네 서구식 집과는 전혀 다른 아름답고 조용한 집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당대의 세력가들이었다. 우리는 마루방에 앉았다. 전왕의 사위가 내 옆에 앉았고, 고인이 된 황후의 시아버지와 그리고 학부협판(Minister of Education)이 함께 앉았다. 학부협판은 창문 쪽을 가리키면서 “선조대왕은 1552년에 이곳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의 아바마마 명종의 사당은 저쪽에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300년 뒤에 한 젊은이가 이 집에서 태어났고, 마찬가지로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왕실 직계의 대물림이 차단될 기미가 벌어졌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였고 총명했다. 그런데,황제를 세우기 위한 다른 파가 활발히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에 연이나 날리며 놀던 유약한 나이 어린 아이가 왕으로 간택(簡擇)을 받았는데, 그가 현재의 황제폐하시다.
그러면 그의 사촌은 어떻게 되나? 사촌이라고? 그는 죽어야만 한다. 왕위 계승의 일인자를 살려 두지는 않는다. 금가루와 독약을 넣은 잔이 이 아름다운 집으로 정중한 표현들과 더불어 전달되었다(1862년 이하전에게 사사가 내렸다 -역자 주). “이 잔을 드십시오, 그리고 황천으로 가십시오” 섭정 (攝政)이 권력을 잡았고 그의 어린 아들이 황제폐하로 책봉되었다. 섭정에게는 또한 뚱뚱하고 둔하게 생긴 큰아들이 있었다. 더 이상 사약을 내리지는 않을 것인가? 왜 그 큰형을 작은 동생의 뒤를 잇도록 살아남게 했는가? 그 동양적 방법을 그 누가 알수 있으랴!
이 황제의 왕국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은 왕국인가! 왕국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돌아가지 못한 불청객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가장 환영받지 못한 것은 ‘근대 문명’ 이라고 부르는 것을 끊임없이 불러들여오는 이른바 ‘20세기’ 라는 것이었다.
동양인(조선인)은 항상 선물에 감사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은 두 팔을 벌려 근대문명을 환영했다. 이 서양 문명이 호의적이지 않았는가?현명하지 못했는가? 기독교가 아니었는가? 무력적이지는 않았는가? 그렇다. 서양의 근대화는 조선에 언급한 사항들을, 그리고 더 이상의 것들을 전해 주지 않았는가!
서양의 근대문명은 조선에 들어올 때 호의적인 모습으로 접근해 왔다. 그러나 정말로 말하자면 서양 문명은 조선의 정부 • 사회 • 종교 •문학 • 음악 • 의식 (儀式) 등을 파괴하는, 마치 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코브라 뱀처럼 하나의 무서운 양귀(洋鬼)의 용자(勇者)로 들어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 위험스럽고 요괴(妖怪)한 것들이 들어왔다. 바로 공산주의, 허무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라고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조선의 문명은 사라져 버렸고, 오로지 수박 겉핥기 식의 장식에만 얼룩져서 혼란스럽기만 한 서양 문명이 조선사회에 들어선 시대에 살고 있다.
황제는 싫든 좋든 이 서양의 근대문명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고, 마침내는 그의 조선정부는 그 서양 문명으로 인하여 망해버렸다.
35년 전에 나는 처음으로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행렬 중이었다. 그때 그는 38세의 젊은이였고, 멋진 연여 (輦輿: 임금님이 타는 수레- 역자주)를 타고 있었는데, 50명의 가마꾼이 견장과 허리띠를 하고 그를 태워 행진했다. 그 모습은 정말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황제의 장군들과 그의 신하들, 내시들과 칼로 무장한 호위무사들이 모두 그의 주위를 호위하고 있었다. 왕의 모습은 당당했고 우러러 보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그날 그는 조상들의 영혼을 모시는 사당(祠堂) 중 한 사당에 나가서 그의 불안한 통치권에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며 그의 조상의 영령 앞에 큰 예를 올렸다.
황제는 재위 동안 많은 불행한 경험들을 겪었다. 어느 흉측한 날 밤이었다. 악마의 한 떼거리가 여닫이 창문을 통하여 들어와서, 황제의 신하들을 마구 살육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서구학문을 배웠고 세상을 개혁하기 위하여 왔다는 자들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이 든 어떤 인력거꾼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막 궁궐에 들어서는 순간에, 나는 병조판서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병사가 그가 가지고 있던 총대를 부러뜨리더니 그 날카로운 총 끝을 병조판서가 숨을 헐떡거리며 쉬고 있는 목구멍 속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그날 밤은 악마의 밤이었습니다” 서양의 무기와 20세기의 발아(發芽)는 동시적 유입이었다.
황제의 거처 주변에서 종종 들리는 불길한 잡음들로 인해 나는 괴로움을 느꼈다. 아직 20세기가 되기 전인 1895년 10월 어느 조용한 밤중에 나는 찌르는 듯한 총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 자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 아침에 나와 내 동료는 궁궐 문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황후가 죽었다, 살해를 당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황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전혀 본 적이 없었다.황후는 용감하고 강인했다. 그녀는 극동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고 이른바 개혁, 서양, 그리고 모든 종류의 혁신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했다.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으로 구성된 암살자들은 왕실의 담을 뛰어넘어 입궁하였다. 황후의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일본 공사는 자객들을 방조하였다. 러시아의 자객이 러시아의 황후 차리나(Tsarina)를 총으로 쏘아 죽인 것처럼, 자객들은 황후를 찾아내 번쩍거리는 칼로 그녀를 죽였다. 흔적을 덮기 위해 자객들은 황후의 시신을 불살랐고 그녀의 피를 닦아내어 현장을 깨끗하게 했다.
그날 밤 나는 미국인 다이 장군과 함께 궁궐에서 지내며 참담한 심정의 황제를 알현하게 된 것이다. 황제는 그의 아들을 한 쪽에 세우고 그의 형을 다른 한 쪽에 세운 채 서 있었다. 황제의 형은 황제에게 반대하여 암살자들과 한 패가 되었다. 문간방(outer room)에는 황제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의 수하에 있는 7명의 하청자객(下請刺客: seven devils)들이 있었다. 이 얼마나 처참한가! 누가 이 황제를 도와줄 수 있을까? 그의 부인인 황후는 죽었다. 그의 아들은 백치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황제의 형은 황제에겐 악마의 대변자였고 그의 아버지는 공공연하게 나타난 원수였다. 슬픔에 빠진 황제를 위로하기 위해 노장군(다이 장군 -역자 주)이 입궐하게 된 것이다.
동양에서는 특히 왕들을 쳐다볼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모습, 특별히 눈물로 훔 백 젖어 있는 그의 눈에 서려 있는 비통함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모든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가장했다. 즉 모든 것이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복수의 적개심이 그의 영혼을 꽉 채워 터져 나오려고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른바 병조판서인 권씨는 한때 황제의 수하에 있었지만, 지금은 마치 뇌신 토르의 망치 (Thor’s hammer) 도 별 소용이 없는 것처럼 그는 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사건은 지나갔다. 황후는 죽었고, 궁궐은 매미가 울어대는 소리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로 가득찼다. 지금 궁궐의 이 적막함을 방해할 왕들은 없다.
내가 두 번째로 황제를 알현한 것은 1899년이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그에게 훈장을 보냈다. 그 훈장은 인도제국의 훈장으로 그에게 수여될 예정이었다. 영국대사는 나에게 함께 가서 훈장 수여식을 도와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날 오후에 있을 훈장 수여식을 위한 야회복을 차려 입었다. 나이 많은 빅토리아 여왕이 서명한 메시지를 내가 읽으며 통역을 했고 모든 신하들이 참석했다. ‘황제께옵서 어떻게 훈장 등을 착용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동양에서는 외국인이 황제의 목에 훈장을 걸어준다는 것이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왕에게 전연 가까이 갈 수 없다. 영국대사는 “황제가 스스로 착용하도록 하시오. 그가 편한 방법대로 그것을 착용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 후 황제와 세자는 잠깐 다른 방으로 나가더니, 그 훈장의 금 코끼리는 적당한 위치에 매달고, 장식 띠는 적당한 각도로 기울어뜨린 채, 드디어 다시 등장했다.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말을 했다. 황제는 얼마나 그가 여왕의 호의에 감사하고 있는지 여왕에게 전해줄 것을 영국대사에 부탁하였다.
다음날 우리는 황제가 그 훈장을 보다 절친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예를 들어 러시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은 그것을 보고 오히려 비웃었고 콧방귀를 뀌었다고 한다. 황제가 “이 훈장이 무엇이오? 그러면 다른 황제들도 그 훈장을 받았나요?’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황제들이라구요? 이건 하급 신하들, 자작들, 남작들 또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받는 정도의 훈장이랍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황제는 그 훈장을 벽장 속에 던져 버리고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말을 나는 전해 들었다.
1900년에 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동행하는 한 일본인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안녕하시오, 일본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말할 때까지, 그는 나에게 완전한 조선말로 이야기했다.
“아닙니다. 저의 이름은 권영준(KwunYung-jun)입니다. 전 병조판서 입니다. 전에 우리는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제 독자 여러분도 기억할 것이다. 권씨는 황후를 살해한 암살자들을 도운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1896년에 러시아가 세력을 잡자 일본으로 도망을 갔어야만 했었다. 보라, 지금 그는 죽음의 길로 직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제물포에서 내렸다. 그가 나에게 한 작별 인사말은 “날 위해 기도해 주시오” (Nae wi-haya chook-soo hassio)였다. 그는 “예수는 세상을 위해 죽었고, 시저는 그의 나라를 위해 죽었소.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 조국을 위하여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荒天
다음날 밤에 왕은 그를 쇠사슬과 착고로 결박했다. 끔찍한 보복이 권씨에게 가해졌다. 배심원이 참석하는 재판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땅바닥에는 사형틀(ring)이 놓여 있었고, 그의 목에는 밧줄이 감겼고 저쪽에 있는 교수형 집행인이 줄을 힘껏 당겼다. 권씨는 죽었고 왕은 이제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황천(荒天)에서 황후와 그의 조상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얼굴을 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황제의 일생에서 좀더 밝은 때도 있었다. 1895년에 조선을 방문했던 프러시아의 헨리 왕자는… 세관장과 나와 함께 “도이칠란트 전함” 에서 점심을 먹을 때, 우리에게 황제를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왕과 함께 식사를 해야 했다. 왕세자는 테이블 건너편에 앉았고, 통역을 하는 민씨가 사이에 앉았다. 주방에서 뭔가 일이 발생하여, 민씨가 나가봐야 했다. 황제와 나는 통역도 없이 무엇을 할까 망설이고 앉아있다가, 나는 황제에게 미소를 지었고 황제도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계속 웃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매우 당황한 가운데, 나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때 나는 어렸을 적에 담배 연기로 둥그런 담배 연기 고리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담배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둥그런 고리와 고리들은 공중으로 떠올라갔다. 나는 계속하여 연기 고리를 만들어 띄워 올렸다. 황제는 세자를 팔꿈치로 슬쩍 찌르면서 그 광경을 가리켰다. 그의 놀라움에 찬 얼굴에는 경이로운 웃음이 가득했다. 황제는 세자에게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는가?’라고 말했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고 나는 추측한다. 이 담배 연기 고리는 그날의 위기를 모면하게 한 공신이었다고 헨리 왕자는 덧붙여 말했다. 세관장은 “그것 보세요. 왕족이 서로 서로 즐겁게 지내는 방법을! 이라고 말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황제를 알현한 것은 가장 불행스러운 경우였다. 황제는, 정부업무와 관계해서 관세청이라고 하는 것을 두었는데 당시 관세청은 아일랜드 사람인 브라운(J. McLeavy Brown) 경이 총책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황제도 이 아일랜드인 기사 (knight of the shamrock)보다 공물을 거두는 데 있어서 더 독재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절대권을 가지고 관세업무를 관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잘 알았고 관세업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묘한 생각이 황제에게 떠올랐다. 황제는 괴이하게도, 유령 • 도깨비 • 악마 • 마녀 같은 유령들의 잠재력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때 어떤 무당이 지금 수천 마리의 악귀가 궁궐을 위협하기 위해 모여든다고 황제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 그 악귀를 막기 위하여 황제는 관세청 사무소 자리에 있는 사당에서 매일 제사를 드리기를 원했다. 그 무당은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황제는 그 무당의 말을 듣고 덜덜 떨면서, 악귀에게 제사를 드릴 때 관세청 건물 때문에 사당에 쬐이는 햇볕이 가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래서 브라운에게 다음과 같은 하명(下命)이 전달되었다. “짐을 싸고 나가시오. 황제께서 이 땅을 당장 원하십니다.”
브라운은 황제의 하명에 순응하지 않고 그 황제의 전령에게 문을 가리키며 “나가시오”라고 냉대했다. 황제의 전령은 브라운의 말을 거절했다. 브라운 경은 잠시 동안 가만히 있다가 아일랜드의 원칙과 법률을 발동시켰다는 말을 들었다(브라운이 아일랜드의 법률을 적용하여 전령에게 무력적인 힘을 발동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 역자 주). 그러자 일시적으로 거친 반발이 일어났고 일시적인 동양식의 동요가 일어나기도 했다(상호간 약간 옥신각신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 역자 주). 그러자 전령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황제는 정부군에게 출령(出令)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브라운과 그의 일행에게 24시간 내에 건물을 비우라는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다. 한편 영국정부에 긴급 메시지가 전달되었고 브루스 제독은 이미 제물포에 있는 4천명의 병력에 완전 무장준비를 갖추도록 신속하게 지시했으며, 전속력으로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외국인에게 충성을 다했던 통역사는 어디론가 피신해서 종적을 감추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는 도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입궐하였다. 내가 궁에 들어갔을 때 황제께서 는 테이블 뒤에 서 계셨고 왕세자는 그의 옆에 있었으며 신하들이 둘러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아일랜드인들을 대변하는 영국공사는 “우리 정부는 그 건물을 비우는 데 1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건물을 준비해야 하는 등등” 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는 “짐은 당장 비워주기를 원하오”라고 말했다. 그 영국공사는 또 다시 “우리 정부는 건물을 비우는 데 오늘로부터 1년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하자, 황제는 “당신들의 정부라고? 당신들의 정부는 무엇인가? 기도를 하는 건가?당면한 문제는 두 가지다. 짐은 그 건물을 지금 당장 비워주기를 원한다” 다시금 영국공사는 반복되는 답변을 했다. “우리 정부는 1년을 요구합니다” 이 무례한 대답은 황제의 입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목에 걸고 있던 염주 하나를 힘껏 씹자, 그의 입 한 쪽에서 부서진 조각들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나서 다른 한 쪽으로 그것을 씹었다. 결국 황제는 그 어이 없는 외국인의 태도를 보고 그의 요구를 포기하였다.
나는 황제께서 많은 자극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매우 걱정을 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그날 석양이 질 무렵에 황제의 신하로부터 다음과 같은 쪽지가 전달되었다. “요청에 따라 협정이 체결됐음. 모두 잘 됐음” 이것이 내가 황제를 뵌 마지막 알현이었다(1899). 비록 그에게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스쳐간 수많은 공포와 비극적인 사건들 때문에, 마치 쫓기는 자와 같은 공포의 모습이 그에게서 보이기는 했어도 나는 그의 외모에서 왕실의 위엄을 여전히 볼 수가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거의 20년 뒤 황제께서는 붕어(崩御)하셨다. 이 20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을까? 그는 일본에 의해 연금 상태로 지내왔다. 전적으로 그의 실책 때문이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그의 마음을 극도로 괴롭혔다. 그의 아들은 일본 여자와 결혼을 해야만 했다.
치가 떨리는 일이로다! 예견했던 대로 황제가 죽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누군들 정확히 알 수 있을까마는,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시계가 그 시간을 알릴 때, 황제에게는 그가 마셔야 할 한 개의 질산(窒酸; aqua fortis) 병인가, 아니면 그런 류의 약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때가1919년이었다.
은총의 해가 아닌 치욕의 해, 그때가 온 것이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궁궐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셨다. 황제는 이것저것을 유심히 보았고 내시들이 모여 있는 신하들의 숙소와 궁녀들의 숙소를 돌아보셨다. 땅을 내려다보시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시기도 했다. 이런 모든 일을 마치시고 황제는 손에 들었던 약물을 마시고는 숨을 끊었다.
다람쥐와 각종 새들, 그리고 매미들이 지저귀며 그의 영혼을 황천으로 보내 드리는 동대문 밖 조용한 숲속 왕릉에 그는 영면(永眠)하고 계신다.
이싼 3세
(이싼은 게일이 본명을 감추고자 할 때 쓰던 익명이었다. 그의 외가쪽 성씨라고도 함.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