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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8회 '400년 전의 편지, 조선판, 사랑과 영혼' (1998.12.12.)
8부: 400년 전의 편지. 조선판, 사랑과 영혼
400년 전의 편지. 조선판, 사랑과 영혼
방송일: 19981212 조회수 : 9804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제 8 회) 98년 12월 12일(토) 방송
[조선판, 사랑과영혼 - 400년 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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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안동공사현장 FS 12 [흘리고-]
봉분 13 지난 4월 14일,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서는
주인모를 무덤 한기의 이장작업이
있었다.
외관뚜껑들어내는 사람들 8 [흘리고-]
나무결 7 갓 베어 놓은 듯,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외관은
나뭇결이 생생히 살아 있었다.
포크레인 관 옮긴다 4 때문에 최근 조성된 무덤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했다.
야간작업-관벗겨내고 5 그러나 야간까지 이어진 유물 수습
과정에서 무덤은 수백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부채모습 4 출토 유물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옷가지 들어낸다 9 [흘리고-]
종이 4 유물을 절반쯤 수습했을 무렵,
발굴팀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시신 누운모습-가슴으로 33 [사이-]
망자의 가슴을 덮고 있던 한지...
[돌리려고 하면 좀 빨리 시작해야 함-]
이것을 조심스레 돌리자...
거기, 한글 편지가 있었다.
"원이 아버지께, 아내가"
편지는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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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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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사대부집 마루]
# 마루에 붓, 먹등과 함께 종이 펼쳐져 놓여있다.
# MC 걸어나오면서.... MC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 편지내용 음미하듯 사이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이 편지.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412년전에 씌여진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남편을 보내며,
그의 아내가 썼던 이 마지막 편지는
400년의 세월동안 어두운 무덤속에서 망자와
함께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지난 4월,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별 이야기가
다 그렇습니다만은... 수백년의 세월동안
남편의 무덤을 지켜온 편지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역사 스페셜, 오늘 이 시간은
400년전 씌여진 이 한 장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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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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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수습하고 13 [잠시 보고-]
6~편지 돌려놓고- 편지는 마치 시신을 지키기라도 하듯
망자의 가슴께를 덮고 있었다.
망자와 가장 가까이 놓여있어, 글쓴이와
망자의 관계를 짐작케 했다.
워니 아바님께 3 워니 아버지께....
PAN 9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한글로 씌여진 이 편지는,
죽은 남편에게 그 아내가 꿈속에서라도
타이트 SK 6 다시보길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지 씌여진다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이 내편지 보시고 자세히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28~ 남편이 죽은 후,
장례전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씌여진
이 편지에는, 지아비에 대한 아내의
그리움이 사무치게 드러나고 있다.
하고픈 말을 맺지 못한 채
종이가 다하자, 아내는 모서리를 돌려,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46~ 아무리 한들 내마음 같겠습니까?
옆으로 돌고 이런 슬픈일이 하늘아래 또
있겠습니까? 아무리 한들 내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1'03 모서리를 채우고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하자, 편지는 처음으로 돌아와 거꾸로
씌여지고 있다. [이하 현장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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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중 5 관에서는,
아내가 쓴 편지외에도
많은 유물들이 수습됐다.
짚신 발굴하고 14 그 가운데, 이들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짐작케 하는 물건이 있다.
바로 남편의 머리맡에서 나온 미투리였다
[이하 흘리고-]
유물정리하고 있다 4 유물을 꺼내는 과정에서는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던 물건,
신발뭉치 7 미투리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였다.
종이 벗겨낸다 9 [반지낀 손 흘리고-]
신들어서 종이 벗기고 36 겉을 싸고 있던 한지를,
찬찬히 벗겨내자...
미투리의 몸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0~ 손으로 벗기고 [이하 현장음]
어머 그러면 신발일수도 있어
~짜다가 관둔 거........
~사람머리는 아니겠지
종이 거의 벗겨냈다 16 이 특이한 미투리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신발 아닙니까?' 살리고-
나눈다 조선시대에는,
관속에 신발을 따로 넣는 경우가
드물었던데다, 재료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던 것이다. [이하 현장음]
머리카락 타이트 10 [잠시 보고-]
검사 결과,
미투리의 재료는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확인되었다.
신발FS 10 왜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았던
것인지... 그 까닭을 밝혀줄 유일한
단서는 신발을 싸고 있던 한지였다.
교수 종이 정리한다 10 상당부분이 훼손된 상태였지만,
거기서 아내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교수INT INT---------------------------------------
상태가 나빠서 파편들만 남아있는데 여기보면 재미있는 글이 나온다.
내머리 버혀.... 머리카락을 잘라서 신을 삼았다. 끝에 보면 이신 신어
보지... 이말은 자기남편이 신을 신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이런
애절한 내용을 쓴 것이다. 부인이 쓴 글인데요, 지금은 많이 읽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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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Z.I 11 [흘리고-]
신발 FS 5 이 내용을 통해,
우리는 남편이 병환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머리카락 타이트 11 아내는 병석에 누운 남편이
이 신을 신을 만큼 건강해지길 바라며
이 신을 만들었던 것이다.
종이에 묻은 머리카락 3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글씨 쓴 종이 7 남편이 죽자, 그녀는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었던 것이다.
신발F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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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MC 병석에 누운 남편과
그 남편의 쾌유를 빌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정성스레 미투리를 삼았던 아내....
이토록 서로를 사랑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사이두고-]
우리는 편지를 통해 몇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먼저 편지속에서 아내는 남편을 일러
원이 아버지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뤄
보아 둘 사이에는 원이라는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구절, '뱃속의 자식을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이 내용을
통해 당시 아내는 또한명의 자녀를 수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전붑니다.
사실 이 무덤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석마저 유실된 채
모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4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무덤속의 남편과
편지속의 아내, 만약 편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 둘간의 이야기는 영원히 과거속으로
사라졌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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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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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7 이장 작업이 시작되기전까지,
무덤의 주인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발굴,옷가지 접어내고 14 그러나 관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무덤의 주인이 고성이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망자에 대한 더 정확한 신원을
밝혀줄 단서, 그것은 무덤속의
유물들이었다.
편지 7 죽은이를 추모하는 글귀속의
31이라는 숫자, 이것이 망자의 나이를
뜻하는 건 아닐까?
치마펼쳐들고 6 그리고, 유물들중 치마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은, 젊은 여자일거라는
추측이 일었다.
장옷 수습중- 9 [현장음]
여자 아냐?~ 글쎄 말예요
4~작업하는 여자들 치마뿐 아니라,
여성용 장옷들도 잇따라 수습됐다.
여자장옷 널어놨다 3 [이하 현장음-]
옷천천히 벗겨내고 9 [잠시 보다가-]
그러나 수의가 드러나면서,
무덤의 주인공은 남자임이 명백해졌다.
옷 수습하고 22 [발흘리고-]
4~얼굴근처의 천 들어내고 망자의 육신을 감싸고 있던 수의는
수백년의 세월동안 신체의 일부라도 된듯
쉽사리 분리되지 않았다. [이하 흘리고-]
얼굴/8 목부분 12 [수염 보이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무덤의 주인.
그는 하얀피부에 수염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온전한 모습이었다
누여진 시신 10 미이라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된 그는,
과연 누구일까?
편지 정리중이다 4 유물중엔, 아내의 편지외에도
두편의 시와 열한통의 서신이 발견됐다.
초서뭉치들 14 이 서신들 가운데 아홉통은,
망자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것으로
모두 죽기 일년전에 씌여진 것들이다.
편지FS 6 초서로 흘려쓴 이 편지들에서
우리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씨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8 [현장음]
자응태기서
아들 응태에게 부치는 편지다
편지 펼쳐놓고 설명중 7 이로써, 무덤의 주인은
이름이 응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편지FS 11 또한, '삼십 일년동안 아우와 함께 했다'는
형의 글속에서, 우리가 찾는 인물이
서른 한 살에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은행잎 떨어진다 20 지금까지 확인한 단서에 의하면,
무덤의 주인은 형이 있는
고성이씨 가문의 남자라는 사실.
그리고 응태라는 이름을 가졌고,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이다.
고성이씨 족보 14 고성이씨 가문의 족보에서,
무덤의 주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여기엔 조상들의 내력은 물론
딸들의 이름까지 꼼꼼히 기록돼 있었다.
때문에 이응태란 이름을 찾는 것은
책장 넘기고 9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응태 이름 보이고-]
요신의 아들 응태 11 군자감 참봉을 지낸 이요신의
둘째아들..... 그의 이름이 응태였다
[잠시 사이-]
이/응/태,
과연 그가 무덤속의 주인일까?
종손INT-----------------------------------
- 할배 편지를 보면, 확실한 증거가 된다
다른 응태는 없나?
- 그건 왜 아니냐면 대수가 많지 않아서 똑같은 이름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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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뒤적이고-응태 6 우리가 찾던 무덤속의 주인,
그가 바로 이응태였다.
몽태~ 16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도시를 썼던 형은 이몽태였다.
군수를 지낸 형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묘미상으로 기록된 이응태는,
족보만으론 무덤의 위치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봉분(너무 많이 나온다) 5 수백년동안
가문에서조차 잊혀졌던 그가
응태 9 지금 우리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하 현장음-]
시신 옷추스려 입히고 21 명종 11년 1556년에 태어난 그는
안동에서도 손꼽히는 무반 가문의
자제였다.
[이어서 계속-]
8~일어나고 발굴당시 그의 키는 180cm.
무척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전인 1586년,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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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MC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곁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니,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앞에서 이응태의 처는,
남편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말로써 그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30대 전후였을 이 여인에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남편의 죽음은,
세상이 다 무너져내리는 듯한
큰 시련이었을 겁니다.
이응태의 젊은 아내, 그녀는 누구였을까요?
[잠시 사이-]
안타깝게도 고성 이씨 가문의 족보에는
이응태의 처, 원이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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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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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뒤적이고- 5 일반적인 경우,
사대부 가문의 족보에는
아내의 이름이 올라있기 마련이다.
형몽태의 처에 대한 기록 11 이응태의 형,
이몽태에 관한 기록에서도
부인의 이름은 물론, 장인의 벼슬까지
명시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몽태-성회 7 그러나 이응태의 옆자리는 비어 있다.
이것은 젊은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보자기 풀어서 족보뒤지고 7 죽거나, 관직에 나가지 못한 경우
배우자가 기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응태도 이같은 경우에 해당됐던
것 같다.
응태 아들 성회 14 이응태에 관한 단서는
외아들 성회에 대한 기록뿐이었다.
족보에 따르면,
그는 진보 흥구로 옮겨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는 안동을 떠났던 것일까?
종손INT-----------------------------------
편지내용에는 아이가 뱃속에 하나 하나는 났다고 되어 있는데
이 어른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면 이 어른은 왜 흥구로 왜 갔나?
외가에 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응자 태자 할배의 처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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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구가는 길 8 이응태의 아들이 어머니를 따라
흥구로 간 거라면, 그곳에서 이응태 처에
관한 단서를 찾아 낼 수도 있을 터였다.
들판-마을어귀 14 [잠시 쉬고-]
만약 이응태 아내의 고향이 이곳이고,
남편이 죽은 후 본가에 돌아와 살았다면,
그녀는 이땅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었다.
산기슭 2 종손들과 함께 일대를 탐문한 결과,
종손들 걸어가고 8 ㅇㅇ면 기슭에서 고성 이씨 문중의 무덤
한기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말하고~무덤 SK 16 [현장음]
안와본지 몇 년된 모양이네
그렇지 몇 년 됐지....
[사람 빠지면-]
수소문 끝에... 이곳이 원이로 추정되는
이응태의 아들, 성회의 무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덤 손질한다 5 [나무 베는 것 잠시보고-]
그렇다면, 이응태 아내의 묘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들의 묘 가까이에
산기슭 4 묻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종손들 서 있고 18 [현장음]
모친묘를 찾을 수 있을까?
~어디있는지 모르니까
~요 밑에 묘가 하나 있어요
무덤찾아 내려가고 10 마을 주민이 안내한 곳엔,
그 흔적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초라한 무덤이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종손들 얼굴 19 고성이씨 가문과 연관이 있을거란
짐작뿐, 더 이상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었다. [이하 현장음]
9~카메라 보고 얘기한다 이 무덤이 긴지 아닌지도
우리도 모르지 세월이 하도흘러서...
무덤 TR 8 일생평 남편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이응태의 아내, 그녀는 지금 어디쯤에서
홀로 잠들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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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발굴장소FS 12 이응태의 묘가 발굴되기 보름전, 안동시
5~무덤 자리 정상동 기슭에서는 또 한기의 무덤 이장
작업이 있었다. 이응태의 친할머니인
일선 문씨의 무덤이었다
미이라로 발견된 문씨 16 [머리 나오면-]
미이라 상태로 발견된 일선문씨는
머리카락은 물론 피부까지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눈썹 타이트 6 [눈썹 흘리고/뭉그러진 얼굴 보이면-]
사람들의 관심은
할배 INT중- 5 온통 어떻게 미이라가 만들어진
것인지에 집중돼 있었다.
할머니 얼굴 7 이처럼 미이라가 출토되는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FS/향주머니 12 문선 이씨의 경우,
관을 둘러싸고 있는 회칠이 외부로부터의
습기를 차단했고 시신과 함께 넣어두었던
향주머니가 방부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덤 SK / 족보 17 그런데 우리가 문선 이씨의 무덤에
주목한 것은 이를 통해 이응태의 아내를
찾기 위한 실마리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당시 유력가문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며느리는 물론 사위의 이름까지 족보에
기록해 놓았다.
일선문씨 족보 13 일선 문씨 가문의 족보를 뒤진 결과,
4~족보 이응태의 할아버지인 계창의 이름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잠시 쉬고-]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몽태 기록 9 외손에 대한 기록은 아들은 물론,
손자인 몽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하 현장음]
국립도서관 13 그렇다면 이응태 역시,
처가 기록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족보들 가운데 어딘가엔 반드시
그의 이름이 적혀있을 터였다
[펼쳐진 족보책-]
유력성씨 14 당시 유력가문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족보에서 이응태를 찾기로 했다.
먼저 경상도 지역에서
권세를 누리던 유력 성씨를 분류한 후,
그들의 족보를 차례차례 뒤져 나갔다.
족보 찾는 PD 12 [잠시 보고-]
6~책들 놓여있고- 그러나.... 끈질긴 작업에도 불구하고
이응태의 이름은, 그 어느 가문의
족보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종손INT-----------------------------------
인조반정 일어나고 하면서 고성이 철성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살아서는 고성, 죽어서는 철성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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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SK 33 인조 2년 이응태의 조카벌인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성이씨 가문은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이전까지 철성이씨 성을 사용했던 이들이
고성으로 성을 바꾼 것이 바로 이때였다.
철성이씨를 사위로 둔 가문들 역시,
역적 집안의 성씨를 기록하는 것을
꺼렸고, 이 때문에 족보에서 누락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옷빨고 있다 15 이응태 아내의 이름이나 가문은 알 수
없었지만... 무덤에서 나온 의복들을 통해,
우리는 그녀의 모습은 추정해 볼 수 있다
총 쉰다섯점의 의복가운데
여성용은 네점, 바로 이것이 이응태
옷말리고- 4 아내가 입던 것들이었다. [이하 흘리고-]
이교수INT---------------------------------
전통상례는 수례가 포함되어 있어
망자의 가까운 사람들이 마음의 표시로 관에 물건을 넣는 것.
여기서 아들과 부인의 것 출토, 부인의 것 4점, 아이것 1점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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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수잰다 13 [교수 얼굴 보이면-]
의복의 길이와 품 등을 측정하면,
이 옷을 입었던 주인의 키와 체격을
확인할 수 있다.
컴퓨터 안의 복식들 4 [잠시 보고-]
이런 과정을 통해
아내의 옷 6 이응태의 아내는 160cm의 키에
보통 체격을 가진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원이 저고리 5 또한 아들 원이는 오륙세의
어린아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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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 ST에 복원된 가족들 412년전, 이응태 가족은
이같은 차림새를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 가족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 가족들 옆으로 다가서고
# 이응태를 가리키며- 남편인 이응태는
키 180cm의 건장한 체격입니다.
제 키가 ( )cm인데.... 옆에 서니까
왜소해 보이지 않습니까? [약간 헛웃음-]
# 원이 자리키며- 자, 그리고 여기 가운데 선 꼬마가
바로 편지에서 언급되었던 아들 원이구요,
# 아내- 그리고 그 옆이 이응태의 아내....
이름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160cm 정도의
단아한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아내를 한번 쳐다보고는 분위기 바꾸며-]
이응태의 아내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라는 말로써 부부간의 금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곱씹어보듯-] '어여삐 여기고 사랑한다' [갸우뚱-]
조금 이상하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는,
남녀 유별, 남녀 칠세부동석 등의 유교이념이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자유로운 남녀간의 애정표현은
점잖치 못한 일로 여겨, 양반이나 사대부 계층의
사람들은 터부시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조선시대에,
사대부 집 여인이 어떻게 이런 말을 편지에
쓸 수 있었을까 의문이 생기는데요,
어쩌면 이응태 부부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달랐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베일에 가려진, 이응태 부부의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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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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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 SK 14 [FS 흘리고-]
4~낙엽 떨어진다 안동 정상동에 있는 귀래정.
이응태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장성할때까지 줄곧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에 살았던 그는, 결혼후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된다.
대청마루 20 이것은, 아버지 이요신과 이응태 사이에
오고간 여러통의 편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만약 부모를 모셨거나 가까이서
살았다면 굳이 서신을 왕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었다.
편지 20 요신이 아들 응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식의 안부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자상함을 읽을 수 있다.
보고싶다는 말이 자주 등장해,
요신이 아들과 가까이서 살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방안으로 19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갔던 편지들.
15~DISS 편지
우리는 이것을 통해
부자간의 따뜻한 사랑뿐 아니라,
이응태 가족은 어떻게 살았으며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어떠했는지....
많은 단서들을 찾아낼 수 있다.
박물관장 이야기중 45 어떤 가족간의 얘기들...
예를 들면 생선을 보내는데 몸을 보호하도록
하라...
은순세마리 ....원아에게 주도록 하기를 바란다
원이이름이 아버지 편지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응태 모친관련 얘기 또는 그 당시 안동지역에 전염병이 돌았던
것 같다. 여기도 이응태의 어머니가 아팠다.
전염병이 심하니...
~25 역질이 끊어지면 오도록해라
농사일 끝났다고 무리해서 올 것 없다
이런 얘기가 적혀있어 전염병이 돌았던
그런 정황도 볼 수 있다.
매관련 이야기 8 또한 매에 대한 언급이 잦아,
이응태 집안은 매사냥을 즐기는
무인 집안임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지 FS 4 그런데 편지 가운데,
유독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편지 타이트 4 처가 식구에 관한 구절이다.
아버지는 물론, 동서의 편지에서도
장인 생일날 5 이응태에게 장인의 안부를 묻고 있다.
할아버지 편지 해독중 6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전문가 INT--------------------------------
이 사람이 장인을 모시고 거기서 살림을 하고 있고,
집에는 간혹 다녀가고 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처가살이...
옛날에 그런일이 많다. 처가살이를 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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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대문으로 들어가는 Cam 21 당시 이응태 가문은
안동에서도 몇손가락안에 드는
권세있는 집안이었다.
그런 사대부가의 자제가
결혼후 처가에 얹혀 살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시기, 사대부 가문의 일반적인
김성일 집 찾아간다 14 풍습이 어떠했는지, 다른 가문의 경우를
통해 알아보기로 했다.
이응태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학봉 김성일... 그의 종가는 현재 안동
금계리에 위치해 있다.
창고 들어가고 7 [창고 들어가는 것 잠시보고-]
종손 김시인씨의 도움으로,
학봉이 살았을 당시의 정황을 확인할만한
종손 책 뒤적인다 4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김성일의 한글편지 14 김성일이 아내에게 쓴 한글 편지중에서
처가살이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발견됐다. 장모를 뫼신다는 내용이다.
[잠시 쉬고 이어서-]
종손과 얘기나눈다 8 김성일은 죽을때까지 장모를 모셨고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이 집을 자신의
종가로 이어가게 된다.
C/G 11 결혼과 함께, 김성일은 자신의 거주지를
생가가 있는 천천리에서 처가가 있는
금계리로 영구히 옮겨온 것이다.
종가 외경 18 중종때 사간을 지낸 회재 이언적.
그 역시 생가는 양동이지만 현재
그의 종가는 처가가 있던 옥산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언적의 경우 자신은 물론,
그 아버지도 결혼과 함께 처가로 옮겨간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C/G 빈자리 14 회재의 아버지 이번은
결혼을 하면서 고향인 영일을 떠나
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리고 아들 이언적은 양동에서
옥산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종손 INT----------------------------------
회자할아버지의 아버님이 양동 월선 손씨에게 장가를 들면서
처가집으로 양동으로 와서 거기서 회자 할아버지가 외가에서
태어나.....옥산에는 나중에 들어왔고 / 장가를 드셨구요? /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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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외경 SK 20 이처럼 이응태가 살던 시대는
결혼과 동시에 처가살이를 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문의 대를 잇는
장남에게도 처가살이의 규정은 예외없이
적용됐던 것일까?
전문가INT---------------------------------
사림파 영수인 김종직의 조상대대로 살던 고향은 선산이다.
김종직의 아버지가 장남인데, 처가가 밀양이다. 고향에는 부모가
사는데 장자면서도 결혼과 동시에 처가살이, 그래서 처가가
그 아들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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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실록 5 왕조실록에는 이같은 풍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본국지속 11 우리나라의 풍습은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 사는 것이다. 즉 처가살이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인 것이다.
전문가INT---------------------------------
신라시대, 고려시대, 임란직후까지도 사위가 결혼하면 처가에
가서 생활한다. 기록에 의하면 처가에서 아기가 장대하면,
친가에 온다. 이건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가정생활이지
조선후기의 처가살이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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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서 마당보이고 29 이같은 관습에 비춰볼 때,
이응태 부부도 결혼 직후엔 처가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응태가 죽기 직전,
이들 부부는 본가로 돌아 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응태가 죽던 해,
아버지의 편지가 더 이상 씌여지지
않은 점으로 미뤄볼 때 이응태 부부는
부모 가까이서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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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집->편지
# 집 결혼 직후, 시댁에 들어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 수 있었다면...
아내가 남편에게 자유로이 애정표현을 하는
그런 부부관계도 가능했을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아내의 편지속에서
우리는 이응태 부부의 관계에 대한 또하나의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이-]
# 편지 바로 '자네'라는 말입니다.
'자내다려 내 닐오되...'
즉 당신에게 내가 말하기를,
또 여기,[손으로 가리키며-]
'자내 몬저 가시난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이처럼 이응태의 처는
남편을 가리켜 '자내'라는 말을 모두 열네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부부라 하더라도
아내가 남편을 자네라고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응태의 처는 남편에게 '자내'란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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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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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FS 8 편지에서 자내라는 말은, 분명히
이응태의 아내가 남편을 직접
호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황문안INT---------------------------------
2인칭 대명사로써 직접 호칭하는데 사용한 경우는 남편이
아내한테 사용한 경우는 있는데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자내라는 호칭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후에도 자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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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책 살피는 교수와 PD 13 이 시기 씌여진 글속에서, 아내가 남편을
직접 자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다만, '그사람'이라는 의미인 3인칭으로는
간혹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문가INT---------------------------------
순천김씨 출토간찰에는 아내가 남편을 3인칭으로 지칭한 예는
있어도 2인칭으로 지칭한 예는 없는데... 고성이씨 언간으로
아내가 남편을 지칭해 일컬을 때도 쓰일 수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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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니 아버님 12 이응태 아내의 편지로써
5~ 자내 우리는 임진왜란전까지의 사회에서는
부부가 모두 자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편지하소 7 그렇다면 이 시기의 부부는
어떤 관계였을까?
김시인INT---------------------------------
우리나라에 예부터 남존여비란 말 때문에 여자를 하대한 것으로
아는데, 이런 편지를 보면 부인한테 경어를 쓰거든 여자라고
하대를 한 흔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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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안INT---------------------------------
기본적으로 하소체는 대등하다고 봐야한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하소체로 쓰는 것은
대등하다고... 그렇게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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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마당으로 Cam 17 이응태 아내의 편지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남녀관계에 있어
대등한 사회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이다.
눈내리는 유성룡 종가외경 5 이시기 남녀 평등의 흔적은
서애 유성룡 가문의 재산 분배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문 4 당시, 대부분의 사대부 가문에서는
종손, 종이들고 걸어온다 7 재산을 분배할 때 그 내역을 낱낱이
적어 기록으로 남겨두도록 했다.
이것을 가리켜 분재기라고 한다.
분재기 펼치고 13 서애 유씨 가문의 분재기에 따르면,
유성룡과 그 형제들은 남녀에 상관없이
모두 공평하게 재산을 나눠가졌다.
이같은 평등 분배의 원칙은 유성룡
차녀...분재기 기록 자신의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줄때도
3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손으로 가리키며- 종손 INT----------------------------------
여기까지가 장자몫, 차녀몫.... 5남매의 양을 보면 글도
균등하게 돼 있는 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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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기 SK 10 남녀에 상관없이, 자녀의 이름은
출생순으로 기록됐고, 출가한 딸이라도
재산상속에선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종손과 대화--------------------------------
장남이 더 받지는 않아?
- 문중을 수호하는 위전답 뿐이지 그외에는 장남한테 별로 더
간게 없다. 똑같다.
여기 딸은 시집가?
- 시집 가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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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가문 분재기 4 이같은, 재산 평등 분배의 원칙은
유씨가문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용 SK 6 율곡 이이 가문의 분재기에서도
재산이 평등하게 분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전에 따른다 12 이이 가문의 분재기에서는
이같은 재산분배의 원칙은 대전에
따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하 현장음]
경국대전 겉표지 6 여기서 말하는 대전이란,
조선시대의 헌법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분재항목 SK 10 경국대전에서는, 재산분배에 대해
승중자, 중자녀 아들, 딸 구분없이 평분한다. 즉 공평하게
7~ 평분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무자녀 9 뿐만 아니라 시집온 여성이 자식이 없이 5~환본가 죽었을 경우, 그 여성의 재산은 다시
본가에 되돌려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펼쳐진 분재기들 SK 7 이 시기에 씌여진 분재기들을 통해,
우리는 상속의 권리에 있어 남녀가
차별받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승준INT---------------------------------
자식들간에 똑같이 재산을 나눠갖는 것은 우리고유의 전통으로
보여지고, 성리학이 우리사회, 개인, 집안까지 침투되는 17세기
부터 지금까지의 기간만 우리가 남녀차별의 상속제라고 할 수
있고, 우리 역사의 대부분은 재산상속에 남녀의 차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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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INT---------------------------------
여자가 재산을 상속받으면 결혼후에도 자기재산은 자기가
관리한다. 재산을 팔 경우, 수결이 있어야지만 팔 수 있어....
완벽하진 않지만 부부 별산제적인 형태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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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뒤지고 있다 9 이처럼, 여성들이 일정정도 경제적인
봉사록 찾고 있다 평등을 누리고 있었던 만큼, 집안에서의
책임과 의무 또한 남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책보는 PD와 종손 6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제사에 대한 의무다.
봉사록 겉표지 4 가문의 제사 내역을 기록해둔 봉사록.
가문별로 돌아간 흔적 13 여기에 따르면, 조선중기에는 집안의
제사를 아들, 딸이 구별없이 나누어 ]
맡거나 번갈아 지냈음을 알 수있다.
윤씨네 봉사기록 4 해남 윤씨 가문의 경우, 문중의 제사는
장남이나 특정 자녀가 도맡지 않고,
타이트 5 모든 자녀들이 매년 순서대로 돌아가며
담당 하고 있다.
C/G 해미댁, 남참봉 10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모의 제사에도
이 원칙은 적용되고 있다. 출가한 딸이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 기록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순구INT---------------------------------
조선초기의 경우엔 아들이 없다고 양자를 들이기보단 딸이
제사를 맡아서 지내고 계속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딸,
외손이 제사를 계속 담당하는 경우를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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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준INT---------------------------------
조선전기 이전엔 남녀간의 차별은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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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외경 20 이응태와 그의 아내가 살았던
시대는 법적, 제도적으로 남녀가 평등한
사회였다.
바로 이것이,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감정표현에 솔직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그러나 이응태가 죽은 후...
두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변하기 시작한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며,
점차 여성들은 권리를 빼앗긴 채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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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한 장의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이응태 부부의 삶, 그것은 우리에게 그들이
살았던 조선중기, 사대부 가문의 평범한
부부들의 생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1580년대 조선사회의 전혀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남녀의 관계를 엄격히 나누고,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의 일입니다.
재산의 균분상속, 그리고 제사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바탕으로, 이 시기의 여성들은 법적,
경제적으로 비교적 평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이두고-]
이처럼 평등한 남녀 관계를 바탕으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또
존중할 수 있었던 시대, 이것이 이응태 부부가
살았던 조선중기의 모습입니다.
[분위기 바꾸면서-]
400년 전,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 비록 육신은 떨어져 있을 지언정,
그들의 영혼만은 지난 세월동안에도 줄곧
함께였을 것입니다.
죽음도 갈라 놓을 수 없었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 긴 어둠의 세월속에서
이 사랑을 지켜온 것은, 아내가 써서 가슴에
고이 품어 주었던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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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편지 전문 읽고-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는 데려가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
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