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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역남, 북로의 분기점, 카슈가르[Kashgar, 喀什]- 하
* 대 실크로드상의 시장인 ‘앵이바자르’
* 유구한 역사의 소륵성(疏勒城)은 어디에?
* 다시 찾은 '모르스투파(莫爾佛塔, Mor Stu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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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실크로드상의 시장인 ‘앵이바자르’
물론 카슈가르의 진정한 기능은 예나 지금이나 실크로드 상의 오아시스 마을을 거쳐 가는 각종 수많은 대상들을 위한 유통형 물류도시이다. 이른바 실크로드의 ‘바자르형 도시’인 것이다.
기원전의 한나라 때부터 당말, 송초까지 대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한 실크로드의 최고의 ‘허브도시’였다. 그것은 지금도 별로 변함이 없다. 비록 독자적 소왕국으로 중계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누리던 과거의 영화는 사라지고, 중국 변방의 작은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카슈가르 인근의 국경세관 앞에는 인근 중앙아시아 제국으로 수출되는 엄청난 물건들을 실은 트럭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세기 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19세기 당시 타림분지를 중심으로 한 신장지방은 청 제국이 시들어가고 손문의 중화민국이 새로 들어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중앙정권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한 채, 여러 외국세력의 각축지가 되었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제국주의들의 파워게임이다.
그런 지정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선 러시아가 먼저 부유한 실크로드의 여러 군소 칸국들을 장악하여 자국의 상품시장으로 삼으려하자 영국도 역시
▼ 카슈가르의 가축시장
당시 영국령이던 인도를 보호하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필요가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신장 상황에 뛰어 들었다. 그리하여 양국은 각기 카슈가르에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를 대고 영사관을 세우면서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그럴 당시에도 카슈가르의 기능은 역시 유라시아, 증앙아시아, 러시와 그리고 증원을 잇는 유통형 물류창고에 바탕을 두었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이 아직도 시내에 두 개의 호텔로 남아 있는데, 당시 러시아 영사관은 현재 셔만호텔[色满賓館] 안에, 영국의 영사관은 현재 치니와커[其尼瓦克賓館, Chini bagh Hotel]1)호텔 안에 자리를 잡고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그 흔적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카슈가르에서는 매주 일요일 유서 깊은 큰 시장인 일요시장, 즉 ‘앵이바자르’가 열린다. 카슈가르를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인근지방에서 생산된 비단, 카펫, 캐슈미어, 호탄옥, 기타 중앙아시아 원산의 귀금속들도 거래되고 또한 농민들이 직접 제배한 다양한 과일과 채소, 공예품 등도 거래되어 이역적인 풍물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들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다. 원래는 일요일에만 열리는 비상설 시장이었지만, 최근에는 상설 바자르로 변해가고 있다.
도시의 중심인 에이티칼 광장을 지나 옛 도시의 오른쪽 절반인 위구르인들의 전통적 거주지를 돌아 나오면 ‘얭이 바자르’가 나타나고 또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낙타나 노새와 양, 염소를 비롯한 온갖 동물이 거래되는 가축시장이 나온다. 이 구시가 일대가 위구르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들의 삶 그리고 이국적인 풍물들이 널려있는 곳이니 꼭 들려볼 ‘0순위’ 구경거리이다.
* 유구한 역사의 소륵성(疏勒城)은 어디에?
현재 카슈가르 주위에 ‘슈레센[疎勒縣, shū lè xian]’으로 불리는 현급(縣級)도시가 한 곳 있다. 대도시 ‘카슈가르 지구’에 속한 11개현 중 하나로 카슈가르에 부속된 조그만 위성도시 같은 곳이다. 사실 소륵은 원래는 카슈가르보다 더 오래된 도시였지만, 근래의 신중국의 정책에 따라 1952년 소륵의 신흥상업지구가 비대해지며 소륵현에서 따로 카슈가르시[喀什市]가 분리되면서 구 도시로 남은 셈이다.
▼ 카슈가르 인근 유적지 지도
그러나 이 구 도시 소륵현이 옛 ‘소륵국’의 수도였나? 하는 문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소륵국’2)은 ‘서역남, 북로’의 분기점이기에 기원전의 한나라 때부터 실크로드에서 요충지 역할을 한 성이었다.
소륵국이 역사에 나타난 시기는 기원전 2세기 서한(西漢) 무제(武帝)가 파견한 사신 장건(張騫, ?~114 B.C)이 서역을 오가면서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면서 그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렇게 한나라는 2세기 동안 눈독을 들이다가 동한(東漢)시기에 이르러 반초(班超, 32년~ 102 AD)3)를 보내 소륵국을 점령하고는 드디어 한나라의 서역경영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한참 때는 소륵국은 1천5백호에 인구가 1만8천여 명이고 2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릴 정도로 거대한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확장되었다.
▼ 최초로 카슈가르를 점령하고 주둔지를 두었던 반초성의 유지
▼ 서역을 개착한 반초성 기념관과 반초의 소상
우선『한서』「서역전」의 기록을 읽어보자.
소륵국의 치소는 소륵성으로서 장안으로부터 9,350리 거리에 있으며 1,510호에 인구 1만8647명, 군사는 2000명이다. 소륵후(疏勒侯), (중략) 좌우역장(左右譯長) 각 한 명씩이다. 동쪽으로 안서도호 치소까지는 2,210리이고, 남으로 사차(莎車)까지는 560리이다. 서쪽으로 대월지, 대원, 강거로 가는 길이 있다.
“좌우 역장(左右譯長)4)이 각 한명이고 ” 또한 “서쪽으로 대월지, 대원, 강거로 가는 길이 있다.” 라는 구절을 연결해보면 예부터 동서교통의 대 동맥으로서 한나라가 얼마나 소륵이나 실크로드를 중요시 하였나를 알 수 있다.
중원에서의 역참제도는 이미 BC 6세기 말 춘추시대 후반에 설치되어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뒤 정착되면서 중앙집권제가 확립된 왕조들인 한(漢), 수(隋), 당(唐)나라로 계승되었다. 역참에는 취사 및 숙박시설뿐만 아니라 말과 마차를 항시 준비하였다가 전쟁 같은 긴급사태나 중앙의 중요한 명령을 전달할 때에는 전문 역졸(驛卒, 驛使)이 말을 계속 갈아타고 달려서 하루에 무려 450km를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불을 피워 연기로 위급을 알리는 봉화(烽火)나 훈련된 비둘기 다리에 문서를 보내는 전서구(傳書鳩) 등이 위험부담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국가차원의 중요한 통신체계였다. 위의 『한서』에서의 ‘좌우역장’ 운운은 당시 역참제도의 조직과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되고있다.
▼ 고대 역참건물의 유지 정문
각설하고 한나라 말기 중앙의 장악력이 약해지면서 이런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소륵국은 주위 여러 민족들의 각축장이 되었다가 북위(北魏)5)때에는 중화권에서 떨어져나가 아프간북부에서 일어난 투르크족계통인 에프탈국[Ephthall/蠍噠國)]6)로 귀속되었다. 이 때 <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총서⓹>의 한 권인 『송운행기』7)의 두 주인공, 송운(宋雲) 혜생(慧生)이 북위의 사신으로 에프탈로 향하기도 했다. 그런 상태는 당 태종 정관(貞觀) 연간(627~649)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당 태종 정관 이후에 적극적인 공략에 의해 다시 당나라에 편입되어 당군의 서역수비군인 ‘안서도호부’ 휘하의 안서사진(安西四鎭)8)의 하나였던 소륵진(鎭)이 되면서 중국화가 고착되기는 했지만 후에도 당과 토번9)은 소륵과 서역의 패권을 놓고 몇 차례나 엎치락뒤치락 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 옛 소륵성지였던 하눠이고성 유적
그럼 이렇게 전운이 그칠 날이 없었던 소륵국의 도읍지 가사성(迦師城) 또는 소륵성은 과연 어디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선 떠오르는 생각으로는, 옛 소륵국이란 이름을 계승한 현 ‘슈례센[疎勒縣]’라고 부르는 도시 인근에 옛 유적지가 몰려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나, 필자가 여러 차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 소륵현에는 그런 유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카슈가르 동북쪽 28km 지점에 있는 유적들10)이 옛 소륵국의 도읍지로 확인되고 있다.
일명 하눠이고성[汗諾依 古城]11)으로 불리는 곳인데, “하눠이”는 위구르어로 ‘왕궁’이란 뜻으로, 이 말 자체로 고대 지방정권과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유명한 고고학자 황문필(黃文弼)을 비롯한 수차례의 발굴팀에 의하면, 모르불탑 인근의 작은 마을[伯什克勒木鄕]에 있는 이 유지는 지형적으로 북으로는 뒷산[古玛塔格山]을 등지고 남으로는 카슈가르 녹지를 마주보고 서쪽으로는 차크막하[恰克瑪克河, 天河]를 두르고 있는 전략상의 요지로 보이는 곳이라 한다. 현재 발굴된 고성의 규모는 동서 10km,남북으로 6km의 장방형으로 그 안에 흙벽돌로 쌓은 성벽의 잔해、군사용 보루, 성문, 왕성건물, 거주민용 방사、수공예방、사원과 불탑 유지, 하수구 그리고 농사용 밭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고 그곳에서 120kg의 고전,동기、철기、옥기、금폐、금인 보석장식품 등과 각종 도기 및 잔편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항아리에는 고량면(高粱面)이 반쯤 들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유적의 대표적 사진을 보면 마치 불탑(?)으로 보이는 둥근 복발형의 토성이 필자의 눈을 끄는데, 이는 인근의 모르불탑의 그것과 같이, 중국대륙에는 유래가 없는, 간다라형식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 개창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또한 고고학적 발굴 상한선이 위로는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부터 아래로는 청조 중기 때까지의 것들이, 지층의 단계별로 발굴되었다는 점을 들어 위로는 기원전후의 서한시대부터 6-7세기의 당대의 왕성뿐만 아니라 중세의 카라한왕조가 순차적으로 이곳에 도읍을 했다고 결론 내리면서 1957년 ‘중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바 있다. 12)
또한 카라한 왕조의 중기부터 시내의 서쪽을 흐르던 차크막 강의 수원이 급격히 감소되면서 이 유적지는 14세기 초기에 이르러 인적이 끊어진 폐허로 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13)。
* 다시 찾은 '모르스투파(莫爾佛塔, Mor Stupa)
‘길’이 있음으로 종교 또한 새로운 땅으로 전래되니 천축에서 파미르를 넘어온 불교는 소륵국에 의해 중원으로 중계된다.
소륵국 왕이 사신을 보내 석가모니불 가사(袈裟)를 보내옴에 황제가 ”만약 이것이 진짜 부처의 옷이라면 정말로 영험함이 있으리라“ 고 말하며 그것을 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타지 않았기에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위서(魏書)』「 서역전 소륵국조」>
이 처럼 2천여 년전의 소륵국은 중원에 불교를 전해준 불국토였지만, 현재 카슈가르 인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불교유적은 삼선동(三仙洞)석굴과 모르불탑뿐이다. 그러나 볼거리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관광업계 심지어 학계에서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은 탓으로 방문객의 발길은 거의 없는 편이다. 간혹 필자 같이 의미 있는 유적지에 목말라하는 이들의 발길만 가끔 이어진다고 한다.
이 모르스투파는 카슈가르에서 동북쪽으로 30km지점에, 하눠이고성에서는 3km 떨어진 모르촌[伯什克然木乡 莫尔村]인근 막막한 황무지에 외롭게 서 있다. 이 유적은 두 무더기로 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스투파이고 다른 한 곳은 사원건축 유지로 알려져 있다. 먼저 스투파형 불탑을 살펴보면 4각형의 기단[길이가 12.3m]이 3단으로 쌓여진 위에 높이가 12.5m에 달하는 원주형(圓柱型)의 형태이다. 물론 둘 다 상륜부인 산개(傘蓋)가 남아 있지 않은 현 상태에서 둘을 비교, 속단할 수는 없지만, 한눈에도 라왁(Rawak, 熱瓦克)사원의14) 스투파와 흡사하다. 현재 ‘서역남로’상의 또 하나의 실크로드의 요충지 호탄(Khotan,于闐) 인근에 있는 이 스투파는 현재 ‘모르’보다 좀 더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이런 형상은 불교사상 처음으로 출현한 산치대탑(Maha Sanchi)15)이 대승불교와 함께 동점(東漸)하면서 간다라문화를 만나며 형성된 사발을 엎어 놓은 이른바 ‘반구형스투파(半球形)’ 이다. 그래서 필자는 ‘탑’이란 용어보다 ‘스투파’16)란 원어를 사용하고 싶다.
▼ 왼쪽의 모르스투파와 오른쪽의 사원건물 유지 전경
▼ 모르스투파와 닮은, 서역남로 호탄 인근의 라왁사원지의 스투파. 현장법사의 발길이 깃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모르스투파 곁에는 사원의 중심건축으로 추정되는 또 하나의 건물유지로 보이는 시각형의 흙무더기가 있다. 둘레가 25m,두께가 23.6m 정도로 옆의 스투파보다는 몸체가 다소 큰 편이다. 담장의 정면과 양옆에는 불감(佛龕)의 흔적이 있지만 마모가 심해 그 구체적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
나그네는 이 모르스투파를 이미 두 차례나 와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여년 전 당시 카슈가르 인근에 알려지지 않은 탑이 하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어렵게 찾아왔지만, 허허벌판에 보이는 것이라는 게 너무 기대 이하였다. 물론 무슬림화 된지 천여 년, 불교유적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으리라곤 기대하진 않았지만, 막상 막막한 사막에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허탈함에 몸을 주체하기 어려워서 서둘러 발길을 돌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20년 만에 다시 찾은 이번 답사길에는 필자 역시 그 동안 인도 산치대탑에서부터 시작하여 보드가야대탑 그리고 간다라지방인 파키스탄, 아프간 등지의 전 실크로드상의 모든 불탑을 보아왔기에 ‘사각형의 불탑’과 사발을 엎어 놓은 ’반구형 스투파’의 의미를 한눈에 간파할 수 있었고 더구나 근처의 위진남북조에 개창된 불교유적인 삼성동 석굴과 연계해보니 더욱 그러하였다.
인도에서 나타난 최초의 탑은 기원전 3~1세기에 세워진 산치대탑과 같은 기단-복발(覆鉢)-평두(平頭)-산개(傘蓋) 순으로 이뤄진 반구형외관을 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후대로 오면서 기단이 높아지고 탑신 위의 상륜(相輪)도 숫자가 늘어나며 높아져 갔다. 또한 지방적으로 간다라지방을 거치며 동점하면서 탑신이 원주형으로 변하고 상륜부의 장식도 복잡해져 가면서 중원땅에 도착했을 때는 사각형화, 누각화가 진행되어 한반도에 이르렀다.17)
그런 불교사적 변천사 분기점이 되는 실물이 바로 모르스투파와 라왁스투파인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까지는 그래도 인도적인 맛이 약간 남아있지만, 감숙성 하서주랑으로 가면서 탑은 인도 탑과는 전혀 다른 ‘누각식 탑’으로 변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 기원전 후의 간다라시대에 세워진, 모르스투파의 원형으로 보이는, 파키스탄 스와트계곡의 싱게다르 스투파
또 하나의 불교유적인 삼선동석굴18)은 카슈가르 북쪽 18km지점, 차크막19) 강변에 위치한다. 동한시기 말기(약AD 140년 전후)에 개창되었다고 하는데, 이 시기는 불교의 동점에 초기에 해당되니 이 또한 불교사적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석굴은 ‘위수푸르캉[玉舒布尔杭]이라 불리는데, 이는 위구르말로 ’3개의 불교동굴’이란 뜻으로 강 남안 절벽에 3개가 나란히 파여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런데 석굴 입구가 지면에서 20m위에 있는 절벽 가운데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어려워 직접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발굴조사 자료에 의하면 모두 전후실로 나누어져 있는 ‘비하라(Vihara)’식 석굴이라 한다. 맨 오른쪽 동굴20)의 전실은 사벽이 각기 다른 내용의 불화들이 그려져 있는데, 어떤 좌불상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고 불상의 후면에는 둥근 채색의 광배가 현란하고 또 그중 한기의 좌불은 채색된 네모난 가사를 입고 있다. 그리고 천장에는 연화문양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전실에 이어 후실에는 빈 석상(石床)이 하나 있고 그 위에는 40cm정도의 장방형의 구멍이 뚫려있는데, 원래 그곳에 있던 불상을 세우기 위한 기단으로 보이나 현재 불상은 보이지 않는다.
규모가 제일 큰 중간 굴에는 한기의 입불상이 남아 있는데, 조형된 솜씨가 아름답고 생동감 있으며 입고 있는 복식은 흔히 보기 힘든 특별한 모양이고 복부 아래로는 록、홍、남색의 3가지 가로무늬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왼쪽 굴은 개창 때부터 미완성이어서 현재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 석굴의 조형물과 벽화들은 정교롭고 선명하여 다른 석굴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서 고대 소륵인 장인들의 높은 예술적 상상력과 창작기법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들 불상들과 벽화들은 세월에 의한 훼손 이외에도 후인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파괴되고 도난당하였고 심지어는 벽화 위에는 후대에 쓰인 낙서성 글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 동한시기의 불교유적, 카슈가르 북쪽 차크막 강안의 삼선동석굴의 전경
1) 얼마 전까지 파키스탄이나 키르기즈스탄으로 넘어가는 수속을 대행해주는 중국여행사 사무실이 있었고 개별배낭여행자들을 위한 도미토리형 게스트하우스가 있기에 많은 여행자들에게 친근한 곳이다.
2) ‘슈레’, 즉 ‘소륵국’ 의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고 구사(佉沙)의 유래에 관해서도 이론이 있다. 또한 현장법사는 소륵국조의 원문에 소륵을 실리흘률다저(室利訖栗多底)라고 불러야 한다는 병주(幷註)를 달아놓았지만, 지금도 소륵이란 지명이 오히려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3) 중국 후한의 무장으로 한나라(漢)때 역사가인 반표(班彪)의 아들이자,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의 아우로 이 세 사람을 삼반이라 부른다. 전한의 장건의 활약 이후 끊겼던 실크로드를 다시 개척하여 후한과 서역의 교역길을 열었다. 그의 원정대는 파르티아와 카스피 해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시내에는 반초가 이곳을 다스렸던 시기를 기념하는 “반초성”이라고 불리는 작은 기념공원이 있다.
4) 역장은 역참의 수장으로 중앙관서에서 파견된 관리이다. 이 역참제도는 몽골제국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정착되었다고 하지만, 중원에서는 이미 BC 6세기 말 춘추시대 후반에 설치되어 후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외국으로 오가는 사신들이나 고관의 부임행사 같은, 공무로 인한 왕래 시에는 말보다도 속력이 떨어지는 마차[傳]를 사용했다. 이른바 역전(驛傳)이다. 그러니까 넓게는 역참제도이지만, 엄격한 구별을 하자면 ‘역’은 긴급한 통신시설에 해당되며, ‘전’은 국가차원의 기간산업인 교통시설에 해당된다.
5) 『북사』「소륵전」에 의하면 소륵왕은 금제 사자관을 쓰고 땅에서는 벼, 밤, 마, 맥류, 동, 철, 주석, 자황(雌黃) 등이 많이 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6) 고대 월지족의 후에로 백흉노(白匈奴) 또는 엡탈리트, 갈달, 읍달, 하이탈, 타프탈레 등으로 기록된 유목민족으로 5세기 경부터 유라시아에서 큰 세력을 이루어 6세기 초에는 헬레니즘을 계승한 마지막 국가인 토카리스탄[吐火羅國]을 멸망시키면서 중앙아시아에 정착하여 동쪽으로는 호탄, 서쪽으로는 사산조페르시아 까지 미치는 판도를 형성하여 인도, 중국, 페르시아 그리고 남러시아를 잇는 교역루트의 차지함으로써 당시 실크로드의 실권을 장악하다가 560년경 페르시아와 연합한 돌궐에게 멸망되었다. 송운의 에프탈에 대한 기록은 사서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7) 졸저 <실크로드고전 여행기 제5권의 송운행기>를 말한다.
8) 안서도호부에는 안서사진(安西四鎭)-귀자도독부(亀茲都督府)/비사도독부(毗沙都督府)/소륵도독부(疏勒都督府)/언기도독부(焉耆都督府)이 있었다. 안서도호부는 전한 시대 서역의 수호와 통상로의 보호를 위해 설치되었는데, 640년 9월에는 교하고성(交하고성)에 처음 설치하고 648년 정관 22년에는 쿠차(龟兹)로 옮겼다. 당 고종, 측천무후, 현종 때 이르러 절정을 이루다가 안사의 난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9) ‘안서사진’을 두고 당과 토번은 오랫동안 쟁탈전을 벌렸다. 개원 16년(728) 교몽송(喬夢松)을 파견해 아마지비안정(阿摩支斐安定)을 소륵 왕에 책봉하였으며, 천보 12년(753)에 소륵 수령 비국량(斐國良)이 내조한 후부터는 줄곧 당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숙종(肅宗) 상원(上元) 연간(760~761)에 소륵도독부를 신설하였다. 이렇게 당 고종 때부터 현종 때에 이르기까지 약 백 년간 당과 돌궐, 토번, 대식간에는 안서 사진을 쟁탈하기 위한 분쟁이 계속되었다.
10) 소륵성의 후보지로 하눠이고성 말고 한 곳 더 있다. 현 탁복심(托卜沁) 동남 6~7킬로미터 지점의 흑태심(黑太伈)의 일명 한인성(漢人城)이라는 곳인데, 둘레가 삼십여 리나 되고 주위에 봉화대가 있으며 동전과 도자기 파편이 다수 출토되어 당대의 고성 유지로 추정되고 있다
12) 이 하눠이고성을 중심으로 한 교외에 산재한 유적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성 인근의 산[胡瑪塔勒山] 위에는 거대한 불탑과 주위에 사원의 유지가 있다고 전하지만, 그곳에 대한 자료는 확인할 수 없다.
13) “汗諾依”即維吾爾語“皇宮”之意,說明這裏在古代確是當地政權的首府。據我國考古學家黃文弼實地考證,認爲汗諾依古城就是唐朝疏勒國都“伽師城”,也是疏勒鎮及疏勒都督府治所。喀拉汗王朝初期王都也設于此,後來改作夏季行宮。喀拉汗王朝末期至14世紀初期,汗諾依遺址以西的恰克瑪克河水源斷絕,又因戰亂頻繁,古城漸趨沒落,清中期遂最終荒廢。(王朝網路 wangchao.net.cn)
14) 호탄시 동북쪽 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사원유적으로 1900년에 스타인에 의해서 처음 발굴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서역 남로 최대의 탑이었다. 탑을 중심으로 이중으로 된 담장이 장방형으로 둘러싸고, 그 담장 안과 밖에는 거대한 소조불상들이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인도 간다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서역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상들은 5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옷 입은 형식과 옷주름 표현 등에 의해서 간다라 영향을 받은 불상조각과 굽타조각의 영향을 받은 불상 조각으로 나눌수가 있다. 중심에 있는 탑은 사방에 층계가 놓여있는 십자형 모양의 기단부와 둥근 탑신부를 가지고 있는 복잡한 구조의 복발탑이다.
15) 인도 중부 마드야 프라데쉬주의 수도 보팔 근처 북부 46km 지점에 자리한 산치스투파는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 시대에 만들어진 수투파의 원형으로 불교예술 중의 극치를 이룬 것이다. 기원 후 1세기 후반 간다라 시대에 산치의 형식을 모방한 스투파(塔)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산치의 스투파는 크고 작은 것이 20여 개였으나 대부분 파괴되고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산치 대탑이라고 불리는 제1탑과 그 탑을 사방 동서남북으로 둘러싼 탑문(塔門, torana) 그리고 제3탑이다.
16) 솔도파(率堵婆)는 산스크리트인 ‘stupa’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말이며, 탑파(塔婆)는 팔리어 ‘thpa’의 음역으로 모두 ‘방분(方墳)’ ‘고현처(高顯處)’로 의역된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그러나 스투파의 원래의 뜻은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土石)을 쌓아올린, 불신골(佛身骨)을 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편 미얀마 등에서는 ‘파고다’라고 하여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도 같이 부르는데, 원래 이 말은 미얀어인 바야와 스리랑카어인 다고바의 혼합어(混合語)로 스리랑카 같은 나라에서 탑을 다가바 또는 다고바라 부르고 있는 것은 다투가르바, 곧 ‘사리봉안의 장소’라는 말을 약(略)하여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17) 한반도에 전래된 탑은, 비록 현존하는 것은 없지만 〈삼국유사〉등에 의하면 적어도 4세기 말에는 황룡사 9층 목탑 같은 중국식의 고루형 목탑이 세워져 삼국 통일 이전까지 계속 건립됐다. 그러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보듯 ‘목탑식 석탑’으로 바뀌었고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지금 같은 ‘한국적 석탑’으로 굳어진다.
18) 在喀什市北18公里伯什克然木河南岸的峭壁上。为古佛教洞窟遗址。据考证,开凿于东汉末期,是目前所知我国西部保存下来的最古一处洞窟,也是古代疏勒地区仅存的一处佛教遗迹,异常珍贵。因河岸陡峭,距地面20米左右,难于登临,维吾尔人称为“玉舒布尔杭”,即3个佛教洞窟之意。3个并列的洞口呈方形,其中以中洞为最大,高近2米,宽约1.5米。洞中色调典雅质朴,图案造型独特生动,充分体现了古疏勒国人民高超的想象力和创作技巧。可惜洞中有不少精美绝伦的壁画被后人破坏,佛像也被窃走。
19) 다른 자료에 의하면 ‘伯什克然木河’라고도 한다.
20) 东洞前室四壁绘满了大小不同的各种佛画,顶部为莲花藻井,藻井四周又绘有高50厘米的坐佛。佛盘腿而坐,双手平放胸前,佛像背后光环耀眼,色彩斑斓,其中有一座佛身着彩色方格袈裟。后室有一石床,上有40厘米左右长方孔,是当年固定佛像的底座,但佛像早已无存。除此之外,还保留着一尊立佛,造型极其优美生动,所着服饰奇特罕见,腹部以下为绿、红、蓝三色相间的横纹绘成,造型和用色在中国其他佛窟壁画中极少见
첫댓글 소륵을 알고 싶다.
어, 또 배꼽사진이...
어, 이상하네. 어제 사진 올릴 때에는 멀쩡했는데....하루만에 또 이러네...참...
잘 보았습니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