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담화시기법(談話視機法)
4) 담화시기법(談話視機法) : 한마디 말에도 깨달음을 드러내라
항상 안개와 노을, 강물과 바위, 그리고 지출(芝朮)을 향한 마음을 폐부에 젖어들게 하고 골수에 새기십시요. 또한 마음이 맑아지고 눈이 밝아져서 이치를 보는 것이 정밀하고 투철해져서 자벌레가 푸른 것을 먹으면 몸이 푸르게 되고, 누런 것을 먹으면 몸도 누래지는 것과는 같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윤계용 영휘에게 답함[答尹季容永輝]〉 8-137
심령을 툭 틔워라
담화시기(談話視機)는 일상의 대화나 주고 받는 글 속에 번쩍이는 깨달음을 드러내 보인다는 말이다. 깨달음은 먼데 있지 않다. 바로 내 곁에 가까이 있다. 듣고 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데 막상 찾으려 들면 숨어버린다. 문심혜두(文心慧竇)가 꽉 막힌 까닭이다. 툭 터진 정신은 아무 걸림이 없다. 듣고 보고 말하는 것 모두가 도 아닌 것이 없다. 한마디 한마디가 다 촌철살인이다.
다산은 실없는 농담이나 하며 시간을 때우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저 스치듯 건네는 한 마디에도 잠든 정신을 일깨우는 깨우침이 있었다. 하지만 해학도 무던히 즐겼다. 위의 편지는 1811년 윤영휘가 시끌벅적하게 행차를 벌여 유배지로 다산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떠나간 뒤 보낸 것이다. 그는 다산에게 온통 고을살이 하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허세를 부려 장황하게 혼자 떠들다가 그저 돌아갔다. 당시는 유언비어가 흉흉하게 나돌 때였다. 다산은 그가 공직에 있으면서 죄인을 공공연하게 찾아와 공연한 구설을 만들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관리된 사람으로 몸가짐을 근신하고, 말을 삼가야 한다는 뜻을 편지로 전했다.
편지 끝의 “자벌레가 푸른 것을 먹으면 몸이 푸르게 되고, 누런 것을 먹으면 몸도 누래진다.”는 말은 《안자춘추(晏子春秋)》에서 인용했다.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여 자기 중심을 잃어서는 안됨을 넌지시 충고한 것이다. 아들에게 준 글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
한 차례 배불러 살이 찌고, 한 번 굶어 수척한 것을 일러 천한 짐승이라 한다. 안목이 짧은 사람은 오늘 뜻 같지 않은 일이 있으면 낙담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고, 내일 뜻에 맞는 일이 있게 되면 생글거리며 얼굴을 편다. 일체의 근심과 기쁨, 즐거움과 분노,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모두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달관한 사람이 이를 보면 비웃지 않겠느냐? -〈학유가 떠날 때 노자 삼아 준 가계[贐學游家誡]〉 8-29
아침에 일찍 볕을 받는 곳은 저녁 때 그늘이 먼저 든다. 일찍 피는 꽃은 빨리 지는 법이 아니냐. 풍차처럼 돌고 도는 것이 운명이다. 현재의 상황에 너무 낙담하지 마라. 사내는 큰 마음을 지녀야 한다. 가을 매가 창공을 박차고 나는 듯한 기상을 품어야 한다. 다산은 아비의 좌절에 절망해서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아들의 마음을 이렇게 다잡았다.
맹자는 “대체(大體)를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지만, 소체(小體)를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어 금수에 가깝게 된다.”고 했다. 만약 생각이 온통 등 따숩고 배부른 데만 가 있어 편히 즐기다가 세상을 마친다면 몸뚱이가 식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스러질 것이다. 이는 짐승일 뿐이다. 짐승이 되고 싶은가? -〈윤혜관에게 주는 말[爲尹惠冠贈言]〉, 8-2
몸뚱이를 위해 사는 소인과 정신을 기르는 대인 가운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사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알고 으스대는 자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개 돼지도 배부르면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줄 안다. 제자들에게 던지는 이런 한 마디도 서늘하게 가슴을 훑고 가는 깨우침이 있다.
각성을 유도하라
해서관찰사로 있던 이의준(李義駿)이 해주의 부용당에서 연꽃 구경을 하자면서 잔치를 열어 다산을 비롯한 산하의 고을 수령들을 초청했다. 다산이 도착하자, 그를 아꼈던 이의준은 이곳은 공무를 보는 선화당(宣化堂)이 아니니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하루를 즐기자고 했다. 그러자 다산은 뜬금없이 감사(監司)가 고을 수령의 잘잘못을 살피기에는 부용당이 오히려 선화당보다 낫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다산의 대답이 이랬다.
수령이 선화당에 이르면 모두 걸음을 단정히 하고 낯빛을 엄숙하게 합니다. 말을 삼가고 공손히 하여 예를 따져 보아도 어느 누구 훌륭한 관리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연꽃 향기와 버들 빛이 눈에 비치고 코를 찌르며, 죽순과 고기가 어지러이 널려있고, 어여쁜 아가씨들이 잔뜩 모여 있으며, 좋은 술로 창자를 적시고, 구운 고기로 배를 채우는 곳에 이르게 되면 상관은 낯빛을 좋게 꾸며 환대하고 농담하며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 소리 지르고 시시덕거리며 제멋대로 구는 사람은 살펴보면 그 잡스러움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는 반드시 유능하기는 해도 경솔하게 법을 범할 것입니다. 굽신대며 아첨하고 윗사람을 찬양하는 말로 빌붙는 사람은 가만히 보면 비루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는 반드시 면전에서 아첨하고 힘없는 백성을 속이는 일이 많을 겝니다. 눈짓을 흘려 뜻을 보내며 계집에게 정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눈여겨보면 물러터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는 반드시 맡은 일에는 게으르면서 요구하고 부탁하는 일은 많을 것입니다. 무슨 고래나 되는 것처럼 통음하고, 벌써 취했는데도 술 마시기를 사양하지 않는 자는 살펴보면 어지러운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는 반드시 술 때문에 공무에 방해를 받아 형벌이 도를 넘게 될 것입니다. 이럴진대, 그 살피는 것이 선화당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부용당기(芙蓉堂記)〉6-153
말 속에 뼈가 있다. 읽는 이의 의표를 찌른다. 상식의 허를 간파해서 자칫 위의를 잃고 흐트러지기 쉬운 자리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게 한 통쾌한 말이다.
〈무호암기(無號菴記)〉도 재미있다. 병조참판 윤필병(尹弼秉)이 자신의 거처에 ‘무호암(無號菴)’이란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는 개백정과 비단장수까지 호를 달고 다는 세상이 하도 꼴같지 않아 그릇된 세상 풍조를 바로 잡기 위해 이런 이름을 붙이게 되었노라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자 다산은 또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톡 쏘았다. 보통 사람의 일반적인 호는 평범해서 대면해서는 호를 불러도 돌아서면 잊고 마니, 있으나 마나한 것이다. 그러나 무호암은 그렇지가 않다.
이제 공은 우뚝하게 이 몇 가지 호에 더하여 ‘무호(無號)’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새로운 생각에 크게 놀라 기이하게 여기겠지요. 그리고는 기쁘게 돌아가서 이를 외워,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은 비록 이름을 피하려 했는데 이름이 더욱 따르게 될 것입니다. 선생의 호는 정말 대단하군요. 이름을 좋아한 사실은 없고, 겉으로 이름을 피한다는 명분만 가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감히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무호암기(無號菴記)〉 6-121
소나 개나 달고 다니는 것이 호이니, 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 무호라 한다고 주인이 떠들었다. 다산은 대번에 그것이야 말로 겉으로는 겸손한척하면서 결과적으로 이름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고 비꼬았다. 주인은 이 한 마디에 그만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산은 이렇듯 촌철살인(寸鐵殺人), 정문일침(頂門一鍼) 하는 한 마디 말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제압하는 남다른 솜씨가 있었다.
여유를 잊지 말라
일상의 대화 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불쑥불쑥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도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넉넉한 해학이 담겨있다. 후학들에게 준 증언(贈言)이 특히 그렇다.
매양 봄바람이 산들 불어 초목이 움트고, 나비가 홀연히 방초에 가득하게 되면 스님 몇 분과 함께 술을 가지고 옛 무덤 사이에서 노닐곤 한다네. 쑥대가 말갈기 같은 가운데 울멍줄멍 무덤들이 들어선 것을 보다가, 술 한 잔 씩을 따라 부어주며 이렇게 말했지. “캄캄한 땅 속에서 그대 능히 이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그대가 예전 세상에 있을 때도 또한 하찮은 이끗을 다투고 티끌의 재물을 긁어모으느라 눈썹을 치켜 눈을 부릅뜨고 애써 힘 쏟으며 다만 힘껏 굳게 움켜쥐려고만 했겠지? 또한 일찍이 저와 비슷한 무리를 좋아하고, 육욕에 불타며, 음란한 욕정이 솟아올라, 좋은 고장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파묻혀 지내느라 하늘과 땅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몰랐던 것은 아닌가? 또한 제 집안을 믿고 건방을 떨어 남을 무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으르렁거리며 스스로를 높이지는 않았던가? 그대 이승을 하직할 때 손에 동전 한 닢이라도 지녀갈 수 있었던가 모르겠네 그려. 이제 그대의 부부가 한데 묻혔으니, 능히 지난날처럼 즐겁기는 한가? 내 지금 그대를 난처하게 함이 이와 같건만 그대가 능히 큰 소리로 날 꾸짖을 수 있겠는가?” 이같이 수작하다 돌아오노라면 날은 어느덧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 있곤 했다네. -〈초의승 의순에게 주는 말[爲草衣僧意洵贈言]〉 7-303
어느 봄날 가까이 지내는 백련사의 스님 몇과 함께 소풍을 나섰던 모양이다. 숲 속 길가에 울멍줄멍 들어선 무덤들 사이를 배회하면서 혼자 하는 독백이다. 땅에 묻혀 흙밥이 되고 나면 그뿐인 인생이 무엇을 그리 영위하고 작위하느라 숨돌릴 새 없이 바쁘게만 살았던가? 무덤 속 주인과의 독백체 대화는 잔잔하면서도 긴 울림을 남긴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視二子家誡]〉(8-19)에서는 재물을 비밀리에 숨겨두는 방법을 알려 준다. 도둑에게 빼앗길 염려도, 불에 타버릴 걱정도, 소와 말을 이용해 운반하는 수고도 안 드는 기막힌 방법이다. 그런데도 천년 뒤까지 아름다운 명성이 남는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단단히 잡으려 들면 들수록 더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재물이란 미꾸라지다.”
내가 토지 문서를 살펴 그 내력을 조사해 보았다. 1백년 사이에 주인이 바뀐 것이 문득 대여섯 번은 되었다. 심한 경우 일고여덟 번에서 아홉 번까지도 있었다. 그 성질이 흘러 움직이고 잘 달아나는 것이 이와 같다. 홀로 어찌 남에게는 금방 바뀌고 내게는 오래 그대로 있기를 바라, 이를 믿어 아무리 두드려도 깨져 없어지지 않을 물건으로 여기겠는가? 창기나 음탕한 여자는 여러 번 남자를 바꾼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만은 어찌 홀로 오래 수절할 것을 바라겠는가? 토지를 믿는 것은 창기의 정절을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부자는 밭두렁이 드넓게 이어지면 반드시 뜻에 차서 기운을 돋워 베개를 높이하고 자손을 보며 말할 것이다. ‘만세의 터전을 내가 너희에게 준다.’ 하지만 진시황 당시에 호해(胡亥)에게 전할 때도 이에 그치지 않았음은 알지 못한다. 이 일이 어찌 믿을만한 것이겠는가? -〈윤종심에게 주는 말[爲尹鍾心贈言]〉 7-300
예전 곡산부사로 있을 때 토지대장을 가져다가 살펴본 경험을 살려 해준 말이다. 땅은 달아나는 법이 없을 것 같지만, 토지처럼 주인이 자주 바뀌는 것이 없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수시로 주인이 바뀐다. 토지가 자손대대로 천 년 만 년 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주인뿐이다. 재물을 어찌 후손에게 남겨주겠는가?
이치를 관조하라
다산의 시는 여느 시에서 보이는 음풍영월의 풍류는 없지만 독특한 깊이가 있고 넘나는 해학이 있다. 시를 두 수 읽어보자.
양식이 생기면 먹을 이 없고 有粟無人食
아들이 많으면 배고파 걱정. 多男必患飢
높은 관리 대부분 멍청이이고 達官必惷愚
재주꾼은 재주를 베풀 데 없네. 才者無所施
온전한 복 갖춘 집 많지가 않고 家室少完福
지극한 도리는 늘 더디다네. 至道常陵遲
구두쇠 아비엔 방탕한 자식 翁嗇子每蕩
아내가 똑똑하면 신랑은 바보. 婦慧郞必癡
보름달은 번번이 구름 가리고 月滿頻値雲
꽃 피면 바람이 불어 떨구네. 花開風誤之
사물마다 모두다 이와 같거니 物物盡如此
혼자 웃음 아무도 아는 이 없네. 獨笑無人知
-〈혼자 웃다[獨笑]〉2-311
다산 버전의 머피의 법칙이다. 높은 벼슬아치는 맨날 사람 좋은 너털 웃음으로 그 무능을 감춘다. 재주 있는 젊은이는 한번도 그 재주를 펼 기회를 못 만나기 쉽다. 아비가 구두쇠 소리를 들어가며 한푼 두푼 모은 재산은 방탕한 자식이 하루 밤 노름으로 다 날려 버린다. 왜 똑똑한 여자는 언제나 멍청한 사내에게 시집가는가? 보름밤에 달구경 약속을 잡아 놓으면 어김없이 그날 밤 비가 내린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문득 앉았다가 한참 꼬인 인생길을 돌아보았던 모양이다. 뜻 같기만 한 삶이 어디 있을까 싶어 하나하나 꼽아보다가 혼자 픽 웃고 말았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기도 하고, 차면 기울기도 하며, 새옹지마 같기도 하고 일장춘몽 같기도 한 인생은 저마다 그렇게 공평하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궁한 살림 올 이 없어 窮居罕人事
늘상 옷을 벗고 사네. 恒日廢衣冠
부서진 집 바퀴벌레 敗屋香娘墜
밭두둑엔 팥꽃 남아. 荒畦腐婢殘
병이 많아 잠은 줄고 睡因多病減
책 쓰느라 근심 잊네. 愁賴著書寬
오랜 비 괴롭잖네 久雨何須苦
맑을 때도 탄식하니. 晴時也自歎
-〈장마(久雨)〉 2-317
강진 유배 생활이 네 해째로 접어들던 1804년 여름, 긴 장마 속에 쓴 시다.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의 하늘 끝 궁한 거처를 누가 찾아줄 것인가. 더구나 연일 비만 주룩주룩 내리는 이 장마통에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의관을 정제하고 사려 앉을 일이 없다. 건(巾)도 하지 않은 맨 머리에 느슨한 옷차림을 하며 편안히 지낸다. 3, 4구가 재미있다. 향낭(香娘)은 향기로운 아가씨인데, 기실은 바퀴벌레의 다른 이름이다. 부비(腐婢), 속 썩히는 계집종, 달리 말해 ‘썩을 년’은 소두화(小豆花) 즉 팥꽃의 다른 이름이다. 비새는 천장에서 뭐가 툭 떨어진다. 가만 보니 바퀴벌레다. 잡초만 무성한 밭두둑엔 그래도 고맙게 팥꽃이 다 시들지는 않았다.
몸에 이런 저런 병이 많아 잠이 자꾸 줄어든다. 잠 깨어 일어나면 밤은 아직 깊었다. 서울 생각, 두고 온 가족들, 알 수 없는 미래, 이런 것들이 천리 밖 유배객의 내면을 할퀴고 지나갔겠지. 이런 저런 근심을 잊으려 더욱 저서에만 몰두한다. 책을 읽고 쓰다 보면 세상 건너가며 누구나 겪을 이런저런 근심들은 어느새 형체도 없다. 장마비가 괴롭다고 투덜댈 것 없다. 방안에만 틀어박혀 이렇게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주지 않느냐. 맑은 날엔 이 사무치게 좋은 날 마음껏 다니지도 못하는 매인 몸을 원망만 했었더니. 병 때문에 잠이 줄어드는 것은 걱정이지만 그 시간에 근심에 침몰되지 않고 저술에 더 힘을 쏟게 되니 굳이 나쁠 것도 없겠다는 말씀이다.
다산은 말한다. 그저 보아 넘기지 말고 이치로 따져 음미하라. 가슴 속에 금강석 보다 빛나는 보석을 품어라. 금새 스러질 그깟 재물 말고, 변치 않을 등불이 될 말씀을 세워라. 문심혜두를 활짝 열어 촌철살인의 정신을 길러라, 흐믈흐믈 녹고 말 육신의 쾌락 말고, 하얗게 정신의 뼈대를 세워라.
9-5 속중득운법(俗中得韻法)
5) 속중득운법(俗中得韻法) : 속된 일을 하더라도 의미를 부여하라
닭에 관한 글들을 베껴 모아 차례를 매겨 《계경(鷄經)》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다. 육우의 《다경(茶經)》이나 유득공의 《연경(烟經)》처럼 말이다. 속된 일을 하더라도 맑은 운치를 얻는 것은 모름지기 언제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학유에게 부침[寄游兒]〉9-39
품위를 유지하라
속중득운(俗中得韻)은 학문 외적인 일에 있어서도 공부의 방법을 미루어 속되지 않은 격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부가 본 궤도에 오르면 이것과 저것 사이에 간격이 허물어진다. 일이관지(一以貫之) 하게 된다. 공부하는 사람은 생활에도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 따로 생활 따로는 아직 공부가 덜 되었다는 말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증거다.
위 인용문은 앞서 ‘휘분유취법’에서 잠깐 살핀 적이 있다. 닭을 친다는 아들에게 사대부의 양계법을 가르치면서 한 말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산의 치가(治家) 또는 치산(治産)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아서 살펴보겠다. 다산은 공부를 핑계로 온 식구를 배 곯리며 저 혼자 고고한 체 하는 학문을 가장 혐오했다.
태사공이 말했다. “늘 가난하고 천하면서 인의를 말하기 좋아하는 것은 또한 부끄러워 하기에 족하다.” 성인의 문하에서는 재물의 이익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공은 재산을 늘렸다. 오늘날 선비들은 소부(巢父)나 허유(許由)의 절개는 없으면서 누추한 집 속에 몸을 숨기고 명아주나 비름 따위로 배를 채우며, 부모와 처자를 얼고 주리게 하고, 벗이 와도 능히 술 한 잔 권하지 못한다. 세시가 되어도 처마 끝에 매달린 고기를 볼 수 없고, 오직 공사(公私)간에 빚진 자가 문간을 두드리며 꾸짖어 욕한다. 이것은 천하에 지극히 졸렬한 것이니, 지혜로운 선비는 피해야 한다. -〈윤윤경에게 주는 말[爲尹輪卿贈言]〉 8-3
부모 봉양도 도외시하고 온 집안 식구를 괴롭히며,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도 갖추지 못하면서 저만 좋자고 하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인의(仁義)를 말하고 효제(孝悌)를 논한다면 이것보다 가증스러운 일이 없다. 재물에 눈이 멀어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되는 것은 안 되겠지만, 학문을 하면서도 인간다운 품위를 잃지 않을 정도의 경제적 바탕을 갖추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다산은 세상의 학문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학문을 아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는 속학(俗學)이요, 하나는 아학(雅學)이지요. 후세의 음악에 아악과 속악이 있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이 아이들은 아학만 알고 속학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도리어 아학을 속학으로 여기는 폐단마저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허물이 아니라 형세가 그런 것입니다. -〈중씨께 올림[上仲氏]〉 8-219
클래식 음악이 좋지만 유행가도 필요하다. 장중한 아악도 필요하지만 경쾌한 속악도 없을 수 없다. 경학 공부가 바탕이 되기는 해도 경제의 공부도 요긴하다. 학자가 재물에 눈이 머는 것처럼 민망한 노릇이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이를 외면하는 것도 바른 자세는 아니다. 매일 배우는 것이 아학이다 보니 아학을 속학 대하듯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 이글에서 다산이 하고자 한 본 뜻이다. 하지만 공부하는 사람이 아학만으로는 생활의 근거를 마련할 수가 없으니 속학도 아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운치를 곁들이라
다산은 자급자족할 만큼의 경제 활동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산은 여러 글에서 원포(園圃) 경영과 누에치기의 중요성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을 일러 ‘사(士)’라 하고, 들에서 밭가는 자를 두고 ‘농(農)’이라 한다. 귀족의 후예로 먼 지방에 유락하여 몇 대를 지나고 나면 벼슬길이 마침내 끊긴다. 오직 농사를 지어야만 노인을 봉양하고 어린 것들을 기를 수가 있다. 하지만 농사 일은 천하에 이문이 박한 것이다. 게다가 근세에는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 날로 무거워져서 농사를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낭패를 보게 된다. 모름지기 원포(園圃)로 이를 보충하여야 유지할 수가 있다. 진기한 과일을 심는 것을 ‘원(園)’이라 하고, 좋은 채소를 기르는 것을 ‘포(圃)’라고 한다. 집에서 먹기 위한 것뿐 아니라 장차 이를 팔아 돈을 만들기도 한다. 큰 고을이나 도회지 곁에 진기한 과일나무 열 그루를 심으면 한 해에 엽전 50꿰미를 얻을 수 있다. 좋은 채소를 몇 이랑 기르면 한 해에 20꿰미를 거둘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뽕나무 4,50그루를 심고 누에 5,6칸을 기른다면 또한 30꿰미의 물건이 된다. 매년 100꿰미를 얻는다면 춥고 굶주리는 것을 구하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가난한 선비가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일이다. -〈또 윤혜관에게 주는 말[又爲尹惠冠贈言]〉 8-3
그때나 지금이나 농사만으로는 뼈골 빠지게 일을 해도 손에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다산은 원포(園圃)의 경영과 누에치기를 특별히 강조했다. 원은 과수원이고, 포는 채소밭이다. 과일과 채소를 길러 식구도 먹고, 남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판다. 또 부지런히 누에를 길러 고치실을 시장에 낼 수가 있다. 농사의 여가에 틈틈이 힘을 쏟아 부수의 소득을 올려야만 식구가 배곯지 않고 겨울에 춥지 않게 지낼 수 있다. 선비가 제 공부를 핑계 삼아, 먹고 사는 일은 아는 체도 않으면서 부모와 처자를 굶기는 것은 인간이 덜된 것이요, 일종의 직무유기다. 거기서 무슨 고상한 학문이 나올 수 있겠는가?
다음 글에서는 원포 경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나온다.
향리에 살면서 원포를 가꾸지 않는 것은 천하에 쓸모없는 사람이다. 나는 국상(國喪)이 나서 정신없는 중에도 만송 열 그루와 향나무 두 그루를 심었었다. 만약 내가 지금 집에 있었다면 뽕나무가 수 백 그루에 접 붙인 배나무와 옮겨 심은 능금나무가 여러 그루였을 것이다. 닥나무는 벌써 밭을 이루었을 게고, 옷나무는 이미 남의 밭두둑까지 퍼져나갔을 것이다. 석류 몇 그루와 포도 덩굴도 몇 시렁은 되었을 테고, 파초도 하마 서너 뿌리는 되었을 것이다. 쓸모없는 땅에는 버드나무가 대 여섯 그루는 될 것이요, 유산(酉山)의 소나무도 벌써 몇 자는 자랐을 게다. 너는 이 가운데 하나라도 했더냐? 들으니 네가 국화를 심었다더구나. 국화 한 두둑을 심으면 가난한 선비의 몇 달 양식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 꽃을 보는 것뿐이 아닌 것이다. 약초인 생지황․반하․도라지․천궁 등과 염료인 쪽풀이나 꼭두서니 따위도 모두 유념할 만 하다. 채소밭을 가꿀 때는 아주 평평하고 반듯하게 해야만 한다. 흙손질도 몹시 곱고 깊게 하되 분가루처럼 부드럽게 해야 한다. 씨를 뿌릴 때는 쪽 고르게 해야 한다. 모종을 심을 때는 널찍널찍 심어야 한다. 이 같이만 하면 충분하다. 아욱과 배추, 무를 한 구역씩 기르고, 가지와 고추 같은 것도 각각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마늘이나 파를 심는데 가장 힘을 쏟아야 한다. 미나리도 심을 만 하다. 한 여름 농사로는 오이만한 것이 없다. 비용을 아끼고 근본에 힘쓰면서 아름다운 이름을 아울러 얻는 것이 이 일이다. -〈두 아들에게 부침[寄兩兒]〉 9-23
농사 외에 요즘으로 치면 특용작물의 재배까지 권한 내용이다. 이밖에도 〈윤윤경에게 주는 말[爲尹輪卿贈言]〉(8-4)에서도 원포와 목축에 힘을 쓰고 방죽을 파서 고기도 기르며, 문전옥답을 10여 개로 구획 지어 여기에 사계절 채소를 심어 집안의 먹거리를 공급하라고 했다. 또 보리 농사는 수익성이 낮으므로, 차라리 그 땅에 복숭아․오얏․매실․살구․능금 등을 심으면 10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 동백은 머리 기름으로 쓰고 치자는 약재나 염료로 쓰이니 많이 심고, 목화는 하루갈이 정도만 농사짓는다. 이와는 별도로 삼과 모시를 심어 봄 여름에는 명주를 짜고 가을 겨울에는 베를 짜서 식구들의 의복 문제를 해결하라. 닭과 돼지도 집안에서 먹을 수 있을 정도는 길러야 한다. 걸핏하면 상자 속의 돈을 꺼내 저자로 달려가서는 절대로 집안을 일으킬 수 없다. 또 집 뒤 빈 땅에는 진기한 과일을 많이 심어 먹고 남은 것을 저자에 내다 팔며, 기른 과일 중에 특별히 탐스러운 것은 벗이나 이웃 어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 함께 나누라고도 했다. 이런 것이 바로 속중득운(俗中得韻)이다.
〈윤혜관에게 주는 말[爲尹惠冠贈言]〉(8-1)말에서도 원포를 경영해서 과일과 채소를 기르되, 봄비가 갓 개일 적마다 가래와 보습을 들고 나가 도랑과 두둑을 정리해서 종류별로 씨 뿌리고 모종을 하고 와서는 짧은 시 수십 편을 지어 옛 사람의 풍취를 본뜨라고 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원포를 경영하지만, 단순히 입과 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려는 마음가짐을 늘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활동이 중요해도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분간은 명확했다. 폐족의 처지를 비관한 아들 학연이 먹고 살 도리를 위해 의원 노릇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산은 크게 놀랐다.
입고 먹는 것의 원천은 오직 뽕과 삼을 심고 채소와 과일을 기르는 것뿐이다. 부녀자가 길쌈 일에 부지런 한 것도 할만한 일이다. 그 나머지 예를 들어 이잣돈을 놓거나 여러 물건을 판매하는 일, 그리고 약 파는 따위의 일은 모두 가장 악착스런 사람이 능히 하는 바이다. 조금이라도 풍미가 있는 사람은 본전을 다 까먹고 그 본업마저 잃지 않음이 없다. 절대로 단념하도록 해라. -〈학연에게 보여주는 가계[示學淵家誡]〉 8-31
자기의 노력으로 농사짓고 과일과 채소를 기르며 부지런히 길쌈해서 생계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은 무방하나, 돈 놀이, 약장사 따위로 돈을 벌려 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편지의 끝에서는 만약 당장 의원 일을 그만 두지 않으면 다시 얼굴도 보지 않겠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겠노라고 쐐기를 박아 말했다.
서울을 지켜라
다산은 폐족이 되었다고 서울을 등지고 깊은 산골로 숨어 들어가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그럴수록 서울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도성과 시골의 문화 수준차가 너무 심해, 도성에서 몇 십리만 벗어나도 태고의 원시 사회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멀고 먼 외딴 곳으로 숨어드는 것은 결국 자손을 노루나 토끼처럼 만들어버리는 길이라고 다산은 생각했다.
무릇 사대부의 가법(家法)은 뜻을 얻어 벼슬길에 나가면 서둘러 산언덕에 집을 세 얻어 처사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만약 벼슬길이 끊어지면 급히 서울 언저리에 의탁해 살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내가 지금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있는지라, 너희들로 하여금 잠시 시골집에 숨어 지내게 하였다. 뒷날의 계획으로는 다만 도성에서 10리 안쪽에 거처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가세가 기울어 능히 깊이 들어갈 수 없게 되면, 서울 근교에 머물면서 과실을 심고 채소를 기르면서 생활을 도모하다가 재물이 조금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저자 가운데로 들어와도 늦지 않을 것이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示二子家誡]〉 8-16
서울을 벗어나지 말라는 당부는 문화(文華)의 안목을 유지하라는 뜻에서였다. 세상에 환멸을 느낀다고 무작정 궁벽한 시골로 찾아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집안을 망치는 무모한 행위로 보았다. 근교에서 원포를 경영하여 기본적 생활을 영위하다가, 경제 기반이 좀더 갖추어질 때를 기다려 도성 안에 들어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근세에 명망 있는 집안의 후예로 먼 변방에 영락하여 사는 자는 벼슬하여 영달할 생각은 없고, 다만 먹고 사는 일에만 힘을 쏟는다. 그리하여 높이 날아 먼 곳으로 이끌고자 하여 오직 우복동(牛腹洞)만을 찾아다닌다. 한번 그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자손들이 문득 노루나 토끼가 되는 줄은 알지 못한다. 비록 다시금 밭 갈고 우물 파서 편안히 지내고, 기르는 것이 번성한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제군들은 과거를 보아 벼슬하기로 마음 먹어야지, 다른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 -〈다산의 제생에게 주는 말[爲茶山諸生贈言]〉 8-6
세상에 환멸을 느낀 사대부가 자손을 이끌고 궁벽한 산골로 숨어드는 것은 난세에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깨끗하게 살려던 뜻은 간데없고, 다만 자손들을 노루나 토끼 같은 무지렁이 시골 백성으로 만들고 말 뿐이다. 우복동은 속리산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의 유토피아다. 우리나라에는 지리산의 청학동이나 상주의 식장산(食藏山)처럼 각지에 이런 무릉도원형 유토피아의 전설이 있다. 다산은 장편의 〈우복동가(牛腹洞歌)〉를 따로 남겼다. 이 시에서도 선비가 세상을 위해 기여할 생각은 없이 실재하지도 않는 낙원을 찾아 제 몸을 괴롭히고 나아가 집안을 그르치는 행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맑은 꿈을 잃지 말라
다산은 여러 글에서 자신이 평소 꿈꾸어 온 이상적인 삶의 공간과 생활을 펼쳐 보였다. 젊은 날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이런 꿈을 품었다.
나는 약간의 돈으로 배 한 척을 사려 한다. 배 안에는 고기 잡는 그물 너댓 장과 낚싯대 한두 개를 놓아둔다. 솥과 술잔과 소반 같은 여러 가지 양생의 도구를 준비한다. 집 한 칸을 만들어 온돌을 들이겠다. 두 자식에게 집을 지키게 하고, 늙은 아내와 어린 아들 및 종 하나를 데리고 물에 떠다니는 집에서 종산(鍾山)과 초수(苕水) 사이를 왕래한다. 오늘은 월계(粤溪)의 못에서 고기 잡고, 내일은 석호(石湖)의 물굽이에서 낚시질한다. 또 그 다음날은 문암(門巖)의 여울에서 고기 잡는다. 바람을 맞으며 밥 먹고 물 위에서 잠자며 둥실둥실 마치 물결 위의 오리같이 떠다닌다. 때때로 단가와 짧은 시를 지어 혼자 기구하고 적막한 정회를 펼친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초상연파조수지가기(苕上烟波釣叟之家記)〉 6-161
이 꿈은 부가범택(浮家汎宅), 즉 물 위를 떠다니는 집을 막 지으려 할 즈음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정국의 격랑 속에 휘말려 들면서 20년 가까운 유배 생활을 맞았다. 다음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만약 내가 몇 년만 사면되어 돌아갈 수 있게 되어, 너희들로 하여금 능히 몸가짐을 삼가고 행실에 힘쓰게 하며, 효제를 숭상하고, 도탑고 화목하게 지내며, 경사(經史)을 연구하고 시례(詩禮)를 담론할 수 있게 된다면, 서가에 3,4천권의 서적을 꽂아두고, 양식은 1년 쯤 버틸 수 있으며, 원포에 뽕과 마, 채소와 과실, 각종 화훼와 약초를 심되 반듯하고 쪽 고르게 심어 무성하게 기르며 기뻐할 만할 것이다.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면 거문고 하나와 투호 하나가 놓여 있다. 붓과 벼루와 책상 및 도서의 모습이 고아하고 깨끗하여 기뻐할만 하다. 때로 손님이 찾아오면 능히 닭을 잡고 회를 쳐서 막걸리에 맛난 채소로 기쁘게 한 끼 배불리 먹고, 서로 고금의 일을 이야기 한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폐족이라 해도 또한 장차 안목 있는 사람이 부러워 사모할 것이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점차 지나다 보면 이러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는 이 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라. 차마 이를 하지 않으려느냐? -〈두 아들에게 부침[寄兩兒]〉9-25
그가 꿈꾸었던 것은 이처럼 담박하고 소박한 삶이었다. 꽃 심고 채소 심고, 대나무를 솎아내고 차잎을 볶으면서 한가한 듯 하면서도 한가롭지 않고, 바쁜 듯 바쁘지 않은 청량한 삶을 누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유배 생활 속에서 현재 처한 자신의 공간을 그렇게 꾸미며 삶 속에 맑은 정취를 흘려 넣으려 애썼다.
다산은 말한다. 마음 속에서 속된 기운을 걷어내라. 하지만 생활을 외면하는 것을 고고한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무능에서 나온 적빈(赤貧)과 군자의 맑은 청빈(淸貧)은 전혀 같지가 않다. 청빈을 즐길 뿐 적빈을 자랑하지 마라. 작은 시련 앞에 주눅 들어 무작정 서울을 떠나는 것은 자손을 망치고 집안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몸은 진창에 떨어져도 꿈은 하늘에 심어라. 처지에 따라 변하는 것은 군자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경제를 생각하되 운치를 잃어서는 안 된다.
10-1 비민보세법(裨民補世法)
1) 비민보세법(裨民補世法) : 위국애민 그 마음을 한시도 놓지 말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대를 상심하고 시속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찬미하고 풍자하며 권면하고 징계하는 뜻이 없다면 시가 아니다. 뜻이 서지 않고 배움이 순수하지 않으며 큰 도를 듣지 못하여, 임금에게 미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할 마음을 지니지 못한 자는 능히 시를 지을 수가 없다. 너는 힘쓰도록 해라. -〈연아에게 부침[寄淵兒]〉 9-17
애민의 뜻을 펴라
비민보세(裨民補世)는 백성의 삶에 도움을 주고 세상을 바로잡는데 보탬이 된다는 뜻이다. 고작 제 한 몸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학문을 하고 사업을 한다면 마침내 그 뜻과 노력이 너무 슬프다. 무엇 때문에 학문을 하는가? 무엇을 얻으려 사업을 하는가?
다산의 삶과 학문을 통해 일관되이 드러나는 핵심가치의 첫 번째 지향은 바로 비민보세에 놓인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은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나아가 무엇에 보탬이 되는가? 이 물음에 마땅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면 그는 어떤 작업도 손대지 않았다. 학문을 하면서도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뜨겁고 붉은 마음을 잠시도 내려놓지 않았다. 그 매운 시련 속에서도 그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세상을 위하는 길을 찾아 모색을 거듭했다.
비민보세의 초심을 벗어나면서 학문이 왜곡되고 세상길이 어긋나게 되었다고 그는 믿었다. 자기 과시의 현학 취미, 자기만족을 위한 공부, 상아탑의 엄숙주의, 이런 것들을 다산은 깊이 혐오했다. 다산의 저술에서 그가 세운 조례나 문목은 모두 이 비민보세의 잣대를 벗어남이 없었다. 학문 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다산의 생각도 그러했다. 여기서는 다산의 시정신과 작품을 통해 비민보세의 정신을 살펴본다.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와 군신 및 부부의 윤리에 달려있다. 혹 그 즐거운 뜻을 선양하고, 혹 그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끌어 전달한다. 그 다음으로는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언제나 힘없는 사람을 건지고, 재물 없는 사람을 구제하려고 방황하며 구슬퍼 하며 차마 이들을 버려두고 떠나지 못하는 뜻을 지닌 뒤라야 바야흐로 시라 할 수 있다. 만약 단지 자신의 이해에만 관계된다면 이것은 시랄 것도 없다. -〈두 아들에게 보임[示兩兒]〉 9-34
한편의 시를 쓰더라도 윤리의 떳떳함을 드러내고, 우세휼민(憂世恤民)의 마음을 담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저 음풍영월이나 하며 자기 과시에 힘쓰는 시를 그는 철저히 배격했다. 문제는 시문의 표현이 얼마나 굉장하고 아름다우냐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도와 뜻의 내용에 달려있다. 쭉정이 뿐 알맹이 없는 내용, 세상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문학은 시끄러운 빈 수레요, 재주부리는 광대놀음에 불과하다. 앞쪽에 인용된 아들 정학연에게 부친 편지에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시의 요건을 명확하게 밝혔다. 다산에게 있어 시는 애군우국(愛君憂國)·상시분속(傷時憤俗)을 표출하는 방편일 뿐이었다. 《시경》의 정신인 미자권징(美刺勸懲)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문사(文詞)로 과거를 뽑는 제도가 생기고 나서, 임금은 문예를 놀이로 즐기고, 신하는 글쓰는 일을 배우의 재주로 여기게 되었다. 서로 더불어 경궁과 요대 사이에서 뒤쫓으며 제 한 몸을 영예롭게 하는 데 그친다. 부족하고 멍청해서 능히 기교가 빼어나지 못한 자는 내쫓아서 백성이나 다스리게 한다. 그러다 보니 내직을 무겁게 보고, 외직은 우습게 보는 주장이 일어나, 백성들의 삶은 날로 고달프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제도는 새로 진사가 된 사람은 나가서 여러 고을의 추관(推官)이나 판관이 된다. 임기가 차서 그 정사를 보고한 뒤에야 비로소 한림 및 경연의 강관(講官)이 된다. 그 뜻이 오히려 훌륭하다 하겠다. 우리나라는 문학을 숭상하여 백성의 근심을 살피는데 주밀하지 못한 바가 있다. 높은 명망을 지닌 사람은 몸을 마치도록 관각(館閣)에만 있고, 일찍이 하루도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다. 폐속일 뿐 좋은 법은 아니다. -〈상원군수로 나가는 윤무구를 전송하는 서[送尹无咎出守祥原序]〉 6·-86
학문이나 경륜을 가지고서가 아니라 문예의 재주로 인재를 뽑게 된 후 생긴 폐단을 지적해 말했다. 문학을 숭상하는 일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따로 놀면 안 된다. 문예가 놀이가 되고 광대놀음이 되면 백성이 병든다. 이것으로 내직과 외직을 가르고, 백성을 외면하는 빌미가 되면 나라의 근심이 커진다. 다산이 생각한 문예의 바른 길은 결코 이런 데 있지 않았다.
현실을 고발하라
다산은 애휼(愛恤)에 바탕한 우국애민의 시정신을 자신의 시 창작 상에 그대로 실천했다. 때로 그것은 처절한 분노로 터져 나왔고, 탄식을 넘어 깊은 슬픔을 담아 각성을 촉구하는 탄원으로 이어졌다.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인 1809년에는 전국에 참혹한 가뭄이 들었다. 이때 일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기사년(1809)에 내가 다산 초당에 있을 때였다. 이해 크게 가물었다. 겨울과 봄부터 입추가 될 때까지 천리에 붉은 땅 뿐,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었다. 6월 초에는 떠도는 백성이 길을 메웠다. 마음이 아프고 보기가 참혹해서 살고픈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죄를 지고 귀양 사는 처지라 사람 축에도 못 끼었다. 오매(烏昧)를 아뢸 길도 없고, 은대(銀臺)의 그림을 바칠 수도 없었다. 이따금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여 시가로 엮었다. 대개 가을 쓰르라미나 찬 귀뚜라미와 더불어 풀섶 사이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함께 낸 것이었다. 요컨대 성정의 바름으로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잃지 않으려 한 것이었다. 오래 되어 편을 이루었기에 〈전간기사(田間紀事)〉라고 하였다. -〈채호(采蒿)〉시서(詩序), 2-452
오매(烏昧)는 고사리의 별명이다. 송나라 때 범중엄이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올 때 굶주린 백성들이 양식 삼아 먹던 고사리를 임금께 올리면서 이를 외척들에게 보여 사치를 억제하도록 간언한 일이 있다. 은대의 그림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후한 때 장형(張衡)의 고사에서 나왔다. 자신이 목민관의 처지에 있었다면 민간의 참상을 임금에게 직접 간언하여 바로잡을 수 있겠지만, 죄인의 처지인지라 다만 그 실상을 시로 노래할 뿐이라고 했다. 미자권징(美刺勸懲), 즉 선을 찬미하고 권면하며, 악을 풍자하고 징계하는 《시경》의 시정신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끝에서 성정의 바름으로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잃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성정의 바름이란 무엇인가? 차마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백성들은 기근이 들어 다 굶어죽고 있는데, 위정자들이 이를 외면하고 폭압과 수탈만 일삼는 것은 천지의 화기를 해치는 일이다. 이에 다산은 자신이 직접 목도한 사실을 가을 쓰르라미의 안타까운 울음소리로 함께 울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 죽고 싶을만큼 괴로운 마음을 가눌 수 있겠어서였다. 차마 안타까운 마음으로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시의 형식 또한 《시경》의 풍자 정신을 이어받아 4언 분장체로 썼다. 〈채호(采蒿)〉·〈발묘(拔苗)〉·〈교맥(蕎麥)〉·〈오거(熬麮)〉·〈시랑(豺狼)〉·〈유아(有兒)〉 등의 6편이 그것이다.
이들 시의 사연은 이렇다. 쑥을 캐서 죽을 쑤어 먹는 유랑민들, 마른 모를 뽑아 버리며 통곡하는 농부, 자식을 하나 죽여서라도 비나 한번 쏟아졌으면 하는 쑥대머리 아낙, 조정에서 나눠주라 한 메밀 종자는 주지 않고 백성들에게 형벌을 내리며 빨리 심으라고만 닦달하는 현령, 겨 반 모래 반의 보리죽으로 연명하는 백성들, 관가의 포학을 못 이겨 전부 달아나 텅 비어버린 마을, 자식 둘을 길에다 내 버리고 달아난 어미. 이 피눈물 나는 정경을 다산은 분노와 슬픔을 담아 노래했다. 그 말이 차마 처절하고 참혹하여 읽는 이의 애를 끊는다.
전편이 길어 여기서 다 읽을 수는 없고, 〈유아(有兒)〉의 한 부분을 살펴본다. 앞쪽의 이야기는 이렇다. 길에서 두 아이가 울고 있다. 동생은 겨우 말을 배울 어린 나이고, 형은 쑥대머리다. 왜 우냐고 묻자 아이가 말한다. 아버지는 굶다 못해 집을 나가 안 돌아 오고, 사흘 굶은 어미도 양식을 구걸코자 자식들 데리고 길을 나섰다. 다음은 다산의 물음에 아이가 대답하는 말이다.
동생 울며 젖 찾아도 兒啼索乳
젖은 벌써 말랐어요. 乳則枯萎
엄마가 제 손 잡고 母携我手
이 젖먹이와 함께, 及此乳兒
저 산촌을 찾아가서 適彼山村
구걸해서 먹였지요. 丐而飼之
갯가 시장 데려가서 携至水市
엿까지 사먹이곤, 啖我以飴
길 건너 같이 와서 携至道越
새끼 품듯 동생 안아, 抱兒如麛
동생 깊이 잠이 들고 兒旣睡熟
저 또한 잠잤는데, 我亦如尸
잠깨어 살펴보니 旣覺而視
엄마가 없었어요.” 母不在斯
말하다간 엉엉 울며 且言且哭
눈물 콧물 흐르누나. 涕泗漣洏
저물어 날 어두워 日暮天黑
새들도 집 찾는데, 栖鳥群蜚
힘없는 저 두 아이 二兒伶俜
들어가 잘 집도 없네. 無門可闚
어미는 마지막 남은 엽전으로 엿을 사서 먹인 후, 아이들 둘을 길에다 버리고 달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남아 좀체로 지워지지 않는 슬픈 풍경이다. 다산은 이 광경을 시로조차 남겨 놓지 않는다면, 천지의 조화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적었다. 이것이 다산의 비민보세법이다.
감싸 안아 보듬으라
이 참혹한 가뭄의 이듬해인 1810년에는 여름부터 파리 떼가 창궐했다. 어디서나 먹을 것만 있으면 구름처럼 새까맣게 몰려다녔다. 사람들은 괴변이라 외치며 파리를 소탕하느라 온통 난리가 났다. 그것을 보고 다산은 이 파리야 말로 지난 해 그 극심한 가뭄과 혹한에 굶주려 죽은 자의 시체에서 나온 구더기가 변한 것으로, 굶주려 죽은 자의 전신(轉身)이니 잡지 말고 오히려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했다. 그 사연을 밝힌 것이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이다.
파리야, 날아와라 울고만 있지 말고. 부모 처자 함께 와서 한바탕 배를 채워 유감이나 없게 하렴. 네 옛집 살펴보니 쑥대만 가득하고, 벽과 시렁 무너지고 문짝도 기울었다. 밤에는 박쥐 날고, 낮에는 여우 운다. 네 갈던 밭 바라보니 가라지만 돋았구나. 올해는 비도 많아 진흙길이 미끌한데, 골목엔 사람 없고 황량한 폐허 됐다. 파리야, 날아와라 좋은 고기 많이 있다. 살진 소의 다리는 살집도 넉넉하다. 장을 치고 파를 쪄서 농어회도 차리었다. 네 주린 장을 채워 낯빛을 활짝 펴라. 도마에 남은 고기 네 무리를 먹이렴. 네 시체 살펴보니, 두둑 위에 가로 놓여, 입은 옷 하나 없이 멍석에 둘렸구나. 장마 오고 날이 찌자 이물(異物)로 변하여서, 파먹으며 꾸물꾸물 어지러이 꿈틀댄다. 갈비뼈에 넘쳐나고 콧구멍에 가득하다. 그러다가 허물 벗어 구속에서 벗어나니, 길엔 다만 해골 남아 길 가는 이 겁을 낸다. 어린 것은 가슴 헤쳐 어미 젖을 빨아대네. 마을에서 묻지 않아 산에는 무덤 없고, 구덩이를 가득 메워 잡초만 무성쿠나. 삵쾡이 와 뜯어 먹고 기뻐서 날뛰나니, 나뒹구는 해골에는 구멍 숭숭 뚫려있네. 그대 이미 나비되고 번데기만 남은 것을.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 9-116
굶어죽은 백성들의 원한을 씻겨주는 한바탕 살풀이의 진혼곡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그래도 관아에는 들어가지 말고, 다시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말라고 했다. 다시 한 단락을 보자.
파리야, 날아오되 넋은 돌아오지 말라. 아무것도 모르는 채 늘 어두움 축하한다. 죽어서도 재앙 남아 형제에게 미치어서, 6월에도 세금 독촉 아전들 문을 친다. 사자후 같은 소리 산악을 뒤흔들고, 가마솥도 뺏어가고 소 돼지도 끌고 가네. 관가로 끌고 가서 마른 볼기 치는구나. 돌아와 쓰러져선 염병까지 걸린다네. 풀 베고 고기 썩듯 원망은 끝이 없네. 천지 사방 어디에도 호소할 데 하나 없다. 백성 숨이 넘어가도 슬퍼할 수조차 없네. 어진 이는 움츠리고 뭇 아전들 날뛰나니, 봉황은 입 다물고 까마귀만 시끄럽다.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 9-117
여름에 느닷없이 창궐한 파리 떼에서 다산은 굶주려 죽은 백성들의 처절한 아우성을 들었다. 설사 그들이 지난 해의 참혹한 기근에서 살아남았다 한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가혹한 아전들의 수탈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해골로 누워 아무 것도 모르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했다. 기막히지 않은가.
분노하고 규탄하라
다산의 시에는 백성을 향한 뜨거운 연민과 위정자를 향한 불같은 분노가 서려 있다. 〈고양이 노래[貍奴行]〉(2-441)에서는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잡으라는 쥐는 안 잡고, 엉뚱하게 고기와 술과 양식을 훔쳐 먹는 정황을 노래했다. 다산이 볼 때 위정자란 좀도둑인 쥐보다 더 흉악한 도둑고양이와 같은 존재였다. 〈시랑(豺狼)〉(2-459)에서는 승냥이나 이리보다 가혹한 고을 수령의 탐학을 고발했다. 다산의 시에서 이런 거친 분노의 목소리는 도처에서 들려온다.
다산이 볼 때 백성들의 삶은 삶이랄 것도 없는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희망을 잃고, 윤리도 체면도 없이 악만 남은 존재였다. 다음 〈산옹(山翁)〉을 읽어보자.
산 늙은이 오늘 아침 산촌에서 내려와 山翁今朝下山村
곧 바로 병문안 차 처마 끝에 앉았네. 直爲問疾坐簷端
가난한 남촌 아낙 표독스런 목소리로 南村貧婦聲悍毒
시어미에 성을 내며 소리치다 곡을 한다. 與姑勃谿喧復哭
표주박 손에 들고 큰 아인 비척대고 大兒槃散手一瓢
작은 아인 누렇게 떠 낯빛이 파리하다. 小兒蔫黃顏色焦
우물가 한 아이는 특히나 너무 말라 井上一兒特枯瘦
배는 성난 두꺼비요 볼기는 쭈글쭈글. 腹如怒蟾臀皮皺
어미 가자 아이 털썩 땅에 앉아 울어대니 母去兒啼盤坐地
오줌 똥 몸에 범벅, 콧물도 줄줄 흘러. 糞溺滿身鼻涕溜
어미가 와 때리자 울음소리 다급하여 母來擊兒啼益急
천지가 찢어질 듯 구름 빛도 멈춰서네. 天地慘裂雲色逗
동쪽 이웃 고치실 켜는 소리 탈탈대고 東鄰繰絲聲軋軋
서쪽 이웃 보리방아 찧는 소리 쿵덕댄다. 西隣舂麥聲搰搰
집 북쪽선 소를 몰며 이려이려 소리치나 舍北叱牛聲咄咄
소가 말을 듣질 않아 힘만 온통 빼는구나. 牛不聽戒力但竭
산 늙은이 심란해서 마음을 못 가누고 山翁心煩意未裁
오래 남아 이 험한 꼴 차마 받지 못하네. 不可久留受此災
옷소매 떨쳐 일어 산 위로 올라오니 翩然拂袖上山來
푸른 나무 매미 소리 연꽃이 피었구나. 碧樹涼蟬藕花開
-〈산옹(山翁)〉 2-443
산옹은 산촌을 내려와 남촌으로 친구의 병문안을 왔던 모양이다. 하지만 병문안을 하기도 전에 그는 못 볼꼴부터 보아야했다. 좁은 처마를 들어서기도 전에 악에 받친 며느리가 시어미에게 욕을 해대고, 그리고도 분이 덜 풀려 발악을 하며 우는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영양실조로 걸음이 뒤틀리고, 황달에 걸리고, 배불뚝이가 된 주렁주렁한 자식들은 개돼지의 몰골로 밥 달라고 징징댄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아수라의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이웃들은 그래도 길쌈하고 방아 찧고 소를 끌어 밭갈이를 하는데, 한 집은 병자의 병구완은커녕 산 목숨에 풀칠조차 할 수가 없다. 절망에 찬 며느리의 악지에 찬 고함에 섞여 똥오줌으로 범벅이 된 배불뚝이의 갈라진 울음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노인은 병문안을 포기하고 다시 산골 마을로 올라온다. 쓰르라미는 세상길이 쓰리다고 우는데, 속도 없는 연꽃이 곱게도 피어났다.
다산은 말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라. 이 마음이 없이는 학문도 문학도 아무 의미가 없다. 아롱아롱 무지개가 문학의 본령이라 말하지 마라. 세상과 상관없는 고고한 상아탑을 학문으로 착각 마라. 뜨거운 붉은 마음 없이는 소용이 없다. 제 몸만 아끼고, 제 식솔만 챙기는 공부는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
10-2 간난불최법(艱難不摧法)
2) 간난불최법(艱難不摧法) : 좌절과 역경에도 근본을 잊지 말라
다른 사람이 바야흐로 애비를 개나 염소 같이 보는데도 부끄럽고 욕된 줄 모르고 이렇게 독촉하여 일을 이루려는 행동을 하느냐? 네가 감히 저들의 비웃고 냉소하는 이야기를 애비를 향해 전한단 말이냐? 설령 저들의 권력이 능히 묵은 불씨를 다시 일으켜 나를 쳐서 추자도나 흑산도로 내던진다 할지라도 나는 터럭하나 꿈쩍 않는다. -〈두 아들에게 답함[答二兒]〉9-14
역경에 담대하라
간난불최(艱難不摧)는 어떤 역경과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의 그릇은 역경 속에서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 시련 앞에 쉬 좌절하는 사람은 대부분 작은 성취에 금세 교만해진다. 군자는 태산처럼 늠연한 기상을 길러야 한다. 역경 앞에 담대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변화에 일희일비를 거듭해서는 큰일을 성취할 수가 없다.
다산이 견지한 핵심가치의 두 번째 지향으로 이 글에서는 간난불최를 꼽겠다. 다산은 임금의 사랑을 한 몸에 입어 한창 절정의 순간에 급전직하 나락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셋째형은 참수형을 당해 죽고, 둘째 형은 자신과 함께 귀양 갔다. 한 집안의 풍운이 온통 수렁텅이로 빠져 들었다. 하지만 다산은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학문에 매진했다.
아래 글은 1812년 다산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그해 큰 사면령이 내려 탐관오리는 물론 살인강도까지 모두 석방되었다. 하지만 다산 형제는 그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방해하는 세력들의 집요한 획책이 있었다. 이에 정약전이 답답한 속내를 비치자 다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늘은 이곳 다산을 저의 평천장(平泉莊), 즉 묘자리로 삼고, 보암산의 몇 이랑 밭뙈기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주었으니, 해를 마치고 죽을 때까지 아이의 울음소리나 아낙네의 탄식하는 소리도 없습니다. 복이 이처럼 두텁고 지위가 이같이 높은데, 이런 삼청선계를 떠나 네 겹의 아비지옥에 몸을 던지고자 한다면, 천하에 이처럼 어리석은 자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억지로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마음 속 생각이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성품이 본래 저열하고 나약해서 그런 것이지요. 간음이 죄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혹 남의 처첩을 훔치기도 하고, 가산이 파탄날 것을 환히 알지만 혹 마조나 강패 같은 노름에 빠지기도 합니다. 돌아갈 마음이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종류일 뿐입니다. 어찌 본심이었겠습니까? -〈중씨께 답함[答仲氏]〉 8-234
1814년, 귀양살이는 14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해 4월에 마침내 대계(臺啓)가 정지되었다. 죄인의 명부에서 이름이 빠진 것이다. 이제 관문(關文)만 발송되면 다산은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준흠과 이기경 등이 상소하여 관문의 발송을 막았다. 결국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난 1816년 여름까지도 석방은 요원해 보였다. 아들이 아비의 석방을 위해 여기저기 탐문해 보면, 제가 답답한 것이 없어 내게 애걸하는 편지 한 통 없는데,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네 애비를 석방하는데 앞장 서느냐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답답해진 아들은 아버지에 편지를 보냈다. 요컨대 석방을 막고 있는 강준흠과 이기경, 그리고 홍의호 등에게 잘못을 빌고 석방을 탄원하는 편지를 써서라도 석방 명령이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산은 자식의 편지에 격노했다.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데, 저들이 허물을 뒤집어 씌워 이렇게 오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 편지를 쓴다면 내가 먼저 써야겠느냐, 저들이 먼저 써야겠느냐? 나를 지렁이처럼 보지 않고서야 이리 업신여길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가 앞장서서 아비 보고 잘못을 빌라는 것이냐? 이같은 격렬한 나무람이 이어진 후 이렇게 편지를 맺었다.
내가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진실로 또한 큰일이긴 하다. 하지만 죽고 사는 일에 견준다면 하찮은 일이다. 사람이란 때로 생선을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하물며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사소한 일로 문득 남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동정을 구걸한다면, 만에 하나 국경에 난리가 일어나게 되면 임금을 저버리고 오랑캐에게 투항하지 않을 자가 능히 몇이나 되겠느냐? 내가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요, 능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 또한 운명이다. 비록 그러나 사람의 도리를 닦지 않고서 다만 천명만 기다린다면 진실로 또한 이치에 합당치 않다. 나는 사람의 도리를 이미 다하였다. 사람의 도리를 다하였는데도 마침내 능히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또한 운명일 따름이다. 강씨의 자식이 어찌 나를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냐? 마음을 편히 갖고 염려 마라. 잠시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 합당한 도리인즉, 다시는 이러쿵저러쿵 하지 마라. -〈연아에게 답함[答淵兒]〉 9-13
늠연하고 담대한 다산의 기상이 느껴지는 글이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쓴 바로 다음 달에 흑산도의 정약전은 섬을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내 세상을 떴다. 그리고 나서도 다시 2년이 지난 1818년 8월에야 다산은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절망을 딛고 서라
그 사이에 가슴 속에 들끓는 분노와 갈등이야 왜 없었겠는가? 유배 초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다음 한 수의 시는 다산의 속내를 얼핏 보여준다.
조각달 새벽녘 돋아나오니 缺月生殘夜
맑은 빛 능히 얼마나 가리. 淸光能幾何
겨우겨우 작은 뫼를 기어 올라와 艱難躋小嶂
긴 강을 건너갈 힘이 없다네. 無力渡長河
세상은 단잠에 빠져있건만 萬戶方酣睡
나그네는 혼자 깨어 노래한다오. 孤羈獨浩歌
-〈새벽에 앉아서[曉坐]〉 2-310
다산은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앉아 있다. 세상은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어둠을 밝혀줄 달빛을 안타깝게 기다렸는데,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조각달이 산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고작 저 작은 묏부리 하나 넘어오느라 긴 밤을 다 보낸 눈치다. 그나마 지쳐서 낯빛이 창백하다. 이 산을 넘어 저 강을 건너가 세상 위로 그 빛을 드리웠으면 좋겠는데, 그 앞에는 또 건너야 할 긴 강물이 기다리고 있다. 아마 저 달은 긴 강물을 건너다 말고 그만 빠져 가라앉고 말 것만 같다. 나는 안타까워 죽겠는데, 세상은 온통 깊은 잠에 빠져 나의 이 안타까움을 모른다.
시인은 호방하게 노래한다고 했지만, 읽는 이의 느낌은 안쓰럽다. 어둠을 밝히는 햇빛이 되리라던 날도 있었다. 아니면 둥두렷한 보름달로 중천에 덩실 떠올라 어둠의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도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다 된 밤에 가물가물한 빛을 자옥이며 세상은커녕 작은 묏부리 언저리만 서성대다 저 건너편 세상으로 넘어가지도 못하고 말다니. 조각달의 여린 빛에 얹어 자신의 처지를 비춘 시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끊임없이 자식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포자기에 빠진 자식들의 마음을 다잡았다. 1810년에 자식에게 써준 가계(家誡)의 한 대목을 보자.
나는 가경 임술년(1802) 봄부터 저서를 일 삼아 붓과 벼루를 곁에 두고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았다. 왼쪽 팔은 마비되어 마침내 폐인이 되었다. 시력도 급격히 떨어져서 다만 안경에 의지하고 있다. 이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너희들과 학초(學樵)가 있어 능히 전해 익혀 실추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학초는 불행히 단명하였고, 너희는 영락하여 관심도 없다. 성품이 다시 경전을 좋아하지 않고 다만 후세의 시율만 거칠게 알아 음미할 정도이니, 《주역》과 《상례》 두 책이 마침내 스러져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된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示二子家誡]〉 8-12
귀양 생활 8년 만에 왼팔이 마비되고, 시력은 저하되어 돋보기 없이는 책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경전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다산은 자신이 피땀을 쏟은 연구 성과가 자식들의 무관심으로 세상에서 잊혀지고 말 것을 염려했다. 다산은 다른 편지에서도 여러 곳에서 절망의 현실 속에서 오롯이 세운 자신의 노력을 토로했다. “수년 이래 새벽부터 밤중까지 사색하며 산가치[算籌]를 붙들고 늘어놓으면서 심혈을 쏟아 부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홀연히 마음에서 빛이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중씨께 답함[答仲氏]〉 8-234)나, “오래도록 고요하고 적막하게 지내다 보니 정신이 응축되어 한데 모여 옛 성인의 책에 마음을 오로지 하여 뜻을 쏟을 수 있었네. 그러다보니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울타리의 밖으로 새어나오는 빛을 엿볼 수 있게 되었지.”(〈윤외심에게 보냄[與尹畏心]〉 8-126)에서 보듯 온전히 경학 연구에만 굳건히 몰두하여 조금도 좌절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내 나이 15세 때 서울로 유학해서 육경이 안신입명(安身立命)의 바탕이 됨을 알았다. 규장각 월과문신이 된 뒤에는 육경의 밭에 아직도 떨어진 이삭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너무 바빠 능히 힘을 쏟지 못했다. 한번 귀양 온 뒤로는 하늘이 긴 휴가를 주어 세월이 한가해졌다. 12년간 마음을 쏟아 연구하고 탐색하여 저술한 육경을 마음으로 풀이한 책이 2백 여 권이다. 정밀하게 연구하고 꼼꼼하게 갈고 닦아 감히 거칠고 잡스런 주장은 하지 않았다. 천고에 성인의 정을 환히 밝히고, 사방에 나라의 빛을 더하게 되기를 바란다. 머리털은 그 사이에 짧아지고 이는 빠졌으며, 근골은 다 삭아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윤면채뇌(尹冕采誄)〉7-231
이 절망의 긴 시간을 다산은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로 바꿔 수백 권 저술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던 것이다. 그 동안 그의 육신은 소진되고 고갈되었다.
위기를 활용하라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 있고, 위기 앞에 그냥 주저앉고 마는 사람이 있다. 평상시에는 비슷비슷해 보여도 위기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다산의 위기관리 능력은 탁월했다. 남 탓만 하는 대신 자신을 성찰했다. 백척간두(百尺竿頭)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위기 상황을 그는 오히려 자기 발전의 계기로 역전시켰다.
나는 잘못 간직하여 나를 잃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과거로 명예를 얻는 일이 좋게 보여, 이 길로 빠져든 것이 10년이었다. 마침내 돌이켜 조정에 나아가 갑자기 검은 사모를 쓰고 비단도포를 입고, 백주대로 위를 미친 듯 내달렸다. 이와 같이 한 것이 또 12년이었다. 또 돌이켜 한강을 건너 조령을 넘어 친척과 조상의 산소를 버리고 곧장 어두운 바닷가 대숲 가운데로 내달아 멈추었다. 내가 이에 진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며 내 발자취를 따라 같이 왔다. 내가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던가? 여우 도깨비에 홀렸던 겐가? 아니면 해신이 부르기라도 했더란 말인가? 그대의 집과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초천에 있는데, 어찌 또한 그 근본으로 돌아가질 않는가?” 그러자 이른바 ‘나’라는 사람은 멍하니 움직이지 않고서 무어라 대꾸할 줄을 몰랐다. 그 낯빛을 보니 마치 붙들려 머뭇대는 것 같았고, 좇아 돌아가고자 하나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마침내 붙들어 이와 더불어 함께 살았다. -〈수오재기(守吾齋記)〉6-130
마음을 잃고 허둥지둥 갈팡질팡 헤매다가, 귀양지에 와서야 마음을 다잡아 나를 지킬 수 있었음을 고백한 글이다. 자신을 문득 돌아보매 진땀이 흘렀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렇게 각오를 다져 학문에 곧바로 몰입했다. 주막집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란 이름을 붙여 놓고, 생각은 담백하게, 외모는 장엄하게, 말은 적게, 행동은 무겁게 한다는 네 가지 마땅함을 지키겠노란 다짐을 세웠다.
낙담하여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는 자식들에게도 이 역경을 오히려 기회로 돌릴 것을 다그쳤다.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과 귀가 총명하지 않으냐? 어째서 자포자기 하려는 게냐? 폐족이라 생각해서냐? 폐족은 다만 과거를 보아 벼슬하는데 거리낌이 있을 뿐이다. 폐족으로 성인이 되거나 문장가가 되는 데는 아무런 걸림이 없다. 폐족으로 식견이 툭 터진 선비가 되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다. 거리낌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좋은 점이 있다. 과거 시험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데다, 가난하고 곤궁한 괴로움으로 인해 또 그 심지를 단련할 수가 있다. 지려(知慮)를 활짝 열어 인정물태의 진실되고 거짓된 형상을 능히 두루 알 수가 있다. (중략) 폐족 중에 재주가 우뚝한 선비가 많다.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낼 때 폐족에게 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영달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가려서 막는 바가 없어, 독서하고 궁리함에 능히 진면목과 바른 골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민으로 배우지 않는 자는 다만 용렬한 사람이 될 뿐이지만, 폐족으로 배우지 않으면 마침내 패려궂고 비루하여 가까이 할 수 없는 물건이 되어 세상에 버림받게 된다. -〈두 아들에게 부침[寄兩兒]〉 9-24
폐족이야 말로 역경을 통해 굳건한 심지를 갖추고 과거를 보아 출세하려는 욕심도 없으니 진정으로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요건을 갖춘 것이 아니냐고 했다. 하늘이 폐족 중에 우뚝한 선비를 많이 낸 까닭을 따져 헤아려 보라고 했다. 자포자기하는 대신 견인불발(堅忍不拔)의 각오를 다져 위기를 돌려 기회로 만들 것을 간절히 당부했다.
근검으로 일어서라
앞서 ‘속중득운법(俗中得韻法)’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다산은 자식과 제자들에게 치산(治産)과 경제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적수공권으로 역경을 건너갈 수는 없었다. 다산은 여러 글에서 근검의 미덕에 대해 되풀이해 말했다. 가난에 찌들어 뜻을 잃지 말고 근검을 체질화하여 뜻을 붙들어 세우라고 했다.
가난한 선비가 정월 초하루에 앉아서 1년 양식을 헤아려 보면 진실로 막막해서 하루도 못가 굶주림을 면치 못할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섣달 그믐날이 되어도 그대로 여덟 식구가 모두 살아남아 한 사람도 줄어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되짚어 생각해도 어찌된 까닭인지 알지 못한다. 너는 능히 이 이치를 깨닫겠느냐? 누에가 알을 까고 나오면 뽕잎이 나오고, 갓난아이가 어미의 태를 벗어나 울음소리를 한번 내면 어미의 젖이 이미 줄줄 흘러 내린다. 양식 또한 어찌 족히 근심하겠느냐? 네가 비록 가난하나 근심하지 말라. -〈윤종심에게 주는 말[爲尹鍾心贈言]〉 7-300
가난해도 굶어죽는 법은 없다. 근심한다고 가난이 제발로 물러가지도 않는다. 제비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면 벌레가 들판에 가득하다. 하늘은 만물을 낳을 때 그가 먹을 양식도 함께 준다. 작위하고 영위하여 지나치게 염려하고, 아등바등 욕심을 부려 노심초사할 일이 아니다. 뜻대로 되지도 않을뿐더러 몸을 망치기 쉽다. 항상된 마음으로 뜻을 세우고, 근검으로 가난을 물리치는 것만 못하다.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전원을 남겨줄 만한 벼슬이 없다. 오직 두 글자의 신령스런 부적이 있어 이것으로 삶을 두터이 하고 가난을 구제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는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과 비옥한 땅보다 훨씬 나으니, 일생을 쓰더라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또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又示二子家誡]〉 8-21
다산이 아들에게 준 유산은 ‘근면함’과 ‘검소함’이라는 두 단어뿐이었다. 이어지는 글에서 다산은 이 두 말의 의미를 되새겨 주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것, 사람마다 맡은 역할이 있어 그저 놀고 먹지 않아 잠시도 한가한 시간이 없도록 하는 것이 근면함이다. 오래 입을 수 있는 옷, 굶어죽지 않을 음식으로 아끼고 절약하며 속임 없이 성실한 태도로 사는 것이 검소함이다. 〈윤윤경에게 주는 말[爲尹輪卿贈言]〉에서도 이 두 가지를 들고난 후 “하늘은 게으름을 미워하니 반드시 복을 주지 않고, 하늘은 사치한 것을 싫어하니 반드시 복을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다산은 말한다. 역경 앞에 담대하라.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야 진짜 군자다. 오히려 그것을 밑바대로 삼아 견인불발의 정신으로 위기를 기회로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가난에 주눅들어 뜻을 잃지 말고, 근검의 정신으로 마음을 다잡아라. 위기의 상황에 놓인 뒤에 그 사람이 보인다. 감춰져 있던 본 바탕이 낱낱이 드러난다.
10-3 실사구시법(實事求是法)
3) 실사구시법(實事求是法) : 사실을 추구하고 실용을 지향하라
문루(門樓)의 앞뒤로 구멍 다섯 개를 뚫어 놓았다. 그 이름을 물어보니 ‘오성지(五星池)’라고 했다. 오성지란 장차 물을 부어 성문이 불타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그런데 가로로 구멍을 뚫는다면 어디다 쓰겠는가? 일을 맡은 신하가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만 힘을 쏟아 실용을 강구하지 않으니 안타까워 할 만 하다. -〈전수기의에 발함[跋戰守機宜]〉 6-181
실용을 우선하라
실사구시(實事求是)란 일을 실답게 하고, 바름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겉보기만 번드르하고 실제에 적용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러자면 작업의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쓸모에 맞게 바른 방향을 설정해 나아가 알찬 결과를 얻는 것이 실사구시다.
다산의 모든 작업 밑바탕에 깔린 핵심가치의 세 번째 지향은 바로 이 실사구시의 정신이다. 위 글은 수원 화성 축조 당시 문루 위에 구멍을 뚫어 놓은 오성지(五星池)를 보고 다산이 탄식한 내용이다. 다산은 처음 설계도면을 올릴 적에 〈성설(城說)〉과 함께 세부 도면인 〈옹성도설(甕城圖說)〉·〈포루도설(砲樓圖說)〉·〈현안도설(懸眼圖說)〉과 〈누조도설(漏槽圖說)〉을 지어 올렸다. 누조(漏槽)는 적병들이 성문을 불태우려 할 때 성문 위에 돼지 구유처럼 생긴 물받이를 성문의 길이와 같게 설치해서 물을 내려 쏟게 하는 시설이었다. 다산은 여곤(呂坤)의 《실정록(實政錄)》에 나온 오성지(五星池)의 제도를 채택하여 〈누조도설〉을 지어 올렸다. 높이 한 자 쯤 되는 위치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적이 화공으로 나올 때 물을 쏟아 불을 끄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공사가 완공된 뒤 다산이 오성지의 제도를 살펴보니, 구멍을 뚫은 것이 겉보기만 그럴싸했을 뿐 실제 쓸모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실제 쓰임을 생각하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일을 진행한 폐단이었다.
다산은 모든 일처리에 있어 실용을 가장 우선 순위에 두었다. 중국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적용가능성을 고려하여 실정에 맞게 바꾸었다. 화성 건설 당시 왕명으로 《고금도서집성》과 《기기도설》 등의 서적을 참고하여 기중가(起重架)를 제작할 때도 그랬다. 기아의 톱니바퀴를 만들 기술력이 없었던 조선의 현실을 감안해, 기아 제작을 포기하고 도르래 장치의 성능을 대폭 강화시켜 조선식 기중가를 발명했던 일은 앞서 ‘득당이취법’에서 살펴본 바 있다. 다음 글은 당시 그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병진년(1796) 겨울에 내가 규장각 교서관으로 있을 때, 이 〈기기도(奇器圖)〉를 보고는, 돌아와서 그림 잘 그리는 김생으로 하여금 옮겨 그리게 하였다. 거기에는 인중(引重)․기중(起重) 등 여러 가지 기구와 해목(解木)·해석(解石)·전마(轉磨)·수총(水銃)·홍흡(虹吸)·학음(鶴飮) 등의 종류가 자세히 갖추어졌었다. 병가(兵家)와 농가에서 참으로 이를 강구하여 시행한다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그림에 대한 해설이 상세하지 못하여 그 기관의 서로 연결된 내용을 알 수 없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기기도첩에 발함[跋奇器圖帖]〉 6-177
서양 선교사 테렌츠가 지은 《기기도설》에는 토목 공사 뿐 아니라 일상에서 소용되는 온갖 기계장치들의 그림으로 가득했다. 물을 품어 올리고, 기아장치를 활용해 방아를 찧는 등 온갖 신기한 시설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설명이 너무 소략해서 기관의 연결 장치와 동력의 전달 과정을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에 다산은 화공(畵工)을 불러 책 속의 그림을 좀더 확대해서 크게 그리게 했다. 좀더 차분하게 작동의 원리를 파악하여 실용화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실제 기중가를 고쳐 만들어 4만냥의 경비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또 석재 운반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유형거(游衡車)를 발명했고, 심지어는 호참을 팔 때 흙을 담아내는 가래조차도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 달리 반달 모양의 철인(鐵刃)에 자루를 위로 휘어지게 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노동력의 손실을 막았다. 남의 떡이 아무리 커 보여도 내게 맞지 않으면 아무 쓸데가 없음을 다산은 잘 알았던 것이다. 이런 것이 다산의 실사구시법이다.
합리를 지향하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일처리 방식도 실사구시의 정신에서 나왔다.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측 가능한 기대치를 설정하고, 여기에 맞춰 역량을 쏟아 부었다. 《촌병혹치(村病或治)》와 같은 의서(醫書)를 엮을 때는 시골 사람들이 흔히 앓는 병을 가까이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로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기본 원칙을 지켜 간편한 약방만을 간추렸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의례를 총정리한 《사대고례(事大考例)》를 엮을 때도 그랬다. 그 이전에 편찬된 《동문휘고(同文彙考)》는 관련 문서만 잔뜩 모아 놓고, 실제 경우별로 필요한 사례를 알아 볼 수는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통문관지》와 《동문휘고》를 참작하여 종류별로 묶고 중복을 깎아내며, 불필요한 것을 모두 걷어내, 어떤 경우에도 목차만 검색하면 필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도록 깔끔하게 정리해냈다.
다산의 모든 정리는 이렇게 군더더기가 없었다. 목표와 쓸모를 정해놓고 가장 합리적인 수순으로 과정을 펼쳐보였기 때문이다. 곡산부사로 나가 있을 때 일이다. 국가에 죄를 지어 고을에 귀양 온 사람들이 있었다. 마을의 책임자인 이정(里正)은 가구 수를 헤아려 끼니 때마다 차례로 그들에게 밥을 먹였다. 하지만 인색한 사람이 죄인을 초대하지 않으면 굶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을사람은 마을사람대로 이 때문에 고달프고 괴로운 점이 있었다. 죄인이라 께름칙한데다 대접 받는 이가 조금도 고마운 빛 없이 거칠게 굴면 기분도 나빴다.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다 괴로웠다. 이에 다산은 양쪽의 의견을 다 수렴하여 실정을 파악한 후, 겸제원(兼濟院)을 설립했다. 양측을 앉혀 놓고 수십 조항을 문서로 작성해 약정했다. 양측의 입장을 고려한 합리적 제안이었으므로 모두들 기뻐하며 수긍했다. 불편하고 껄끄럽던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되었다.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도 다산의 실사구시는 늘 힘을 발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년을 맞아 존호(尊號)를 올릴 때도 그랬다. 이때 태비인 정순황후와 태빈인 혜경궁 홍씨에게도 존호를 올리기로 했는데, 봉함 위에 ‘신근봉(臣謹封)’이라 할지, ‘근봉(謹封)’이라고만 할지로 논난이 일었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조정 대신들도 마땅한 전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때 다산은 서슴없이 앞으로 나서 ‘신근봉’이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의정 채제공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제지하는 눈짓을 다산에게 보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론측의 인물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다산이 말했다.
이제 이 옥책(玉冊)·옥보(玉寶)·금인(金印) 등의 물건을 도감의 여러 신하가 자기 이름으로 태비와 태빈께 올린다면, 조정에서 태빈께 대해 평소에 신하를 일컫지 않았으니, 또한 신(臣)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이제 우리 여러 신하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이 옥책 등의 여러 물건을 만들어 대전에 올리는 것입니다. 대전께서 스스로 효성으로 이를 태비와 태빈께 바치시는 것이니, 이제 우리가 대전에 대해 어찌 하여 신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찬묘지명(자찬묘지명)〉 7-108
태빈은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부인이니, 죄인의 아내에게 조정 대신이 칭신(稱臣) 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으므로 이는 자칫 큰 화를 불러들일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쟁점이었다. 하지만 다산은 태비와 태빈께 올리는 것이지만, 왕명을 받아 올리면 임금이 효성의 뜻을 담아 자신이 직접 이를 바치는 모양새가 되므로, 태비와 태빈께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께 올리는 것이라는 단순 명백한 논리로 이런저런 쓸데없는 논란을 일거에 잠재웠다. 채제공도 그제서야 크게 깨달아 좋다고 했고, 온 좌중과 낭관 서리 등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온통 속 시원해 했다.
실상을 파악하라
실상을 파악할 때 다산이 즐겨 쓴 것은 표로 작성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왕명으로 현륭원 식목부(植木簿)를 정리할 때도 수레에 가득한 자료를 달랑 표 한 장으로 정리해 내어 임금을 놀라게 했던 것처럼, 다산은 현실의 소용에 맞게 실상을 파악하고 자료를 장악하는데 뛰어났다.
다산이 곡산부사로 부임하자마자 침기부(砧基簿) 종횡표(縱橫表)를 만들어 고을의 실정을 한 한 손에 장악했던 일은 앞서 ‘지기췌마법’에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실제 예시를 살펴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처음 다산은 고을 아전과 군교(軍校) 중에 입이 무거운 10명을 뽑아 마을별로 보내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보내기 전에 만일 중간중간 확인해서 사실과 다를 경우 엄히 문책하겠다고 다짐을 놓았다. 보통의 경우 호수 조사 때마다 가좌(家坐)의 책자를 작성하는데, 너무 큰데다 보기가 번잡해서 일목요연하지가 않았다. 다산은 이를 가로세로의 빈칸으로 구성된 종횡표로 만들고, 작성 지침을 하달하였다. 다음 표는 다산이 작성해준 지침과 기본표에 따라 작성된 침기부 종횡표의 실제 예이다. 〈호적의(戶籍議)〉(4-145)에 이 표가 실려 있고, 《목민심서》에도 실려 있는데, 둘 사이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아래 표는 《목민심서》의 것이다.
(*표는 깨져서 생략함)
곡산현의 자연부락인 이동리(梨峒里)의 9세대에 대한 침기부 종횡표이다. 각 세대별로 19개 항목에 걸쳐 조사하고, 그 결과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했다. 품(品)은 신분을, 세(世)은 이 지역에서 몇 대를 거주했는지를 나타낸다. 업(業)은 생업에 따른 구분이고 역(役)은 군포를 바치는 숫자다. 택(宅)은 집의 칸수, 전(田)의 숫자는 마지기 단위의 경작 면적을 표시했다. 전(錢)은 동산(動産)이며, 좌(銼) 즉 가마솥의 숫자는 가난한 사람에 한해 기재했다. 종(種)은 기르는 과목의 숫자였다.
이렇게 해서 주민의 신분과 이 마을에 거주 또는 이주한 기간, 생업과 부역 관계, 가옥의 크기와 전지의 넓이, 가족 관계, 가축 사육 실태, 심지어 과수(果樹)의 그루 수와 가마솥의 숫자까지 다 파악했다. 이 표 한 장만 보면 그 마을의 인구 구성과 빈부차, 세금과 부역에 충당할 수 있는 숫자, 구휼 우선 대상 등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마을의 전체적인 살림살이까지 그려진다. 일일이 호적을 뒤져보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조망이 가능했다. 더구나 호적에는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 군역과 호포를 늘이기 위해 조작된 내용들이 허다한 실정이었으므로, 다산의 이 침기부의 효용은 자못 위력적이었다.
10명이 분담해서 작업한지라 실제 자연 부락별로 위와 같은 표를 만들어 정리하는 일은 크게 시일이 걸리지도 않았다. 실제로 다산은 이 침기부를 가지고 고을의 세금 수입원과 부역, 그리고 구휼 대상 등 전체 실정을 손금 보듯 파악할 수 있었다. 엉뚱한 사람에게 부역을 씌워 횡포를 부릴 경우, 침기부를 살펴 그 허위를 지적하면 농간을 부리던 아전들은 무슨 귀신이라도 보는 듯 넋이 나가, 다시는 장난을 치지 못했다. 부피만 많고 가닥은 잡을 수 없던 가좌 책자가 단 몇 장의 도표로 대체되었지만 그 효용은 이전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고을의 실상을 완전히 장악한 다산은 여러 가지 합리적인 시책을 통해 과거 불합리하던 관행을 바로잡고, 잘못된 제도를 개선했다. 《사암선생연보》에는 곡산부사 시절의 치적을 에피소드 중심으로 흥미롭게 정리해 놓았다.
쓸모에 맞게 하라
실사구시란 쓰임새 있는 공부를 하고, 쓸모 있는 작업을 하자는 말이다. 다산은 선배들의 책을 평가할 때도 쓸모의 잣대를 가지고 논단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곤 했다. 그리고 나아가 그 문제점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표란 고금을 종횡하여 같고 다름을 살펴 비교하여 검색과 참고에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서건암(徐健菴)이 상기표(喪期表)를 만든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뜻이다. 다만 그 칸의 범례가 뒤섞여 요령을 잃은 것은 유감이다. 첫 칸은 마땅히 누구를 위해 복을 입는 것인지를 표시해야 한다. 둘째 칸의 첫 줄은 근거가 되는 책 이름을 표시해야 한다. 둘째 줄은 상복을 입는 기간을 표시하는 것이 옳다. 제 셋째 칸 이하는 모두 이것을 본뜬다. 이렇게 했더라면 고금의 같고 다른 제도가 일목요연해져서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았을 것이다. 서공은 오로지 상복을 입는 기간만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친속(親屬)의 갈래에 따라 모으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머니를 위한 복(服)의 경우 참최 3년, 자최 3년, 장기(杖朞)와 불장기(不杖朞) 등 4개 항목에 걸쳐 나누어 실었다. -〈서건학의 상기표에 제함[題徐乾學喪期表]〉 6-223
상례(喪禮)의 각종 절차와 상복(喪服)의 의례, 그리고 경우에 따른 상기(喪期)의 적용은 예학이 경직되어 있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 구체적 적용에 있어서는 워낙 생각지도 못했던 복잡한 경우들이 많아 적용에 큰 애를 먹었다. 다산은 중국학자 서건학(徐乾學)이 상기표를 보고, 그 노고를 치하하면서도, 요령을 잃어 실용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상복을 입는 기간에 따라 각종의 경우를 주욱 나열하다 보니 구체적 사례를 검색하는 것이 이만저만 불편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경우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경우와,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경우, 계모일 경우, 혹은 후처의 자식이 전처에 대한 경우, 어머니가 개가했을 경우 등등 각기 다른 사례가 끝도 없었고, 또 시대별로 적용하는 예법도 각각 차이가 있었다. 지금 당장 상이 나서 복을 입어야 하는데, 어느 겨를에 그 많은 사례를 공부해서 예법에 맞게 법도를 갖출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서건학의 상기표는 별 효용이 없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을 도표화해서 보여줄 생각을 했다는 정도 뿐이었다.
다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례사전(喪禮四箋)》에서 〈상기별(喪期別)〉을 따로 두어 무려 21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망라하고 역대의 적용을 종합해서 총정리했다. 하지만 이 책은 너무 방대하여 전문학자들의 연구용에 알맞았고, 실제 간편하게 가까이에 두고 활용할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이에 다시 그 방대한 《상례사전》을 단 한 권에 간추려 핵심내용만 싣고 《상의절요(喪儀節要)》라 하였다. 또 말로만 비판하지 않고 《상의절요》의 뒤에 〈본종오복도(本宗五服圖)〉와 〈오복연혁표(五服沿革表)〉를 만들어 그 번다한 내용을 하나의 그림과 도표로 압축해 냈다. 특히 〈오복연혁표〉는 친속에 따른 가로 칸과 연혁을 확인할 수 있는 출전 근거를 밝힌 세로 칸으로 구성되어 서건학의 상기표가 가진 문제점을 명쾌하게 해결했다. 이 표 하나만 가지면 대부분의 통상적인 상기(喪期)를 파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산은 말한다. 작업에 앞서 쓰임새를 생각하라. 왜 이 작업을 하는지,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 지를 먼저 점검하라. 현장의 활용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작정 하고 본다는 식은 안 된다. 하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도 안된다. 이렇게 해서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거둘 성과가 없다. 처음엔 비슷해도 중반 이후에는 정보가 뒤얽혀서 손댈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또 그 알맹이는 속이 꽉 찬 것이라야 한다.
10-4 오득천조법(吾得天助法)
4) 오득천조법(吾得天助法) : 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에 몰두하라
《주역사전(周易四箋)》은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어서 쓴 글이니, 절대로 사람의 힘으로 통하거나 지혜로운 생각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히 이 책에 잠심하여 그 오묘한 뜻을 다 통하는 자가 있다면 바로 자손이나 벗일 것이니, 천년에 한번 만난다 해도 애지중지함이 마땅히 보통의 정리에 배가 될 것이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示二子家誡]〉
장점을 강화하라
오득천조(吾得天助)는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일을 이룬다는 뜻이다. 하늘이 자신을 도와 자기를 통해서 이루고자 한 일이니,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슨 작업을 하든지 무턱대고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잘 파악해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핵심 역량을 집중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다산이 견지했던 핵심가치의 네 번째 지향으로 이 글은 이 오득천조를 꼽겠다. 다산은 자신의 작업 뿐 아니라 제자의 육성에 있어서도 이 원칙을 견지했다. 다산 자신은 사변과 궁리보다는 정리와 분석에 탁월한 역량이 있었다. 그의 대부분 작업 대부분이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종합하여 하나의 맥락으로 꿰거나, 복잡한 정보를 간추려 유용한 정보를 얻어내는 방식인 것을 보아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습관처럼 초록하고 일상으로 정리했다. 계속된 작업 끝에 마침내 그가 건강을 잃게 되자, 주변에서는 쓰러져 못 일어날 것을 염려해 작업을 계속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정약전도 다산에게 편지를 보내 이제 저술을 그만 두고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더 전념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이때 보낸 다산의 답장이다.
점차 수렴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힘을 쏟고자 합니다. 하물며 풍병(風病)은 뿌리가 이미 깊어 입가에 항상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는 늘 마비증세를 느낍니다. 머리 위에는 늘 두미협 얼음장 위에서 잉어 낚시하는 늙은이들이 쓰는 털모자를 쓰고 지냅니다. 근래 들어서는 또 혀마저 굳어 말이 어근버근합니다. 스스로 살 해가 길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꾸만 바깥으로만 마음을 내달리니, 이것은 주자께서도 만년에 뉘우치신 바입니다. 어찌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고요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려하면 세간의 잡념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어지러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저술만 못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문에 문득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인법(導引法)은 분명히 유익하지만 게을러서 능히 이것을 하지 못할 뿐입니다. -〈중씨께 올림〉 8-218
이 편지는 1811년, 귀양 온 지 11년 째 되던 해에 쓴 것이다. 이때 다산의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다. 가족의 보살핌 없이 강행군을 거듭한 결과였다. 아마 이때 정약전은 오늘날 맨손 체조에 해당하는 도인법을 열심히 해볼 것을 권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매우 긴 이 장문의 답장을 보면 다산은 공부를 멈추기는커녕 외려 공부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편지만 통해 봐도 이 때 다산은 《주역》의 점치는 법과 화폐 가치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온갖 풀잎과 나무껍질을 채취해서 색색의 물감을 배합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와중에 제자들을 가르쳤고, 지도 제작에 관심을 쏟았으며, 《성호사설》을 간추려 정리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악학(樂學)이라는 강적을 만나 모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 지난 10년간 작업해 온 《아방강역고》를 거의 탈고했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소학주천》과 2천자문 《아학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상서고훈》의 정리도 막 마쳐 정약전에게 감수를 요청한 상태였다.
이 많은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여 놓고 있었으니 건강을 상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더구나 대부분 정보를 종합하고 핵심을 간추려 분석하고 정리하는 성격의 작업이었다. 한 주제를 화두 삼아 내면으로 궁구해 들어가는 그런 공부가 아니었다. 당연히 자료의 검색과 정리 확인에 소모적인 육체 노동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산 자신은 치심(治心) 공부에 몰두하려 ‘정좌징심(靜坐澄心)’ 하려 해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아지기는커녕 잡념만 들끓어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저술 작업에 매달리게 된다고 했다.
개성을 추구하라
다산은 따지기를 좋아하는 학자였다. 따졌다 하면 문제를 명확하고 선명하게 쟁점별로 갈라냈다. 반대로 관념적 지식이나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힘든 추상적 작업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어떤 일을 하던 실제에 바탕을 두지 않는 경우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는 늘 꼼꼼하고 깐깐하게 따져가며 작업했다. 정약전도 다산의 꼼꼼한 성격에 대해 “내 아우가 달리 흠잡을 데가 없지만 그릇이 작은 것이 흠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젊은 시절 문과에 급제한 후 신참례(新參禮)를 할 때도 작은 소동이 있었다. 선배들이 신참들에게 여러 가지 짓궂은 장난을 걸며 괴롭히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었다. 이때 다산은 시종 뻣뻣한 자세로 장난에 응하지 않아 건방지다는 비방이 일었다. 판서 권엄이 이 일을 듣고 다산의 태도를 몹시 나무랐다. 다산이 쓴 답장의 일부다.
새 급제자의 얼굴에 먹물을 칠하는 장난은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고려 말에 귀한 벼슬아치의 자제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면 문득 붉은 분을 써서 얼굴에 칠하던 것이 오래 되자 장난이 되어 마침내 먹으로 바뀐 것입니다. 대개 나쁜 습속일 뿐입니다. 얼굴에 먹칠하고 다니는 것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지라 저 또한 어쩔 수 없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보고 크게 웃는 것이나, 절름발이 걸음으로 게를 줍는 시늉하는 것, 부엉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일 따위는 제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어서, 비록 시키는 대로 해보려 애썼지만 천성이 졸렬해서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고, 팔을 내뻗을 수가 없었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진실로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슴 속에 지니고 있으면서 모멸스런 거동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제가 이에 있어 어찌 일찍이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한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는 본래의 뜻이 명백하나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신 지라 감히 스스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풀리셨다기에 이에 외람됨을 무릅씁니다.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권판서께 올리는 글〉 8-41
짖궂은 장난 앞에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던 다산의 거동이 눈에 선하다. 그는 이렇게 상황에 적당히 타협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 고지식함 때문에 입은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을 끝까지 괴롭혔던 이기경(李基慶)이 자신과 몹시 얹짢은 일이 있은 뒤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부 편지를 보냈을 때도, 다산은 같이 눙쳐서 받아 넘기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받았다.
이제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으니 좋은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마땅히 앞뒤 이야기는 있어야겠지요. 그런데도 싹 빼버리고 하나도 점검함이 없더군요. 그대는 능히 노부(老夫)로 자처하므로 가슴 속에 한 가지 거리낌도 없어 오동나무에 걸린 달이나 버들가지에 부는 바람처럼 텅 비어 맑고 시원스럽겠지만, 이것을 저에게도 기대하셨더란 말씀입니까? 저는 비루하고 인색하여 능히 여기에는 이를 수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그대 또한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을 염려합니다. -〈이기경에게 답함[答李基慶]〉8-81
이 글만 보더라도 그가 모난 처세로 얼마나 손해를 많이 보았을 지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도 가차 없이 시시비비를 가려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벼슬길에서 상관의 명령도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끝까지 듣지 않고 대들었다. 자신의 기준에서 바르지 않거나 수틀린 수작은 결코 절대로 그저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산은 이 고지식한 원리원칙 주의를 밀어 붙어 끝내 자신의 학문적 개성으로 만들었다. 삶과 학문을 일관된 질서로 꿰뚫었다.
잘하는 일을 하라
오늘날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강진 시절의 제자들도 다산의 이러한 훈도를 받아 학문의 바탕을 키워 나갔다. 다산은 제자를 기르는 데 있어서도 그의 특장을 살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쪽으로 북돋워주었다.
제자 황상은 ‘성의병심법’에서 살펴본 대로 다산이 가장 아꼈던 제자 중의 하나였다. 다산은 그를 시(詩) 제자로 인가했다.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추사 김정희는 그곳에서 황상의 시를 본 후 다산의 아들 정학연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제주도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시 한 편을 보여주는데, 묻지 않고도 다산의 고제(高弟)인 줄을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그 이름을 물었더니, 황아무개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를 음미해보니 두보를 골수로 삼고 한유를 근골로 한 것이었습니다. 다산의 제자를 두루 꼽아 보더라도, 이청 이하로 모두 이 사람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또 들으니 황모는 시문이 한당(漢唐)에 가까울 뿐 아니라, 그 사람됨도 당세의 높은 선비라 할만 하여 비록 옛날 은일의 인사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고 합디다. 그래서 육지로 나서는 대로 그를 찾아갔더니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므로, 구슬피 바라보며 돌아왔답니다. 이제 내가 서울로 왔더니 벌써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군요. 제비와 기러기가 서로 어긋남과 같아서 혀를 차며 안타까워 할 뿐입니다. -〈유산의 편지 별지[酉山書別紙]〉, 황상 《치원유고》 중
다산이 세상을 뜬 뒤에 쓴 훗날의 편지지만, 시골의 서생에 불과했던 황상은 어느새 당대의 추사가 이토록 인정할 정도의 시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중앙무대에서도 다산의 제자들은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에서의 작업은 ‘분수득의법’에서 본 것처럼 여러 제자들이 카드 작업과 받아쓰기, 정리 및 필사, 교정 및 대조, 제본과 검토 등 역할을 분담하는 집체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작업에 투입되는 제자들에게 맡긴 역할도 제각금 달랐다. 특기를 길러 각자의 장점을 향상시켜 주었다. 이청은 경전과 역사 방면의 문헌 대조와 비교검토를 전문적으로 맡았다. 이강회는 경전 연구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윤동은 글씨와 정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자식들도 작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다산이 제자들과 공동 작업을 진행하는 몇 광경을 살펴보자.
지금에 《논어》를 공부하지 않는 자들은 사서(四書)의 밭에 반드시 남은 이삭이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굉보(紘父) 이강회(李綱會)가 과거 시험에서 돌아와 발분하여 경전과 예학의 학문에 몸을 돌린지라, 그에게 시달린 바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안경을 쓰고 이에 임하고 있습니다. -〈중씨께 답함[答仲氏]〉8-235
《춘추고징》도 초고는 아들 학유가 받아적었고 두 번째 원고는 이강회가 도왔다고 적고 있다. 《논어고금주》에도 이강회와 윤동이 함께 도왔다는 언급이 보인다. 또 《상의절요》 또한 이강회의 질문에 대답한 내용이었다. 이로 보아 이강회는 사서삼경의 경전 공부와 관련된 학술적 작업에 중심축의 역할을 맡았던 제자임이 드러난다.
경오년(1810) 봄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작은 아들 학유(學游)는 돌아가고, 이청만 곁에 있었다.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어 마음을 붙일 데가 없었다. 당시 《시경》을 강의하고 있었으므로, 남은 뜻을 이정을 시켜 받아 적게 하였다. 이때 나는 풍증으로 큰 곤란을 겪어 정신이 맑지 못했다. -《사암선생연보》 중
다산은 유배 초기에 이청의 집에 2년간 머물렀다. 그는 다산의 측근에서 다산의 작업을 가장 많이 보좌했던 핵심 제자다. 이청은 《주역심전(周易心箋)》의 네 번째 원고를 다듬어 완성했고, 위 글에서 본대로 《시경강의보》를 받아 적었으며, 《대동수경》과 《현산어보》의 정리를 도맡아 안설을 얹은 것도 그였다. 《악서고존》의 구술도 이청이 받아 적었다. 이청은 다산이 마재로 돌아온 뒤에도 스승을 따라가서 함께 머물며 다산의 저술을 보좌했다. 《사대고례(事大考例)》는 다산이 범례와 안설을 작성하고, 이청이 편집의 책임을 맡아 첨삭은 다산의 재가를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로 보아 이청은 정보 검색과 편집 및 정리의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던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의 구술을 받아 정리하고, 자료를 검색해서 근거를 보완하는 일은 대부분 이청이 도맡아 했다.
윤동(尹峒)은 윤종심(尹鍾心)이 본명인데, 다산이 강진 시기 엮어낸 300여권 저술의 2/3가 모두 그의 글씨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주로 필사의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그밖에 두 아들이 대부분의 정리 작업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이들 몇 사람을 주축으로 해서 다산학단의 공동 작업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사실 다산이 한 것은 기획과 작업 방법을 제시한 것뿐이고 실제 조사와 정리는 제자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무리 과정에서 다산의 안목을 더 거쳐서 최종 마무리되었다. 이렇듯 다산은 제자들의 특장을 파악하여, 그들의 역량에 맞는 작업을 집중시킴으로써 균형을 이뤄냈다. 전체 조직을 장악하는 다산의 용인술이 아주 돋보이는 대목이다.
독창성을 지녀라
다산에게서 철저한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스승의 지식경영법을 배워 다양한 독자적 저작을 제출했다. 이들은 스승의 구술을 받아 적고, 범례에 따라 문헌을 뒤져 관련정보를 찾아내던 훈련 과정을 스스로의 작업에까지 미루어 확장시켰다.
큰 아들 정학연은 젊은 날 아버지 다산이 양계를 할 바에는 닭에 관한 문헌 정보와 자신의 기록을 정리해 《계경(鷄經)》으로 엮어볼 것을 권했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가, 원예와 축산 관련 독자 저술인 《종축회통(種畜會通)》 3책을 남겼다. 잠상법(蠶桑法)․재종제론(栽種諸論)․목부(木部)․약부(藥部)․화부(花部)․초부(艸部)․육축부(六畜部)로 구분하여 논한 내용이다. 둘째 아들 정학유도 《시경》에 등장하는 조수(鳥獸)와 초목의 이름을 고증한 《시명다식(詩名多識)》 4권을 남겼다. 두 작업 모두 아버지 다산의 정리 방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이청은 천문과 역상 관련 저술인 《정관편(井觀編)》 8권 3책을 남겼다. 천문 역상에 관련된 동서고금의 학설을 정리한 내용이다. 전체 8편의 끝에는 ‘동국역상(東國曆象)’의 항목을 두어 스승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했다. 하지만 그는 뒤에 70이 되도록 과거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가, 번번이 낙방하자 낙담하여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앞서 ‘성의병심법’에서 본 다산이 황상에게 준 편지에서 이미 이청의 행동을 나무라는 듯한 언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위대한 스승 아래서 훈도된 자신의 학문적 자신감과 이를 펼칠 길 없는 현실의 장벽 앞에서 갈등과 번민을 반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강회의 학문적 성과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몇 년 전 신안군 우이도에서 그의 필사본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잡저(雲谷雜著)》가 필사본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는 스승이 속담을 분류하여 펴낸 《이담속찬(耳談續纂)》을 보충하여 〈방언보(方言補)〉를 지었다. 또 《유암총서》에는 당시의 현안이었던 배와 수레의 제도 및 그 개선방안에 관한 분석적 논문들이 오롯하게 실려 있다. 그는 유구와 마카오, 중국과 필리핀의 배 만드는 기술을 우리나라의 방식과 상세하게 비교해서 장단점을 분석했고, 서양 선박의 특징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나라로 부국강병의 기초를 다지려면 배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음을 역설했다.
황상은 《치원유고(巵園遺稿)》 2책을 남겼다. 추사 형제가 나란히 서문을 쓰고 있을만큼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추사의 동생 김명희는 그의 시가 다산의 가범(家範)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주목했다. 김명희가 그 시의 소종래를 묻자 황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에 들으니, 선생님께서 두보와 한유, 소동파와 육유 등 사가(四家)야 말로 천고의 빼어난 시인이니, 이 4가를 버리고 시를 하는 것은 바른 법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곁으로 다른 시인은 보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쏟아 사가의 시만 읽은 것이 대개 50여년입니다. -김명희, 〈치원유고서(巵園遺稿序)〉 중에서
이렇게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받들어 그 궤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산은 이렇듯 제자들에게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을 중심으로 과제를 부여하여 그들의 성취를 고무했다. 앞으로 다산학단과 관련된 자료들은 계속 발굴되어 학계에 풍성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다산학단이 쌓아올린 성과와 제자들로 이어진 지식경영의 실체는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다산은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해서 기쁘고, 안 할 수 없고, 내가 다른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라. 자신의 장점을 파악해서 개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 저 일 기웃거리지 말고, 핵심역량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분야를 개척하라. 그러자면 평소에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안목을 갈고 닦아야 한다.
10-5 조선중화법(朝鮮中華法)
5) 조선중화법(朝鮮中華法) : 지금 여기의 가치를 다른 것에 우선하라
나는야 누군가 조선의 사람 我是朝鮮人
즐거이 조선의 시를 지으리. 甘作朝鮮詩
-〈노인의 한 가지 쾌사[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제 5, 3-143
여기에 바탕하라
조선중화(朝鮮中華)란 조선을 문화적 선진인 중화로 여긴다는 뜻이다. 우리 것에 대한 자존을 지녀 남을 추종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가치를 추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중국만 기웃거리며 무작정 본떠 따르려는 경향과 대립된다. 중국에서 좋은 것이 반드시 우리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고, 저들이 버렸다 해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도 있다. 우리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지, 맹목으로 추수해서는 안 된다. 나름대로 해야지 덩달아 하면 안 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 것을 제대로 아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산 학문의 다섯 번째 핵심가치는 바로 조선중화의 정신에 있다. 다산은 조선의 학자들이 제 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면서, 중국의 시시콜콜한 역사는 줄줄 훤히 꿰고, 또 그것을 자랑으로 아는 현실을 개탄했다. 남에게 끌려 다니는 주체성 없는 학문을 크게 탄식했다.
수십 년 이래 일종의 괴상한 의론이 있어, 우리나라의 문학을 크게 배척한다. 무릇 선현의 문집은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큰 병통이다. 사대부의 자제로서 우리나라의 고사를 알지 못하고, 선배의 의론을 보지 않는다면, 비록 그 학문이 고금을 꿰뚫었다 해도 절로 거칠게 될 뿐이다. 다만 시집은 급히 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상소문이나 차자(箚子), 묘문과 편지 등의 글은 읽어서 안목을 넓혀야 한다. 또 《아주잡록(鵝州雜錄)》·《반지만록(盤池漫錄)》·《청야만집(淸野謾輯)》 같은 책도 널리 수집해서 두루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두 아들에게 부침[寄二兒]〉 9-8
중국의 역사는 손금 보듯 알고 중국의 고사는 제 집안 일처럼 훤하면서, 막상 우리나라의 옛일은 깜깜하게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책은 펼쳐볼 생각도 않고, 중국 책만 열심히 뒤적인다. 그렇게 해서 애써 글을 지어봤자 후배들 또한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런 공부를 왜 하며 그런 글을 왜 쓰는가? 다산은 아무리 훌륭한 학문을 지녔어도 제 것을 모르면 쳐줄 것이 없다고 나무랐다. 선배의 일화나 고사가 수록된 잡록류의 책들도 부지런히 구해 읽어 안목을 넓힐 것을 주문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곤 한다.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 모름지기 《삼국사기》·《고려사》·《국조보감》·《여지승람》·《징비록》·《연려실기술》 및 그 밖의 우리나라 글에서 사실을 채록하고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넣어 쓴 뒤라야 바야흐로 세상에 이름나고 후세에 전할 수가 있다. 유득공의 《십육국회고시(十六國懷古詩)》를 중국사람들이 판각한 것만 보더라도 이를 징험할 수가 있다. -〈연아에게 부침[寄淵兒]〉 9-18
독서 뿐 아니라 시 창작까지도 우리나라의 역사 고사와 인물 전거를 폭넓게 활용할 때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경쟁력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지금 여기를 살면서 그때 저기만 기웃거린다면 결국 비슷한 가짜가 되는데 그친다. 왜 죽을 힘을 다 쏟아서 배우의 흉내만 내려 드는가? 진짜가 되려면 내 목소리를 지녀야 한다. 지금 여기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 것을 중시하라
우리 것이 아무리 소중해도 입으로만 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의 기호는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저들이 좋아한다고 내가 따라 좋아할 수가 없고, 저들이 싫다 해도 나는 좋을 수가 있다. 여기서 문화의 차이가 생겨난다. 문화에 획일화의 논리는 안 된다.
노인의 한 가지 통쾌한 일은 老人一快事
붓 내달려 미친 노래 짓는 것일세. 縱筆寫狂詞
험한 운자 반드시 구애치 않고 競病不必拘
퇴고하며 구태여 끌지도 않네. 推敲不必遲
흥 이르면 그 자리서 뜻을 펼치고 興到卽運意
뜻 이르면 그 즉시 베껴낸다네. 意到卽寫之
나는야 누군가 조선의 사람 我是朝鮮人
즐거이 조선의 시를 지으리. 甘作朝鮮詩
그대는 그대 법을 씀이 옳으니 卿當用卿法
어리석다 떠들어댐 그 누구인가. 迂哉議者誰
구구한 격이나 율 같은 것은 區區格與律
먼데 사람 어이해 알 수가 있나. 遠人何得知
오만하기 그지없는 이반룡(李攀龍)이는 凌凌李攀龍
우리를 동이(東夷)라고 조롱했었네. 嘲我爲東夷
원굉도(袁宏道)·우동(尤侗)이 이반룡을 후려쳐도 袁尤搥雪樓
중국에선 별다른 말이 없었지. 海內無異辭
등 뒤서 새총을 든 자 있는데 背有挾彈者
어느 겨를 마른 매미 엿본단 말가. 奚暇枯蟬窺
나는 산석(山石) 싯귀 사모하나니 我慕山石句
아녀자란 놀림을 받을까싶네. 恐受女郞嗤
어찌 능히 서글픔 꾸며대어서 焉能飾悽黯
괴롭게 애끊는 소리를 내랴. 辛苦斷腸爲
배와 귤은 그 맛이 제각금이니 梨橘各殊味
기호는 마땅함을 따를 뿐이라. 嗜好唯其宜
-〈노인의 한 가지 쾌사[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제 5, 3-143
다산이 73세 때 지은 시다. 나이 들어 통쾌한 것은 더 이상 격률이나 운자에 얽매이지 않고, 퇴고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된 것이라 했다. 흥이 이르면 쓰고, 뜻이 떠오르면 짓는다. 조선 사람이 조선시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반룡은 우리를 동이(東夷)라고 모욕했다. 그 이반룡을 또 원굉도와 우동 등이 극렬하게 비판했다. 이반룡은 의고주의적 문학 입장을 견지한 반면, 원굉도와 우동은 옛날을 추종하기를 거부하고 거짓 없는 진솔한 감정을 노래할 것을 말했다. 그런데 막상 우리나라에서는 정작 우리를 멸시했던 이반룡은 높이 떠받들고, 그를 욕한 원굉도와 우동은 욕한다. 적의 적은 동지가 아닌가? 물론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지 다산이 원굉도와 우동의 문학 주장을 찬성한 것은 아니다.
다산은 여기서 슬쩍 《장자》의 고사를 끌어들였다. 새는 매미를 노리고, 새총 든 사냥꾼은 그 뒤에서 새를 노린다. 우리가 매미고, 이반룡이 새라면, 원굉도와 우동은 새총 든 사람이다. 이반룡은 제 앞가림 하기 바쁘니 공연히 우리나라를 동이라고 헐뜯을 겨를이 없겠다는 뜻이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를 따지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이 눈치 저 눈치 보다가 하고 싶은 말은 정작 하나도 못한다면 그것이 될 말인가? 차라리 조금 부족하고, 형식이 저들과 달라도 결국은 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옳다.
뒤쪽에서 ‘산석구(山石句)’를 사모한다고 했다. 이에 얽힌 다른 고사도 있지만, 한유(韓愈)가 〈산석(山石)〉시에서 “인생이 이 같으면 절로 즐길만 한데, 어이 꼭 얽매여서 남의 부림 당하랴. 人生如此自可樂, 豈必局束爲人鞿”라 한 구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툭툭 털고 하고 싶은 말만 하기도 바쁜데 왜 이런저런 격식에 얽매여 가짜 글, 거짓 소리만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다산이 말한 조선시 정신의 핵심이다. 차라리 형식을 버릴망정 눈앞의 진실을 노래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배와 귤은 각기 맛이 다르다. 중국과 조선도 각각의 맛을 지니는 것이 옳다. 옛날과 지금, 저기와 여기는 취향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괜스레 형식에 맞추느라 끙끙대지 말고 가슴으로 시원한 소리를 토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산은 우리의 고사나 지명, 심지어 방언까지 시 속에 자유자재로 활용해가면서 조선 사람의 정서가 녹아든 조선 스타일의 한시를 즐겨 창작했다. 〈장기농가(長鬐農歌)〉와 〈탐진촌요(耽津村謠)〉, 그리고 〈탐진농가(耽津農歌)〉 같은 연작시에는 그 지역의 풍속과 생활상, 그리고 그들이 쓰는 언어들이 시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변화를 긍정하라
모든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 처음에 훌륭한 제도도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면 문제가 생긴다. 지금 여기의 실용적 가치를 추구하는 조선중화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변화의 당위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에 일을 막는 자들은 문득 조종(祖宗)의 법이니 의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조종의 법은 창업 초기에 만든 것이 많다. 당시에는 천명을 환히 알 수가 없었고, 인심도 크게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 으뜸가는 공을 세운 장상(將相)들은 거칠고 드센 무부(武夫)가 많았고, 백관(百官)과 사졸에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간사한 자들이 많았다. 저마다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다가, 조금만 마땅치 않으면 반드시 무리로 일어나 난을 일으켰다. 이런 까닭에 거룩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장막 가운데서 비밀스레 꾀하였으나 양옆을 돌아보고 아래위로 얽매이다가 마침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아무 것도 못하게 되었으므로 옛날 하던 대로 따라했다. 하던 대로 하는 것은 원망이 가장 적은 방법이다. 비록 마땅치 않은 점은 있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창업의 초기에는 능히 법을 고칠 수가 없어 말세의 풍속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법을 운영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고금의 공통된 근심이다. -〈방례초본서(邦禮艸本序)〉 6-25
세상이 변해 실정에 맞지 않아 고치려 들면, 조종께서 세우신 법이고 역대 임금이 지켜 온 것인데 어찌 바꿀 수 있느냐며 이를 저지한다. 하지만 막상 따져보면, 처음 이 법이 생겼을 때는 격동의 와중에 임시변통으로 세운 것에 불과했다. 이것이 각종 폐단을 야기하는데도 그들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중국 것도 그들은 이미 바꾼 지 오래 된 것을 우리는 여전히 꽉 붙들고서 그것만을 전부로 알며 살아간다. 시대가 달라지고 공간이 바뀌면 마땅히 바꿔야 한다는 자명한 진리를 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다산은 우리에게 꼭 맞는 것이라면 중국 것이든 일본 것이든 받아들여 우리에게 맞게 고쳐 써야 한다고 여러 글에서 주장했다. 역대 조정에서 지켜온 법도 현실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뜯어 고쳐야 한다고 외쳤다. 이것이 다산이 《방례초본》, 즉 《경세유표》를 편찬하고 《목민심서》를 엮으며, 《흠흠신서》를 편집했던 까닭이었다.
〈탐진농가〉에 보면 강진에서 아이가 작은 가래를 한 손으로 잡고서도 밭 갈고 물대는 힘든 작업을 너끈히 해치우는 것을 보고, 한강 주변에서 쓰는 큰 가래는 건장한 사내가 온 힘을 써도 허리가 시큰시큰 하다며 남쪽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대나무 손잡이에 쇠가락을 묶어 끼워 타작하는 도리깨의 경우 남쪽 것이 북쪽에서 쓰는 것의 호쾌함만 못하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다산은 무엇을 보든지 허투루 보지 않고, 서로 비교하여 더 나은 것을 찾았다. 문제점을 비교하여 향상의 방도를 물었다. 예전 하던 대로 따라하지 않고, 남의 것이라고 배척하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실용에 알맞은 것, 쓰기에 편리한 것뿐이었다.
주체성을 잃지 말라
하지만 이러한 것은 경제와 관련된 실용의 영역에 한한다. 정신의 주체성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원칙이 엄격했다. 다산은 조선중화의 정신을 미루어 확장하여 역사·지리·국방·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적 모델을 찾고 정리하는데 몰두했다. 역사지리에 관심을 두면서 1811년에는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엮었고, 이듬해인 1812년에는 유사시 우리나라 국토방어에 관한 정책 논문인 〈민보의(民堡議)〉를 지었다. 이 경험을 미루어 중국의 《수경(水經)》을 참작하여 우리나라 강줄기를 역사지리학적으로 정리한 《대동수경(大東水經)》을 제자 이청과 함께 엮었다. 명나라 모원의가 지은 《무비지(武備志)》를 보고, 그 단점을 보완해 《아방비어고(我邦備禦攷)》의 편집에 착수했다. 중국 속담집 《이담(耳談)》이 너무 소략하고, 우리나라 속담이 누락된 것을 보완해서 《이담속찬(耳談續纂)》을 편집했다. 《아언각비(雅言覺非)》는 뜻을 잘못 알고 쓰는 우리말을 바로잡으려고 지은 것이다. 저들은 저들의 필요에 따라 각종 저술을 남겼으니, 우리는 우리의 소용에 맞게 우리 것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생각으로는 이른바 중국이란 것이 ‘가운데[中]’가 되는 까닭을 모르겠고, 소위 동국이 동쪽이 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대저 해가 정수리 위에 있는 것을 정오라 한다. 정오는 해가 들고 나는 거리로 따져 그 시각이 같다. 그렇다면 내가 서 있는 곳이 동서의 중앙임을 알게 된다. 북극은 지면에서 솟아 몇 도 정도 높고, 남극은 들어가 몇 도 가량 낮다. 다만 전체의 절반을 얻는다면 내가 서있는 곳이 남북의 중앙임을 알게 된다. 대저 동서남북의 중앙을 얻는다면 어디를 가든 중국이 아님이 없거늘, 어찌 이른바 동국으로 본단 말인가? 대저 이미 어디를 가든 중국이 아님이 없거늘 어찌 이른바 중국이라 한단 말인가? -〈사신으로 연경에 가는 교리 한치응을 전송하는 서[送韓校理使燕序]〉 6-69
다산은 중국이란 관념의 허구성을 해체하고 나선다. 중국은 없다. 어디나 중국이고 누구나 중화다. 요순우탕의 도가 행해지면 중국이고, 그렇지 않으면 중국이 아니다. 그런데 그 도는 지금 우리에게 있고 저들에게는 없다. 다만 농사의 기술과 문예의 재능만은 저들이 우리보다 낫다. 그러니 우리가 지닌 중화의 도를 지켜 간직하되, 우리에게 없는 저들의 기술을 배워오자. 이것이 바로 다산식의 조선중화법이다.
〈척발위론(拓跋魏論)〉에서도 다시 한번 짚어 말했다.
성인의 법은 중국이라도 오랑캐처럼 굴면 오랑캐로 여기고, 오랑캐라도 중국처럼 하면 중국으로 여겼다. 중국과 오랑캐는 그 도와 정치에 달려있는 것일 뿐 강역과는 무관하다. 때문에 주나라의 선조가 훈육(獯粥)과 곤이(昆夷) 가운데 끼어 있어 이적이었지만, 하루아침에 태왕(太王)·왕계(王季)와 같은 이가 일어나 예악과 문물이 본받을 만 해지자 중국으로 쳐주었다. 진(秦)나라의 선조는 백익(伯益)의 후손이라 중국이었으나, 한비자(韓非子) 이후 이익을 숭상하고 의리를 버려 중국과 더불어 우호하기를 즐기지 않았으므로 이적으로 여겼다. 성인이 오랑캐와 중화에 처함이 본래 이와 같았다. -〈척발위론(拓跋魏論)〉 5-169
주체를 높이 세워 조선이 스스로 중화, 즉 문화의 중심이 되고, 이를 밑받침 하는 문물은 밖의 것을 배워와 끊임없이 향상시켜 나가는 것, 이것이 다산이 생각한 조선중화론의 핵심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배워야 할 것은 안 배우고, 안 배워야 할 것만 굳게 지켜 묵수하니 그것을 답답해했다. 심지어 물감만 해도 오색의 범위를 절대로 넘어서지 않아, 새로운 색채가 있어도 버리고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를 ‘안동답답(安東沓沓)’에 비교했다. 일본에 표류한 조선 배를 일본 사람들이 수리해서 보내주면 그들의 좋은 제도를 본떠 배울 생각은 않고, 도착하기가 무섭게 왜놈 것이라며 때려 부수는 고식적인 태도를 통탄했다.
서양의 홍이포(紅夷砲)를 중국과 일본은 벌써부터 받아들여 사용하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활고자가 다 벗겨진 활에다 살촉도 없는 살을 매겨 백보 밖의 과녁을 맞추는 것을 묘기로 여기며 군기(軍器)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큰 소리 친다. 저들이 선진의 농업 기술을 배워 생산력을 급속도로 확장시키고 있는데도 우리는 꿈쩍도 않고 예전 방식만 고집한다. 이러니 무슨 발전이 있고, 무슨 변화가 가능하겠는가?
다산은 말한다. 우리 것이 소중하되 우리 것만으로는 안 된다. 속도 없이 덩달아 해서는 안 되지만, 내 것만 좋다고 우기는 것은 더 나쁘다. 정신의 주체를 굳건히 세워라. 그 바탕 위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구하라.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 마라. 하지만 변해서는 안 될 것까지 바꾸려 들면 주체가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