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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이다56] 지리산 39...지리산의 큰 울음과 선열들의 피끓은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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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윤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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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산장 뒷 봉우리. 덕유산, 진양호, 사천만이 발아래 환히 보인다.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세석산장의 연달래의 향기가 코끝에서 막 사라지는가 싶으면, 이제 촛대봉이 멀지 않다. 이곳에서 연하봉에 이르는 능선에는 1m 정도의 암괴들이 분포하고 있을 뿐 뚜렷한 특징은 나타나지 않는다. 세석산장에서 2.7㎞ 지점에 있는 연하봉은 10~15m에 이르는 암괴들이 주봉을 이루면서 지리산 능선에서 가장 절경을 보여준다. 또한 그 주변에도 1~5m 크기의 원형의 암괴들이 다양한 형태를 연출하며 분포되어 있다.
파쇄절리(破碎節理)가 잘 발달하여 풍혈이나 다양한 형태의 형상석들이 많이 있으며, 연하봉에서 바라보는 능선이나 계곡의 원경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드디어 장터목 산장이다. 이제 천왕봉이 코 앞이다. 촬영=윤재훈 기자
저 아래를 보니 1,750m 고도의 위치한 장터목 산장이 보인다. 이 지역은 약간 평탄한 지역이 있어서인지 옛부터 남쪽의 거림이나 중산리에 사는 백성들과, 북쪽의 백무동 쪽에 사는 백성들이 올라와 장터가 열리던 곳이다. 그 후로 생활이 나아지면서 장터는 없어지고 등산객이 늘어남에 따라 누군가 산장을 지어 운영하다가, 지금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6㎞ 떨어진 백무동에 이르는 계곡과 5.3㎞ 지점의 중산리에 이르는 계곡의 갈림길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지형적으로 뚜렷한 경관의 특징은 나타나지 않는다.
천왕봉에 이르기 전 마지막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제석봉은 노고단과 유사한 형태의 대규모적인 평정봉으로 암괴들이 조금씩 노출되어 있다. 또한 지리산 일대 최대의 주목인 고사목 지대로서 초원과 더불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제석봉에서 바라본 천왕봉의 경관은 월출산의 천왕봉과 유사한 원추형의 산지 형태로서 요철이 크게 나타나는 암석 미지형의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의 침엽수림, 주목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리산에서 바라본 사바(娑婆). 촬영=윤재훈 기자
영남과 호남의 양 지방에 걸쳐서 경계를 이루고 있는 위치적 특성과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험하지는 않다. 이런 지형적 특징이 특이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우선 백제의 망국민 일부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섬진강을 따라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그 도피처로서 지리산을 찾는 경우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는 병화(兵火)와 흉년이 없는 피란 · 보신의 땅을 찾는 정감록신앙(鄭鑑錄信仰)으로 사람들이 또 지리산을 찾게 된다.
『정감록』 감결(鑑訣)과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 記)』 『도선비결(道詵 訣)』 『남사고비결(南師古 訣)』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 『이토정가장결(李土亭家藏訣)』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 등 도참서류(圖讖書類)에는 대부분 피란 · 보신의 장소로 열 군데(이름하여 十勝地라고 함)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운봉두류산(雲峰頭流山), 즉 지리산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정감록 관념은 한말(韓末)에 이르러 농민운동에 실패한 동학교인들이 유민이 되어 흘러 들어오고, 이들 일부가 신흥종교를 개창하였다.
민간인 학살의 상징물 ‘손가락총’, 여수 오동도의 여순사건 기념관. 촬영=윤재훈 기자
오늘날 계곡 도처에 흩어져 있는 사찰과 산신당 이외에 이러한 민족종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산간 마을이 일부 흩어져 있는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갱정유도(更正儒道) 신자들로 구성된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도인촌일 것이다.
그들은 묵계리를 전설상의 청학동(靑鶴洞)이라 일컬으며 댕기 머리와 상투. 바지저고리로 우리의 전통문화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청학동은 선조 때의 문인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靑鶴集)』에 신선에 대한 기록에서 나온 말로, 우리 민족의 이상적인 길지로 구전되어 오던 곳이다.
이런 명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에서는 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그들의 이익에 따라 한 민족이 좌·우로 나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된다. 여기에 이승만과 서북청년단들이 일으킨 제주 4.3항쟁에 이어, 1948년 10월의 여순 항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되고, 그 중 일부가 지리산으로 쫓겨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1950년 6·25 때에는 북한군의 패잔병 일부가 되어 노고단과 반야봉 일대를 거점으로 떠돌다가 민족 간의 깊은 상처를 남기며 아픈 손가락이 된다. 그런 흔적들이 여수의 유명한 오동도에 가면 여순사건 기념관에 <손가락 총>으로 남아있다.
통천문. 촬영=윤재훈 기자
천왕봉에서 0.5㎞ 지점인 1,890m 고도에는 15~20m 높이의 수직암벽이 10m 폭의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 중앙에는 7m 높이와 5m 폭의 돌출 암괴가 위치하면서 그곳을 경계로 양측에 2~3m 폭의 공간이 나타난다.
이 공간의 상부에는 정상부근의 암괴와 중앙부의 암괴가 파괴됨으로써 형성된 터널인 '하늘과 통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통천문이 있다. 이 통천문은 지리산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석문이라 할 수 있다.
천왕봉 아래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 판독하기 위해 분필로 따라 쓴 모습. 사진=국립공원공단 제공.
천왕봉 아래에서는 2024년 8월에 바위에 새긴 글씨가 발견되었다. 구한말 문인 묵희(1875~1942)가 짓고 권륜이 1924년에 새긴 것으로 확인이 되었는데, 이 글은 중국 고전들에 나오는 오랑캐 침략 관련 고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라며 나라 잃은 슬픔을 비통해하는 말로 맺고 있다.
아! 지리산. 촬영=윤재훈 기자
이 바위 글씨는 1894년 전후 지리산에서 의병을 조직해 일제에 대항하려 했다고 전해지는 경남 합천 출신 권상순 의병장의 후손이, 2021년도 9월에 발견한 뒤 국립공원공단에 지난해 11월에 조사를 요청해 확인됐다. 천왕봉 바로 아래 자연석 바위에 392자의 한자로 새겨져 있으며, 글자가 새겨진 면적은 폭 4.2m, 높이 1.9m에 이른다.
지금까지 전국의 국립공원에서 확인된 근대 이전의 바위 글씨 190여 개 가운데, 가장 높은 지대(해발 1900m대)에 쓰여 있고 글자 수도 가장 많다. 이 글을 국역한 최석기 한국선비문화 연구원 부원장은
이라고 설명했다. 송형근 국립공원공단 이사장도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정상에서 일제에 대항한 의병과 관련된 바위 글씨가 발견된 것은 국립공원 문화유산의 가치를 높여주며, 지리산 인문학과 지역학 연구에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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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훈 기자yunjaeh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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