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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성당
1. 한국 천주교회의 첫미사
1779년 이벽을 중심으로 학자들이 천진암에 모여 서학을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서의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하여 학자들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서 한국 교회 최초의 정식 세례자가 되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여러 학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함께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호남의 사도라 불리던 유항검은 신자들 스스로 성사를 집행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하기로 하였다.
1789년 윤유일이 북경에 파견되었고, 그 곳에서 평신도에 의한 성사 집전의 부당함을 깨닫고 돌아온다. 1790년 윤유일은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다시 북경의 주교에게 파견되었고, 이 요청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곧 신부의 파견을 약속하였고, 아울러 윤유일에게 미사경본 등의 성물을 들려 보내고 포도주 담그는 법 등을 알려주면서 성직자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1791년 2월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가 조선으로 파견되어 변문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나기로 하였으나, 신해박해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조선 교회에서 사람을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써 첫 사제의 영입은 무위로 끝난다. 조선 교회는 1793년 다시 윤유일과 지황을 북경에 보내 사제 파견을 거듭 요청하였고, 이에 주교는 학문과 인품을 갖추었고 조선 사람과 비슷한 풍모를 지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794년 12월 23일 조선의 신자들을 만나 조선 땅을 밟은 주문모 신부는 1795년 1월 4일 한양에 도착하고,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마련한 북촌심처(北村深處) (가회동 관할 구역)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그로부터 언어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그곳에서 주문모 신부는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를 봉헌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가회동은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가 집전된 장소요,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의 거점으로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2. 가회동 순교 복자
1795년 6월 27일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바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고, 최인길은 사제의 복장을 하고 중국말을 하면서 포졸들을 맞아 주문모 신부 대신 체포된다.
그러나 곧바로 신부가 아님이 밝혀지면서 윤유일, 지황과 함께 포도청에서 곤장을 맞고 6월 28일 순교하였다.
1801년(신유박해) 순교할 때까지 주문모 신부는 북촌에 있던 강완숙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그 사이에 주문모 신부는 전국을 순회하기도 하고, 박해를 피해 한 동안 한양을 떠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간 북촌에 머물면서 북촌의 석정보름 우물물로 세례를 베풀기도 하고,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등의 사목활동을 하였다.
한편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숨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제의 모든 사목 활동을 도왔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을 여성 회장에 임명하였고, 강완숙은 노비에서 왕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류의 여성들을 만나 전교에 힘써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니, 주문모 신부의 입국 당시 4,000여 명이었던 신자가 5년 만에 1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여성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강완숙과 함께 살면서 성물을 만드는 등의 노력으로 주문모 신부의 사목을 돕고, 또 기도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살고자 하였다.
윤유일의 4촌 동생인 윤점혜(아가다)는 온전한 신앙생활에 대한 염원으로 동정녀로 강완숙이 집에서 거주하며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주문모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돕다가 1801년 7월 4일 순교하셨다.
또 그녀의 동생 윤운혜(루치아)는 남편 정광수(바르나바)와 함께 신앙생활을 위하여 서울 벽동(가회동 근처)으로 이주하여 살며 집에 집회소를 마련하고, 상본과 성물을 만드는 등 주문모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돕다가 1801년 5월 14일 순교하셨다.
최인길 마티아와 첫 미사
북경교구청은 조선의 자생교회에 놀랐지만 미사나 고해성사는 성직자에 의해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부랴부랴 신부를 파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때는 조선이 쇄국정책을 쓰고 있었기에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면 금방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우리나라 사람과 가장 모습이 비슷한 중국신부를 보내게 된다.
그 분이 바로 주문모 신부님이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12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에 밀입국한다. 겨울에 입국하게 된 것은 압록강이 얼기 때문에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해서 얼음을 밟고 국경을 넘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 드디어 최인길(마티아) 집에서 성직자에 의해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된다.
하지만 밀고자가 생기게 되어 주문모신부의 수배령이 내려지게 되자 최인길이 자신이 주문모 신부라고 거짓 자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역관(오늘날의 통역관)이었으므로 중국말을 굉장히 잘했기 때문에 주문모 신부라고 자수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주문모 신부가 아님이 밝혀지고 주문모 신부는 다시 쫓기는 처지가 되었고 최인길은 곤장을 맞자 죽는 장하치명을 당했다.
첫 미사 전경은 고증에 의해서 복식이나 그때 당시 첫 미사를 드렸던 정황들을 고려하여 수년에 걸쳐서 정성껏 만들고 봉헌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 인형 작가인 임수현(제노베파) 자매가 수년에 걸쳐서 제작한 작품으로서 현재 한옥의 큰 방에 상설 전시되어 있으며 역사전시실의 영상 전시로도 볼 수 있다.
_강완숙 골롬바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골롬바) 집에서 숨어서 지내게 된다. 강완숙은 과부였고 남편 없는 아녀자 집에 외간 남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 문화 안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므로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안전하게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강완숙의 집도 북촌에 있던 충훈부 정문 쪽이라는 기록이 있고 가회동 관할 내에 있다. 한옥의 작은방에는 강완숙의 집에서 숨어 지내던 주문모 신부님을 재현한 것인데, 안을 들여다보면 숨어있는 인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주문모 신부이다.
마찬가지로 집의 형태나 옛날 복식 등 고증을 통해 임수현(제노베파)이 제작한 것이다. 강완숙 집에서 숨어 지내지만 강완숙도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아직 잡히지 않았으므로 주문모 신부가 중국으로 갔는지 안 갔는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해서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고 할 것이며 많은 신앙인들이 힘들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목자가 양을 버리고 가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겨 한양으로 되돌아 와서 자수를 한다.
결국 목을 잘라 처형하는 군문효수로 순교한다. 주문모 신부는 백성을 위해서 죽은 것이다. 이렇게 목자와 양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 놓은 사이가 되었다.
3.박해에대한 신앙의승리
조선 천주교에 파견된 첫 사제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는 “북촌 심처(北村 深處)”라고 불리던 가회동 본당 지역의 최인길(마티아)의 집에서 지내며 언어를 배우면서 많은 신자들에게 우선 세례를 베풀고, 1795년 4월 5일 예수부활대축일에 조선의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첫 미사가 드려진 이후에 불행하게도 밀고자가 나오면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수배령이 전국에 내려졌다. 이 사건을 북산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시 역관이었던 최인길(마티아)는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주문모 신부라고 자칭하면서 자수하였으나 발각되고,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을 도왔던 윤유일, 지황과 함께 단성사 자리에 있었던 좌포도청에서 장하치명을 하게 되었다. 한편 주문모 신부는 초대 여성총회장이었던 강완숙(골롬바)의 집(북촌 가회동본당 관할구역)으로 피신을 하였고, 이후 1801년 순교할 때까지 주로 그곳에 기거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다.
100여 년에 걸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조선 황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황실 가족이었던 의친왕 ‘이강’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왕비 ‘김숙’은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1955년 가회동 본당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신앙의 진리가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경향신문 1955년 8월 18일 기사 내용
고종 황제 둘째 아드님인 이강 의친왕은 8월 16일 안국동 별장에서 불우한 평생을 마치었다. 풍문여고 교사 뒷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고풍스러운 별궁에서 파란 많은 이른 아홉 해의 생애를 끝마친 것이다. 한국에 살아 남아 있는 이 왕가로서는 오직 한 분인 의친왕이 서거한 날 아침 이렇다 할 조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망자를 위한 연도의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영전 앞에 모신 사진을 확대 복사하는 데도 당황해야 하는 가운이기도 했다. 섬돌 밑이 도는 낡은 마루 위에 가마니가 깔려 있고 그 앞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포 앞에 조그마한 상이 마련되어있고 상 위에는 가톨릭 식대로 십자가와 촛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말없이 누워있는 의친왕 앞에서는 8인의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를 할 뿐이었다....
그는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부를 청해 영세받기를 원했다. 그는 입교 동기로서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 최근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 후 날로 천주교 세력이 번성해가는 것은 진리였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 하는데, 그가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시내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영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의친왕의 영결미사는 20일 오전 10시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4.순교 신앙의 승리
한국천주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례 없이 사제, 수도자를 포함한 선교사 없이 자생한 유일한 교회이다.
쇄국정책을 하고 있었던 1700년대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에서 스스로 천주교서적을 구입해 연구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국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순번을 정해서 미사와 성사를 주기 시작했는데 이를 가성직제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자들이 교리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서 가성직제도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는 북경교구가 설립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북경교구청에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아무도 신앙을 전해주지 않았고 선교사를 보낸 적도 없었는데 스스로 연구하여 신앙을 받아들인 사실에 북경교구청의 주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북경교구는 교황청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고 전 세계의 지역교회에서도 이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성사는 성직자에 의해 거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북경교구청에서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쇄국정책 때문에 서양인사제를 보내지 못하고 한국 사람과 외모가 비슷한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은 1794년 12월 압록강이 얼 때를 기다려 주문모 신부를 밀입국 시키는데 성공했다.
주문모 신부는 북촌심처라고 불리던 가회동본당 지역에 와서 많은 신자들에게 우선 세례를 베풀고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최인길(마티아)집에서 드디어 조선의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 장소는 북촌심처라고 칭했던 지금의 북촌한옥마을 언저리였다.
지금은 그 당시와 지도가 너무나 많이 바뀌어 어느 지점이었다고 특정할 수는 없으나 북촌한옥마을의 한 복판에 자리 잡은 가회동 본당 근처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첫 미사가 드려진 이후에 불행하게도 밀고자가 나오면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수배령이 전국에 내려졌다. 이 사건을 북산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시 역관(지금의 통역관을 칭함)이었던 최인길은 주문모신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주문모 신부라고 자칭하면서 자수를 하게 되었다. 그가 아무리 중국말을 잘 했어도 조선인이라는 것이 금방 들통이 나면서 모진 고문을 받게 되었다.
결국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을 도왔다가 체포된 윤유일, 지황과 함께 지금의 단성사 자리에 있었던 좌포도청에서 장하치명(매 맞아 죽음으로 순교함)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첫 천주교 박해인 을묘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수배 중이었던 주문모 신부는 초대 여성총회장이었던 강완숙(골롬바)의 집(가회동본당 관할지역)에서 피신을 하게 되었다.
당시 혼자 사는 여인의 집에 외간남자가 같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당시 독신이었던 강완숙의 집에서 숨어 지내는 것이 안전했다.
주문모 신부를 아직 잡지 못했던 조정에서는 박해를 더욱 심하게 했기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희생되면서 주문모 신부는 본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는 국경을 넘기전에 “목자가 어찌 양을 버리고 떠날 수 있겠는가” 크게 자각하고 자수하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발걸음을 한양으로 돌려서 자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는 두 번째 박해인 신유박해(1801)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양 귀에 화살을 뚫고 목을 친 다음에 그 목을 긴 창에 꽂아 높게 들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 처형)를 당한다.
이어 같은 해에 강완숙도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어서 기해박해(1839)에는 앵베르주교(아베마리아의 작곡가 구노의 절친한 친구였고 구노는 이를 슬퍼하며 성가 284장 “무궁무진세에”를 작곡하여 봉헌하였다.),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였다. 병오박해(1846)에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였고, 병인박해(1866) 때에는 베르뇌주교, 다블뤼 주교가 순교하였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박해인 기묘박해(1879)까지 100여 년에 걸친 모진 박해는 황실에서 주도했다.
103위 순교성인들을 비롯해서 아직 성인품에 모르지 못해 성인 청원을 올린 하느님의 종과 그 외의 무수한 순교자들은 모두 세상의 눈으로 보면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목 잘려 죽고, 마치 인생을 실패하고 불운하게 죽어간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박해를 주도했던 황실은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힘과 권력으로 천주교신자들을 박해하고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사교)로 여기고 씨를 말리기 위해서 모조리 잡아 죽였다.
그래서 황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승리자의 모습으로 보였을 지 모르나, 마지막 황실에서 모두 천주교를 받아들이므로 해서 마침내 신앙이 승리하였슴을 입증하게 된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친왕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왕비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가회동 본당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순교자들이 믿었던 신앙의 진리가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가회동본당에 보관되어있는 옛 세례 문서를 가회동본당 사무장(김상규)이 찾아내었는데 의친왕의 이름이 ‘이 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왕조가 끝났음으로 ‘왕’이라는 호칭 대신에‘公’을 사용했다. 그리고 의친왕이 선종할 때 당시의 신문기사에서 의친왕이 세례 받은 동기를 알 수 있다.
고종황제 둘째 아드님인 李堈이강 義親王의친왕은 8월 16일 안국동 175번지 별장에서 불우한 평생을 마치었다. 풍문여고 校舍교사 뒷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古風고풍스러운 別宮별궁에서 파란 많은 이른 아홉 해의 생애를 끝마친 것이다. 한국에 살아남아 있는 李 王家이 왕가로서는 오직 한 분인 義親王의친왕이 서거한 날 아침 이렇다할 弔客조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亡者망자를 위한 鍊禱연도의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靈前영전 앞에 모신 사진을 확대 복사하는 데도 당황해야 하는 家運가운이기도 했다.섬돌 밑이 도는 낡은 마루 위에 가마니가 깔려있고 그 앞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屍布시포 앞에 조그마한 床상이 마련되어 있고 상위에는 가톨릭 식대로 십자가와 촛불이 안치되어 있었다.말없이 누워있는 의친왕 앞에서는 8인의천주교 신자들이 “主주는 蕩子탕자 비오를 긍휼히 여기소서.”하면서 기도를 할 뿐 12시까지 별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 중략 )
그는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가톨릭에 歸依귀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부를 청해 領洗영세받기를 원했다. 그는 入敎입교 동기로서 자기의 先祖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 最近史최근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贖罪속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 후 날로 천주교 세력은 繁盛번성해가는 것은 ‘眞理진리’였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 하는데 그가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 妃비 金淑김숙(77세) 여사도 시내 嘉會洞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領名영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의친왕의 영결 미사는 20일 오전 10시 明洞명동 천주교성당에서 거행되었다.
<京鄕新聞> 1955년 8월 18일
을묘박해(1795)로 시작하여 기묘박해(1879)까지 모두 황실에서 주도하였다. 황실에서는 옥쇄로 도장을 찍은 척사윤음을 전국에 배포하고 천주교를 씨를 말리려 했다. 그러나 뿌리째 뽑으려고 했던 그 천주교가 오히려 확산되고 신자들을 죽일수록 신자들은 살아나니 천주교가 바로 진리라는 것을 마지막 황실에서 시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황실에서 세례 받았다는 것은 순교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것이다.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이 최종의 승리자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지막에 승리할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천주교의 신앙인들이 어리석어보이고 패배자같이 보여도 결국 진리가 승리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가회동성당관할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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