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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님(고선 정병)께서 첫 게시글에 올려주신 한재선조와 선비정신에 대한 글을 잘봤습니다.
저도 연도별로 보기쉽게 연보를 작성해보았던 자료가 있어서 올려봅니다.
[ 이 목 (李 穆 1471년 ~ 1498년) ]
◎ 휘(諱): 목(穆)
◎ 본관(本貫): 전주(全州)
◎ 자(字): 중옹(仲雍)
◎ 호(號): 한재(寒齋)
◎ 한재당(寒齋堂: 경기도 기념물 제47호)
◎ 시호(諡號): 정간(貞簡)
시법(諡法)에 의하면 정간(貞簡)의 뜻은,
不屈無隱曰 貞 (불굴무은왈 정 : 굽히지 않고 숨김이 없음을 정)
正直無邪曰 簡 (정직무사왈 간 : 정직하여 사특함이 없음을 간)
[출처:『한재문집(寒齋文集), 증시사적(贈諡事蹟)』,p.523~525.]
정간(貞簡)이라는 시호(諡號)는, 민진후(閔鎭厚, 1659~1720)가 숙종(肅宗)에게,
이목(李穆)의 시호를 내려줄 것을 건의하자 숙종이 이를 윤허하여 증시하도록 명하였다.(숙종 43년)
[출처:『숙종실록(肅宗實錄) 60권,숙종43년 8월28일』]
그리고 5년 후인 1722년(경종 2년)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1471년 7월(1세): 경기도 김포에서 참의공 이윤생(李閏生)의 둘째 아들로 출생.(성종 2년)
● 1478년(8세): 글을 배우기 시작함.
● 1484년(14세): 당시의 거유 (巨儒)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함.
● 1487년(17세): 문사를 공부하되 글은 좌씨춘추(左氏春秋)를 좋아함.
북송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범중엄을 좋아함.
[출처:『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제10권 묘지(墓誌), 한국고전번역원]
범중엄의 인물 됨됨이를 소학집주(小學集註)에서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출처:『소학집주(小學集註), 가언(嘉言) 제5(第五)』]
● 1489년 3월 7일(19세):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문(성종 20년)
이 무렵 참판(參判) 김수손(金首孫)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성균관에서 강론하면서
그의 비범함을 알고 사위로 삼음으로써 예안김씨를 부인으로 맞이함.
[출처:『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 1490년(20세): 이목(李穆)이 성균관에 있을 때 성종(成宗)이 병들어 대비(大妃)가 무녀(巫女)를 시켜 반궁(泮宮)의 벽송정(碧松亭)에서 기도를 베풀게 하니, 이목이 성균관 유생을 데리고 무녀를 매질하여 내쫓았음.
성종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성균관에 명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기록하게 하자, 모든 유생들이 달아났지만 이목 혼자 도망하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성종이 그 직절을 가상하게 여겨 술을 내려 장려하였음.(성종 21년)
[출처: 이목(李穆)의 직절(直截),『영조실록(英祖實錄)』]
[출처:『영조실록(英祖實錄)』,부록(附錄), 영조대왕 행장(行狀)]
[출처:『연려실기술』,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492년 12월 4일(22세): 간신 윤필상이 정승이 되어 정권을 제 멋대로 휘두를 당시 그는 가뭄으로 인해 글을 올리기를 "윤필상을 삶아 죽여야 하늘이 비를 주시리라"고 하며 영의정 윤필상의 간교한 행위를 지적하여 그를 간귀라고 상소를 올림.
[출처:『성종실록(成宗實錄) 272권, 성종23년 12월4일』]
이로 인해, 이목 등 8명의 유생을 의금부에 가두게 함.(성종 23년)
[출처:『성종실록(成宗實錄) 272권, 성종23년 12월4일』]
● 1492년 12월 14일(22세): 성종의 전교가 있어 의금부에서 풀려남.(성종 23년)
[출처:『성종실록(成宗實錄) 272권, 성종23년 12월14일』]
● 1493년 10월 12일(23세): 김수손을 연경(북경)에 보내 정조(正朝: 신년축하의례)를 하례하다.
[출처:『성종실록(成宗實錄) 283권, 성종24년 10월12일』]
이 시기에 장인 김수손을 따라 명나라 연경(북경)으로 유학을 간것으로 추정.(성종 24년)
● 1494년 3월 10일(24세): 김수손(金首孫)이 연경(북경)에서 돌아와 귀국함.(성종 25년)
[출처:『성종실록(成宗實錄) 288권, 성종25년 3월10일』]
이 시기에 장인 김수손을 따라 연경(북경)에서 귀국함.
[출처:『국역한재집』p.136]
※ 연경(북경) 유학시절 차문화의 견문을 통해, '다부(茶賦)'를 지은것으로 추정.(연대미상)
● 1494년 12월 24일(24세): 성종 대조전에서 승하함.(성종 25년)
[출처:『성종실록(成宗實錄) 297권, 성종25년 12월24일』]
● 1494년 12월 29일(24세): 성종 장례식에 불교의식인 수륙재(水陸齋)를 반대하기 위해 상소를 올림.(성종 25년)
● 1495년 1월 27일(25세): 수륙재(水陸齋) 반대 상소로 인해 충청도 공주로 유배되다. (연산군 1년)
[출처:『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2권, 연산1년 1월27일』]
● 1495년 5월 22일(25세): 충청도 공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남.(연산군 1년)
[출처:『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5권, 연산1년 5월22일』]
● 1495년 11월 6일(25세):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서 '인재득실책'으로 장원급제(壯元及第) 하여 정6품의 성균관 전적과 종학사회를 제수받음.(연산군 1년)
[출처:『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 1496년(26세): 진용교위(進勇校尉: 정6품 무관)로 영안남도(지금의 함경남도) 병마평사(兵馬評事: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인 정6품 외직 무관직)로 부임.(연산군 2년)
● 1497년(27세): 휴가를 하사받아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했고, 아들 세장(世璋, 6월 22일 출생)을 낳음.(연산군 3년)
● 1498년 7월 26일(28세): 이날 밤, 큰 바람이 불고 큰 비가 물쏟듯이 내렸다.(연산군 4년)
[출처:『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30권, 연산4년 7월26일』]
윤필상 등이 사초 사건 관련자 김일손, 권오복, 이목 등의 죄목을 논하여 서계(조선시대 임금의 명을 받은 관원이 임무를 완수하고 보고하는 문서)하다.(연산군 4년)
[출처:『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30권, 연산4년 7월26일』]
● 1498년 7월 27일(28세): 김일손, 이목, 허반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알리고 중외에 사령을 반포하다.(연산군 4년)
[출처:『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30권, 연산4년 7월27일』]
※ 윤필상, 유자광, 이극돈 등 훈구파가 성종실록 사초(史草)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실로 김종직 학파인 사림파를 모함하여 김일손, 이목, 허반 등 많은 선비들이 억울하게 처형 또는 유배 당했는데, 이것이 바로 무오사화(戊午史禍)이다.(연산군 4년)
●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인해 부관참시란 혹형까지 당함.(연산군 10년)
● 1507년: 연산군이 축출되고 중종(中宗) 이 등극하자 그분의 억울했던 죄명이 벗겨져 관직이 복직되고 가산도 환급받음.
(중종 2년) [출처:『중종실록(中宗實錄) 3권, 중종2년 6월18일』]
● 1552년: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겸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동지 춘추관 성균관사를 증직 받음.(명종 7년)
● 1558년 11월 16일: 배(配) 정부인(貞夫人) 예안김씨(1478.1.15 ~ 1558.11.16)
[출처: 전주이씨족보]
● 1581년: 충현서원(忠賢書院, 충청남도 공주 소재)에 배향.(선조 14년)
● 1625년 5월 16일: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묘표문을 지음.(인조 3년)
[출처:『이평사집(李評事集)』부록(附錄), 한국고전번역원]
● 1632년: 증손자 이구징(李久澄, 1568~1648)의 부탁으로 장유(張維, 1587∼1638)가 묘지명을 지음.
[출처:『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제10권 묘지(墓誌), 한국고전번역원]
● 1717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 좌빈객, 오위도 총부 도총관 등 정2품의 관직을 추증 받음.
민진후(閔鎭厚, 1659~1720)가 이목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고하자, 숙종이 윤허하여 증시하도록 명함.(숙종 43년)
[출처:『숙종실록(肅宗實錄) 60권, 숙종43년 8월28일』]
● 1722년: 숙종이 증시할 것을 명한지 5년 후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짐.(경종 2년)
● 1726년: 그의 절개를 영원히 기리도록 부조지전(불천위 不遷位: 나라에 큰 공훈(功勳)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祠堂)에서 제사(祭祀) 지내게 하던 특전(特典))이 내려짐.(영조 2년)
[출처:『국역한재집』p.406]
※ 불천위(不遷位): 중국 고대 은(殷)나라에는 2조(二祖) 3종(三宗)으로 일컫는 사람들이 있다.
2조는 설(契)과 탕(湯)이며, 설(契)은 상(商=은나라)의 시조,
탕(湯)은 하(夏)나라(B.C.2070년경~B.C.1600년경)의 걸(桀)왕을 치고
상(商=은나라)(B.C.1600년경~B.C.1046년경)을 건국한 왕이다.
3종은 태갑(太甲, B.C.1582년경~B.C.1571년경), 태무(太戊, B.C.1486년경~B.C.1422년경),
무정(武丁, B.C.1250년경~B.C.1192년경)으로 은나라를 중흥시킨 왕들을 말하며, 태갑은 태종(太宗: 4대 왕), 태무는 중종(中宗: 9대 왕), 무정은 고종(高宗: 22대 왕)을 말한다.
옛날에는 제왕중에 공이 있는 왕을 조(祖), 덕이 있는 왕을 종(宗)이라 칭하는 바 이들 조종(祖宗)은 별도로 불천지묘(不遷之廟)를 세워 오래도록 모시었다.
춘추전국시대때 송(宋)나라(B.C.1040년경~B.C.286년경) 대공(戴公, BC.799년경~BC.766년경 在位) 대부인 정고부(正考父, B.C.?~?)가 주(周)나라(B.C.1046년경~B.C.256년경) 선왕(宣王, B.C.828년경~B.C.782년경 在位) 때 태사(太師)에게 상송(商頌) 12편(현재, 시경에는 상송 5편만 남아있으며, 나머지 7편은 공자가 시(詩)를 엮을때 이르러 망실된 것으로 보인다)을 얻어 돌아와 그 선왕(先王)에게 제사하였다.
[출처:『시경(詩經)』, 20권(卷二十), 상송사지오(商頌四之五), 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2002, p.418]
[출처:『춘추(春秋)』, 세계도(世系圖), 학민문화사, p.88]
[출처:『춘추(春秋)』, 송세계십오(宋世系十五), 학민문화사, p.108]
● 1781년: 황강서원(黃岡書院, 전라북도 전주 소재)에 추가로 배향.(정조 5년)
● 1848년: 한재당 건립.(헌종14년)
● 1849년: 통진(通津: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일대 지역의 옛 지명) 여금산(餘金山) 아래에 사우(祠宇: 사당)를 짓다.
종손이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하게 되자 조정에 품의(稟議)하여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예에 따라 나이가 많고 관작이 높은 후손이 봉사하라"는 전교를 받다.(헌종 15년)
[출처:『국역한재집』p.406]
[참고문헌]
1. 이목(李穆),『한재문집(寒齋文集)』
2.『한재문집(寒齋文集), 증시사적(贈諡事蹟)』
3. 이목(李穆),『국역한재집』, 최영성 편역, 도서출판문사철, 2012, p.136.
4.『성종실록(成宗實錄)』
5.『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6.『숙종실록(肅宗實錄)』
7.『영조실록(英祖實錄)』
8. 장유(張維),『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제10권 묘지(墓誌), 한국고전번역원
9. 『전주이씨족보, 정축보(丁丑譜)』,1697, p.玄(三).
10.『전주이씨족보, 경술보(庚戌譜)』,1850, p.洪.
11. 김장환,「한재 이목 선생 연구에 관한 확인 연구」, 석사학위논문(2009),
한서대학교 건강증진대학원
12.『소학집주(小學集註))』, 가언(嘉言) 제5(第五), 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1996,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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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후손들의 한재선조에 대한 배움에 도움되고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출처까지 명기한 좋은 자료 공유에 감사하고,
갈수록 게재 내용도 풍부해지고 활기를 띠는 카페를 보며 애쓰는 진석씨의 노고에 재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