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 확대에 이어 남은 문제는 제품의 질을 높인 뒤 판매ㆍ영업망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모나미 물감과 왕자파스의 판매 신장세가 계속됐지만 나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일본 제품에 비해 아직 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크레파스의 경우 일본 제품은 부드러우면서도 색깔이 곱게 칠해졌다.
반면 우리 제품은 크레파스가 딱딱해 쉽게 부러지는데다 질감도 거칠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한 뒤 나는 일본 거래처인 우치다요코(內田洋行)측에 일본의 3대 문구 제조회사중 하나인 데라니시(寺西)화학에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데라니시화학은 그동안 우치다요코를 통해 광신산업에 기터(Guiter)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를 수출하던 바로 그 회사였다.
나는 데라니시화학측과 크레파스 제조기술 제휴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사카(大阪)에 도착해 만난 데라니시화학 사장에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기술 제휴를 부탁했다.
불현듯 62년 볼펜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오토볼펜을 방문했다가 마쓰모토(松本) 전무로부터 취조당하듯 질문 공세에 시달렸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60대의 노(老) 사장은 의외로 순순히 기술 제휴를 약속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데라니시화학이 경영난에 봉착했을 때 한국의 광신산업이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를 대량 구입해주는 바람에 회사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데라니시화학 사장은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 한다”면서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준 친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고도 기쁜 일”이라며 기술제휴에 흔쾌히 응해줬다.
데라니시화학은 약속대로 내가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술과장을 직접 광신화학으로 파견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회사에 머물며 크레파스를 만들 때 색소와 왁스를 배합하는 방법과 왁스 제조법 등을 전수해줬다.
이로써 우리는 비록 일본 제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국내 제품 가운데는 최고 품질의 그림물감과 크레파스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오토볼펜이나 데라니시화학의 경우처럼 일본 기업들이 언제나 그렇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데라니시 화학 기술과장이 다녀간 뒤 회사 생산부장을 일본으로 보냈다.
데라니시화학의 크레파스 제조 공정을 견학하기 위해서였다. 1주일만에 귀국한 생산부장의 출장 보고 내용은 그러나 실망스러웠다. “일본 시장에서는 데라니시화학 제품보다 사쿠라(櫻)와 펜텔(Pen-Tel)의 크레파스가 더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두 회사와 기술제휴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데라니시화학과의 관계 때문에 일단 미뤘다. 몇 년뒤 연구실장과 함께 사쿠라 크레파스를 방문했지만 나는 보기좋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공장 견학은 물론 기술 제휴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보지도 못한 채 나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발길을 펜텔로 돌려 기술제휴가 가능한지 여부를 타진해보았지만 역시 실패였다. 기술제휴는 하지 않으니 아예 방문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차가운 반응만이 되돌아왔던 것이다.
기업이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우수한 제품과 기술, 그리고 소비자들의 변함없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기업의 힘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모나미가 다양한 제품과 우수한 질로 국내외 무대에서 경쟁력을 높여 가던 80년대 후반, 나를 문전박대했던 사쿠라크레파스측이 모나미에 합작공장 설립을 제의해왔다.
성사되진 않았지만 나는 새삼 모나미의 높아진 위상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리고 기업의 세계에서는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