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비’를 부르는 색의 언어
- 진은영의 시를 읽고
임희선(시인)
“랍비는 힘든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숲속에 들어가 불을 피우고 기도했는데 그러면 문제가 곧 해결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며 차차 불과 장소와 주문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은 잊혔고 이 신비의 체험은 다만 글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아감벤은 불과 글의 첫 장을 유대 신비주의에 관한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짧은 이 한 편의 이야기로 그는 ‘신비(불)’와 ‘문학(글)’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에 따르면 신비를 상징하는 ‘불’이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꺼지고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 나타나 생명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 ‘글’이다. ‘불이 사라진 후’에야 글쓰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우리가 망각한 ‘신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방식 또한 글쓰기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들의 시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신비에 관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 오래전 불 피우고 기도하며 겪었던 ‘이상한 신비’의 체험을 시를 읽으며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진은영의 시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 ‘색(色)의 언어’를 통해서일 것이다. 진은영의 시에서 ‘색’은 양적으로도 방대하지만, 질적으로도 특이성을 지닌다. 그의 시에서 ‘색’은 세계에 대한 시선을 바꾸는 일에 기여하고, 시에 내재된 정치성 또한 그러한 방식(미적 혁명의 기획)1)으로 정립되는데 “시인은 침묵함으로써 대화하는 사람”이라 했던 그의 발언을 떠올려 본다면 진은영식 ‘색의 화법’은 가장 적합하고 정교한 시적 언어이자 잃어버린 신비를 되살리는 유용한 도구로 보인다.
진은영의 시에서 색의 화법이 강한 추동력을 발휘하는 방식은 ‘불화’인데 이는 분명함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경계하고 ‘언제나 자명한 것’의 무력화(해체)를 시도하는 형식으로 강화된다. 표면적으로 현상되는 색은 수많은 색의 집적물이기 쉽고, 선명함의 배후에는 알아차리지 못한 배제와 포섭이 작동하기도 한다. 그래서 초록의 내면은 온통 초록일 수 없고, 흰색의 내부에서 정작 흰색의 부재가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진은영의 시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섣불리 동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의 질서에 ‘불화’를 일으킨다.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엎지른다
나는 붉은색이 없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 「봄이 왔다」 전문
초록이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그러나 이는 봄의 출현이 지니는 일양성과 관련 없다.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때맞춰’ 엎질렀을 뿐이다. 그러니 “봄이 왔다”는 인식은 ‘시각’적 통제로부터 개시된다. 모든 개인은 의지와 무관하게 초록으로 뒤덮인 세계에 기입되어 동일한 시각적 체험을 거쳐 자연스럽게 ‘봄’을 체득한다. 이제 ‘봄’은 초록으로 뒤덮이는 ‘공간’ 이미지와 심연에 은폐된 색을 떠올려야 하는 때, ‘시간’ 이미지로 탈바꿈된다. 이런 무차별적 획일화(단일 색)와 행위 주체(사내)에 대한 각성은 화자가 희생을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기존의 통념은 이때 전복되어, 진은영 시에서 초록(녹색)은 온통 부정성으로 나타난다.
하늘은 푸른색 칸막이다
좀더 위쪽의 신비를 가려놓은
……
녹색 종양이 자라는 팔월의 나무
뱀처럼 기다란 죽음이 나를 감아 오르고 있다
- 「소멸」 부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평면의 초록빛을 만드는 풀 깎는 기계를 구입하셨다
옛날의 방식과 똑같다
- 「예언자」 부분
푸른색(「소멸」)은 “위쪽의 신비를 가려놓은” 답답한 “칸막이(통제)”며 “팔월의 나무”에 기생하는 “종양(죽음)”이다. 또한, 옛날과 똑같은 폭압적 방식으로 안정성과 평온함을 강제하는데 동원된다. “너무 높은 푸른 벽돌로 둘러싸인 시간”(「유년 시절」)과 “죽은 쥐와 고양이의 부패한 몸에서 흘러나온 녹색 웅덩이”(「방법적 회의」), “커다란 뚜껑이 달린 푸른색 쓰레기통”, “열어보지 않으면” “모든 것이 푹푹 썩어가도” 그저 “산뜻한 세상”(「푸른색Reminiscence」)이 온통 초록이다. 그래서 화자는 ‘폭력의 중지(中止)’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손목을 자르기로 한다.
동물 대부분은 붉은색을 보는 시각 체계가 없다. 붉은색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과 영장류뿐이다. 그래서 붉은색의 결여가 신경 쓰이고, 그것의 필요를 채우려 힘쓰는 모든 과정은 곧 ‘인간다움’의 확인절차와 같다. 즉, 진은영 시에서 ‘인간다움’은 숨기거나 방치된 (붉은)색을 꺼내 세상에 드러내놓는 일이다.2) 은폐하고 망각한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고, 일정한 시기마다 문득문득 되살아나 덧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색’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견고한 기제이지만, 그 안에 은폐 혹은 망각된 기억을 내장한 불분명한 기제이기도 하다. ‘색’은 언제든 퇴색 또는 변형 가능한 가변성 때문에 보는 이에게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진은영의 시에서 ‘색’은 갈등과 저항의 기억이 망각된 하나의 사태이다. 그 이면과 실체를 들춰냄으로써 진은영의 시는 안정된 일상에 불화를 일으키고 불편함을 야기한다.
진은영식 색의 언어가 가지는 특이성은 평범한 색채 비유에서 좀 더 뚜렷해진다. 그의 시는 가끔 ‘보다 잘 말하려는 의지’ 혹은 ‘보다 다르게 말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지양하는 지극히 평범한 색채 비유를 진은영의 시는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새빨간 피”, “하얀 종이”, “검은 심지”, “푸른 바다”, “흰 달걀”, “빨간 사과” 등 너무 친숙한 단어들의 ‘존재 증명’에 굳이 ‘색’을 소환하는 일은 무용(無用)해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사물의 속성에 이미 귀속돼버린 색을 기어이 호명하는 까닭은 ‘색’의 지위를 찾아주려는 의지이다. ‘사과’를 발음하는 순간 ‘빨간색’, ‘바다’를 말하는 순간 ‘푸른색’을 떠올리는 무심함은 앞서 ‘봄’을 ‘초록색’으로 기억할 때와 같은 폭력성을 작동시킨다.
먼저 살핀 아감벤의 사유를 이어가자면 ‘글’은 인간의 삶에서 ‘불(신비)’을 잃은 대가로 획득한 것이다. 진은영의 시는 언어가 발휘하는 효용성보다는 ‘소통’이라는 기능을 위해 제물로 바쳐진 ‘신비’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단어에 잠식된 ‘색’을 호명해 ‘의미 작용’ 대신 ‘시각적 환기’에 몰두한다. 이때 ‘감각의 재분배’가 일어나고 배제됐던 타자성이 발현된다. 방치됐던 타자성은 호명을 통해 ‘있음’을 증언하고 이것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아감벤의 말을 빌자면 “작가는 변함없는 자세로 오로지 문학, 즉 ‘불의 상실’만을 믿을 줄 알아야 하고 … 망각의 바닥에서 사라진 신비가 뿜어내는 검은빛의 조각들을 식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 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 「사랑의 전문가」 전문
이 시에서 ‘사랑’은 ‘인간다움’으로의 이행이다. 나는 절망해야 할 상황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돌멩이의 일종”, 분노해야 할 현실에서 움직이지 않는 “식물의 일종”, 타인이 겪는 고통의 깊이를 헤아릴 줄 모르는 “바다의 일종”이었다. “사랑의 전문가”는 ‘건드리고’, ‘부러뜨리고’, ‘발가락을 담그’는 행위들을 통해 나의 내면에 동요(動搖)를 만든다. 그래서 자연물과 다름없던 나는 비로소 세계의 질서에 물음을 갖고, 작은 불씨 하나만 떨어져도 활활 “불타오를 준비”를 마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하”는 무서운 절망 또한 배운다. ‘사랑’은 특정한 삶의 에토스가 변화하는 것이며 내 안에 타자를 들이는 일이다.
이 시에서 ‘피’, ‘발가락’, ‘물’을 수식하는 말들은 좀 더 세심하고 다채로운 감각적 변형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고 평이한 ‘색채 비유’를 고집한 이유는 ‘빨간색’과 ‘흰색’, ‘푸른색’을 새로운 이름으로 ‘등록하기’ 위해서다. 색이 빠져버린 ‘피’와 ‘발가락’과 ‘물’은 식별이 어려운 ‘물체’일 뿐이다. ‘색’은 사물을 ‘그것답게’ 만든다. 그러므로 색의 강조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를 만난 것처럼 질료에 대한 통일된 약호의 권역에서 빠져나와 새롭고 능동적인 감각을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이렇듯 언어에서 ‘의미’ 대신 ‘색’을 떼어내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진은영의 시가 ‘신비’를 부르는 방식이다.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가시적 색채를 단순 반영한 듯한 비유가 진은영의 시에서는 오히려 능동적인 ‘이미지 강화’를 이루어낸다. “하얀 밥알들”, “흰 이”, “흰 양파”, “붉은 간(肝)”, “노란 탱자” 등 색이 전경화되는 표현들은 기꺼이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 이것은 일반적 인식의 경계(警戒)로부터 발아하는 것이 진은영의 시가 담지한 미학적 감각이자 독특한 정치성이기 때문이다.3)
진은영의 시에서 ‘색’은 ‘없으면서 있는 힘’, ‘가능태로서 역동성’을 발휘한다. 그의 시에서 사물은 새로운 방식으로 결집⦁재구성된다. 이때 ‘색의 재구축’ 도구로 회색과 검은색이 동원된다. 수많은 색을 잠재태와 가능태의 상태로 집적하고 있는 회색은 명암 중심의 시적 감응을 요청한다. 하나의 거대한 그리자이유4)로 표현된 세상에서 나무들은 슬픔의 기름이 흐르는 “회색 밑둥”(「지난해의 비밀」)이다. 단단한 성벽에서는 “회색 벽돌”(「무질서한 이야기들」)이 떨어지고, 수챗구멍 위에는 머리카락처럼 “회색의 풀들”(「방랑자」)이 붙어 있고, “회색 리넨 바지”(「슬픔의 작은 섬」)를 입은 이들은 화를 내며 걷고 있다. 성모도 “회색 두건”(「오월의 별」)을 쓰고, 의심하는 이들은 “회색사과”(「아빠」)를 나눠 먹는다. “영원한 녹색에서 영원한 회색으로”(「방랑자」) 세상은 곳곳에 “회색 종을 달고서”, “슬레이트 지붕의 부서진 회색 위”(「이 모든 것」), “회색 도관”(「전생」)으로 버려져 있다. 거대한 회색 덩어리로 재구성된 세상은 명암이 뚜렷해지며 감각과 인식의 재편성을 이룩한다.
검은 벽
검은 별과
검은 병이 뒤척이던
향기 나는 몸뚱이의 지진
- 「청춘 4」 부분
진은영의 시에서 눈에 띄게 많이 출현하는 단어가 ‘검은’이다. 그동안 그의 시가 끊임없이 망각된 타자와 조우하고, 배제된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해온 만큼 ‘검은 칠’은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찬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기 위한 ‘그리타주’5) 작업이다. “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견습생 마법사」)” 이 세상에 불 피우던 신비는 사라지고, “백주 대낮에는 하느님이 정하신 일만 일어나므로(「교실에서」)” 사람들은 남의 일에 무감하다. “슬픔이 하느님보다 힘세다는 (「나는 도망 중」)” 사실과 “하느님은 다리를 절며 걸어나오(「카살스」)”는 절름발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무지하다. 그래서 ‘시인의 글쓰기’는 세계의 온갖 사물에 ‘검은’ 칠하고, 날카로운 ‘감식안(예술의 옷)’을 도구로 ‘긁어내기’를 시작한다. ‘검은’ 칠을 하는 밑 작업은 모든 존재의 움직임을 멈추는 저항행위(cisto)6)이고,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내는 작업은 새로운 존재생성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삶에 깊이 침투해 신비를 망각한 언어의 심연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색의 수런거림을 듣는다. 그러므로 진은영식 ‘색의 언어’는 은폐된 다색성(多色性)을 되찾아 ‘신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오래된 거리처럼(「청혼」)” 사람과 시를 사랑하는 것이다.
1) 예술은 저항하는 동시에 단지 저항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미학적(감성적) 공동 세계의 형성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정치적이다.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95쪽.
2) 붉은빛의 원천인 안토시안이나 노란색, 갈색을 내는 카로틴(Carotene), 크산토필(Xanthophyll) 등의 색소는 나뭇잎 속에 내내 ‘가능성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나무가 월동준비를 하는 가을에 비로소 익명성을 벗고 유의미하게 작동한다. 엽록소 때문에 망각의 색으로 내재해 있던 빨강, 노랑, 갈색은 이 시점부터 정체성을 발휘하고 망각의 색은 다시 녹색으로 대체된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의 팽팽한 길항작용을 통해 나무는 색을 입고 벗는 행위를 수행하며 자신의 생(生)을 구성하는데, 이 메커니즘 속에 배제된 ‘색의 징후’를 발견해내는 것이 진은영의 시이다.
3) 언어를 사회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표현되지 않은 현실이 잠재하고 있다.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텍스트는 언제나 현실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현실적인 것을 자체 구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점은 이런 일들이 현실적인 것을 부인함과 동시에 행해진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비평용어사전, 국학자료원, 2006, 830쪽.
4) 회색조의 색채만을 사용하여 그 명암과 농담으로 그리는 회색 단색 화법이나 그 화법의 그림.
5) Grattage ‘마찰’, ‘긁어내기’를 뜻하는 미술용어로 스크래치라고도 함. 밝은색으로 밑부분을 가득 채워 색칠한 후, 검은색을 덮어서 칠하고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서 그리는 그림이 대표적임.
6) 라틴어 어원 cisto(저항하다)라는 말에는 ‘멈추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임희선
1974년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 수료.
2014년 애지 등단, 문학과사람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