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목사(1865-1942)

1.출생:1865년 12월 23일 그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남.
2.어린시절
①어려서부터 남다른 총명함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줄줄 외웠고 글과 그림에도 재주가 있었고 특히 붓글씨가 뛰어나 12살 때 백일장에서 장원할 정도였음.
②그는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농민출신이기에 출세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고 괄괄한 성격에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결국 평양성이 알아주는 깡패가 됨.
③의협심이 강했던 그는 백성에게 거만하게 굴던 평양좌수를 폭행하여 옥살이함.
3.평양의 소문난 깡패
①그가 19살 때 동학운동에 가담한 후 ‘서양인들이 조선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말을 자주 듣고는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하고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함.
-1890년 어느날 평양 서문통 사거리에서 노방전도하던 마펫선교사에게 돌을 던졌고 순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선교사는 이때 턱뼈가 부러졌음.
②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터가 된 평양을 빠져나와 원산으로 피신했고 전 재산을 잃어버린 그는 담뱃대에 그림을 그려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음.
4.예수님을 영접하여 새사람(1894년 30세)
①어느날 그는 노방전도하던 스활른선교사의 모습을 보며 마펫 선교사의 턱뼈를 부러뜨린 일이 생각나 마음이 심란했고 그날밤 겨우 잠이 들어 장엄한 음성을 들음.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는냐? 너는 나의 복음을 증언할 사람이다” -> 깜짝 놀란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고백하며 회개함.
②그후 그는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전군보(田君甫)라는 사람의 전도로 드디어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2년뒤 1896년 스활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평양으로 돌아온 이기풍은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이 돌을 던져 상해를 입힌 사건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였음.
③1898년(34세)부터 매서인(성경책을 팔며 전도)으로 함경도 각지를 돌며 복음 전파함.
-친구들은 변화된 이기풍을 보며 ‘예수 귀신 붙었다’고 비난하였지만 그는 마펫 선교사를 따라 황해도의 안악, 신천, 해주, 평양 등지에서 전도함.
④그는 1902년부터는 황해도의 여러도시에서 조사(전도사)로서 일하였는데 이때 마펫 선교사의 권고로 1903년(39세)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함.
-1907년 이기풍은 길선주, 서경조,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와 함께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7인 목사중 한명’이 됨.
5.제주도 최초의 선교사: 초기 사역과 계속된 수난
①1907년 장로교 독노회에서 제주도선교사로 이기풍목사 파송을 결정함. 1908년 1월 11일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목사의 설교로 파송예배를 드렸음.
②이기풍 목사는 인천항을 출발하여 1908년 4월 제주도(당시 미지의 섬)에 도착.
-그러나 목포에서 겨울 풍랑이 심하여 가족은 목포에 두고 혼자서 출발했는데 배가 파선하여 전원 사망, 14일후 혼자 추자도 해변에 도착(아내의 금식기도 덕분)
③그는 제주도에 도착하여 온갖 냉대와 배척,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했으며 굶주림과 생활고 등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전파에만 전심전력함.
-당시 제주도는 1899년 신축교난(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을 죽인 사건)으로 예수교를 믿으면 죽는다는 공포가 확산되어 주민들이 기독교를 배척함.
④이에 제주도 청년들은 ‘이기풍을 제주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선동하였지만 그는 계속 전도하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졌는데 마침 해녀가 그를 발견해 구함.
-이때 자신의 목숨을 구한 해녀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선교의 첫 열매가 됨.
6.제주도 복음전파 사역
①1909년 5월 큰 홍수 때, 물에 빠진 여인을 건져내는 사건으로 제주도 도민들 사이에 이기풍목사에 관한 좋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전도함.
-그는 농사철에 농사일을 돕고 특히 장례를 치러주면 그 가정이 예수 믿었고 사모는 여인들이 해산할 때 조산원으로 돕고 병자들을 돌보며 복음 전파함.
-1910년 영흥학교를 세워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육사업도 함.
②그의 기도에 귀신들린 정신병자가 치료되면서 ‘목사가 병을 고쳤다’는 소문을 듣고 각종 병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성안교회가 설립되고 부흥이 시작됨.
-한 청년이 정신이 이상하여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자 경찰들은 손 쓸 방법이 없어 이기풍목사에게 보냈고 그의 기도로 깨끗이 나았고 훗날 전도자가 됨.
③제주도 선교 13년의 열매(1908~1921년 57세)
-성안교회를 시작으로 교회 3개와 기도처 5개를 설립해서 교인이 410명으로 부흥했고 그가 떠난후 30개의 교회가 더 설립되었으며 1934년 노회가 조직됨.
7.전라도 농촌 순회전도와 교회개척
①이후 그는 전라도 내의 여러교회를 돌보았고 1913년 벌교교회로 파송되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여러마을을 돌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전도를 쉬지 않았음.
-그러다 너무 열정적으로 전도한 탓에 그는 1915년 성대 이상으로 후두염과 관절염, 중이염의 병을 앓아 목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가 요양생활을 함.
②그는 몸이 회복되자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농촌을 다니며 전도했고 교회를 개척함.
-1918년 광주 북문안교회 부임했고, 1923년 순천교회, 1924년 고흥교회 목회, 1927년 제주도 성내교회, 1934년(70세) 여수의 작은 섬 우학리에서 목회함.
8.신사참배 반대와 최후 순교의 길
①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서 신앙을 지킨 이기풍은 1938년 미제의 앞잡이라는 죄목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신앙의 지조를 지킴.
-당시 75세였던 그는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도 “예수님이 날 배반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예수님을 배반하겠는가?”하며 견디다 병보석으로 출감.
②최후 순교의 길: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2년 6월 20일, 77세로 별세함.
-이기풍목사는 1942년 6월 20일 아침, 마지막 말을 남긴채 숨을 거두었음.
“천군대신이 어떻게 하나님보다 높단 말이냐! 말도 안되는 소리...”
-한국교회 최초 목사(7인)중 한명, 최초의 선교사(제주), 순교의 본을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