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용어가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싶다.
이은해의 보험금 사냥용 상습 결혼과 살인이
크게 보도 되며 그걸 가능하게 한 기제로
가스라이팅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연봉 6천만의 대기업 연구원 출신이
교육수준도 사회적 위치도 저급한 여자에게
정신적 지배를 당한다는게 과연 가당한가?
그러나 그다지 희박한 케이스는 아니다.
그런 일에 특화된 (가해자, 피해자) 인간형이 있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 관련하여 신입 때 생각이 난다.
신입에게 옆자리 경력 동료는 중요한 존재다.
일도 배우고 분위기 파악과 적응에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복불복 차원이지만 잘 지내야 하는 사이다.
내 옆 미즈는 이미 3년 경력자인데,
썩 끌리는 외모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초긴장 상태인 날 챙기는 듯한 모습에
조금은 다행스럽고 든든하기 까지 했다.
가장 뻘쭘할 수 있는 첫 점심시간을
누군가 함께 하자며 데려가주면
이제 첫 고비는 넘겼다,고 안심이 되는 법인데,
기대 대로 옆 미즈가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이미 어울려 먹는 무리가 없었고
나와 단둘의 자리가 되었다.
(차츰 겪어 보니 그럴만 했다.)
나란히 식판에 반찬을 담는데
돈까스 하나를 더 집어 내 식판에 놓으려 했다.
(경양식 집의 단독 메뉴 만큼의 크기였다.)
아니 전 괜찮아요, 해도 굳이 떨군다.
여기 돈까스 맛있고 자기도 먹을 테니 걱정 말란다.
내 입장은 조리사 등 타인의 눈치 때문인데,
양을 걱정하는 걸로 해석한 것이다.
저 먹을 거면 제 식판에 놓지 왜 내 식판에 놓을까?
그러나 어쩌랴 옆 동료는 중요한 사람이니..
옆 동료는 커피 마시고 싶을 때도 꼭 같이 가잔다.
바로 처리할 일이 있다고 또는 귀찮이즘으로
여타의 핑계를 대도 재차 삼차 사차 강요하니
무시할 수 없어 결국 같이 가게 된다.
(그는 거절을 용납 못하는 것이다.)
식당이나 휴게실 가서도 먼저 자리 잡으면
아니 저쪽으로,하며 굳이 다른 곳으로 끌고 간다.
커피 탈 때도 나의 선택은 옳지 않다는 듯
설탕이나 크림양도 간섭하려 한다.
모든 선택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니 성가셨다.
대화도 주로 자기 얘기만 늘어 놓고
내겐 좀처럼 물어 보는 게 없다.
어쩌다 내가 말하게 되면 그 중 단어 하나만 낚아 채
앞뒤 맥락도 없이 자기 얘기로 다시 이어간다.
삼인용 벤치에 앉을 경우 중간에 떡하니 앉으므로
나중 주자는 자리가 애매해 진다.
그렇다고 대 놓고 피할 수도 없어
한동안 점심이나 커피 브레이크는 이어졌지만
슬슬 탈출을 고민하게 되던 차,
그새 다른 신입들과 안면도 트고 발도 넓어져
점차 옆 미즈와의 동행은 자연스레 줄었다.
그렇게 한동안 함께 하며 지켜본 결과,
옆 미즈는 지독한 자아도취자(나르시스트)였다.
실제 잘나서 도취된게 아니고 일종의 정신 착란이다.
자아도취는 그의 설정이나 의식적 행동이 아니고
그저 그렇게 밴 기질이다.
모든걸 자기 시나리오대로 해석하는데,
자신을 누군가가 늘 바라보고 있다거나
맘만 먹으면 어떤 남자도 홀릴 수 있다 믿으며
설사 무반응이면 그가 수줍거나
플라토닉 사랑을 원한다고 해석한다.
객관적으로 학벌이 더 좋은 사람을 접해도
속으론 자신이 더 똑똑하다고 믿으니
그 믿음이 자기 의견이나 선택을 강요하는 동력이 된다.
자신을 돌아봐야 할 이유가 없으니
스스로는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의 강요로 누군가 피해를 입어도
다 남탓이고 매사 자기 합리화 되어 있으니
가책이나 죄책감은 없지만
상황 인식은 되니 겉으로는 미안하다고는 한다.
매사 자기중심적이고 역지사지가 안된다.
타인의 양보는 자기가 옳았기 때문이란다.
자신의 선택은 옳다고 생각하니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고 강요한다.
자기애로 가득차서
타인에게 나눠줄 사랑이나 정은 없다.
그에게 타인은
자기 삶의 무료함을 달랠 위안부,
편리함을 위한 도구,
있어 보이기 위한 장신구로만 여겨질 뿐이다.
그에게도 특별히 애정하는 대상은 있긴 한데,
스스로와 동일시 되는 대상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자신을 거절하면 앙심을 품는다.
절대 자신은 누구의 기피 대상이 될 수 없는
최고의 인간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기 옆에 사람이 머물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흠모하여 멀리서 본다고 생각한다.
대략 내가 본 내 옆 미즈의 성향과 행동들이다.
이런 사람도 별 문제 없이 잘 살아간다.
평생 주변에 양보해 주고
봉사해 주는 사람들이 몇 있게 마련이다.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들이다.
남에게 기대는 마음, 의존성이 많으며
자기 결정력이 약하여 남에게 잘 휘둘리는 유형,
즉 주체성이 많이 부족한 사람에겐
바로 이런 미즈 같은 부류는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애정을 표하는 듯 이모저모 오지랖을 펴며
갈등할 때 대신 선택을 해 주니
스스로 골치 아프게 뇌를 쓸 일도 없어
오히려 편하게 느끼며 그런 상태로 습관화 된다.
나중엔 지시 또는 명령조로 강요하지만
이미 의존성이 심화되어 따르게 된다.
가스라이팅이 된 것이다.
이은해는 자신을 최고 미모와 몸매로 봤을테고
맘만 먹으면 어느 남자와도 결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테니 다중 혼인 시도를 했다.
그 바탕은 바로 심각한 자아도취증이다.
어릴 적 방송 출연이 그 자아도취를 더 심화시켰을 것이다.
(러브하우스 요청도 이은해의 발상으로 추측한다.)
공짜로 러브하우스를 얻으니
필요한 걸 노력 없이도 쉽게 얻을 수 있단 걸
일찌감치 터득하고 그런 쪽의 행동을 해 왔을 것이다.
거기다 타고난 품성 자체가 반사회성이고
사람은 자기 필요에 의해 이용할 존재로 인식될 터이니
조종과 지배가 습관화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가스라이팅이 발생했을 거로 본다.
가스라이팅은 (이은해류의) 반사회성 소유자가
사기 등 자신의 계획범죄를 성사시키기 위해
상대를 조종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지만,
평범한 상황에서도 발생한다.
그 경우는 의도있는 계획적 시도라기보다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식에 발원한 행동에 의해
그런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자아도취자라해서
모두 가스라이팅을 하는 건 아니고
그런 조종과 강요를 당하기 쉬운,
심약한 인격의 누군가가 측근에 있음으로 해서
자동 발생한다.
노예화된 상대에 대한 미안함은 없다.
당연한 이유를 늘 갖고 있는 부류기 때문이다.
자아도취니 개과천선도 발생하지 않는다.
옆 미즈는 내게도 정신적 우위를 점하려 했다.
신입이고 뻘쭘해 있는 상태이니
뭐든 우월하다고 믿는 자신이 인도하려 했을거다.
그게 자아도취자의 행태다.
다행히도 나의 독립성과 주체성이
상대의 조종과 지배를 허용치 않았다.
이후 부서도 바뀌고 마주칠 일 없으니
스트레스 인자 하나 사라졌다 싶었지만
그 미즈 옆에 앉게 된 다른 동료가
미즈에게 조종당하지 않을까 걱정은 되었다.
영화 가스등(Gaslight)은 1944년 개봉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이다.
중딩 시절 흑백 티비로 본 흑백 영화였다.
이 영화의 남녀 주연,
잉글리드 버그만과 샤를르 보아이에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 보고 좋아하게 된 배우라
더 재밌게 봤다.
남편은 자아도취자 이면서 범죄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남편이 부인 소유 왕가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부인이 계속 착각하는 것처럼 유도하고
스스로의 판단력을 의심토록
장시간에 걸쳐 상황 조작과 잘못된 인식을
주입하는 과정, 가스라이팅이 잘 표현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