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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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묵상글. 1차(0703. 21:10), 2차(04:30), 3차(19:50)
7월 4일 묵상글, 3일 21시 1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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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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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9,14-17 요한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경건의 잣대를 들이대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뜻밖에도 ‘혼인 잔치’입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데 어찌 슬퍼하겠느냐?”
성 암브로시오는 이 ‘신랑’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봅니다. 신랑께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시니, 지금은 무엇보다 기쁨의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단식과 절제도 우울이나 자기 학대가 아니라, 신랑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한 기쁨의 준비입니다.
암브로시오에게 신앙의 바탕은 두려움이 아니라 혼인 잔치의 기쁨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새 천과 헌 옷, 새 포도주와 헌 부대를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새 포도주는 낡은 마음의 부대에 담기지 않습니다. 옛 습관과 굳은 틀에 그대로 부으면 부대도 터지고 포도주도 쏟아집니다.
암브로시오는 여기서 은총의 ‘새로움’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시는 새 생명은 새롭게 빚어진 유연한 마음을 요구합니다. ‘새 부대’가 된다는 것은 옛것을 무조건 버리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새 포도주를 담아낼 만큼 마음을 비우고 넓히는 일입니다. 굳어 있던 편견과 두려움을 비울 때, 그 자리에 사랑과 기쁨의 새 포도주가 채워집니다.
이웃종교·생태의 관점에서 보면 창조 세계를 돌보라는 오늘의 부름도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낡은 사고의 부대로는 담을 수 없습니다. 이웃과 이웃 종교, 모든 피조물과 함께 새롭게 살아가려는 마음 ― 그 새 부대 안에서 평화의 포도주가 보존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신앙은 두려움인가, 혼인 잔치의 기쁨인가? 나는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려 하지는 않는가? 나는 굳은 편견과 습관을 비워 마음을 새롭게 하는가? 나는 창조 세계를 향한 새로운 사랑에 마음을 여는가?
주님, 신랑이신 당신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낡은 마음의 부대를 비우시어 당신의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하시고, 그 새로움으로 이웃과 온 피조물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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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 사람들도 대부분 아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와 말씀이 있지만,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정치인에게도, 사업하는 사람에게도, 교사에게도 이 말씀은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다들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자녀들은 이 말씀을 내세우며 부모님의 간섭에서 자유롭고 싶어 할 것입니다. 새로 창당한 정당은 기존의 정당과 차별화를 내세우며 자신들이 새 술이고, 새 포도주라고 할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도 말씀을 인용해서 정당성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1984년도에 신학교에도 질풍노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쇄신 위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생각에 따라서 신학교가 이집트가 되기도 했고, 신학교가 약속의 땅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신학교를 쇄신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식당 앞 게시판에는 신학생들의 생각을 담은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교수 신부님들도 신학생들의 주장을 경청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관해서도 두 가지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없는 사람, 율법에 무지한 사람이 가지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입니다. 이분들은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없는 사람, 율법을 모르는 사람을 죄인처럼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없는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라는, 안식일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정신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통 법규와 신호등이 없으면 교통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과 예언서를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다. 한 글자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안식일과 율법의 규정을 넘어서는 더 큰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규정이 있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누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어라.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라도 벗어 주어라.”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쪽 눈이 잘못하면 그 눈을 뽑아라. 한쪽 발이 잘못하면 그 발을 잘라라.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쪽 눈이 없더라도, 한쪽 발이 없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낫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술은 이렇게 율법과 안식일의 차원을 뛰어넘는 더 깊은 영적인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부대는 율법과 안식일로 포장된 몸과 마음이 아닙니다. 율법과 안식일의 차원을 뛰어넘는 십자가와 희생의 부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하느님께서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시는 분입니다. 갈라진 곳을 다시 이어주시는 분입니다. 메마른 언덕에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면, 우리의 낡은 마음도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친 공동체도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 안에 낡은 부대가 있다면 주님께 맡겨 드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권위와 독선으로 혼자 걷는 것은 낡은 포도주입니다. 타성에 젖어서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낡은 포도주입니다. 무관심으로 공동체의 어려움을 방관하는 것 또한 낡은 포도주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교우들이 함께 걷는 것이 새 포도주입니다. 새 포도주는 어려움과 갈등이 있을지라도 함께 걷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깊은 연민을 갖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느끼며 함께 걷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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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단식’을 왜 하는가? ‘단식’은 요나의 재앙 경고를 들은 니네베 왕이 단식을 선포하고 회개한 것처럼,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 앞에서 교만을 내려놓는 행위로 했습니다. 또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단식하신 것처럼, 중대한 사명을 시작할 때 유혹을 이겨내고 영적으로 무장하기 위해 했습니다. 또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판관 20,26-28), 회개의 표시로(요엘 2,12), 죽은 이를 위한 애도의 표시로(2사무 7,6), 사도의 임명이나 파견하기 위해서도 했습니다(사도 13,2-3;14,23).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16,34)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서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신심행위로 1주일에 두 번씩(월, 목) 단식했습니다. (한편, 이사야 예언자는 이웃 사랑과 정의 실천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사 58,6-7)으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의 침통한 표정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의 진실 된 마음을 ‘단식할 때의 바른 자세’(마태 6,17-18)로 강조하셨습니다.) 결국, ‘단식’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낮추고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하겠다는 강력한 영적 표현이요, 내면을 정화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은밀하고도 기쁜 영적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독서>에서 아모스가 예언한 “그날”이 온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보라 그날이 온다. ~모든 언덕에서 세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아모 9,11-13)
“그날”, 바로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몰고 온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이기 때문이라고 밝히시면서,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밝히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마태 22,1-14)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에서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암시하셨고,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요한 3,29).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새 천”과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6-17)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 부대’는 새 시대를 살아가는 ‘변화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는 말씀하고 덧붙이십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새것’과 ‘묵은 것’의 부조화를 강조하면서 마치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비연계성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는 말씀을 통해, ‘묵은 것’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묵은 것’이 ‘새것’에 의해서 보존된다는 것을 제시해 줍니다. 곧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완성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임과 동시에 우리를 완성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로지 당신 안에 머물게 하소서! 당신이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주님! 저를 결박하는 마음 속 생각을 멈추고(단식하고) 당신의 뜻 따르게 하소서.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폭식)하지 않고 내어놓음으로 당신의 생명이 퍼져가게 하소서. 제 자신 섬기기를 멈추고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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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본성에 근원적 결핍이 새겨져 있어 소유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 시달리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을 ‘슬픈 짐승’으로 보는 견해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무엇을 ‘더’ 가지기를 바랄수록, 누군가가 내 곁에 ‘더’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랄수록 우리의 슬픔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그런 존재이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슬픔에 앞서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 이전에 인간은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단절되면서 깊은 슬픔이 인간을 짓누르기 시작하였고, 이를 회복하고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분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참 행복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는 지금 단식할 이유가 없습니다. 본디 단식은 무엇을 자꾸만 더 채우려는 소유와 집착의 고리를 끊어 내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며 자기들의 단식 행위가 정당함을 드러내는 데 급급합니다. 그들은 규정을 철저히 지켰지만, 단식이 향해야 할 본질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슬픔에 자주 짓눌립니다. 이런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분과 함께할 때 우리는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 대한 집착과 낡은 관습적 사고를 벗어던지고, 우리 마음의 새 부대를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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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 당신은 우리가 누구라고 말씀하십니까?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 모두는 사랑받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기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모든 이는 이미 선택되었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우리가 누구라고 말씀하십니까? 2026년 7월 3일 금요일 신학자 다이애나 L. 헤이스(Diana L. Hayse)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신앙인에게 가장 중심적인 질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피부가 검든, 갈색이든, 노랗든, 붉든, 희든 상관없습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인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 안에는 다른 나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슬림, 유다인, 그리스도인, 힌두교인, 혹은 그 밖의 누구든, 하느님은 모든 인류의 하느님이시며,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변함없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되었으며, 그 창조는 하느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좋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시공간 속에 존재할까? 하느님의 나라(kin-dom: 서로가 친족인 나라)를 이루는 데 협력하기 위함입니다. 곧, 모든 인류와 함께 공동 창조된 존재임을 인식하고, 더 나아가 이를 확언함으로써 내가 만나는 모든 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이가 부르심을 받았듯이, 모든 이가 환영받는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에 기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헤이스는 우리가 가족, 문화, 교회 안에서 사랑받음의 경험이 없는 이들로부터 사랑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성찰합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미천한 이들 이미 이 시대의 가장 중한 영적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 질문이란 "하느님, 당신께서는 인류인 저를 누구라 말씀하십니까?"라는 물음입니다. 이는 그들의 삶이 단순하거나 어린아이 같기 때문이 아니라, 욥처럼 시련을 겪고도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일상 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기에,… 그들은 모든 갈망의 해답이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이끌리는 이들입니다…. 가장 많은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풍요롭고 생명을 길러 주는 영적 삶을 지니며 일상의 투쟁 속에서도 인내하는 이들의 모범으로부터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때가 아닌가요?… 우리는 모두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지켜야 할 책임을 지닌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모든 이를 사랑하고, 개인의 성공보다 타인의 선익을 추구하라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를 괴롭히는 각종 "주의(ism)"—인종, 민족, 성별, 계급, 성적 지향, 종교적 신념에 따른 부정적 분열—를 내려놓을 때만 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씌운 눈가리개를 벗기 시작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고, 모든 사람의 얼굴을 통해 빛나시는 하느님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 되어, 삶을 협소하고 이분법적으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 신앙 공동체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하느님, 당신께서는 우리를 누구라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혼란스럽고 뒤엉킨 세상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지만, 결코 버려지지 않고, 결코 외면당하지 않으며, 결코 홀로 있지 않는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들로서, 생명과 죽음의 지식을 부여받았고, 은총을 통해 그 지식을 사용하여 모든 다양성 안에서 생명을 선택하고 이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변화시킬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가오는 세기, 어쩌면 새 천년을 향한 우리의 도전인지 모릅니다. 부디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 안에서 충만한 삶을 되찾고 변모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계속 축복받기를 빕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언제나 내성적인 성향을 결함으로 여기며, 더 사교적으로 되려고 애써왔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묵상들과 리처드 신부님의 가르침을 통해, 이제는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제가 결코 홀로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품 안에 안겨 있습니다. —Veronica S. References Diana L. Hayes, No Crystal Stair: Womanist Spirituality (Orbis Books, 2016), 77, 78–7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redits: Tony Sebasti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여러 가지 꽃으로 엮어진 꽃다발처럼,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존재로 온유하게 품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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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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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7.04 04:11
- 사랑은 똑같지만 마음은 새로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지금 저는 연피정 중인데 그래서인지 오늘 말씀이 고백성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어저께 고백성사를 제가 봤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이 먹을수록 고백성사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줄어듭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닌데 지나고 나면 뭔 죄를 지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일 큰 이유는 아닙니다. 제일 큰 이유는 망각도 죄의식의 상실도 아니고, 새로움의 의지 없음이고 현재의 안정(安定)에 안주(安住)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지금 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안정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사랑할 자유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랑만 해도 되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저의 삶은 참 행복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하거나 그럴 수 없는 분들에게 미안할 정도입니다.
사실 저에게 새 포도주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설사 새로운 것이 있어도 그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제 안에 들어와 저를 차지하고 있는 분과 것들이 있고, 그렇기에 새로운 것들에 그 자리를 내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다시 말해서 새로운 분은 아니지만 새로운 하느님을 맞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마음과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똑같은 하루이지만 새로운 마음과 눈으로 하루를 맞이하면 그것이 새날이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지만 새로운 마음과 눈으로 맞이하면 그가 새삼스럽듯 변함이 없으신 하느님이지만 새로운 마음과 눈으로 뵈면 새로운 하느님입니다.
똑같은 하느님 사랑이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면 그 마음이 새 부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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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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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청춘이시며 영원한 새로움이신 예수님! 과거 우리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본의 아니게 단식을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끼니때가 되어 어머니가 쌀독 뚜껑을 열었을 때, 쌀이 바닥나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 그 심정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보다 사정이 괜찮았나 봅니다.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는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단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단식과 기도는 언제나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단식하는 날은 곧 기도하는 날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단식하고 있다면 ‘지금 기도하고 있구나!’생각하고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단식은 인간을 기도로 안내합니다. 어떤 분이 혼자서 삼겹살 3인분에, 소주·맥주 합해 다섯 병에, 철판 볶음밥까지 두 그릇 비벼 먹고 난 직후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신도 오락가락 혼미해지고,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단식을 제대로 하게 되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단식은 인간을 약하게도 만들지만 강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단식을 통해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과 본능을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스레 인간의 마음과 영혼, 감각과 오감들이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식을 통해 기도할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단식할 때가 있다면, 단식을 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활동하시던 그 순간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기쁨의 잔치요 축제의 잔치입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육화로 인해 시작된 공생활 기간은 일반 혼인 잔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대한 기쁨과 구원의 축제였습니다. 구원과 은총의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만끽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잔치상에 올라온 맛갈진 음식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배불리 먹는 것입니다. 갓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내온 새 포도주를 큰 잔에 콸콸 부어 서로 건배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중요시한 것은 부정한 것에 대한 단호한 기피였습니다. 율법 규정을 목숨처럼 여기며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그저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외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내적 태도, 영혼의 상태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원의 때에 합당한 근본적인 회개와 삶의 변화를 중요시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는 언제나 청춘이시며 영원한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고,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늘 새롭게 탄생해야 마땅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각자가 들고 있는 부대의 상태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저기 구멍 나고 헤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런 현실 안에도 분명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리라 굳게 믿으며,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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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단식 논쟁 - 새것과 헌 것>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4-17)> 1)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은 것은,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을 비난한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8-19).”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먹는 모습만 보고, 굶는 모습은 못 본 것 같습니다. 뒤의 12장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마태 12,1). 또 16장에는 빵이 없다고 제자들이 걱정했다는 말이 있습니다(마태 16,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사도들은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을 텐데,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단식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먹을 것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는, 단식을 할 수도 없지만, 단식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을 많이 했다는 것은, 먹을 것이 많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단식을 함으로써 남은 음식은 어떻게 했을까? 만일에 그 음식을 단식하지 않는 날에 다 먹어버렸다면, 그들의 단식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단식함으로써 남은 음식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이 없는 단식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2)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에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고 슬퍼하는 단식이었는데, 메시아께서 이미 오셨으니 그런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메시아와 함께 기뻐해야 하는 때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을 메시아로 안 믿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그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단식을 합니다. 3)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지금은 ‘신약시대’ 라는 선언이기도 하고, 신약시대의 신앙생활은 구약시대의 신앙생활과는 달라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약시대 신앙생활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십계명 제3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로 바뀐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이(주일이) 토요일에 지내는 안식일보다 더 중요한 날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킵니다. <초대교회 때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유대교인으로서 안식일을 지켰고,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분리된 다음에는 주일만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계명들은 원래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4)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새것’과 ‘낡은 것’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새롭다고 다 옳은 것도 아니고, 오래 되었다고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사상들과 이론들 가운데에는 악하고 해로운 것들도 많고, 또 오래 되었지만 계속 지켜야 할 ‘선하고 좋은 것들’도 많습니다. 그런 것을 잘 식별하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단순히 오래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선하고 좋은 것들’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뒤의 13장에,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을 하면서 바꿀 것은 바꾸고,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데, 판단 기준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과 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기준은 생각하지 않고, 장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무턱대고 모든 틀을 바꾸는 것도, 또 좋지 않은 관습이나 전통 같은 것 등을 버리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지키려고만 하는 것도 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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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 사랑이라는 달빛은 언제나 빛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기에, 종종 많은 비판을 받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자네는 자네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거야?"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고향에 한 과부가 있는데, 그 집에는 개가 있어. 달빛이 밝게 비추는 밤이면 그 개는 밖에 나가 밤새 짖곤 해." 친구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개와 달빛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는 건데?" 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달은 그저 계속 빛나고 있을 뿐이잖아!…" 우리의 삶도 수많은 비난과 험담 속에 놓일 때가 많고, 또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비판하고 험담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준을 세워 다른 이들을 평가하고, 그 기준으로 남을 비판하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내 편견과 잣대로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하느님께서 쓰시는 "사랑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마태 9,14) 그들의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풀어 표현하자면 이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승 요한을 따라 고행하며 자주 단식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의 규정보다 더 자주 단식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고 즐겁게만 지내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그들은 매우 금욕적인 지도자를 따랐기에, 그들의 식욕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단식에 대해 물은 내용을 보면, 다소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만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평가하며 비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단순히 맞대응하셨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그분도 세례자 요한의 그 교만한 제자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대신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아주 단순하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준비의 때가 아니라 이미 실현된 현실을 누리는 때요 기쁨의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신 그분을 기뻐하며 누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평가하실 때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재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쉽게 비판하고 불평하는 유혹에 빠지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초대받습니다. 사실 불평할 일만을 보거나 우리 주변을 부정적인 쪽으로만 보게 되면 우리의 정신은 늘 그렇게 우리 생각의 방향을 잡게 합니다. 일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정신은 "관성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우리 삶을 바라보게 되면 감사할 일, 기뻐할 일, 즐겨야 할, 누려야 할 일들이 우리 삶에 늘어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 정신의 눈이 그곳에 시선을 두지 않고 다른 이들의 시선과 평가만을 더 많이 무의식적으로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가 우리 삶을 누리고 기뻐하고 즐기고 감사하지 못할 뿐입니다. 이렇게 바쁘게 무의식적으로 달려만 가는 정신을 멈추어 세우고 가만히 우리 삶의 감사할 일, 기뻐할 일, 즐겨야 할 일, 누려야 할 일들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관상적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이 바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삶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정신을 깨워 의식적으로 우리 삶 안에 비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응시하며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을 누리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겠지요?! 그럴 때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이라는 달빛은 언제나 빛나고 있다!"는 진정한 현실을 말입니다. 단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던 성 예로니모(347–42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올바르게 단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에고, 곧 옛 자아입니다. 그것은 단식조차 자기 자신을 부풀리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단식과 모든 노력은 결국 에고를 부풀리기 위한 표현에 불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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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성보나벤투라의 관상적 시선으로 보는 세상
성보나벤투라의 관상적 시선으로 보는 세상
보나벤투라가 말하는 관상은 세상을 떠나는 시선이 아니라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시선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입니다. 프란치스칸에게 기도는 현실을 외면하는 시간이 아니라, 현실 속에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성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성사입니다. 보나벤투라는 하느님께 집중된 마음만이 사물의 깊이를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더 많은 지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머무는 사람은 더 이상 사물을 단순한 대상이나 소유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존재 안에서 흘러나오는 창조주의 숨결을 듣고, 모든 생명 안에 스며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모든 만남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기도의 본질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하늘만 바라보는 기도가 아니라, 땅을 사랑하는 기도이며, 사람을 바라보는 기도이고, 피조물과 함께 호흡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만나고 계심을 알아차리는 깨어 있음입니다. 그러므로 관상은 특별한 황홀경이나 신비 체험 이전에,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경외와 사랑의 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보나벤투라에게 관상이란 사물의 진실을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실은 사물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진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넘쳐흐르는 하느님의 선성을 보는 것입니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은 단순한 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창조주의 아름다움이 시간 안에서 피어나는 사건이며, 어린아이의 웃음은 하느님의 기쁨이 인간의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사건이고, 형제를 용서하는 순간은 십자가 위에서 끝없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오늘 다시 육화되는 사건입니다.
프란치스칸들에게는 결코 '무생물'이라는 말이 마지막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돌은 침묵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물은 자신의 맑음으로 하느님의 순수함을 노래하며, 불은 자신의 따뜻함으로 사랑의 열정을 드러내고, 바람은 보이지 않는 성령의 자유를 증언합니다. 해와 달은 창조주의 영광을 비추고, 새들은 계산하지 않는 신뢰를 노래하며, 나무는 묵묵히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신비를 가르쳐 줍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선성을 표현하는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피조물을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 고백입니다. 모든 존재는 같은 아버지에게서 나왔고, 같은 사랑 안에서 존재하며, 같은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태양과 자매 달, 형제 바람과 자매 물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창조주를 함께 찬미하는 우주적 형제자매입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육화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물질세계를 거부하지 않으셨음을 뜻합니다. 오히려 그분은 육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고,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육화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며, 동시에 세상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거룩한 장소임을 선언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존재가 어느 정도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부분적으로 비추는 거울이며, 창조된 모든 것은 하느님 사랑의 흔적을 품고 있는 살아 있는 표징입니다. 꽃은 아름다움으로, 강물은 생명으로, 빵은 나눔으로, 포도주는 기쁨으로, 사람의 눈물은 자비로, 웃음은 희망으로, 침묵은 현존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흔적이 새겨진 거대한 복음서이며, 피조물은 그 복음서를 이루는 살아 있는 문자들입니다.
이러한 관상은 결국 삶의 태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존중하게 되며, 자연을 소비하지 않고 돌보게 되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거룩하게 받아들이며, 평범한 일상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성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설거지를 하는 손길도, 밭을 일구는 땀방울도, 병든 이를 돌보는 인내도, 형제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침묵도 모두 하느님의 선성이 육화되는 거룩한 전례가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기도는 눈을 감는 기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을 뜨게 하는 기도입니다. 사람 안에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가난한 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며, 상처 입은 세상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성령을 발견하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하느님께 집중될수록 세상은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세상이 더욱 선명하게 보일수록 하느님의 사랑은 더욱 깊이 드러납니다.
결국 관상이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피조물을 넘어 창조주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안에서 창조주의 끝없는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칸에게 온 우주는 거대한 성전이며, 모든 피조물은 살아 있는 제단이고, 모든 만남은 은총의 성사이며, 우리의 일상은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도 계속 육화되고 있는 거룩한 역사입니다. 바로 이러한 눈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하느님의 현존을 만나고, 누구를 만나든 형제를 만나며, 무엇을 하든 창조주의 사랑을 세상 안에 드러내는 살아 있는 복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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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4.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9:50 추가
마태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가 따집니다. 자기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요. 그런 문제를 제기한 건 그들의 스승인 요한으로부터 배운 구원관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종말’이 임박하게 되었는데, 그 종말을 잘 준비하여 구원받기 위해서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재계를 실천해야 하는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식을 철저히 실천하며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하기는 커녕,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시끌벅적하게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식의 참된 의미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단식은 육체적인 즐거움에 빠져 무절제한 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을 때,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그분의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니 굳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 세상 모든 이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기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릴 기회가 열리게 되었으니,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 그 기쁨을 만끽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을 유다인들의 혼인잔치 풍습에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유다인들은 결혼을 하면 부부가 따로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고 자기 집에 머물면서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일주일 동안 기쁨의 축제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율법이 정한 모든 의무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누군가가 ‘단식’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며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똥 씹은 얼굴로 앉아있다면, 그건 율법을 잘 지키는 모범이 아니라, 남의 잔치집 분위기를 망치는 ‘민폐’가 될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머무르시는 이 시간이 바로 당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참된 기쁨을 먼저 누리는 잔치 때라고, 그러니 지금은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데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단식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당신을 잃고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진 그 때 시작해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신앙생활에서도 ‘때’와 ‘상황’을 잘 구별하여 알맞은 행동을 하는 게 중요하지요.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이라는 선물을 주시기 위해 늘 우리 곁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잔뜩 인상을 쓴 채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이라는 ‘새 술’을 그분의 뜻에 따라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즉 ‘새 부대’에 담는 모습이지요. 새 술을 ‘헌 가죽부대’, 즉 죄만 안지으면 된다 여기는 수동적 삶의 태도 안에 담으면 고귀한 신앙의 이상이 비루한 우리 현실에 부대껴서 빵하고 터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귀한 은총의 선물들을 다 쏟아 버리게 될 겁니다. 그러니 얼른 우리 마음에 새 부대를 장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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