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N뉴스 / 시를 잘 쓴다는 것에 대하여/ 이어산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28)
시를 잘 쓴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은 길이가 약간 긴 시 한 편과 아주 짧은 시 한 편을 먼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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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파트도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푸르지오, 미소지움, 백년가약, 꿈에 그린, 이 편한 세상…
집들은 감정을 결정하고 입주자를 부른다
생각이 많은 아파트는 난해한 감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타워팰리스, 롯데캐슬베네치아, 미켈란, 쉐르빌, 아크로타워…
집들은 생각을 이마에 써 붙이고 오가며 읽게 한다
누군가 그 감정에 빠져 입주를 결심했다면
그 감정의 절반은 집의 감정인 것
문제는
집과 사람의 감정이 어긋날 때 발생한다
백년가약을 믿은 부부가 어느 날 갈라서면
순식간에, 편한 세상은 불편한 세상으로 바뀐다
미소는 미움으로, 푸르지오는 흐리지오로 감정을 정리한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무궁화 아파트는 제 이름만큼 꽃을 심었는가
집들이 감정을 정할 때 사람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금이 가고 소음이 오르내리고 물이 새는 것은
집들의 솔직한 심정,
이제 집은 슬슬 속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마경덕「집들의 감정」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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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 「성선설」전문
잘 쓴 시의 대부분은 좋은 묘사보다는 '의미부여'다. 의미부여는 상상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서술하거나 아름다운 말로 치장을 했다고 해도 의미가 부여되지 않으면 좋은 시가 되기 힘들다.
시적 대상을 재가공하여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내 놓은 시는 매끈하게 아름다운 시보다 더한 감동과 공감을 얻게 된다.
위 시 두 편 중, 우선 마경덕 시인의 시적 소재를 보자. '아파트'를 끌어와서 '감정'이라는 생명을 불어 넣었는데 감정을 가진 아파트는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곤 입주자를 부르는데 까지 발전한다. 이 시에서 가장 큰 의미부여는 "집과 사람의 감정이 어긋날 때 발생 한다"는 것이다. 이 시의 핵심이다. 집들은 자기의 감정을 '소음'으로, 또는 '물이 새는' 행동으로 보여 준단다.
함민복 시인의 3행밖에 되지 않은 저 시도 울림을 크게 준다. 어떤 과학으로도 태아의 손가락이 열 개로 형성되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지만 화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 태아의 노력"이라는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실로 시인이 아니면 이 위대한 여정을 저토록 명쾌한 의미부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시인이 되느냐 마느냐는 이렇게 대상에 어떤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하는가에 따라서 갈린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