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특설대와 백선엽
2001년, 식민지 시기 일본군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만주군내 조선인 장교들을 조사를 했다.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아직 논문이 발표된 적이 없는 때라 전체상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관련 자료조차 한국에 거의 없어 일본과 중국에 가서 하나하나 새로 확인해야 했다.
이때 길 안내를 받은 책이 만주국군 출신 조선인들의 회고록이었다.
회고록에서 만주군 출신자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이나 독립정신과 연관시켜 장교가 된 이유를 언급했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한 회고는 없었다. 반면에 <중국공산당 소속 팔로군>과의 싸움이나
만주에서의 <공비 토벌>을 들며 <반공을 강조>하고 그것이 <민족을 위한 행위>였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들이 일본군이든 만주군이든 일제와 자신의 미래를 같이하겠다고 선택한 직업군인이었다.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이유다. 그런 가운데 ‘왜 반공을 강조하며 써야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은 특히 간도특설대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서 풀려갔다.
간도특설대 설치는 만주의 대표적 친일파로 간도성장(間島省長)으로 재직하던 이범익(1883~?)이
만주국 정부에 건의하면서 시작되었다.
1937년 백계(白系)러시아인으로만 구성된 특설부대가 결성돼 있었으니 모방한 정책이였다.
만주국은 1938년 9월 조선인의 ‘애국적 자각심과 협력을 결집’하고자 간도특설대를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실제 간도특설대는 장교 몇몇을 제외하면 병사들까지 모두 조선인이었으니 조선인만의 특수 부대였다.
그럼에도 왜 1938년 시점에 이범익이 건의하고 관동군이 통제하는 만주국 정부에서 실행했을까.
그것은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일본에 이 전쟁은 물자와 사람을 총동원하는 체제를 갖춰야
도전이 가능하다는 현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조선총독부도 여기에 조응하는 정책의 하나로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그해 6월부터 제1기생을 훈련소에 입소시켰다.
일본군은 중국 본토를 침략한 직후 이미 100만명이 넘어선 군대를 편성하고 있을 만큼
팽창하고 있어 가까운 미래에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할 징병제에 대비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특별지원병제는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청년을 특별지원병자로 간주하지 않는 제도였다.
오히려 만주의 조선인은 만주국의 오족협화에 따라 일본인, 만주족, 몽골족, 한족과 협화 대상이었다.
간도특설대는 협력심을 한데 모을 결집체였던 것이다.
동시에 간도특설대는 부대가(部隊歌)에서처럼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 부대’이기도 했다.
간도특설대가 오족협화와 천황의 뜻을 구체화한 공간이 북간도 지역이었다.
만주국은 1939년까지 군사훈련을 마친 대원을 정치적 고려차원에서 재만한인이 거주하는곳에 배치했다.
부대의 본부도 백두산 자락 바로 밑에 있는 안도현 명월구에 두었다.
왜냐하면 그 곳은 조선인 대원이 많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그중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제2군 6사의
주요 활동지역이 안도현을 포함해 백두산 일대였기 때문이다.
계속 저항하는 항일 유격대에 관동군은 진드기 전법으로 대응했다.
1940년쯤에 항일 유격대는 부상자가 속출한 가운데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했다. 유격대의 조직적인 항일 무장투쟁이 사실상 끝난 것이다.
실제 1941년 4월까지 북간도 지역의 항일 유격대와 간도특설대 사이의 전투가 확인된다.
반면에 간도특설대가 북간도 지역에 배치되기 시작할 당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은 없었다.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백선엽도 러허성에서 팔로군 등과 싸웠다.
그는 1993년 일본에서 간행한 회고록에서 "우리들이 추격한 게릴라 가운데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민족주의던 공산주의던 차이가 있을지라도 한국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는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말려든 꼴이었다”고 밝혔다.
비록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제압하려는 일본의 책략에 ‘말려든’ 결과였다며
피동적 선택임을 변명했지만 그는 자신을 포함한 간도특설대의 조선인 탄압을 인정했다.
그래서 “동포에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고 비판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고백했다.
이후 간도특설대는 1944년 초 러허성(熱河省)으로 이동해 중국공산당의 팔로군과 싸웠다.
이때 운영한 정보반이 크게 활약했다고 한다.
또 1945년 들어서는 많은 조선인이 이주해 살고 있던 허베이성(河北省)에서 팔로군과 싸웠다.
간도특설대는 북간도에서처럼 두 곳에서도 팔로군 이외에 민간인을 죽이거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경향신문(2023.8.29).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의 글 일부에서 발췌.
[출처] 간도특설대와 백선엽 (한양길라잡이 - "조선의 도읍지 한양" 의 강의와 답사) | 작성자 한양길라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