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 열
변 태 현
남송 말 고려로 귀화한 농서 변려(邊呂)공을 시조로 하는 황주 변씨가문이 이뤄졌다. 후손인 변순 선조는 원나라 사신을 따라 원으로 건너가서 장수가 되었고 손자인 변안열공(1334.4.16.-1390.2.1.(55세))은 공민왕을 호종(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 또는 그런 사람)하여 고려로 귀국하였다. 이 때부터 변안열공을 시조로 삼아 “황주변씨”에서 “원주변씨”로 분적하였다.
변안열공은 이성계장군의 생신 때 “불굴가”를 통해 역성혁명 반대의 뜻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곧바로 고려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의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 당했다. 한양에 유배된 뒤 이듬해인 1390년 사약을 내렸으나 왕이 그의 공을 생각하여 “사약을 내리지 말고, 유배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이방원 일당이 먼저 도착하여 할아버지에게 철퇴를 내려쳤다.
이를 밑받침하는 정몽주의 제문이 보인다. "임신년 정월 기망일은 고인 대은공이 순절하신 두 번째 해입니다. 진실한 벗이며 시중의 직책을 맡고 있는 영일인 정몽주는 술잔을 부어 공의 묘에서 아룁니다. 늠름하기가 추상같음은 공의 충열이요, 열렬하기가 백일(白日) 같음은 공의 의절 이었습니다. 이 밤을 소리 내어 크게 울건대 어느 날이든 감히 잊겠습니까? 받드리는 제수는 비록 박하오나, 마음으로 통하는 우정은 두터우니 혼령께서는 바라건대 오셔서 드시옵소서. 아! 원통하도다."『고려사』 정몽주는 진실한 벗이며, 잊을 수 없는 벗이라 하고 마음으로 통하는 우정이 두터움을 표현하였다
우리 집안 세거지는 자인을 중심으로 내려왔는데 오랫동안 윗대로부터 외동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증조할머니께서는 “고향에서 백 리 이상 떠나 살면 자손이 번창 한다.” 하여 차도 없는 그 시절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업고 걸리고 하면서 고령까지 와서 정착하였다. 할머니는 현풍에 현씨 집안으로 시집가고, 할아버지는 김해 김씨 규수를 맞이하여 2남 3녀의 자식을 두었다.
아버지께서는 장남으로 청년시절에 힘이 장사라 동네에서 황소를 때려눕히기도 하여 상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증조할머니는 돌아가셔서 가야고분이 있는 산 밑에 안장을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누구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할머니 묘를 이장해야 한다.” 고 야밤에 동네 청년들과 묘를 팠다고 한다. 그 순간 파묘한 자리에서 하얀 연기 같은 것이 뭉실뭉실 나와 모두 놀라 “다시 묘를 덮자.” 고 하였으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앞산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일부 인부는 다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때는 일제강점기시대라 묘를 옮기는 것은 절대 금지된 시기였다고 한다.
그 후 집안에 크고 작은 사고들이 계속 생기기 시작하였다.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작은아버지는 탄광이 무너져 목숨을 잃게 되었고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모는 낫질못 아래에 있는 들판을 가리키면서 “저 들판에 논들이 모두 너거 아버지 땅이었단다.” 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시었다.
그 후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낮에는 건설공사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야학을 하였다. 그 공사장에 야쿠자 1명이 주위 동료들을 괴롭히고 돈도 떼어갔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그 야쿠자를 한방에 굴복시켰다. 그랬더니 그 야쿠자가 아버지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공사 중인 건물 옥상에서 아주 큰 돌을 건물 밑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던졌다. 다행히 그 돌이 나무 받침대에 맞아 가까스로 피했다고 한다. 바로 옥상으로 올라가 그 야쿠자를 때려 눕혔는데 그만 숨이 끊어졌다. 동료들 중에 야쿠자들이 몰려오기 전에 아버지를 피신시켜 다른 지역에 있는 탄광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기에 숨어서 일을 하였다. 하루는 탄광에 전신주를 운반하고 있었다. 한 동료가 전신주를 옮기는데 힘에 겨워 끙끙거려 대신 아버지가 받아서 야적장으로 던졌다. 그러나 전신주가 쌓여 있던 곳에서 전신주들을 건드려 무너지면서 아버지를 덮쳤다. 병원에 후송되어 3개월 만에 깨어났다. 가슴과 오른팔을 크게 다치고, 엄지손가락은 절단되어 있었다. 의사가 “팔은 붙일 수 있는데 손가락 접합수술은 어려워 사용하기가 불편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다행히 움직일 수는 없어도 성공적으로 수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몸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50대가 되면 몸에 위기가 와서 고생할거라고 담당의사가 예견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경산, 연호, 고산 등으로 여러 군데로 이사를 하였다. 도청 도로과에 근무하면서 현장감독 일을 하였다. 1남 3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형이 네살 때 심한 홍역으로 저 세상으로 보내서 집안에 위기가 왔다. 딸만 셋 남게 되었다가 늦둥이로 삼성현이 태어난 고장 경산에서 내가 태어났다. 다시 아들 하나 건졌다고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여름밤 모깃불 피워놓고 아버지의 얘기에 빠져든다. “한국 사람의 근성은 왕모래와 같고 일본사람의 근성은 시멘트와 같단다. 왕모래 하나하나는 아주 강하지만 뭉치질 못한다. 시멘트는 가루 하나하나는 쓸모없지만 적당한 물이 들어가면 단단하기가 돌멩이 이상이란다.” 어린 나로서는 무슨 말인지 그 때는 몰랐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별똥별을 보다가 꿈나라로 갔다.
아홉 살 때 심한 홍역으로 사경을 헤매다. 겨우 회복되었으나 귀도 잘 들리지 않고 고장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밤이면 어머니가 다리를 주물러 주어야 잠이 들곤 했다. 여름에는 수영하다가 물에 빠져 구조되고, 겨울에는 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얼음이 깨어져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구출되는 등 어린 시절에 위기가 여러 번 있었다.
대구에 있는 누나가 막내를 시골에 두면 안 된다고 하여 초등학교 3학년 때 대구로 전학 왔다.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꿈에 아주 큰 곰이 나타나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고 깨어났는데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와 식구 모두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누나들이 일어나다 다시 스러지고 했다. 주인집과 이웃에서 약과 여러 가지 민간요법 처리로 모두 무사했다. 꿈에 나타난 그 곰이 우리 식구들을 살렸는데 동물원에서 곰만 보면 그 일이 떠올라 혹시 곰이 우리 조상인가?
6학년 5월 16일 토요일 학교를 마치고 고향으로 가면서 차비를 아껴 병환 중인 아버지 드린다고 엿 한 봉지 구입하여 시골집으로 향했다. 여자아이의 눈썹처럼 생긴 초승달이 남쪽하늘에 걸려서 나를 따라오고, 소쩍새는 누굴 찾는지 목이 메이도록 울어대고, 아카시아향기는 온 몸에 번져 녹아내리듯 황홀경에 빠져 걸어갔다. 5월이면 어김없이 지천에 깔린 아카시아 꽃들이 품어내는 향기에 홀려 그 날을 떠 올리게 한다. 아버지는 엿을 입에 넣고는 내 품에서 59세로 저 하늘에 있는 초승달을 타고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였는데 아들만 셋이다. 그 시절에는 오로지 외동을 면하는 것이 최고의 희망이었다. 다행히 3명 모두 결혼하여 큰아들에게 손녀, 손자가 태어나 잘 자라고 있고, 둘째아들도 손자가 한 명 생겨 백 일이 다가온다. 셋째도 곧 소식이 올 것을 기다리며 미소 지어본다.
퇴직 후 대상포진, 통풍 등이 오더니 어느 날 가슴에 통증이 와서 병원에 가서 심장 초음파를 해 보니 혈관이 터지기 직전이고 여기저기 많은 손상이 있어 바로 경대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자칫했다간 손주들도 보지 못한 체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 다행히 위기직전에 치료되어 덤으로 남은 인생 살아가게 되었다. 몇 번이나 위기가 있었는데 그 때 마다 할 일이 남아서인지 그때마다 염라대왕이 부르지 않는 것을 보면 할 일이 남아서일까? 그 덕에 선조님들께 부끄럽지 않게 외동아들이 열 명의 식구로 불려놓았다.
역적으로 몰린 집안에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성계 장군 아들이 변씨 집안 사위로 있어서인지 멸족은 면하게 되었고 역적반열에서 사면 복권되어 면면이 이어져 이렇게 우리네 가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내 덕이다. 가난한 공직자의
집안에서 알뜰히 살림 살고, 남편을 잘 보필한 덕이다. 그 힘이 자식들에게도 이어져지게 되어 자부들도 하나같이 효부들이라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일당백은 못 되어도, 일당 열은 이루었다. 앞으로 일당백이 되는 집안으로 거듭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해 생활하면서 조상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그 때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2023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