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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겠습니다!(1)
2022년 10월 23일 / 대예배 / 누가복음 10:25-37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여호수아 18:17에서는 ‘아둠밈 비탈’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둠밈 비탈이란 말을 ‘피의 길’이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은 800m 이상의 고원지대이고,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400미터나 낮은 계곡에 있어 무려 1,200m나 내려가야 했다. 참고로 예루살렘 동쪽의 감람산의 높이는 905m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만들어내신 이야기가 아닌 실화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는 나그네를 때려 거반 죽게 만들고 옷을 벗기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달아났다. 갑작스럽게 어려움을 당한 나그네는 자기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가는 목적도 모르고, 그의 직업이나 신분도 모르고, 가정 형편이나 경제적인 사정도 전혀 모른다. 단지 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는 것뿐이다. 그가 강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다. 가진 것을 빼앗긴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인사불성이 되도록 얻어맞은 것이 문제이다. 피가 계속 흐른다. 점점 정신 차릴 수가 없고, 이대로 시간이 지나가면 저체온과 허기짐으로 죽을 수도 있다. 지금 입장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제사장이 지나갔다. 여리고 지방은 제사장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봉사하기 위하여 길을 재촉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제사장직을 수행하려면 시신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죽은 시체를 만진 자는 7일 동안 부정하리라”(민 19:11).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은 아직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럴지라도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나그네를 보고는 지나쳤다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은 제사장이 그 자리를 피하여 지나간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마찬가지로’라는 말이다. 레위인이라고 하면 제사장은 아니라고 해도 제사장을 도와서 성전에서 일하는 거룩한 사람이요, 동포의 어려움을 보고 눈감을 사람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 목마른 사람, 배고픈 사람, 나그네 된 사람, 옷을 벗은 사람, 옥에 갇힌 사람, 가난한 사람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외면하여서는 안된다. 내가 그런 끔직한 일을 당하였다면,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하는 중에 그곳에 이르렀다. 여행이란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안전이 최우선이다. 여행 중에는 돈 쓰는 것을 신중히 해야 한다. 여행을 하다보면 돈의 위력과 중요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돈을 쓰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마음은 작지만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실천으로 옮기느냐 옮기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사마리아 사람은 이런 저런 생각을 떠나서 인간이 갖게 되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적인 마음(양심)에 근거하여 돌보아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행동으로 옮겼다.
이적과 기적의 동기는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하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험한 곳에서 죽어간다는 말인가? 그냥 놔두면 죽을 터인데 … . 그러나 나도 지금은 바쁜데 … .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고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 .’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갈등 속에서 ‘내가 지금 여기서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면 이 사람은 죽을 터인데 … . 힘들어도 내가 도와주자.’라며 마음에 결정을 하고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돕기 시작하였다.
강도의 위험도, 사업의 손실도, 시간 지연으로 인한 고통도 감수하고 돌보아 주었다. 자신의 여행을 위해 준비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주고, 싸매어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하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갔으며, 밤새도록 간호하고, 다음 날 주인에게 나그네를 부탁하면서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라고 했다. 죽어가던 사람을 여관에 인도해준 것으로 자기를 할 일을 다 했다고 갈 수도 있었다. 다음 날 가야할 길이 있기에 두 데나리온이란 적지 않은 돈을 주면서 사후관리까지 부탁했다. 남들이 보기에 아니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 없이 할 일을 다 하였고, 의무 이상으로 최선을 다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예수님은 다시 율법교사에게 묻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하기가 싫어서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어떤 사람은 도와주고, 어떤 사람은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도와주다보면 한도 없고, 끝도 없다고 걱정부터 한다. 그뿐 아니라 이런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깨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고생하게 내버려둘 사람, 저런 사람은 죽도록 고생해도 당연하다고 하면서 그런 이들은 ‘나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바클레이 목사는 말한다. ❶ 자신의 무모한 행위로 저지른 여행자처럼 스스로 불행을 초래한 사람까지도 우리는 도와주지 아니하면 안 된다. ❷ 어떤 민족, 어떤 사람이고 간에 필요 중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다. 우리가 뻗치는 도움의 손길은 하나님의 사람만큼이나 넓지 아니하면 안 된다. ❸ 도움이란 실제적이어야 하며, 단순히 동정을 느끼는 것에 그치는 정도로서는 안 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꼭 있어야 할 사람, 절대로 필요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을 하시려 할 때에 우리의 신분이나 경력, 재산이 얼마나 있느냐를 보시지 않고 ‘불쌍한 사람을 진정 불쌍하게 보는 눈이 있느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느냐?’를 보신다. ‘행동하는 발과 섬기는 손이 있느냐? 자기의 것을 내어놓는 희생의 사람이냐?’를 보신다.
▶ 예수님이 그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다. 이 비유는 영생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이웃 사랑의 문제로 연결되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희생제물로 내어주시고, 죄악에서 건져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멈추지 말고, ‘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겠습니다.’라고 하며 생명을 살리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순간의 선택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만일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도웁고자 하는 일을 지체하였더라면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다. 물론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많은 생각이 오고 갔을 것이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자기네들을 멸시천대 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도 나왔을 것이다. 자기와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그냥 가고픈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이 지체하였다는 말이 없다. 그만큼 신속하게 돌보아 주었다는 말이다.
■ 순간의 선택이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온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 옐친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옐친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두 가지 최고의 예우를 했다. 하나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최고의 요리인 귀머거리 새 요리이다. 러시아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종 귀머거리 새가 있는데 그 새를 잡아서 요리를 하면 그 희귀성 때문에 그토록 높은 평가를 하는 요리이다. 이것은 평민들은 구경도 못하고 아주 특별한 고관들이나 먹어본 경험이 있는 요리라고 한다. 또 하나는 6·25 전쟁 비밀문서를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공개해버렸다. 그것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 내용이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계획을 내놓으니까 스탈린의 대답이 “미국이 개입하면 실패한다. 어떻게 하겠느냐?” 그랬더니 “미국에서 한반도까지 군인들이 오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남침 계획은 8일이면 완전히 끝나는 전쟁입니다. 더구나 남한에는 30만의 지하 노동당원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 전쟁은 삽시간에 끝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탈린이 승낙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다. 그 당시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밤중 전화보고를 했다. “한반도에서 지금 이런 일이 터졌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 보고를 받고 국회소집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미군 파병을 지시했다. 사실 트루먼의 신속한 결단 때문에 한국은 살아났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8일 만에 부산까지 점령당할 뻔했다.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지 않았는가? 나중에 소집된 국회 안보회의에서 “왜 대통령 혼자서 그렇게 중대한 결정을 밤중에 혼자 했느냐?”라는 질문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연합국이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아니했느냐? 실수는 한번으로 족하다.”라고 당당하게 대답을 해서 한국전에 참여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일까? 나만 편히 먹고 지내면 될까? 나중에 내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에 도웁겠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지? 이러한 변명들이 하나님 앞에서 통하리라 생각하는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이 임할 때에는 긍휼없는 심판이 임할 것이다.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고 해서 도움이 될까?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생각났을 때에 빨리하는 편이 좋다. 내일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후회만 키울 뿐이다.
■ 잘 아는 이야기 한편을 소개한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이 동료와 함께 매섭게 눈보라가 치는 날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있었다. 걸어가다가 앞에 뭔가 발길에 걸리는 물체를 보니 동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선다씽은 동료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서로 번갈아가며 메고 언덕을 넘어가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동료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가버리고 말았다. 선다씽은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언덕을 올라갔다. 올라가던 언덕길에 발에 걸리는 사람이 또 있었다. 보니 앞서 가던 동료였다. 목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선다씽은 그 사람을 업고 무사히 언덕 밑을 내려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 사람 모두 살았다. 그것은 선다씽의 몸의 뜨거운 땀으로 뒤에 업혔던 사람의 몸이 녹기 시작했고, 업힌 사람의 온기로 선다씽도 살 수 있었다.
■ 어떤 목사님이 미국의 식당에 가게 되었다. 여자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태도가 몹시 불쾌하더랍니다. 나가면서 팁을 놓고 갈까 말까 매우 망설였다. 주인에게 이야기하면 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님은 생각을 달리하였고, 보통은 2~3$만 놓고 가는데, 그날따라 이상한 마음이 들어서 10$을 놓고 나왔다. 종업원이 따라 나와 말했다. “손님, 팁이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많이 받을 자격이 저는 없는데요?”, “아니요, 오늘 아침 당신의 모습에서 무슨 사연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어젯밤에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했습니다. 오늘 이 일을 끝내고 저는 죽을 각오를 하였습니다. 오늘 손님께서 주신 이 팁은 팁이 아니라 제게는 희망입니다.”
율법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하라’는 말씀과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나누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❶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원하시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것이 율법인 것이다. ❷ 나아가 율법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신명기 10:12-13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지 마라’고 하신 모든 말씀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 말씀이다. 그대로 행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으면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신명기 4:39-40 /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오래 장수하면서 잘 사는 비결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 것이다.
신명기 28:1-14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면 세계민족 가운데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해 주신다. 그래서 들에 가도 복 받고, 성읍에 가도 복을 받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복 받게 하셨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게다가 자손들이 복을 받고 소와 양떼들까지 복을 받는다. 그것 뿐일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보고를 열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신다. 모든 일이 잘되게 하신다. 그래서 나누어 줄지언정 꾸러 가게 아니하신다. 남의 머리가 되게 하시지, 꼬리가 되게 하시지 않으신다. 이처럼 모든 복을 다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복 받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니까,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오해를 한다. 절대로 그런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
마 5:17-20 / 내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쓴 책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18)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라 하여 이를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그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의롭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율법이 끝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온전히 이루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 계명 중에 우리가 작은 계명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이 율법 박사라고 할지라도 천국에서는 작은 인간 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계명을 지키면서 가르치는 사람은 영생을 얻음은 물론이거니와 천국에서 ‘크다’라는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이렇게 명하신다.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너도 이제 가서 그와 같이 실천하라.” 이에 대한 우리 모두의 답변은 “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겠습니다!”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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