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모
-조선 교회에 최초로 파견된 선교사-
1752〜1801, 세례명 야고보,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
주문모(周文誤, 야고보) 신부는 1752년 중국 강남성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왼 그를 고모가 삯바느질을 하며 키웠다. 나이가 차자 주문모는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3년 후 아이도 없이 부인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는 슬픔을 잊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 북경으로 갔는데,그곳에서 서양 학문과 천주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서양 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갔지만,서양 학문뿐만 아니라 천주교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깊이 감동하여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는 신앙심이 아주 깊었기 때문에 결혼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경교구 신학교에 특별히 입학할 수 있었고,나중에는 제1회 졸업생으로서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그는 중국 문학과 신학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1) 최초의 미사 성제가 봉헌되다.
조선 교회에 최초로 파견되어 1795년 부활 대축일에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미사를
봉헌한 주문모(야고보) 신부.
조선 교회는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 1790년 5월에 밀사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파견하였다. 8월 13일이 청나라 건륭(乾陰) 황제의 80회 생일이라서 윤유일은 사신 일행에 끼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 길인 윤유일은 북경에 도착하여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귀국하는 윤유일에게 미사 때 사용할 제구(祭具)를 가지고 가도록 하고,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주교는 조선 교회를 그대로 방치해 둘 경우 수년 내에 이단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여 선교사 파견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791년 주교는 약속대로 도스레메 디 오스(산05요에!선0이 라는 마카오 출신의 중국인 오(吳:) 요한 신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오 신부와 조선 신자들은 약속이 어긋나 만나지 못했고,그 결과 첫 번째 선교사 영 입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선교사 영입 운동이 재개된 것은 1793년 윤유일,지황,최인길에 의해서였다. 밀사로 선발된 지황과 박 요한이 1793년 10월 동지사 일행에 끼어 서울을 출발하여 그 해 말 북경 주교에게 선교사 파견을 청하는 편지를 전달하였던 것이다. 구베아 주교는 1794년 초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선발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로부터 성무 집행을 위한 통상적인 권한과 특별 권한 모두를 부여받고 1794년 2월(양) 북경을 떠났다. 그리고 20일 동안 걷고 또 걸은 끝에 약속된 장소에서 지황을 만났다. 그러나 지황은 주문모 신부에게 압록강의 얼음이 예년보다 일찍 녹은데다가 국경의 감시가 삼엄하여 관문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래서 압록강이 완전히 어는 12월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주 신부는 약속된 날을기다리면서 근 10개월 동안 구베아 주교의 지시대로 만주에서 교회를 순회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12월 국경 지대로 다시 온 주문모 신부는 윤유일과 최인길 등을 만나 복장과 머리 모습을 조선식으로 바꾼 다음,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2월 3일 (양 1795년 1월 3일) 밤 조선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2일 동안을 걸어 마침내 12월 14일(양 1795년 1월 14일)경 서울에 무사히 입성하였다.
중국어를 잘하는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주문모 신부는, 우선 성무를 빨리 수행하기 위해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795년 성주간에는 세례성사와 보례(補禮)를 집전하였으며, 한자를 통한 필담으로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이어 부활 대축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미사 성제가 감격스럽게 봉헌되었다.
2) 북경 주교에게 서양의 큰 배 파견을 요청하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서 사목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도 채 안되어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당할 뻔하였다. 진사 한영익이 주 신부가 입국한 사실과 은신처를 이벽의 동생 이석에게 밀고한 것이다. 이석은 4월에 이 사실을 우의정 채제공(蔡濟燕)에게 알렸고,채제공이 다시 정조에게 보고하면서 임금은 포도 대장 조규진에게 주 신부의 체포령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주 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고, 대신 온갖 고생을 무릅쓰며 신부를 이 땅에 모셔 오고, 늘 곁에서 열심히 보필하던 윤유일과 최인길 그리고 지황이 신부를 대신하여 체포된 뒤 매맞아 순교하였다.
이른바 을묘박해(己卵迫害)였다. 주 신부는 박해를 피해 최인길의 집을 떠나 창동 - 석정동,사축서동(司畜署洞,지금의 북창동),경기도 양근 - 충청도 연산의 교우 집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1796년 5월 창동에 있는 강완숙(姜完減,골롬바)의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주문모 신부는 입국한 지 반년 만에 자신의 입국을 주도한 죄목으로 세 사람이 처형되자 위기 의식을 느꼈다. 그리하여 주 신부와 신자들은 신부의 신변 안전과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면 서양의 큰 배〔大船〕를 청해 오는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북경 주교에게 서양의 큰 배를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주 신부의 경험에 서양의 큰 배는 선교사들의 교통 수단이며,우수한 서양 문화의 유통 수단일 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신봉하는 유럽 나라의 외교적인 힘의 상징이었다.
사실 서양 큰 배의 파견은 조선 교회의 희망이었다. 일찍이 조선 신자들은 중국 교회의 역사에서 선교 활동의 자유를 얻은 사례를 찾고 있었다. 조선의 신자들은 선교사라면 으레 큰 배를 타고 선교를 다녔고,마테오 리치같은 대학자 역시 그랬던 것으로 인식하였다. 마테오리치가 처음 중국에 와서 선교를 하려고 하자 중국 정부는 이를 금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서양 큰 배에 보화를 싣고 중국에 들어와 천주교당을 짓고 서양 학문을 가르친 결과, 선교 활동이 허락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신자들은 리치와 같이 높은 학식을 갖춘 선교사가 서양 큰 배를 타고 조선에 입국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자기 혼자의 노력으로 서양 선박 청래(請來) 운동을 추진하는 것보다 조선 신자들의 의견을 모아 신중하게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라도 교회의 중심인 유항검(抑恒檢,아우구스티노)에게,편지를 보내 북경 주교에게 서양 큰 배를 파견해 달라는 진정서를 쓸 것을 부탁했다. 그 결과 1796년 겨울 밀사 황심 (黃心, 토마스)이 주 신부의 편지와 신자들의 진정서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1800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대박 청래(大船請來)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주 신부와 신자들의 희망은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3) 신자 1만여명으로 늘어
을묘박해 후 주문모 신부는 거의 창동 강완숙의 집에 거처하고 있었다.
집주인 강완숙은 양반 집 안 출신이 었는데 , 조선 왕조의 풍습에 따르면 양반집은 관헌이 들어가 가택 수색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부녀자가 주인인 집에는 외부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습을 이용하여 주문모 신부는 이 집을 사목 활동의 본부로 정하고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하면서, 순교하기까지 6년 동안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
그 동안 그는 언어 소통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고, 풍속에도 충분히 익숙해져 조심스럽게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그러나 발각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의 가정 방문과 사목 활동은 비밀에 싸여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제한 된 활동 속에서도 주 신부는 조선에 온 이후 6천여 명의 신자들을 증가시켰고,그들의 신앙을 크게 북돋아 주었다.
즉 주문모 신부의 활동 결과 그가 입국하였을 때 4천명이었던 신자수가 주 신부가 순교할 무렵에는 1만여 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것 외에 신자들을 위한 신심서 저술에도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지은〈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는 고해성사와 세례성사를 준비하는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주 신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주로 밤에 사목 활동을 하였고, 낮에는 음식을 제대로 들지 않으면서까지 신자들을 위해 책을 쓰는 데 전념하였다. 그야말로 불철주야 신자들을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문모 신부는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을 체계화하기 위해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였다. 명도회는 교리를 연구하여 가르치는 모임으로. 서울에는 보통 ‘6회’ (穴會)라고 하여 황사영,현계흠,홍문갑,김여행 - 홍익만,김이우(?)의 집이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다. 명도회는 흔히 주 신부가 중국에 있던 유사한 조직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하지만,아마도 이승훈의 영세 이후 조선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해왔던 교리 연구와 선교 활동을 좀더 체계화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떻든 명도회의 공식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있었던 것 같고, 초대 회장은 정 약종이 맡았다.
주 신부는 명도회 말고도 회장제를 도입하여 최창현과 강완숙을 남녀 회장에, 정산필을 내포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는 등 회장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주 신부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목 활동에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평신도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은 계속되는 박해 중에서도 나름대로 이어져 박해를 이겨 나가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4) “조선에 온 목적은 하나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의 은신처를 추궁받으면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래서 몇몇 신자들은 주신부에게 안전을 위하여 잠시 동안이라도 본국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재촉하였다. 그들은 박해가 멎으면 다시 잠입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 신부를 설득한 것이다. 주 신부는 할 수 없이 중국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러나 황해도 황주에 도달한 주문모 신부는 도중에 ‘착한 목자 로서 자신의 양 떼와 끝까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가 자수하면 신자들의 고통도 끝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울로 되돌아온 주 신부는 그 해 3월 12일(양 4월 28일)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보내면서 , 자기와 함께 있는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을 잃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주 신부는 구베아 주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렇게 헌신적으로 활동하다가 자수한 것이다. 자수함으로써 박해자들의 모든 격노를 온통 자신에게 쏟게 하여 신자들의 불행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주 신부는 문초 중에 조선에 온 이유를 묻자 “내가 조선에 온 것은 한 가지 목적뿐이오. 참된 종교를 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불쌍한 백성의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었소”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취조를 받으면서 성직자로서의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여 신자들에게 불리할 것 같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4월 19일(양 5월 31일) 그를 군문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던 처벌)에 처해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결정하였다.
같은 날 오후 주문모 신부는 감옥에서 끌려나와 사형 집행 장소인 한강 근처의 ‘새남터’ 로 갔다. 그가 사형장에 도착하자 형리는 신부의 양쪽 귀에 화살을 꽂고 주 신부에게 죄목을 나열한 조서와 판결문을 읽게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침착하게 다 읽고 난 후 주위에 모여 있던 군중을 향해 힘차게 나는 천주교를 위하여 죽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한 다음, 머리를 숙여 칼을 받았다. 그때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주문모 신부의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그전까지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어두운 구름이 짙게 깔리더니,광풍이 불면서 모래사장의 모래와 자갈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아가자마자, 바람과 비가 그치고 해가 다시 나타나면서 하늘에 영롱한 무지개가 걸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인들과 백성들은 모두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징조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시신은 3 일 동안 처형장에 방치된 채 군인들이 지켰는데,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 위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 뒤 군인들은 어디에 묻었는지 신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 신부의 시신을 몰래 땅에 파묻었다.
얼마 후 신자들은 백방으로 주문모 신부의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현재 주문모 신부는 수원교구에서 시복이 청원된 상태이며,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 마을)에 그의 가묘가 모여져 있다.
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순교는 믿음의 씨았이되고』 [신유박해 순교자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