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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1578년(선조 11) 이이(李珥)가 지은 시조
이동현 이북도민작가 ・ 2021. 10. 8. 21:44
고산구곡가
이 이
<원문>
高山九曲潭(고산구곡담)을 살ᄅᆞᆷ이 몰으든이
아홉 번을 굽이도는 계곡
주모복거(誅茅卜居)ᄒᆞ니 벗님네 다 오신다.
풀을 베어 냐고 집을 지어 살 곳을 정함.
어즙어, 武夷(무이)를 想像(상상)ᄒᆞ고 學朱子(학주자)를 ᄒᆞ리라.
주자가 정자를 짓고 학문을 닦던 곳
<해석>
고산의 아홉 번을 굽이 도는 계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람들이 모르더니
내가 터를 닦아 집을 짓고 살게 되니 벗들이 찾아오는구나
아 주자가 학문을 닦는 무이를 생각하면서 주자의 학문을 공부하리라.
➡ 고산에 정사를 짓고 주자학을 배움.
<원문>
一曲(일곡)은 어드ᄆᆡ고 관암(冠巖)에 ᄒᆡ 빗쵠다.
바위의 이름, 갓같이 생긴 바위
안개가 걷히니
平蕪(평무)에 ᄂᆡ 거든이 遠近(원근)이 글림이로다.
잡초가 무성한 들판 그림같이 아름답도다
松間(송간)에 綠樽(녹준)을 녹코 벗 온 양 보노라.
좋은 술을 담은 술통
<해석>
일곡은 어디인가? 관암에 해가 비친다.
잡초가 우거진 들판에 안개가 걷히니 원근의 경치가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소나무 사이에 술통을 놓고 벗이 찾아 온 것처럼 바라보노라.
➡ 관암의 아침 경치
<원문>
二曲(이곡)은 어드ᄆᆡ고 花巖(화암)에 春滿(춘만)커다.
바위 이름, 꽃바위 봄이 저물었도다
碧波(벽파)에 곳츨 ᄯᅴ워 野外(야외)에 보내노라.
푸른 물결
살ᄅᆞᆷ이 勝地(승지)를 몰온이 알게 ᄒᆞᆫ들 엇더리.
명승지의 준말
<해석>
이곡은 어디인가? 화암에 봄이 저물었도다.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들 밖으로 보내노라.
사람들이 경치 좋은 이 곳을 알지 못하니 알려서 찾아오게 한들 어떠리.
➡ 화암에 늦봄 경치
<원문>
三曲(삼곡)은 어드ᄆᆡ고 翠屛(취병)에 닙 퍼졌다.
푸른 빛 병풍처럼 나무와 풀로 덮인 절벽
綠樹(녹수)에 山鳥(산조)는 下上其音(하상기음)ᄒᆞ는 적의
소리를 낮추었다가 높였다 함
盤松(반송)이 受淸風(수청풍)ᄒᆞᆫ이 녀름 경(景)이 업셰라.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
<해석>
삼곡은 어디인가? 푸른 병풍을 둘러친 듯한 절벽에 잎이 우거졌다.
푸른 나무 위의 산새는 여러 가지 소리로 지저귀는데,
작은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니 여름 같지 않게 시원하구나.
➡ 취병의 시원한 여름 경치
<원문>
四曲(사곡)은 아드ᄆᆡ고 松崖(송애)에 ᄒᆡ 넘거다.
소나무가 있는 물가의 낭떠러지
潭心巖影(담심암영)은 온갖 빗치 ᄌᆞᆷ겻셰라.
물에 비친 바위 그림자
임천(林泉)이 깁도록 죠흐니 흥(興)을 계워 ᄒᆞ노라.
수풀 속의 샘 깊을수록
<해석>
사곡은 어디인가? 소나무가 있는 절벽에 해가 넘어간다.
연못 속에 비친 바위 그림자는 온갖 빛과 함께 잠겨 있구나.
수풀 속의 샘은 깊을수록 좋으니 흥을 이길 수가 없구나.
➡ 송애와 연못의 저녁 풍경
<원문>
五曲(오곡)은 어드ᄆᆡ고 隱屛(은병)이 보기 죠희.
으슥한 병풍처럼 둘어 있는 절벽
水邊精舍(수변정사)는 瀟灑(소쇄)ᄒᆞᆷ도 ᄀᆞ이업다.
물가에 세워진 정사 맑고 깨끗함
이 中(중)에 講學(강학)도 ᄒᆞᆯ연이와 詠月吟風(영월음풍)ᄒᆞ올이라.
<해석>
오곡은 어디인가? 으슥한 병풍처럼 둘러 있는 절벽이 보기 좋구나.
물가에 세워진 정사는 맑고 깨끗하기 한이 없다.
이 가운데서 학문 연구도 하려니와 자연을 시로 짓고 읊으면서 풍류를 즐기리라.
➡ 수변 정사에서의 강학과 영월음풍
<원문>
六曲(육곡)은 어드ᄆᆡ고 釣峽(조협)에 물이 넙다.
낚시질하기에 좋은 골짜기
나와 고기야 뉘야 더욱 즑이는고.
黃昏(황혼)에 낙대를 메고 帶月歸(대월귀)를 ᄒᆞ노라.
달과 함께 돌아옴
<해석>
육곡은 어디인가? 낚시질하기 좋은 골짜기에 물이 넓구나.
나와 물고기는 어느 쪽이 더 즐거운가?
이렇게 종일 즐기다가 날이 저물면 달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노라.
➡ 조협에서의 낚시질과 대월귀
<원문>
七曲(칠곡)은 어드ᄆᆡ고 楓巖(풍암)에 秋色(추색)이 죳타.
단풍으로 둘러싸인 바위
淸霜(청상)이 멻게 치니 絶壁(절벽)이 금수(錦繡)ㅣ로다.
맑은 서리
寒巖(한암)에 혼자 안자셔 집을 닛고 잇노라.
차가운 바위
<해석>
칠곡은 어디인가? 단풍으로 둘러싸인 바위에 가을빛이 좋다.
맑은 서리가 엷게 내리니 절벽이 비단같이 아름답구나.
차가운 바위에 혼자 앉아서 속세의 일을 잊어버렸노라.
➡ 단풍으로 덮인 아름다운 가을 풍경
<원문>
八曲(팔곡)은 어드ᄆᆡ고 琴灘(금탄)에 ᄃᆞᆯ이 ᄇᆞᆰ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는 시냇가
玉軫金徽(옥진금휘)로 數三曲(수삼곡)을 노는 말이,
아주 좋은 거문고
古調(고조)를 알이 업스니 혼ᄌᆞ 즑여 ᄒᆞ노라.
옛 곡조 즐겨
<해석>
팔곡은 어디인가? 악기를 연주하는 시냇가에 달이 밝구나.
아주 좋은 거문고로 몇 곡을 연주하면서,
옛 곡조를 알 사람이 없으니 혼자 즐기고 있노라.
➡ 시냇가에서 거문고를 연주하여 즐김
<원문>
九曲(구곡)은 어드ᄆᆡ고 文山(문산)에 歲慕(세모)커다.
한 해가 저물도다
奇巖怪石(기암 괴석)이 눈 속에 뭇쳣셰라.
遊人(유인)은 오지 아니ᄒᆞ고 볼 것 업다 ᄒᆞ더라.
놀러 다니는 사람
<해석>
구곡은 어디인가? 문산에 한 해가 저물었도다.
기암 괴석이 눈 속에 묻혔구나
사람들은와 보지도 않고 볼 것이 없다고 하더라.
➡ 눈 덮인 세모의 자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개설
10수의 연시조로 작자가 43세 때 해주 석담(石潭)에 은거할 때 지었다. 『율곡전서(栗谷全書)』를 비롯하여 『악학습령(樂學拾零)』·『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시가(詩歌)』·『악부(樂府)』(서울대학교본)·『청구영언(靑丘永言)』(洪民本·가람본·육당본)·『시조유취(時調類聚)』·『해동가요(海東歌謠)』(一石本·周氏本)·『교주가곡집(校註歌曲集)』 등과 유중교(柳重敎)의 문집인 『성재집(省齋集)』 권49·50·『현가궤범(絃歌軌範)』 부록에도 실려 있다. 『해동가요』에는 작자가 밝혀져 있지 않고, 『시가』·『악부』·『청구영언』(홍민본)·『해동가요』 및 『금보(琴譜)』의 맨 뒷장에는 오언으로 된 송시열(宋時烈)의 한역시가 덧붙어 있으며, 『현가궤범』에는 가사 옆에 율자보(律字譜)가 병기되어 있다.
이 작품은 작자가 석담에서 고산구곡을 경영하여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주희(朱熹)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栗谷先生年譜)
내용
내용은 서곡(序曲), 제1곡 관암(冠巖), 제2곡 화암(花巖), 제3곡 취병(翠屛), 제4곡 송애(松崖), 제5곡 은병(隱屛), 제6곡 조협(釣峽), 제7곡 풍암(楓巖), 제8곡 금탄(琴灘), 제9곡 문산(文山)의 경치를 두고 각각 그 흥취를 읊은 것이다.
이 작품이 「무이도가」를 본떠 지었다고 하나 서로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단순한 모방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산구곡가」 제1곡과 「무이도가」 제1곡을 놓고볼 때, 「무이도가」가 수채화에 견줄 수 있는 반면에 「고산구곡가」는 담백한 묵화를 연상하게 한다.
그 까닭은 작자 나름의 확고한 시론(詩論)에 바탕을 둔 작품이기 때문이다. 『율곡전서』에 따르면, 그의 시론은 “시는 담백하고 꾸밈이 없어야 한다(主於沖澹蕭散不事繪飾).”는 것이다.
작자와 주희는 한결같이 도학적 문학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도학의 문구가 전혀 없다. 이는 그들이 문학의 본질, 즉 문학이 지닌 미의식을 긍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작자의 미의식은 주희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자가 주희의 미의식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 독창적인 시경(詩境)을 개척하였음을 말해 준다.
『현가궤범』의 「고산구곡가」는 국한문혼용의 가사 옆에 12율명을 병기한 율자보로서 그 음 높이만 알 수 있을 뿐이며, 그것도 한글로 된 부분의 음은 정확히 어떤 글자에 그 음이 몇 번 붙는지도 불분명하게 되어 있다.
또한, 장단 표시가 없어 어떤 음이 얼마만큼 길고 짧은지 알 수 없는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의 규칙적인 장단으로 되어 있다. 제1곡부터 제3곡까지는 ‘황(黃)·태(太)·고(姑)·유(蕤)·임(林)·응(應)’의 6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4곡부터 제10곡까지는 ‘황·태·고·유·임·남·응’의 7음으로 구성되어 있어 황종각조(黃鐘角調)에 해당된다.
이 악보는 『현가궤범』의 부록인 「시율신격(詩律新格)」에 있는 한시의 율격 가운데 칠언사운율의 배율을 응용하여 국한문혼용체의 율격에 맞게 적당히 배율하여 만들었으며, 각 장의 시작음과 끝음은 항상 황종으로 황종각조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형식은 1장부터 10장까지 어느 장도 완전 반복이 없을 정도로 조금씩 달라 장절 형식과 통절 형식의 절충형식으로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의 주자학 지식인들이 「무이도가」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이황(李滉)의 경우가 그렇듯이 거의 한시로 차운(次韻)을 한 데 반하여, 작자는 시조의 형태로 변용하였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17세기에 와서 송시열을 비롯한 주자학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한역되기도 하고, ‘고산구곡’이라는 자연을 소재로 한 많은 한시가 창작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작품이 17세기 조선 문단에 중요한 작품으로 부각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고산구곡가」는 주자의 「무이도가」의 구곡가 형식을 빌려 노래하면서, 주자의 성리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주자의 천도(天道)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신적 경지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산구곡가」는 주자의 사상과 철학을 수용하되 율곡의 독자적인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사상과 겸선(兼善)의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미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형식적인 면에서 「고산구곡가」는 고산구곡담을 배경으로 서사 연과 일곡으로부터 구곡까지 이어지는 10수 연시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사 연을 제외한 일곡으로부터 구곡까지의 각 연의 1행의 “○○곡은 어드메오, ○○에 ∼하다”는 문답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호기심을 일깨워 시상을 불러일으킴과 함께 개별적인 각 연에 순차성을 부여하고 각 연의 관련성을 탄탄하게 하여 연시조로서의 통일성을 갖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 구조는 율곡 문학의 특징으로 드러나는 평담(平淡)을 지향하는 것으로 형식면에서의 평담한 미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또한 「고산구곡가」는 전통적인 사시가의 시간 구조를 빌어 하루 사시와 일년 사시의 복합 시간 구조를 형성하고 효과적으로 순환성을 획득하고 있다. 즉 서사 연과 오곡을 제외한 여덟 곡이 중장과 종장에서 하루 사시의 시간과 일년 사시의 시간이 교차되며, 순차적으로 드러나면서 우주적 원리에 의한 순환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효과는 서사 연과 오곡의 무규정적 시간 속에 더욱더 증대된다. 즉 서사 연은 10수 연시조의 선두에서, 오곡은 서사 연을 제외한 나머지 연의 중심에서 앞뒤의 각 연에 의미를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을 바탕으로 서사 연에서는 “학주자(學朱子) 하리라”라 하였고,오곡에서는 “강학(講學)과 영월음풍(詠月吟風)하리라”고 읊고 있는데, 다른 여덟 곡의 종결형 어미 ‘하노라’와는 다르게 ‘하리라’라는 미래 원망형 종결어미를 사용하여 의지적으로 지속적인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참고문헌
『사림파문학의 연구』(이민홍,형설출판사,1985)
『국문학과 자연』(최진원,성균관대학교 출판부,1977)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조윤제,동광당서점,1937)
「율곡의 고산구곡가 율자보에 대한 소고」(권오성,『제3회 국제학술회의논문집』,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4)
「고산구곡가와 무이도가고 1·2」(이민홍,『개신어문연구』1·2,충북대학교,1981∼1982)
「고산구곡가연구」(황진성,『동악어문논집』1,동국대학교,1965)
집필자
집필 (1996년)
이민홍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현존하는 한글본 '고산구곡가', 율곡 이이가 지은 원작 아냐" (매일경제 2021.7.11.)
신향림 고려대 연구원, 논문 발표…"박세채가 한문 시 재번역한 것" |
"고산구곡담(高山九曲潭)을 사람이 모로더니/ 주모복거(誅茅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무이(武夷)를 상상(想像)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조선시대 학자 율곡 이이(1536∼1584)가 지었다고 알려진 시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첫 구절이다. 고산구곡가는 퇴계 이황이 창작한 시조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함께 16세기에 만들어진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오늘날 전하는 한글본 고산구곡가는 이이가 지은 원작이 아니며, 후대에 송시열이 이이의 원작을 한문으로 옮긴 글을 박세채가 다시 한글로 번역한 작품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11일 학계에 따르면 신향림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연구원은 한국한문학회가 펴내는 학술지 '한국한문학연구' 최신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지금 전하는 고산구곡가는 박세채가 송시열의 한역본(漢譯本)을 한글로 재번안한 작품"이라고 밝혔다.
신 연구원은 이이가 고산구곡가를 지었다는 사실은 명확하지만, 사후에 이이의 한글 원고가 사라졌고 박세채가 재번역한 시만 전승됐다고 강조했다.
신 연구원은 우선 이이와 친분이 두터웠던 이해수가 1593년 해주에서 이이를 추억하며 읊은 시에 "누가 다시 길게 구곡사(九曲詞)를 부를까"라는 문장이 있어 이이가 구곡사, 즉 고산구곡가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이이 제자인 김장생이 1597년 남긴 '율곡행장'부터 김집이 1654년 지은 '묘지명'(墓誌銘)까지 이이와 관련된 여러 문헌에 고산구곡가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신 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이이가 고산구곡가를 지었다는 기록은 송시열이 주관해 1665년 간행한 '율곡연보'에 처음 나타난다. 이후 송시열은 박세채에게 율곡연보 검토를 맡겼고, 박세채 손을 거친 새로운 연보에 "한글로 고산구곡가를 지었다"는 기록이 추가됐다.
신 연구원은 "박세채가 '율곡집' 증보 필요성을 느껴 1682년 '율곡선생외집'을 간행했고, 여기에 송시열의 한역본이 실렸다"며 율곡선생외집은 언문이 아닌 한문이지만 고산구곡가를 수록한 최초의 문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송시열은 어떻게 고산구곡가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일까. 신 연구원은 "김집의 첩이자 이이의 서녀(庶女, 첩이 낳은 딸)인 여성이 가지고 있던 한글본 고산구곡가를 송시열이 스승 김집의 명으로 한역했고, 20∼30년 뒤 한글본은 사라진 것 같다"고 추론했다.
이어 박세채는 한문 고산구곡가를 1681년 재번역한 한글본을 송시열에게 보내면서 수정을 요청했는데, 이때 송시열이 한글 원본 고산구곡가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면 율곡집에 수록하도록 내놓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송시열이 1688년 편지에서 "오래전부터 한글본 고산구곡가를 소장하고 있다"고 이야기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신 연구원은 송시열이 거짓을 말했다고 판단했다. 송시열 본인이 옮긴 한역본이 원작에 충실하다고 판단했기에 박세채의 한글본을 원작으로 둔갑시켜 공개했다는 것이다.
신 연구원은 또 오늘날 알려진 고산구곡가는 언어학적 관점에서도 한문을 한글로 옮긴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판본이 존재해 원본임이 확실하다고 알려진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현재 전하는 고산구곡가를 비교해 "고산구곡가는 도산십이곡처럼 듣는 이를 의식한 구어투 표현이나 다양한 종결어미가 보이지 않고, 시조에서 잘 쓰이지 않는 '∼(로)다' 같은 종결어미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강조했다.
이어 "고산구곡가는 대부분의 어구가 한시의 직역에 가깝다"며 여러 정황상 현전하는 고산구곡가는 원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매듭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