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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현초64회 원문보기 글쓴이: 피안재
스페인을 찾는 여행자들은 우선적으로 두가지 점에 우선 순위를 두고 여행을 계획한다.
첫째는 스페인을 위한 가우디에 의한 가우디의 도시 바로셀로나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여행계획을 설계한다는 사실이다.
두번째는 스페인 영토 안에 남아있는 이슬람의 문화를 찾아서 안달루시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세비아의 대성당과 하랄다 탑과 콜럼버스의 묘를 만나보아야만 하겠다는 간절한 열망을 담은 여행길을 말한다.
그런 여행자들의 발걸음에 나는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다.
'Buena Suerte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적어도 스페인에서라면 당신의 마음이 쏠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그대로를 마음껏 누리고 즐기시라' 권하겠다.
어디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와 세비야 뿐이겠는가?
세고비아. 톨레도. 코르도바. 론다. 쿠엥카. 말라가. 살라망카. 발렌시아. 사라고사 뿐만이 아니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여행자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 스페인이야 말로 자유여행자들의 천국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마드리드도 있지않은가?
(프라도 미술관)을 포함한 수많은 미술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장들의 숨결과, 태양을 닮은 정열과 혼재된 문화속에서 생겨난 매우 독특한 정취와 그 속에서 한껏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에게서 풍겨나오는 스페인만 뜨거운 열정과 체취가 여행자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함께 동참하기를 요구한다. 광장마다 펼쳐지는 풀라멩코의 화려하면서도 강렬한 율동과 아련하게 울려퍼지는 아코디언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마드리드다.
'부에나 수에르테'
크고 장엄하면서 화려함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스페인 왕궁)을 이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짧은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그냥 타인의 안내에 이끌려 이국의 풍경과 정취나 경험해보려 찾아온 여행자에게는 멋지고 아름다운 것만 보일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 경우에는 스페인의 역사속에서 밝음과 어둠, 영광과 수난의 역사를 이미 알고있고, 그것들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이 화려함들이 마냥 아름답게 보여지고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열정 가득한 뜨거우면서도 격정적인 플라멩코 춤은 스페인의 정열을 상징한다. 그 풀라멩코를 처음 추기 시작한 사람들은 바로 집시들이었다. 그리고 그 집시들의 삶은 그렇게 화려하고나 격정적이거나 열정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뭇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속에 떠돌아 다니면서 구걸하기 위하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집시들의 플라멩코다.
그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역사 또한 오역으로 점철된 아프고 슬픈 역사였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 역사속에서 스페인이 강국으로 부각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비교적 한참이나 늦은 출발이었다.
하지만 강력했다. 어느날 느닺없이 나타나 강력한 위맹을 떨쳤던 것이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스페인의 번영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아이콘 이었다. 그 무적함대가 한 수 아래로 치부되던 영국 함대에게 패배하는 순간 스페인은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다. 그 바턴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차지해 버렸던 것이다.
이 순간에도 스페인은 유럽의 절대 강국 반열에선 밀려나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국가에는 밀려나서 다시 뜨겁게 박차를 가해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유럽의 2류 국가라고 해도 무방하지 싶다.
그리고 그 중심에 (레알)로 대변되는 '스페인 왕가'가 버젖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은 대부분의 국가들과는 다르게 분명한 '입헌 군주제'의 나라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가 현 스페인의 국왕이다. 국민의 절대다수는 카톨릭 교도이다.
와인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이어 세번째 생산국이며, 올리브유는 세계 최고의 생산국가이다. 어디를 가나 올리브 와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스페인의 역사를 아주 단편적으로 들여다 본다면 약 7명의 인물에 의해서 지금 이순간의 스페인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 면면을 탄생 순으로 살펴 본다면 이사벨 여왕.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페르디난도 마젤란.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 프란시스코 고야. 안토니오 가우디.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를 꼽을 수 있겠다.
스페인의 역사는 이사벨 여황의 등장 전과 후로 구분된다.
여왕의 등장 이전의 역사는 까마득한 고대의 그저그런 내세울것 없는 역사에다가 지중해를 건너온 무어인(이슬람교도)들에 의한 치욕의 역사로 점철된다.
마침내 스페인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카스티야 지역의 (이사벨 여왕)은 아라곤 지역의 (페르디난도 2세)와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스페인의 자주성 확보에 돌입하게 된다. '레콩키스타(카톨릭에 의한 국토 회복운동)' 이 시작되었고, 끝내는 그라나다에서 승리함으로써 마지막 이슬람 왕조를 스페인 영토에서 영원히 추방시켜 버리는 성과를 얻게된다.
그리고 같은 해에 모든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컬럼버스를 후원하여 신대륙을 발견하는 위대한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
스페인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콜럼버스를 빼고는 스페인 역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사벨 여왕보다도 더 중요한 순간을 콜럼버스가 담당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사벨 여왕의 '국토 회복 운동'과 맞물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스페인을 하루 아침에 세계 최강의 부자 나라로 만들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콜럼버스는 스페인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인데........ 사실 그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스페인 역사에 한 획씩을 그은 7명의 위인 중에서 두명이 스페인 사람이 아니다. 묘하게 대항해 시대의 두 주인공이 모두 외국인인 셈이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마젤란은 포루투갈 사람이다.
그래서 포루투갈 사람들은 콜럼버스와 마젤란을 지극히 미워하고 혐오한다. 앙숙인 스페인을 위해서 공을 세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콜럼버스가 별로 달갑지 않은것은 어쩔 수 없는 역사의 부산물이 아닐까?
스페인 사람들은 그런 콜럼버스를 존경하고 추앙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스페인의 영웅이다. 그는 왕들의 반열 위에 있으며 거의 신(神)의 경지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그렇게 스페인을 위해서 헌신하며 영광을 함께했던 삶에 만족해 했을까?
그는 죽으면서 단 한가지 유언을 남겼다.
'나의 시신은 절대로 스페인 땅에 뭍지 말아다오.'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스페인 왕궁 투어는 여기까지이다.
왜냐하면 입구 현관의 계단 지역을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전구역 모두 사진촬영 금지구역 이다. 왕궁을 모두 둘러보기는 하였으나 가지고 나온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결코 소소하지 않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음에도 사진촬영을 금지하고나면 여행자는 허탈하다. 왜냐면 눈과 가슴에만 담아가기에는 타고난 인간적 메모리카드의 용량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왕궁 뿐만이 아니었다. 프라도 미술관도 철저하게 금지하고 수많은 관리자를 풀어 철저하게 규제한다.
스페인의 대부분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모두 '절대 사진촬영 금지' 였다. 이런 점만은 지극히 싫다.
기타 여러 다른 유럽국가에서 일부는 사진 촬영에 관해서 전혀 터치하지 않는자. 완전 자유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제한적으로 '사진 촬영은 자유이되 플래시 사용을 금지' 한다. 르네상스의 보고인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우피치에서는 입장료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왕궁이나 프라도 미술관은 억울할 정도로 아까웠다. 그래서 생각에 앞으로 웬만하면 스페인에서의 미술관 관람은 자제하기로 했다. 인터넷이나 책자를 통해 관람하는 것이 오리려 났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사실 따지자면 어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몰라서 미술관에 가는것이 아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실물을 직접 보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접근도 힘들고 인파로 북적이고 사방에서 노려보면서 사진 찍는것 까지도 감시한다면......... 그런곳은 별로 가고픈 생각이 없다. 역시 미술관은 (우피치)가 최고다!!!!
왕궁 내부에는 벨라스케스. 카라바조. 고야 등 거장들의 작품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으나 역시 모두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그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은 이 왕궁엔 저마다 치장과 용도가 다른 2.800개의 방이 있다는데....... 280개가 아니라 정확히 2.800개의 방이란다. 그 중에서 약 50개의 방만 관람객에게 오픈하고 있다.
그런 사방에서 제한이 따라다닌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처음 기대와는 다르게 갑자기 영흥이 싸그리 사그라져가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뒷맛이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출구로 향하는 길도 꼭 기념품 판매소를 경유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레알 씩이나 하는 간판을 걸어 놓고도 참으로 가지가지 하는구나......... ㅎㅎㅎ)
출구 앞에서는 (중국의 인권 탄압을 규탄)하는 일인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다. 한국인 만큼이나 중국인 여행자들도 제법 눈에 띄는데........ 저들은 저런 시위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할까?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왕궁을 마주본것 처럼 나란히 우뚝 서 있는 (알무데나 대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알무데나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la Real de la Almudena de Madrid)'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마드리드 교구 대성당이다. 이름 자체에 (레알)이 들어가는 범상치 않은 교회다.
1561년 스페인의 수도가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천도를 감행하였을 때 부터, 이곳 마드리드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수도에 걸맞는 대성당을 짖기로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톨레도 대성당이 스페인을 총괄하는 대교구의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고, 이로 인하여 마드리드 대성당의 건축은 이후 약 300면 넘게 유명무실해 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수백년간 이슬람의 지배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성모 마리아 상'을 모시기 위한 대성당을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끊어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한 염원에 힘입어 마침내 1879년에 대성당이 착공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에 '시민 전쟁'과 같은 여러가지 우환이 겹치고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지자 수시로 공사가 중단되어 100년 이상이 걸려 1993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대 스페인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대하게 축성되었다. 하여 정문 왼편에 교황의 동상이 서있다.
대성당은 마주보고 서 있는 왕궁의 격에 맞추기 위해 중간에 대대적인 설계 변경을 하기도 하였다.
스페인 왕궁은 1085년 알폰소 6세가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당시 이슬람 성채가 있던 곳을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마드리드 대화재 사건 이후 새로 왕궁을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여 알무데나 대성당의 터는 아마도 당시에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알무데나 대성당은 스페인 사람들이 절대 성지로 여기고 있는것뿐만이 아니라 수만은 카톨릭 신앙을 가진 여행자들에게 있어서도 '성지 순례'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서기 711년 지중해를 건너온 무어인(이슬람 교도)들이 안달루시아를 먼저 점령하고는 재차 내륙 깊숙한 군사요충지 마드리드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교도가 금방이라도 성벽을 넘어 쳐들어올 기세를 보이자 성 안에서 미처 피신하지 못했던 기독교인들이 작금의 위급한 상황에 성모 마리아 상을 가지고 빠져나갈 고민을 해보았으나 도저히 다른 방법이 더오르질 않았다. 자신들의 빈 몸뚱이만으로도 이교도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기가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여 그들은 성벽의 허물어져 구멍난 부분에 마리아 상을 모시고 입구를 흙과 벽돌로 막아 버렸다.
다음날 무어인(이교도)가 성문을 부수고 들이닥쳤고 성 안의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져서 달아 났다.
겨우 살아서 도망친 사람중에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기와 기록으로 남겨 후손에게 그 사실을 전하도록 했다. 당사자들이 모두 죽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손들이 하나 둘 죽어갔다. 그러면서 성벽에 숨겨둔 마리아 상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잊혀졌다. 370년이 흐르기 까지 아무도 그런 과거를 기억하거나 알아채지 못했다.
국토 회복 운동의 결과로 무어인(이슬람교도)들이 모두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로 쫓겨가고 마드리드가 다시 카톨릭 영토가 되었음에도 이젠 아무도 370년 전의 그 사실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노인이 자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먼 옛조상님의 일기장을 우연히 읽어보다가 '성벽 속에 숨겨둔 성모 마리아 상'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노인은 성직자들과 학자들을 모아서 당시 시대에 남겨진 모든 기록들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잊혀졌던 370년 전의 기록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 기록을 토대로 '성벽 속의 성모 마리아 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다 하였음에도 마리아 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기독교인의 꿈에 아주 먼 조상님게서 나타나 아주 구체적으로 그날의 역사적 현장을 설명해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적으로 '성모 마리아 조각상'을 성벽 속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알무데나 대성당은 그렇게 '기적처럼 발견 된 성모 마리아 상'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 건축된 대성당이다. 그 후로 영험하다는 소문이 더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성모 마리아 상'을 찾아 온다. 교회 이름에서의 '알무데나'는 바로 이슬람 언어로 '성벽'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성벽 교회'인 것이다.
2층 높이의 제단 위에 안치된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사람들은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도 자주 목격된다. 받침대라도 손을 뻗어 만지는 사람, 입을 맞추려 애쓰는 사람......... 그러고 보니 신앙인들의 기도하는 모습도 나라마다 다 제각각이다.
'저들의 간절함 위에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신 신의 놀라운 축복과 은총이 가득하기를 나는 염원해 본다.'
할렐루야.
아멘.
밖으로 나와 왕궁을 바라보고 서 있는 천국의 열쇠를 손에 거머 쥔 베드로 동상을 만나도, 정면의 파사드 오른쪽을 차지하고 서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알무데나 대성당과 작별을 했다.
우연한 방문이었지만, 왕궁에서 퇴짜 맞은 느낌이었던 것을 이곳 알무데나 대성당에서 말끔하게 보상 받은것 같아 다시 기분이 상쾌해 졌다.
이런 상황들 또한 여행이 주는 묘미가 아니겠는가?
마침 지나가는 버스 번호가 눈에 익어서 잽싸게 달려가 탔다.
마요르 광장이 그리 먼 것은 아니었지만 아침 일찍 부터 제법 걸었음이며, 한낮의 열기가 기승을 떠는 시점이 되기도 했고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더하여서는 이 시점에서 컨디션 조절을 잘 해야지만 오후에도 또 열심히 걸어다닐 수 있지 않겠는가?
마요르 광장에서 먹었던 빠에야가 나름 인상적일만큼 맛있었기에 일단 우선 그리로 가보고 결정하기로 했고, 아니면 이 기회에 마드리드의 명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산 미구엘 시장)을 한번 섭렵하면서 배가 부르도록 실컷 군것질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마요를 광장의 한 노천 카페에 일단 자리를 잡았는데 너무 붐비기도 하고 묘하게 다른집보다 유독 이 카페가 부산스럽고 소란 스러웠다. 메뉴판을 살피던 우리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산 미구엘 시장과 끝장을 보아야만 하는 날인가 보다.'
'밥 먹으로 가는 길이니까 조금만 힘내서 식씩하게 걸어갑시다. ㅎㅎㅎ 홧팅?'
'산 미구엘 시장(Mercado de San Miguel)'
예능 프로그램 '꽃 보다 할배'에 등장하면서 여행자들의 관심이 급증했고, '송송 커플'의 신혼여행 코스로 알려지면서 근자에 정말로 한국여행자들에게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는 명소가 되었다. 아무리 살펴보고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한국여행자들이 열광할만한 이유는 크게 없어 보이는데....... 아마도 그만큼 티비의 영향력이 큰것 같다. 아마도 마요르 광장과 인접해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편하게 예쁜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으면서도 나름 스페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산 미구엘 시장은 '스페인의 3대 명물 전통 재래 시장' 중의 하나라고 각종 여행안내 책자와 팜플렛과 여행자들의 입에서 저마다 떠들어 대고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3대 전통 명물 시장이 어디어디인지를 알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나 책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어디선가 들었던 풍월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스페인의 3대 명물 전통 재래시장을 알아 본다면, 첫째가 바로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 이요, 둘째가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마켓(Boqueria Market)' 이며, 세번째가 바로 발렌시아의 '중앙 시장(Mercado Central)' 이다.
하지만 위의 세곳 모두 이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전통 재래시장은 아니다.
'푸드 코트' 혹은 그냥 '푸드 마겟'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쉽겠다.
일부 생과일이나 식재료(수산물이나 향신료)를 파는 상점도 있지만........ 이제 이곳들은 시대흐름에 맞추어 아주 간단하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안주 같은 소량의 음식들과 디저트와 가벼운 와인이나 차를 마시는 현대식 음신문화로 완전히 탈바꿈 되었기 때문이다.
세곳 모두가 1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이 가득 배어있는 재래시장이었다. 시끌벅적하고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그런 우리네와 닮은 낡고 혼잡한 재래시장 말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근에 백화점과 대형마켓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점차 재래시장은 활기를 잃어갔고 마침내는 손님들의 발길마저 끊겨서 점포들이 하나 둘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마드리드의 한 공무원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모두가 떠난 재래시장을 재개발한 것이다. 기둥과 천장등의 옛모습은 그대로 살리되 사방으로 훤하게 뚫려있던 공간을 통유리로 둘러막아서 하나의 독립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공간에 환기와 냉난방 시설을 갖추게 하여 사계절 항상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도록 했다. 40여곳 가까운 모든 점포들이 모두 오픈된 주방을 갖추게 하여 위생과 청결을 중요시 했다. 거기에다 주로 입점한 점포들이 주로 '타파스(tapas)'라고 하는 스페인만의 매우 독특한 음식 문화를 다루는 점포들이었다. 이게 그만 대 히트를 쳤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너무도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산 미구엘 시장의 변신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이어서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이 새롭게 탄생했고 그 뒤를 발렌시아 중앙 시장이 뒤를 따랐다.
모두가 21세기형 새로운 트렌드로 거듭났던 것이다. 그중 그나마 가장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산 미구엘이고, 그나마 약간 촌스런(?) 옛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보케리아 시장이다.
긴 통로와 긴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약 40개의 점포 또한 길게 늘어서 있다.
또한 긴 통유리쪽의 외벽에도 길게 길게 테이블이 늘어서 있다. 밖을 내다보면서 간단하게 음식이나 와인이나 맥주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이 푸드 마켓엔 한가운데를 제외하고 바깥쪽을 비롯한 상당수의 테이블은 의자가 없다. 그냥 버젖이 서서 음식을 먹는다. 이 또한 영업적으로 커다란 장점이자 독특한 그네들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나라의 선술집이나 야시장 같은 분위기가 약간은 느껴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낯설게 다가오는 스페인의 푸드코트를 이제 구경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이들 문화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몇가지 스페인 음식 문화에 대해서도 사전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설명하자면............
스페인에는 '바르(bar)'라고 하는 그네들만의 매우 독특한 생활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름만 가지고 본다면 우리나라의 '스탠드 바'를 연상시키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지극히 일상복이고 보편적인 생활문화의 하나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바르에 가서 진한 체스페레소 한잔을 마시고 출근한다. 새참을 먹거나 점심 시간에도 가벼운 식사를 위하여 바르를 찾는다. 저녁에도 간단한 식사를 위해 바르를 찾고, 생맥주 한잔이나 와인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싶을때도 바르를 찾는다. 길을 오가다가 화장실이 필요할 때도 바르를 찾는다. 이유는 바르에서의 커피나 차 값이 밖에서 생수를 사 마시거나 유료 화장실을 이용하는 비용에 비해서 별로 더 비싸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카페의 커피값이나 레스토랑의 음식값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하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값싸고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바르'인 것이다.
바르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때 까지 편의점이며 사교의 장이며 만남의 장소이다. 아무리 작은 시골의 동네에도 반듯이 바르는 존재한다.
이 바르에서 파는 음식의 대표적인 메뉴가 바로 '타파스(tapas)'다.
어찌 본다면 '바르'는 '타파스 전문점' 이라고 해도 무방할듯 싶다.
타파스는 메인 식사에 앞서서 식욕을 돋구어 주는 에피타이저로서 스페인 음식중에서 간식의 일종이었다. 올리브 치즈와 함께 차게해서 먹거나, 오징어 같은 해산물 튀김과 함께 먹기도 했다.
그러던 타파스가 유명해져서 스페인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전채요리나 정교하고 푸짐해진 하나의 개별적 메뉴로 차차 진보해 가면서 타파스만으로 한끼의 제대로 된 식사를 해결하는 정식 메뉴로 발전하기도 했다.
'타파스'라는 어원은 스페인어 'tapar'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덥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더운 안달루시아 지방 사람들은 유독 달콤한 세리주(알콜 도수를 높인 와인)를 즐겼는데, 세리주를 마시는 자리에는 항상 많은 날벌레들이 몰려와서 와인잔에 달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네들은 안주로 아주 얇게 썰은 고기조각(하몽)이나 치즈 조각을 작은 접시에 담아 놓고 술자리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날아드는 날벌레를 막기위하여 안주 접시를 올려 세리주 잔을 덮었다.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론 아예 세리주가 나올때 안주를 담은 접시를 세리주잔 위에 덮어서 함께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 세리주 잔 위에 덮개로 쓰인 작은 접시에 담겨나오는 다양한 안주류를 '타파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타파스'는 '바르'에서 파는 간단한 안주이고, '바르'는 '타파스 전문점'이 된 것이다.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여 스페인의 황금 전성기가 구가되면서 타파스는 놀라울 정도로 급격하게 발전해 가기 시작한다.
고대 리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던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서 포도와 올리브가 들어와 생활 자체를 변화시켰던 것처럼, 리베리아 반도를 침략하고 오랫동안 다스렸던 무어인(아프리카 이슬람 교도)에 의해서 아몬드와 석화(굴)와 온갖 향신료들이 전해졌다. 거기에다가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해서 토마토와 고추와 옥수수와 감자가 전해 졌다.
스페인 뿐만이 아니라 온 유럽인들의 생황 음식 습관이 변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중에서 바르에서 제공하는 타파스의 다양성이 몰라보게 늘어났던 것이다.
매력적이고 대단히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다.
하지만.......... 적어도 산 미구엘 식당의 타파스를 보고 있노라면........ 맛은 물론 대단히 화려해지고 다양성이 몰라보게 발전하였지만......... 변했다.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도 변했다.
'타파스가 가진 고유성'은 '쉽고 간단하고 값이 싼'것이 이유 였다. 그것이 타파스가 항상 어디서나 서민들에게 각광을 받는 이유였다.
여행 책자나 방송에서도 '타파스의 저렴함'을 타이틀로 소개했다.
타파스는 1개에 주로 1유로에서 3유로 까지 한다고 다들 이야기 하고 알고 있다. 스페인에서 보통 평균적인 한끼 식사가 10유로~12유로 한다고 치면, 그 돈으로 타파스를 적어도 5개~8개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고 소개한다.
개뿔.
산 미구엘 식당의 저렴한 타파스가 1개에 3유로 정도다. 평균을 보면 거의 1개에 5유로 정도로 보면 되겠다. 심지어는 한개나 세개 담기는 한접시에 12유로에서 15유로 17유로 까지 하는 음식들도 즐비하다. 이건 절대로 편한 길거리 음식이 아니다. 서민들의 음식이 아니다. 최고급 레스토랑 수준이다.
주로 관광객을 상대하는 곳으로 변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날....... 나름 여러가지를 즐겨보았다.(비용은 당연히 제법 나갔지만.........)
샴페인과 생맥주를 곁들인 산 미구엘 시장의 타파스 투어는 충분히 즐겁고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한번으로 족했다.
그날 이후로도 우리는 여행내내 타파스를 충분히 즐겼지만.......... 동네 골목 안에 있는 작은 바르를 순회하면서 타파스를 즐겼다.
더 맛있고, 더 정겹고, 진짜 스페인의 맛은 동네 골목안에 모두 숨어 있었다.
헐.......
하루 다섯끼니를 먹는다는 스페인 사람들의 음식문화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모두 사실이다.
'그렇게 먹고도 어떻게 살이 안찌지?'하는 부러움 보다는 '하루종일 먹는 생각만 하다보면 도대체 일은 언제하나?'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이침 7시쯤에 집이나 바르에서 간단하게 에스페레소 한잔과 작은 롤케익이나 크루아상으로 해결한다. 이를 (데사유노)라 하는데 아침식사라는 의미다.
오전 11시쯤에 친구나 동료들과 바르에 모여서 밀크커피나 크루아상 또는 쥬스를 마신다. 하몽 또는 보카데요라는 간단한 식사를 즐기는데 이를 (알무에르소)라 하는데 요즘 흔히 말하는 브런치의 뜻이다.
(코미다)라고 하는 점심시간은 이들의 식생활에 가장 중요한 일과로 마치 왕처럼 점심식사를 즐긴다. 레스토랑마다 저렴하게 에피타이저와 메인 요리와 디저트를 셑트메뉴로 '오늘의 요리'를 내놓기도 한다. 거의 대부분 한시간 가량의 점심시간을 풍부하게 즐긴다. 간단한 와인이나 맥주도 필수다.
오후 6시 쯤 퇴근시간이 되면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바르에 들러 간단하게 술을 마시거나 간식을 먹는데 주로 와인에다 타파스를 먹는다. (메리엔다)라 부르는데 오후 간식이라는 뜻이다. 다양한 타파스 안주를 먹다보면 의외로 시간이 길어지거나 다른 장소로 2차 3차를 즐기게 되는데 이를 다른 의미인 (차테오)라고 부른다.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을 먹는다.(그제서야 해가 지기 시작하니까...... 이 독특한 문화가 가능하다고 이해가 되기는 한다) 이들에게 밤 9시는 이제 막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밤 10쯤은 되어야 하나 둘 모여들어 저녁 식사를 한다. 이를 (세나)라고 부르는데 주로간단하게 스프나 토르티야 나 타파스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주로 술을 즐기는 편이다.
그 와중에 이들이 가장 즐기는 도토리를 먹여서 키운 돼지 뒷다리를 소금과 올리브유에 절여 자연 건조 숙성시킨 (하몽)과 최고급 향신료 샤프란이 들어가서 카레처럼 노랗게 먹음직스런 색깔을 내는 스페인식 볶음밥 (파에야)가 등장하게 된다. 스페인 사람들은 매주 목요일을 '파에야 데이'라고 부를만큼 즐긴다.
마드리드 거리산책은 무척이나 즐겁다.
주변의 모든것들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포루투갈의 채색타일 문화인 (아줄레주)를 이곳 스페인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스페인을 여행한다면....... 마드리드 거리 곳곳의 이정표, 바르셀로나의 모던한 가우디의 건축물들, 세비야의 상징이랄 수 있는 스페인 광장이나 구시가 곳곳들에서, 그리고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더하여 코르도바의 파티오 들을 떠올려본다면......... 그 건물 하나하나가 어찌보자면 하나같이 아름다운 도자기를 보는것 같은 착각이 생겨날 수도 있다.
이 푸르빛은 세라믹 타일 사용은 포르투갈과 스페인만의 매우 독특한 특징인데, 이 모두가 바다를 건너왔던 무어인(이슬람 제국)의 덕분에 생겨나고 발전시켜나간 것이다. 스페인의 매우 독특하고 다양한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그 이면에 크게 이슬람 양식이 풍부하게 가미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갈길이 멀고 먼 스페인에서 그런 부분들을 차차 살펴나가면서 여행을 계속하기로 하고....... 일단은 마드리드를 좀 더 즐겨보자.
그렇게 아름다운 마드리드의 도심을 구경하면서 걷다보면 저만치 멋진 문이 하나 나타난다. 마치 여기서부터가 진짜 마드리드다 라고 하는것처럼.
로마의 개선문을 본 떠 만든 (알카라 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마드리드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시벨레스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마리의 사자가 끄는 마차를 탄 풍요의 여신 시벨레스의 우아한 자태가 뿜어져 내는 분수 위에서 더욱 빛난다. 시벨레스는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 신의 어머니 이다. 마드리드의 모든 길은 이곳 시벨레스 광장을 반듯이 경유한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것이다. 그만큼 는 차량으로 붐빈다. 그리고 이 광장 주변으로 유독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시벨레스 궁전이 있고, 스페인 은행과 마드리드 시청 건물이 모두 이곳에 있다.
시간만 있었다면 주변의 어느 건물에든 높은 곳에 올라가 주변 경관을 한번 내려다 보고 싶었지만.........
이 광장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숲이 늘어서 있다. 레티로 공원이다. 그러고 보면 사방으로 곳곳에 우거진 푸른 숲을 가진 마드리드는 참 아름답고 행복한 도시다. 마냥 부러울 수 밖에.........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시벨레스 광장을 지나 프라도 거리를 산책하고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하는 것이지만, 알카라 문까지 온 마당에 가장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일단 (아토차 역)을 먼저 보고자 하는 발걸음이다. 하여 프리도 거리를 서둘러 그냥 통과하듯이 지나쳐 간다.
(아토차 역)은 마드리드에서 가장 먼저인 1851년에 생겨난 어찌보면 스페인 전체에서 가장 내노라 하는 멋진 건축물이다.
대화재를 겪은 후 보수한 구 역사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신 역사가 추가되어 다른 나라의 국제 공항에 버금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특히 구 역사 건물에 다양하게 각종 기념품 가계와 카페 레스토랑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으며, 특이하게도 건물 중앙에 열대 식물이 무성한 식물원을 조성해 놓은곳으로 아주 유명하다. 시민과 여행자들의 소중한 휴식터이자 멋진 관광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 아름다운 장소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는 다른 아픈 이유가 있다.
2004년 3월 11일 스페인 마드리드에는 동시다발적으로 곳곳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 주로 사람들이 붐비는 시간대의 역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가장 큰 폭탄테러가 바로 이 아토차 역의 식물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드리드의 테러는 약 180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2.000명 정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대형 참사였다. 이유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고, 그런 미국의 행위에 스페인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것에 분노한 이슬람 무장단체의 소행이었다.
생겨나지 않아야 할 일이지만........ 국가간에 분쟁이 전쟁으로 확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테러에 의해서 아무 상관이나 이유를 모르는 선량산 사람들........ 아이들. 부녀자들. 일반 시민들이 죽거나 부상당한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비극이라 하겠다.
1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스페인 사람들은 그날의 참사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하지만 결코 잊지는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날을 기얷하면서 우리도 아토차 역을 둘러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고....... 많은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기차시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코르도바를 거쳐 세비야로 가는 날....... 우리는 다시 이 역에 오게 될 것이다.
시간표를 살펴보고 코르도바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이젠 다시 프라도 거리로 디돌아 가야만 한다.
시벨레스 광장으로 남쪽으로 시원하게 뚫린 숲길을 따라 걷는다. 바로 프라도 거리다.
도심의 공원이 아니라 어디 깊은 산골짜기에 와 있는듯한 착각마저 일으키는 숲 사이로 오벨리스크가 나타나면서 부터 수많은 인파를 만날 수 있다.
이 거리....... 이 숲속에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3개의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프라도 거리의 중간쯤이라 할 수 있는 넵투노 광장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 방향으로 (티센 보르네사 미술관)과 (파라도 미술관)이 마주보고 서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내려가면 아토차 역 부근으로 (소피아 왕비 미술센터)가 있다.
거장들의 숨결과 예술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이 거리는 참으로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그 숲길 사이의 노천 카페에 앉아서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신다.
점점 가슴까지 설레이기 시작한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3대 거장인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그리고 '고야'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와 '루벤스', 그리고 이탈리아 화가 '보티첼리'와 '틴토렌토' 등도 만날 수 있다. 중세를 지나 근대와 현대의 서양 회화의 흐름을 한 장소에서 모두 즐기고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 마드리드다.
아뿔싸.
숲길 사이로 길게 길게 늘어선 인파의 행렬.........
단박에 표를 끊기 위한 긴 행렬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스페인 여행기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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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현초64회 원문보기 글쓴이: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