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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와 기독교의 신비
Mysticism and Biblical Mystery
들어가는 말
미국의 풀로리다 주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사람이 저녁에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불량배라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마을에는 저녁에 불량배들이 많이 몰려와서 주민들의 안녕을 침해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특정시간에 마을을 거닐거나 서성거리는 사람은 불량배로 취급하여 처벌했다.
체포된 이 사람은 법정에 호소했다. 법정은 체포된 이 사람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저녁에 마을을 서성거리는 사람은 불량배라는 마을의 규정이 너무나 “애매모호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저녁에 마을을 서성거리는 사람은 불량배일수도 있고 바람 쐬기 위해 산보하는 사람일수도 있는데 둘을 구분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마을에 위임된 권한의 남용이라는 재판부의 의견이었다.
오늘날 신비주의라는 말처럼 오용되고 남용되는 말도 드물다. 또한 신비주의라는 말처럼 애매모호하고 광범위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말도 드물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한글은 사교적인 어컬티즘(occultism)과 미스티시즘(mysticism)을 같은 신비주의로 표현하기 때문에 더 많은 오해를 야기시킨다. 대부분의 경우 신비주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방언하고 신유하는 사람들은 신비주의적인 열광주의자들이다”
이 말은 이단 문제를 다루는 J 목사가 대형 교회로 성장한 어느 오순절 계통의 교회를 비판한 말 중의 일부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방언하는 정도를 가지고 신비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보수 계통의 목사나 성도 중에서도 기도원이나 부흥회 등을 통하여 성령 체험을 하 고 방언을 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 신학자인 박아론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방언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한 입장 또는 태도 천명 중에서 후대교회의 ‘방언의 은사’의 종식을 선언하고 방언 말하는 것을 교회적으로 전혀 금지하는 첫번째 입장보다는 방언을 신자가 소유할 수 있는 성령의 고전압적 경험으로서 그것이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분쟁을 일으키고 교회를 나누는 일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충만한 구현에 도움을 주는 한, 그리고 성령의 저전압적 경험에만 만족하고 기독교 교리의 이론적 전개에만 충실한 기성 교회의 대다수의 교역자들과 신도들에게 성령충만을 갈망하도록 하는 자극제요, 각성제가 되는 한, 공적 예배에서가 아니라 사사로운 모임의 장소와 시간에 하도록 허용함이 좋다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하며 그런 방향으로 우리의 태도를 표명해나감이 현명한 일이라고 사료된다.”[1])
박 교수는 방언을 허용하고 권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박 교수가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인가? 그는 오히려 그의 책 뒤 부분에 가서는 신비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2) 그러므로 적어도 박 교수에게는 방언하는 것이 신비주의가 아닌 것은 틀림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사람은 신비주의자다
언젠가 보수주의 목사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필자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그게 바로 (불건전한) 신비주의지 뭐냐!”라고 잘라 말한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모든 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방언이나 신유가 오늘날에도 일어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면 금방 안색이 변해지며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라는 낙인을 찍고 만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인 웨인 그루뎀은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인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에서 오늘날에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 예언, 환상과 같은 현상들이 여전히 지속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특히 이러한 은사가 사도 시대에 끝났다는 리차드 개핀 교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리차드 개핀은 그의 「오순절의 전망」(Perspectives on Pentecost, P & RP, 1979, pp. 97-99)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두 가지의 계시, 즉 모든 교회를 위한 ‘정경적인’ 계시와 개인적인 신자들을 위한 ‘사적인’ 계시가 있을 수 없다고 확언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기 위한 논증이나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예를 들어 내가 검증한 고린도전서 14:24-28 바로 이후의 구절들에 비추어 볼 때 그 주장(두 가지 계시가 없다는 주장)이 사실인가의 진위 여부를 가리지도 않는다.3)
웨인 그루뎀에 의하면, 오늘날에는 기록된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가 없다는 개핀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조직신학자의 독단적인 주장이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의 번 포이트레스 교수도 그루뎀 교수와 개핀 교수의 주장을 비교 분석한 후 그루뎀 교수의 팔을 들어 준다.
포이트레스는 개혁신학자인 R. C. 스프롤이나 자기 친구 신학자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사실을 예로 들고는 성경을 지나치게 편협하고 독단적으로 해석하는 일부 조직 신학자들의 횡포를 나무란다.4) 성경에는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4:1)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계적인 개혁보수신학의 산실인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중진 교수들조차 오늘날 예언이나 환상 또는 하나님의 음성의 가능성을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우물 안에 갇혀서 사도시대에 기적이 끝났다는 해묵은 기적 종식론을 고수하는 것이 마치 성경에 충실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필자를 신비주의자라고 한 그 목사에 의하면 웨인 그루뎀 교수나 번 포이트레스 교수도 신비주의자들이다. 과연 그런가?
용어 정의의 어려움
이상 간단히 살펴 보았지만 신비주의란 용어가 사람에 따라 얼마나 남용되고 오용될 가능성이 농후한 지를 알 수 있다. 반(反) 이단사역 전문가인 밥 파산티노와 그레첸 파산티노는 어떤 용어의 개념을 너무나 모호하고 광범위하게 확장하는 것은 마녀 사냥꾼들(Witch Hunters)5)이 즐겨 사용하는 잘못된 논증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세상에서는 물론 불행스럽지만 교계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설득 방법 중의 하나는 어떤 말의 정의를 광범위하게 하거나 모호하게 만들어서 어떤 행위라도 저촉되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어떤 단어에 대한) 귀하의 정의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거나 모호하다면 여러분은 기분에 따라 어떤 행동을 부정할 수도 있고 긍정할 수도 있다 . . . . 불행하게도 기독교신자들은 어떤 생각(단어)을 간단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고 왜곡시킬 정도로 광범위하고 모호하게 정의하고 있다.6)
쉽게 말하면 박 정권 시대의 긴급조치 같은 것이다. ‘외국에서 국가 원수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행위는 긴급 조치 xx조 위반’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용어의 정의가 너무나 광범위하고 모호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정적들이 박 대통령에 대해 입만 벙끗하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 시킨 것과 같다. “비슷하면 볼 것 없이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논리적인 오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개념을 명확히 한 후에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늘날 수많은 개혁보수주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조차 기사와 이적의 가능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체험까지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차별적으로 반대파를 정죄하는 수단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찰스 핫지7)도 신비주의를 제대로 정의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자유주의자들은 성령의 조명을 믿는 보수 복음주의자들을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반면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기록된 말씀과는 달리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을 신비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필자는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를 다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이 의도하는 말 그대로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오늘날 교회 내에는 팽배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방언하고 신유하고 예언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는 등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그 자체가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것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필자는 ‘불건전한 이성주의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신실한 주의 사자들이나 신자들이 체험하는 신령한 것조차 부정하는 자들을 달리 표현할 말이 어디 있는가?
따라서 여기에서는 애매 모호한 신비주에서 벗어나 불건전한 신비주의와 건전한 신비주의의 차별성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이 말하는 신비
성경에서 신비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미스테리온(μυστηριον)이다. 미스테리온이 사용된 몇 구절들을 예로 들어 보자.
“하나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영세 전부터 감추어져 있다가 나타난 신비(미스테리온)의 계시를 통하여 여러분을 굳게 세우십니다”(롬 16:25. 원문에 의한 사역)
“오직 비밀(미스테리온)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어져 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고전 2:7, 8상)).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미스테리온)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그 뜻의 비밀(미스테리온)을 우리들에게 알리셨으니”(엡 1:9)
“이 비밀(미스테리온)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들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미스테리온)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
이상에서 살펴볼 때 성경이 말하는 비밀이나 신비 즉 미스테리온은 태초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지혜이며 이전에는 감추어 졌다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제는 완전히 드러난 구원의 복음을 말한다. 이 복음을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게 되었으며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비밀 곧 계시의 복음 전파 사역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미스테리온은 이제 더 이상 신자들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드러난 비밀이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비밀이다. “천국의 비밀(미스테리온)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 막 4:11; 눅 8:10 참조).
그러나 성경에서 미스테리온이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의미하는 말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유대인이 완악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미스테리온)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하 수가 들어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
-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불법의 비밀(미스테리온)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고 있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살후 2:7).
- 보통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사람도 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미스테리온)과 모든 지식을 알고”(고전 13:2). 그렇다고 인간의 노력으로 소수만이 가지는 특수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은사나(고전 12:10; 14:24, 25), 신앙의 성숙으로 인해 말씀을 보다 깊이 깨닫는 것 등을 말한다. 신앙이 성숙한 자가 초신자보다 성경의 내용을 더 많이 알고 의미를 더 깊이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방언하는 자는 그 내용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내용의 비밀을 아신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미스테리온)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예수님의 재림 때에 우리들의 몸이 홀연히 변하는 현상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라”(고전 15:51).
이처럼 성경에서는 인간의 이성이나 채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만이 아는 일들을 비밀(미스테리온)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미스테리온의 의미를 적어도 두 가지로는 구별해서 이해야 한다.8)
S. 모티어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드러나고 숨겨진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 (미스테리온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물론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두 가지 측면과 부합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에게 모든 지혜 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알려 주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은 측량할 수 없고 그 방법은 찾지 못할 정도이다”(롬 11:3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제한된 신학이나 체험 (또는 체험의 결핍)을 내세우기 위해 미스테리온이란 말을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레이몬드는 성경에서 ‘방언하는 자는 그 비밀을 말하기 때문에 알아 듣는 자가 없다’(고전 14:2)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스테리온은 이제는 드러난 비밀--구원의 복음--이므로 방언의 내용은 ‘방언하는 자에게 알려져 있고’ ‘뜻이 분명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본문의 단어(‘비밀’)’를 계시에 의하여 방언하는 자에게 알려지고 있던 감추인 진리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성있는 추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방언하는 자가 비밀을 말할 때에, 만일 그가 롬 11:25; 16:25; 고전 2:7-13; 15;51; 엡 3:3-6; 골 1:26-27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내용의 말들을 한 것이라면(레이몬드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과는 달리 여기서 미스테리온의 뜻을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하라!-필자 주) 그는 분명히 황설수설이 아닌 뜻이 분명한 진리를 말한 것이 틀림없다.10)
하워드 라이스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자들의 이러한 불건전한 지성주의, 불건전한 이성주의를 조심스럽게 비판한다.
"윌리암 보즈만은 그의 저서인 칼빈의 자서전에서 칼빈은 두 가지 모순되는 방향으로 이해가 가능한 복잡한 인물이라고 결론짓는다. 첫째는 중세의 스콜라주의 전통을 지지하는 원칙주의 자로서의 칼빈이다. “이렇게 칼빈을 이해한 경우 기독교는 정체적인 정통으로 흐르기 쉬우며 기독교 신자는 어떤 지위를 물러 받은 사람이다.
칼빈의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칼빈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질서와 지성을 갈망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모호하거나 애매한 것을 허용하지 않는 학자적인 정통주의를 고안해 내었으며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인간의 어떠한 경험도 의심하였다. 이러한 개혁주의자들은 기도와 신자들의 삶에 대해 말은 많이 하면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두려움과 외경심 이외의 신비 체험은 인정하지 않았다. . . .
칼빈의 다른 한면을 강조한 사람들은 인생의 역설을 칭송하고 모호성을 이성화 하기를 거부했으며 믿음의 마음으로 신비 (체험) 를 받아 들였다. 보즈만은 “칼빈은 신학보다는 경험과 실천을 우위에 두었으며 개인의 자유를 상당히 허용했다”고 주장한다. 칼빈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신장의 믿음은 역동적인 특성을 지니며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었다.
칼빈의 이러한 측면을 강조한 사람들은 전혀 다른 형태의 칼빈주의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교리보다는 믿음의 질에 관심을 가졌다. . . .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불변성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비주의를 허용했다. 그들은 차이점을 인정했으며 신자의 삶을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으로 지향해 왔다. 이러한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의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 자주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언어를 사용해 왔다. . . .
지금까지 첫째 유형의 칼빈주의가 너무나 우세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개혁전통은 종교적인 체험에 관심이 없거나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칼빈의 두번째 유형에 대해서는 최근에 와서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11)
하워드 라이스가 지적한 것과 같이 우리는 신앙의 두 측면 즉 지성적인 측면과 감성적이고 체험적인 측면, 드러난 계시와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신비성을 인정해야 한다.
신비주의의 여러 가지 정의
이처럼 신비주의라는 말을 제대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보수복음주의자인 윈프리드 코르두안12)도 신비주의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정의를 제시한다.
“신비 체험은 자아 의식에서 벗어 나거나 자아 의식에 더 이상 몰두하지 않은 경험을 말한다” -로렌스 하타브(Lawrence J. Hatab).
“신비주의는 “실체--즉 하나님--를 이해하는 것이다” -에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신비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이고, 직접적이고, 비추상적이고, 중보자가 없는 지식을 얻는 것을 말하며, 지식이 너무나 직접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도 부른다” - D. D. 마틴(D. D. Martin).
마빈 콜은 보다 자세히 정의한다.
우주에는 (우리들의 인식을 초월하지만 자극시키는)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데 이는 통상적인 감각 기능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신비적인 요소가 인류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자란 이러한 신비적인 요소를 믿거나 체험한 사람을 말하며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믿음이나 체험은 너무나 귀중한 것이 되어서 그 사람은 그러한 믿음이나 체험을 표현하고 평가하는 삶을 산다.13)
한편 윌리암 제임스는 좀 색다르게 신비주의를 평가한다. 그는 신비주의의 주요 특징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14)
첫째, 신비 체험을 말로 제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Ineffability). 둘째, 신비주의자들은 신비 체험을 통해 순수 ‘지성적인 지식’(noetic quality)을 얻는다. 이 두 가지 만으로도 신비주의의 요건을 갖추기에 충분하지만 제임스는 두 가지를 더 추가한다. 즉 이러한 체험은 일시적이며 수동적이다(transiency and passivity). 즉 신비 체험은 통상적으로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며 개인이 자의로 그 체험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의를 살펴 본 후 코르두안은 신비 체험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한다.15)
첫째, 신비 체험은 연합(unity)의 체험이다. 둘째, 신비 체험을 통해 얻는 지식은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성으로 제대로 포착하는 것은 물론 말로 제대로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코르두안은 신비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신비주의자는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으며 초월적인 체험을 통하여 절대자와 직접적인 교제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16)
이상에서 살펴본 여러 가지 정의들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이러한 정의를 염두에 두고 신비주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한결 이해가 쉬울 것으로 생각한다.
대표적인 개혁, 보수신학자들의 신비주의관 비판
필자는 신비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는 3명의 개혁, 보수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 평가하고자 한다.
미리 밝혀두고 싶은 말은 세 분 모두 필자가 존경하는 분들이란 사실이다. 찰스 핫지는 19세기 개혁 신학의 선봉장이며 그의 조직신학은 오늘날 개혁 신학의 뼈대가 되고 있다. 간하배 교수는 한국 선교사 출신이며 필자가 신학교에 다닐 때 더불어 여러 가지 이슈를 가장 폭 넓게 토론할 수 있었던 스승이었다. 다만 신비주의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필자와 달라 그 부분에 대해서만 일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또 한 사람 박아론 박사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깊게 사사한 적은 없지만 한국의 이름난 개혁 신학자이다. .
찰스 핫지
찰스 핫지는 그의 그의 저서인 「조직신학」17)에서 ‘신비주의’란 제목으로 신비주의를 비교적 자세히 평가하고 분석한다.
첫째 그는 신학하는 방법으로 신비적인 방법은 감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적합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규정짓는다.18)
그 러나 핫지의 주장은 오늘날에 와서는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개혁주의 신학은 죄로 인한 인간의 전적인 타락-지성, 감정, 의지의 전인격적인 타락-을 주장하면서도 유독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를 감정 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자가 당착이다. 하워드 라이스는 이렇게 비판한다.
마음(생각)도 오도될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정의하는 데 있어 생각19)의 은사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 칼빈도 이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우리는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경우를 너무나 자주 본다. 우리들의 이성도 여러 형태의 기만으로 가득 차 있으며,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전진하고, 너무나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기 때문에 우리들을 바로 인도하기에는 부족하다.
감정이 우리들을 오도하여 신앙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는 것과 같이 이성도 그럴 가능성이 다분이 있다. 개혁 전통에 있는 사람들은 이성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성을 우상화하고 있다.20)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한 성경을 해석하면서도 해석 방법의 차이 때문에 갈라진 교단이 얼마나 많은가? 서로가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려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학자나 지도자들이 혹은 세대주의를, 혹은 개혁 전통을, 혹은 웨슬레의 전통을, 혹은 오순절 전통을 따른다.
모두가 기록된 말씀을 제대로 인용하고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온갖 논리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한다. 같은 교단 내, 같은 신학교 내라고 모두가 같은가? 천차만별일뿐만 아니라 전혀 상반된 견해도 있다. 인간의 사변이 아니라 계시의 결정체인 말씀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로라는 신학자들의 주석을 보라? 같은 구절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만이 믿을만하고 감정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 인간은 죄로 인해 감정은 물론 이성과 의지도 타락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나친 감정이 믿을 수 없듯 지나친 이성도 믿을 수 없다. 이성이나 감정 모두 구속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또 한, 핫지는 신비주의자들이 외적인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조용하고 수동적인 명상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21)
과연 그럴까? 현대 최고의 영성가로 꼽히는 리차드 포스터의 말을 들어 보자.
성숙의 기도(formation prayer)에는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이 있다. 능동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다. . . . 수동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대상이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22)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여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죄를 회개하고, 해 주신 일에 감사하고, 이웃을 위해 간구하거나(중보기도) 나의 요구를 위해 간구한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기도는 대분분 이러한 단계에서 끝난다. 기도는 주로 ‘무엇을 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적인 기도에 도전이 일고 일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성을 통한 바른 교리의 뒷전으로 밀려나자 취급을 받아온 여러 가지 다양한 기도의 형태를 역사의 보고에서 찾아내어 주옥같이 펼쳐 보인다.
‘성숙의 기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성품과 행동--을 닮아가는 기도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가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있는 반응이 요구된다. ‘안식의 기도’는 세상의 잡다한 일들에서 벗어나서 안식과 평안을 주는 하나님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는 나의 신랑이신 예수와 달콤한 친교를 나누는 기도이다. 이런 기도들은 말을 많이 하고 교리를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증거하는 살아계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산 교제를 가지는 기도이다.
이런 기도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조용하게 ‘수동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발버둥쳐서는 안 된다. 주권적이고 사랑이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려야 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시 62:1).
수동적인 기도는 고독과 ‘완전히 온순하고 완전히 솔직하며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맡기는 기도’이다.23) 수동적인 기도의 절정은 무언(관상)의 기도24)이다. 포스터는 무언의 기도의 장점을 이렇게 말한다.
무언의 기도는 우리를 말 중독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훈련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 진다는 것은 점점 더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시 62:1).라고 시편 기자는 선언한다.
그리고 성 안토니의 제자였던 광야의 교부 암모니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게, 침묵의 힘이 얼마나 철저하게 치리하는지, 또 얼마나 하나님께 온전히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침묵에 의해 성도가 자라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 안에 거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이 성도들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이다.” 무언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렇듯 다시금 살아나는 묵으로 나아가게 된다.25)
명상 기도는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기도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무언의 기도에서는 말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감정이 전면으로 부상한다. 리차드 로울은 어느 날 예배당에 않아 있을 때 갑자기 평소에 체험해 보지 못한 기쁨의 불을 자기 안에서 체험했다고 한다.
12세기의 걸출한 종교적 정치적 인물이었던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서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주께서 임재하심을 느꼈다. 후에 뒤 돌아 보니 그는 나와 함께 하고 계셨다. 그리고 때때로 그가 오실 것이라는 예감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오시거나 떠나시는 것을 느낀 적은 없었다.” . . . . 각각의 경우 감정적인 언어를 주목해 보라. 이런 종류의 기도는 분명히 이성적인 경험보다는 감정적인 경험에 해당한다.26)
필자도 기쁨과 황홀이 동반되는 이러한 체험을 수시로 한다.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주권적이고 사랑이신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이자 축복이다. 이러한 체험은 단순한 말씀 공부나 봉사에서 얻지 못하는 새로운 영력을 제공해 준다.
수많은 활동과 헌신과 봉사로 거의 탈진한 웨인 고든은 하나님과의 이러한 체험을 가진 후 목회에 새로운 도전과 기쁨을 얻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조용한 만남의 교제를 이렇게 기록한다.
내가 아내와 가진 친밀한 시간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때이다. 우리는 단지 서로 같이 앉아 있거나 누워서 서로 손을 잡거나 팔장을 끼고 서로의 존재를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는 구절을 통해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게 되었다. 그러한 침묵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내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움을 느끼는 순간은 내가 그의 앞에 조용히 앉아서 그의 임재를 기다릴 때이다.27)
오늘날 하나님과의 이러한 무언의 기도 시간을 가지지 못해 영적으로 탈진하고 메마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균형을 잡힌 기도가 되기 위해서 기도는 능동적이자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고 포스터는 결론짓는다.
유진 피터슨을 말하기를 “기도는 중간태로 일어난다”고 했다. 문법에서 능동태란 우리가 행동을 취할 때이고 수동태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받을 때이다. 그러나 중간태에서는 우리가 행동을 취하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 . . 우리가 하나님을 조종하지도(능동태) 않고 하나님에 의해 조종되지도(수동태) 아니한다. 우리는 행동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도 참여한다. 그러나 그것을 통제하거나 구정하지 않는다(중간태). . . .우리는 중간태로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받기도 하고 반응을 보이기도 하여 참여와 친밀한 교제, 신뢰와 용서와 은혜라고 하는 수많은 미묘한 일에 동참하게 된다.28)
또한, 핫지에 의하면 신비적 신학 접근법은 초자연적인 면과 자연적인 면의 두 가지가 있다. 전자에 의하면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들의 영혼과 직접적인 교제를 가진다. 그 결과 이러한 종교적인 감정이나 흥분을 통해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지식을 습득한다. 이것은 교회 시대 전체를 통해 전해 내려온 기독교적 신비주의를 의미한다고 그는 말한다 .
하나님의 성령이 객관적으로 계시된 성경의 진리를 우리의 심령에 적용시켜서 우리들을 거듭나게 하는 이러한 신비 체험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반대자들은 신자들이 이러한 성령의 내적 사역을 믿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를 신비주의자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핫지에 의할 때, 보수 복음주의 신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신비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조명, 계시, 성육신, 중생, 성례전 및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29) 핫지는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성 빅토르(St. Victor), 게르송(Gerson) 및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등을 복음주의적 신비주의자들로 꼽는다.30)
이들도 여느 다른 신비주의자들과 같이 성경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비적인 의미인 ‘하나님과의 합일’(Union)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과의 합일이 추상적이고 황홀한 체험은 물론 삶 속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핫지는 그들을 극구 칭찬했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에 상당한 축복을 주었다. 그들의 영향은 그 당시 교회에서 성행하고 있던 형식주의와 예전주의(예배의 형식주의)에 대항하여 종교의 내적 생활을 보존하는데 기여하여 양심을 인간의 활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버나드의 작품은 지금도 여전히 읽혀지며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는 보편적인 교회의 모든 복도와 작은 방들을 향기롭게 한다.31)
핫지는 클레르보의 버나드나 토마스 아 켐피스 등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성령의 사역으로 이해한 듯하다. 그러므로 핫지에 의할 때 하나님과의 합일 체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인가 아닌가 가 문제이다. 핫지는 성령의 사역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노력으로 합일 체험을 추구하는 자들을 ‘거짓 신비주의’ 또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규정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핫지는 속 사도시대의 몬타니즘이나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이었다고 말한다. 핫지에 의하면, 이들은 동방 종교--브라아만교나 불교 등--에서와 같이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절대자와 직접적인 교제를 가지려고 시도하는 범신론적인 신비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32)
그러면, 어떤 신비 체험이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인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인지 또는 악령의 사역에 의한 것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핫지는 성령의 조명, 성령의 인도, 일반 은혜의 신비적인 요소를 언급하면서도,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이 가지는 체험은 성령의 사역에 의한 신비적인 체험과 다르다고 추상적인 말로만 설명할 뿐, 구체적으로 왜, 어떻게 해서 다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기독교 신비주의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만 ‘인본적인 신비주의자’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신비 체험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라고 주장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핫지는 건전한 신비주의와 불건전한 신비주의를 구분한다. 전자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절대자를 만나는 직접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핫지에 의할 때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성령의 사역인가 아닌가가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자신의 수양이나 각성에 의해 절대자를 만나거나 자신이 절대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는 유명한 영화 배우인 셜리 맥클레인을 들 수 있다. 뜨거운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던 중 신비 체험을 한 메클레인을 이렇게 말했다. “나의 전신이 붕 떠는 것 같았다. 서서히 나 자신이 물이 된 것 같았다. . . 나의 숨소리와 주변의 에너지의 맥박이 일치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실 내가 공기였고 물이였고 어두움이였고 벽이였고 거품이였고 촛불이였고 물 아래의 바위였고 흘러내리는 강물의 소리였다.”33)
맥클레인의 고백은 자신과 자연과의 합일, 자신이 신이고 자연이 신(神)인 전형적인 범신론적인 신비주의자들의 고백이다. 또한 동방 종교의 명상 훈련 등은 핫지가 지적한 불건전한 신비주의의 여러 요소들을 수없이 포함하고 있으므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성령의 사역에 의해 가지는 신비 체험은 외양은 뉴 에이지 운동가나 동양 종교의 수도승과 비슷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성경의 충분성을 믿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에 직관이나 내적 조명을 종속시키고, 일반 은혜의 소산인 인간의 학문, 법령, 제도를 인정하고, 사랑의 하나님과 황홀 체험을 가지면서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은 물론 내재성을 믿기 때문이다.
찰스 핫지는 적어도 이런 사람들을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극단에는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클레르보의 버나드나 토마스 아 켐피스 들을 극구 칭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핫지보다 지나쳐서 보수 신앙을 고백하고 말씀의 권위를 믿더라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음성, 환상, 신비적 황홀 체험 등--을 하기만 하면 볼 것 없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라고 정죄한다.
그들은 성경이나 역사적인 증거를 넘어서서 자신들의 좁은 식견이나 몇 가지 나쁜 체험이나 무체험을 통해 외양이 비슷하기만 하면 최악의 것과 동일하게 여겨서 정죄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메마른 정통, 죽은 정통, 불건전한 이성주의자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 뉴 에이지 운동가나 동양 종교의 신비주의자들은 신비한 황홀 체험을 추구한다.
- B 교회는 신비 체험을 추구한다.
- 그러므로 B교회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이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필자는 어떤 정통주의라도 이단으로 만들 수 있다.
- 통일교회는 그들이 섬기는 신--문선명--을 찬양하고 그가 기록한 말씀을 강해하고 기도하고 헌금한다.
- A 보수 교회는 그들이 섬기는 신을 찬양하고 성경말씀을 강해하고 기도하고 헌금한다.
- 그러므로 A 보수 교회는 통일교 집단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논리의 전개 자체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외양과 현상이 비슷하기만 하면 내용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논리 전개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선명 집단의 예배 형태가 비록 보수 교회의 예배 형태와 비슷하지만 섬기는 신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뉴에이지 운동가들이나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신비 체험의 외양은 같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다르고 열매도 다르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신비 체험의 결과 범신론적인 사상을 강화하지만 기독교 신자들은 신비 체험의 결과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강화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외양은 비슷하지만 본질이나 열매는 전혀 다르다. 하나는 성령의 사역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노력이나 악령의 사역이다. 모양만 보지 말고 교리나 신앙 인격의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불신자나 신자나 모두 공유하는 일반 은혜로 인한 여러 가지 비슷한 현상을 영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경우 기독교의 유일성을 증거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진다.
불신자가 보기에 모든 종교가 같은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구원을 말하고, 내세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배타성을 싫어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변증하는가? 겉 모습은 비슷하지만 본질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면 본질이 다른 것을 어떻게 아는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야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신비 체험도 마찬가지다. 건전한 신비 체험이 결핍된 사람이 보기에, 불건전한 신비적 체험이나 건전한 성경적 체험이나 외양은 비슷하다. 그러므로 겉 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 체험으로 인해 예수에 대한 믿음이 더해지고, 하나님은 더 사랑하고, 성경 말씀을 더 사랑하고, 세상적인 욕심과 죄악에서 멀어졌는가의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적인 나의 의가 지나쳐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박아론 박사
박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대부분 신비주의를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그는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신비주의는 현세를 멀리하는 소극적인 면은 있었지만 범신론적이고 사교적인 배경을 가진 이단적이며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신비주의는 교의학적으로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잘못된 전제란,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 또는 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 이는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무로 돌리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이나 연합을 시도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도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비주의자들이 그리스도 없이 직접적인 교통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윈프리드 코르두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은 내주하는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이나 연합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비적인 연합이다. 더군다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신비주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사역에 의한 신비주의이다.
그러면서 코르두안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세 가지 계통의 신비주의 중요성이 신약에 기록되어 있다. 즉 내주하는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통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이다. 우리들이 이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언급하면 우리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삶의 중요한 핵심이지만 신약이 그리스도 신비주의만 말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성령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결론은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삼위일체 신비주의라는 것이다.”36)
삼위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박사는 성령의 내주로 인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박 박사가 성자 신비주의자나 성부 신비주의자인가?
둘째. 그는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금식을 해야만 크리스천의 영성이 개발된 것으로 믿고 그렇게 할 것을 모든 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은혜적 구원관을 가르치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어긋나는 공로적 구원사상으로 정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사막의 신비주의자들이나 일부 신비주의자들은 금욕과 고행을 통해 덕성과 영성을 개발하려고 했으며 이것이 지나쳐서 그렇게 해야만 기독교적 덕성과 영성이 개발된다는 극단에 치우친 오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극단에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주장한 나머지 인간의 노력 자체를 거부하는 초칼빈주의(Hyper Calvinism)의 위험도 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기도를 부정하고 인간의 노력에 의한 선교를 부정한 초칼빈주의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중시하는 칼빈주의를 버려야 하는가? 신비주의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칼빈주의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죽은 정통에 빠졌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발로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여러 운동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기도원에서의 기도와 금식도 마찬가지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믿는다면서,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도록 기도원에 한 번 가지 않고 금식 한 번 하지 않는 신자들이 과연 제대로 된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유감스럽게도 정통 교회 내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당연한 결과로 그들의 신앙생활은 냉랭하고 죽은 정통을 치닫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기도원적인 금욕주의가 신비주의를 부추긴다면 이것들을 부정하거나 간과하는 정통주의는 죽은 정통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100%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100% 인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닌가?
셋째,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는 공로사상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박 박사는, 찰스 핫지가 극찬한 토마스 아 켐피스조차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했던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인간의 구원은 물론 하나님이 주도하시지만 인간의 책임 있는 반응도 필요하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명령이나 권면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성경에는, 기도하라, 전도하라, 봉사하라는 등의 명령이나 권면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인간의 공로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주권이나 성령의 인도를 시인하는 사람들이 열심을 내는 것조차 공로사상이라고 해야 하는가? 성경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최선을 다하고(마 25:14-30), 열심을 내라고 명령한다(계 3:19). 때로는 인간의 노력이 지나쳐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전통이나 가르침에도 실수나 극단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의 노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극단이 있기 때문에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을 수밖에 없다(마 25:26).
넷째, “모든 기독교인들이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께 종일토록 매달려 기도하지 않는다면 또는 산간이나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하면 금욕과 고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긍극적인 실재와의 신비로운 연합으로부터 오는 영혼의 희열을 만끽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성되지 못했다든가 아직도 성숙되지 못한 천박한 믿음의 상태에 놓여있다는 판단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인 줄 안다.”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에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금욕이나 황홀체험을 모든 신자들이 꼭 가져야 할 규범적인 것(normative)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박 박사는 주장한다.
이 주장은 신자들이 꼭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새벽기도는 성경의 규범인가? 성령 체험이나 신비 체험은 성경의 규범인가 라는 해 묵었지만 심각한 논쟁의 범주에 속한다.
이런 것들을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이것은 성경의 규범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전혀 노력도 하지 않고 권면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잘못이 있다. 평생을 가도 체험을 권면하기는커녕 추구할 생각조차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경은 병 치유를 위해 ‘꼭’ 기도하라고 한 것은 아니라면서 평생을 가도 병자를 위해 기도 한 번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묻고 싶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체험을 규범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한 번이라도 추구하거나 권면해 본 적은 있는가? 또는 내가 추구해 보았다가 받지 못하니까 받은 사람은 모두 가짜인 것처럼 보이는 유아독존적인 아집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한 극단을 비판하기 전에 내가 다른 극단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살펴보아야 하지 않는가?
다섯째,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보다 심오한 이해와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은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 . .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의 경험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생각하여 주장함은 하나의 과장이요 우리를 불건전한 신앙으로 이끌어갈 것이 분명하다.”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는 논쟁도 ‘어떤 것은 성경의 규범이 아니라’는 논쟁과 비슷하다. 즉 “이것은 성경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할 필요가 없다”라는 다른 극단에 빠지기 쉽다는 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보수 신학자들은 ‘구원의 확신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질은 아니지만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 오는 많은 유익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조차 자세하게 기록한다(신앙고백 제18장 3절).
사람이 살기 위해서 자동차가 필요하고 전화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삶의 본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도 없이 매일 수십 리 걸어 다니고 전화도 없이 대화하기 위해 수백 리를 여행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이 본질은 아니지만 삶의 질을 높여준다.
신비 체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의 경험은 신앙의 본질은 아닐지 모르지만, 구원의 확신처럼, 신자들에게 유익한 점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이 아니라고 팽개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권면할 것인가?
간하배 (영어 이름은 하비 콘)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간하배 교수도 “신비주의”41)란 소논문에서 신비주의를 자못 부정적으로 비판한다. 그의 견해를 비판해 보자.
첫째, 그의 의하면 신비주의자들은 성경 이외의 특별 계시를 믿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는 기록된 성경이 듣는 자에게 역사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바르트주의자거나42), 새 해석을 보태는 모르몬교도와 신비주의자를 동일시 한다.4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계시’라는 단어를 전문술어에만 국한시키는 오류이며 기록된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계시--오늘날의 예언이니 환상--를 주장하는 웨인 그루뎀, 고든 피, 번 포이트레스같은 개혁 신학자의 주장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렇다고 해서 웨인 그루뎀, 고든 피 및 번 포이트레스가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인가?
둘째. 신비주의는 “객관적인 표준을 잃고서 주관주의와 정서주의를 고조한다.”44) 그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몸을 떨거나 울부짖는 현상을 모두 불건전한 신비주의의 소행으로 치부한다. 그러면서 그는 부정적인 예만 몇 가지 제시한다.
그러나 개혁, 보수주의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러한 현상들을 그런 식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현상들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충분하고 설득력 있게 증거했다.
간하배는 또한 “신비주의는 우리가 정서를 사용할 때는 균형을 유지해야 함을 잊는다”45)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과도한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 그러나 감정의 결핍도 문제다.
오늘날 ‘불건전한 이성주의’에 의해 학(學)과 지식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감정을 소홀히 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누구인가? 바로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바른 교리를 중시하여 건전한 체험을 부정하고 말씀에 합당한 행위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정통주의자들이 아닌가? 신비주의의 폐해를 다루었다면 간하배는 마땅히 다른 극단인 죽은 정통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다루었어야 하지 않은가?
셋째, “신비주의는 보통 기성교회를 헐며 한 지도자 중심이다. 교회의 무용을 들어 세차게 공격하기가 일쑤이다.”46)
이러한 정의에 딱 들어 맞는 사람이 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기성 종교단체인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의 무용을 들어 유대 종교를 세차게 공격하고 허무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신비주의자인가?
역사적인 인물로는 루터, 칼뱅, 쯔빙글리, 마틴 루터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나중에 서로 교제할 때까지 혼자서 로마 교회를 허물고 심하게 공격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인가?
어느 운동이든--영적인 운동이든 정치적이 운동이든 사회적인 운동이든--초창기에는 강력한 한 지도자에 의해 인도되기 마련이다. 성경의 기록이 증거하고--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 등--실생활의 경험이 증거한다. 문제는 한 지도자가 아니라 그 지도자의 가르침이 성경에 부합하는가의 여부이다.
넷째, “신비주의는 종종 신기한 것을 강조한다.”47) 성령의 은사 중에서도 평범한 것이 아니고 특별한 은사를 강조한다. 간하배는 자신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환상, 신유, 방언이 특별하고 신기한 은사처럼 보이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어떤 은사는 “특별하거나 신기하고” 어떤 은사는 “평범하다”는 구분을 하지 않았다. 모든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유익하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입장을 바꾸어서 비판해 보자. 간하배의 말대로 “평범한” 은사를 말하는 교회에서는 “특별하고 신기한 은사”를 언급이나 하는가? 모두가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특별하고 신기한” 은사를 강조하는 자들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라면 그런 은사들은 평생 가도록 한 번도 언급조차 하지 않는 자들을 불건전한 이성주의자들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는가?
많은 경우 기적 행하는 은사가 결핍된 경우 신앙생활은 지극히 냉랭한 죽은 정통으로 치닫기 쉽다. 이런 사람들은 예배나 신앙생활을 통해 놀랍고 두렵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기대고 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는 지극히 형식화되며, 신앙생활에 활력이나 생동력이 결여되기 쉽다. 많은 경우 이런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율법의 이런 규정 저런 제도나 신앙에 본질적인 아닌 부수적인 교리로 사람을 평가하고 정죄한다.
이들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저버리고 이지적이고 사변적인 바른 교리, 신앙의 전통, 배경, 연륜, 출신 배경이나 학교, 전력, 이런 공부 저런 훈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대신하기 쉽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바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바리새인같이 되기 쉽다.
결론적으로, 간하배가 주장하는 대로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48)
신비 체험의 분별
어떤 신비 체험이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인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인지 또는 악령의 사역에 의한 것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찰스 핫지가 [조직신학]에서 제시한 것과 다른 것을 종합해 본 구분법은 다음과 같다.
• 성경의 충분성을 저해하며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주장하는 또 다른 계시 (성경은 기록된 말씀에 종속되는 사적인 계시는 인정한다)를 주장하는가(몬타니즘의 오류, 다미회의 오류),
• 말씀보다는 자신들의 직관이나 명상에 더 의존하는가(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오류),
• 인간의 제도, 법령, 학문들을 무시하며 말씀보다는 성령의 직접적인 "내적 조명 (Inner light)을 더 중시하는가(미국 퀘이커 교도들의 오류).
•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려고 하는가(사막의 교부들의 오류).
• 죄와 회개는 무시하고 신비적이고 황홀한 체험만을 추구하는가(독일 신비주의자들 및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의 오류).
• 급진적이고 배타적이며 교회의 전통을 부정하는가(급진주의자들의 오류)
•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범신론적인 주장을 하거나, 하나님 아닌 것에 수동적으로 나의 모든 모든 것을 맡기는가?(침묵주의자들이나 뉴에이지운동가들의 오류).
찰스 핫지의 분별법을 통해 우리는 신비주의나 신비 체험을 막연하게 정죄할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식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적 신비 체험의 유익
성경적 신비 체험은 교리 고백과 전통을 바르지만 바른 체험의 결여로 인해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죽은 정통의 좋은 처방제이다.
처음 사랑이 유지된다
주님은 처음 사람을 버린 교회를 책망하신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4-5).
뜨거운 신앙을 유지한다
주님은 미지근한 신앙을 책망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세상적 부요보다는 영적 부요를 더 사모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
신비 체험이 결여된 신자나 지도자들을 보면 유난히 전통이나 학력을 내세운다.
위기를 잘 극복한다
신비 체험을 통해 영적, 육신적 위기를 극복하거나 내적 치유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 64:4; 고전 2:9 참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사람은 서로 많이 대화하면서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사람을 닮아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랑이신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할수록 더욱 주님의 형상을 닮아간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하나님은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에게 보통 사람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려주신다. 이 비밀은 성경의 기록을 벗어나는 비밀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은 되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미쳐 깨닫지 못한 비밀을 말한다.
얼마 전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테러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는 아프칸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우방국의 원수들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리듯, 하나님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에게 비밀을 일을 알려주시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성경적 신비 체험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많은 유익이 있다. 이런 좋은 유익을 모른 채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부정적인 면만 보고 성경적 신비 체험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고백주의, 율법주의, 전통주의로 인해 고백은 바르지만 건전한 신비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바른 행동을 낳지 못하는 죽은 정통주의자들이 되기 쉽다. *
[1]. 박아론, “오순절주의의 폭발적 인기,”「보수신학연구」(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pp. 87-88
[2]. 같은 책, pp. 193-224.
[3]. Wayne Grudem, The Gift of Prophecy (Wes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8 & 2000), p. 316
[4]. Vern Poythress, NT 858 Miracles Class Note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5]. 중세의 이단인 마녀 사냥꾼. 오늘날에는 반대파를 사정없이 이단이나 사이비로 모는 지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6]. Bob & Grechen Passantino, Witch Hunt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1990), pp. 90-92
[7].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One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reprinted. 1989), p. 61.
[8]. Geoffrey W. Brommiley, abridged in one volume, TDNT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85), pp. 617-18; Collins Brown, ed.,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3, (Grand Rapids, MI: Zondervan, 1986), pp. 501-505; Walter A.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4), pp. 741-742 등도 미스테리온이 가지는 두 가지 의미를 지지한다.
[9]. S. Motyer, “Mystery,” in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 740.
[10]. 레이몬드 지음,「신오순절운동 비판」, (개혁주의신행협회, 1984), p. 21-22.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레이몬드의 논리의 오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 기록보다 우위에 두는 주장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을 권하여 신령한 영적 은사들, 특히 에언의 은사를 구하라고 말한다. 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는 14:29에 있는 예언자와 동일시된 자로서, 계시의 기관이었다(14:30, 참조, 행 11:27-28; 행 21:10-11). 말이 났으니 말인데 계시가 사도 시대가 끝남으로 중단되었다고 한다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I/i, vi) 이러한 의미에서 예언자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는 바울의 권유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차라리 그 권유는 계시의 과정이 아직 진행 중이었던 때에만 유효하였고 그 결과로 오늘날에는 아무도 에언의 은사를 구하도록 권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p. 14).
그의 주장을 쉽게 말하면 비록 성경에는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고 말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계시는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기 때문에(오늘날에는 이러한 해석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개혁보수신학자들이 늘고 있다), 방언하라는 성경의 권면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것이야 말로 본말이 전도되는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교회의 모든 분쟁이나 신조들이나 학설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동 신앙고백 I/x), 레이몬든 신앙고백의 기록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필자는 이것이 레이몬드 본인의 논리 상의 실수이거나 아니면 번역상의 오류이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본인 자신도 모른 사이에 신앙고백을 성경의 권위보다 우위에 놓는 이단 사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1]. Howard Rice, Reformed Spirituality (Louisville, 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1), pp. 24-26.
[12]. Winfried Corduan, Mysticism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1).
[13]. 같은 책, p. 24.
[14]. 같은 책, p. 30.
[15]. 같은 책, pp. 31-33.
[16]. 같은 책, p. 32.
[17].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One, pp. 6-9, 61-103.
[18]. 같은 책, pp. 6-7.
[19]. 필자는 영어의 mind를 생각, 추론 또는 사고의 기능으로 번역하였다―필자 주.
[20]. Howard Rice, Reformed Spirituality, p. 56.
[21]. 같은 책, p. 67.
[22]. Richard Foster, Prayer (San Francisco: Harper, 1992), pp. 59, 「기도」(두란노), p. 86.
[23]. 같은 책, p. 94.
[24] 영어로는 contemplative prayer라고 하는데 사람에 따라 무언의 기도, 명상 기도, 관상 기도, 내적 기도, 임재 기도 또는 친밀한 기도(intimate prayer)라고 부르기도 한다.
[25]. 같은 책, p. 210.
[26]. 같은 책, pp. 213-14
[27]. Wayne Gordon, "A Driven Pastor's Pursuit of God," Leadership (Fall, 1994), p. 68
[28]. 같은 책, p. 136.
[29]. 같은 책, p. 64.
[30]. 같은 책, p. 79.
[31]. 같은 책, p. 79.
[32]. 같은 책, p. 61.
[33]. John Ankerberg & John Weldon, The Facts on New Age Movements (Eugene, OR: Harvest House Publishers, 1988), p. 7
[34]. Winfried Corduan, Mysticism (Zondervan, 1991), p. 132.
[35]. 간하배, “신비주의,”「현대신학해설」(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pp. 126-135
[36] 보수주의자는 기록된 말씀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역사로 들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필자 주
[37]. 같은 책, pp. 127-128, 132.
[38]. 같은 책, pp. 129, 132-133.
[39]. 같은 책, p. 132.
[40]. 같은 책, pp. 130, 133.
[41]. 같은 책, p. 130.
[42]. 같은 책, p,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