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나자 광해군은 도성의 재건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종묘의 복구가 제일 먼저 시행되었고 연이어 창덕궁, 창경궁이 중건되었지요. 하지만 광해군은 노산군(단종), 연산군이 폐위된 곳이라 하여 창덕궁에 기거하기를 극도로 꺼려하였고, 1616년 한 술사가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고 하자, 인경궁(仁慶宮) 건설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인경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또 다른 술사가 새문동 (신문로2가) 에 왕기가 있다며 궁궐을 짓자고 건의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궁궐이 1620년 탄생한 경덕궁(慶德宮), 바로 훗날의 경희궁(慶熙宮)입니다.
경희궁의 뒤쪽에는 바위언덕이 흘러내리듯 펼쳐진 서암(瑞巖)이 있습니다. 바위틈에서 물이 샘솟는다는 암천으로, 국왕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왕암으로도 불렸습니다. 광해군이 술사의 말을 듣고 이 자리에 궁궐을 짓게 된 연유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 사이의 3남 정원군이 살던 곳이었으니 과연 범상치 않은 기운이 있기는 있었나 봅니다.
한편, 경희궁의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던 1623년 광해군은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곳에 살았던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이 새로운 국왕, 인조가 되었으니 결론적으로 술사의 예언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광해군의 주관심은 인경궁이었습니다. 경희궁은 일시적인 피우처 정도로 생각하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그 규모가 인경궁이 5,500칸, 경희궁은 1,500칸 정도라는 숫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인경궁 터는 사직단 북쪽에서부터 옥인동 부근까지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문헌 자료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광해군이 술사들의 말을 듣고 거의 동시에 착공한 인경궁과 경희궁은 역사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때마침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임진왜란 후 다시금 불타버린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하기 위하여 많은 재목들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때 인조는 인경궁 건물들을 헐어 그 재목을 사용하게 윤허하였고 그 후 인경궁의 모습과 위상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반해,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옛집으로, 후대 왕들이 왕권 정통성의 상징으로 계속 보호하여야 할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고종의 경복궁 중건 때까지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역사는 경희궁 쪽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참고 말씀;
1. 한 술사는 성지(性智), 다른 술사는 김일룡(金日龍)을 말합니다.
2. 경덕궁(慶德宮)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을 바뀌게 된 사연은 경덕궁의 경덕(慶德)이 추존왕인 원종(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겹친다고 하여 영조 때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