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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을 보면서
2024년 10월 13일 / 마 11:20-24
얼마 전에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이다. 우영우가 비싼 회식자리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맛있는 김초밥을 먹었다. 그리고 아버지 생각이 나서 회식 자리에서 먹은 김초밥을 사가지고 왔다. 그런데 아빠는 하루 종일 김밥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 김밥을 받아 든 아빠의 표정이 묘해졌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들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살면서도 이런 실수를 한다. 부부관계에서 잘 한다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파혼에 이르는 경우도 생기고, 자식과 부모 관계에서 특히 사춘기에 있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이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자식이 곁길로 나가는 경우도 참 많다. 직장에서도 그렇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나름대로 잘하려고 하는 것이 자기중심적 사고 때문에 상대방을 불편하고 힘들게 한다.
그런데 사랑이 빠져있다면 그 결과는 비참해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내 나름대로 예배도 잘 드리는 것 같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까?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하나님께서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실까? 그저 자기중심적 신앙이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책망거리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결론적인 말씀이기는 하지만 수시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말씀을 거울삼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써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와 더불어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고을들에 대해 책망하셨다.
카톡에 있는 글 / 유혹은 마음의 찌꺼기를 끌어 올리는 불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은밀하게 다가오는 악한 영의 유혹이다. 악한 영의 유혹이 어떻게 우리를 사망의 길로 치닫게 하는가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특히 겉모양에 속지 않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강박관념에 빠져서 자기의 수준과 상태보다 훨씬 더 멋있게 보이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영혼의 타락은 은밀하게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타락한 본성의 지배 아래 있다. 겉으로는 온갖 칭송을 다 받고 있을지라도 냄새나는 악을 품고 있는 주인공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토마스 보스턴은 스코틀랜드 목사로 어릴 때부터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8km를 걸어 예배 참석을 할 정도로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영적 깊이가 있었다)
책망을 받은 고을들은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이다. 이 고을들의 공통점은 예수님께서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서 정성을 쏟으신 곳이다.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많은 말씀을 전하셨고 또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많은 사역을 행하신 곳이다.
그러나 이 고을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쏟으신 사랑과 정성에 제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열매가 없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무섭게 책망하셨다. 심지어는 만일 ‘다른 곳에서 이 만큼 하셨다면 회개했을 것이라’라고 꾸짖으셨다. 이 고을들로서는 심판대 앞에서처럼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마 11:21-22 / ‘화가 있으라. 고라신아. 화가 있으라, 벳새다야! 너희에게 베푼 이적을 악한 도시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부끄러워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3) ㄱ)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네게 베푼 이적을 소돔에서 베풀었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날까지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ㄱ. 사 14:13-15) 24)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소돔이 오히려 너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고을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 말씀은 자기중심적 신앙에 빠져들기 쉬운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21절에서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라고 하셨는데, 이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도 몇 차례 나온다. 예를 들어 이사야 3:11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악인들을 향해 이 표현으로 경고하였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불의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향해 이 표현으로 경고하였다(렘 22:13). 그러니까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보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문제가 있는 자들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할 때 사용하였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표현으로 자기들을 책망하시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하고 화를 냈다. ‘자기들만큼 하나님께 칭찬 받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듯이 교만을 떨었다.
갈릴리 고을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이들도 예수님의 이런 책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책망의 말씀을 듣고서 회개하고 돌아섰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분이 왜 이러시나?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가? 우리가 의인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책망을 받을 정도로 악한 사람들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우리와 우리가 하는 일 심지어는 마음가짐까지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라고 책망하신 것은 지켜보시다가 더 이상 그대로 두실 수 없기 때문에 경고 차 하시는 말씀이다. 지금이라도 멈추고 돌아서라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 건축이나 토목 그리고 도시계획에 ‘조감도’라는 것이 쓰인다. 이 조감도는 특정 지역이나 구조물의 전체적인 모습을 공중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시각에서 그린 그림이나 도면을 말한다. 이것은 건축물, 도시, 또는 특정 지역의 구조와 배치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조감도라는 말의 한자어를 살펴보면 이렇다. '조‘(鳥)는 '새'를, '감’(瞰)은 '내려다보다'를, '도‘(圖)는 '그림'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새의 눈높이에서 내려다본 그림'이라는 뜻이다. 건물은 집을 짓는 일군들의 눈높이에서 그려진 그림만을 보고 지어서 안 된다. 전체 구조와 주변과 어울림을 고려해서 그려진 그림을 보고 지어야 한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관점에서만 그려진 그림대로 신앙생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려진 그림을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에 ‘주감도’(主瞰圖)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는 우리와 우리의 삶에 대한 그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주감도’(主瞰圖)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 신앙이고, 결국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는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혹시 ‘화 있을진저!’라고 책망하시지는 않으실까?
예수님의 기대가 있다
2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책망하시되’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이유를 말씀하셨다.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고을들을 살펴보자.
❶ 가버나움 / 마태복음 4:1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공생애기간을 지내셨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이 가버나움은 예루살렘 다음으로 많이 거명되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가장 많은 사역을 행하셨다. 제자 열둘 중 다섯을 이곳에서 부르셨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 맹인을 눈 뜨게 하셨고,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셨고, 12해 혈루증 앓는 여인을 낫게 하시는 등 수많은 이적을 베푸셨다. 그리고 회당에서, 주변 바닷가나 산 위에서 많은 말씀을 전하셨다.
❷ 벳새다 / 갈릴리 북동쪽 요단강이 갈릴리 호수로 유입되는 지점에 펼쳐진 평야지대에 있는 고을이다.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이다.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고 맹인의 눈을 치유하셨다.
❸ 고라신 / 이 고을은 가버나움에서 북쪽으로 약 4-5km로 정도에 위치한 곳으로 건물은 대부분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이 고을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가버나움에서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을 오가시며 이 고을을 지나셨고, 때로는 회당에서 말씀도 전하셨고, 이적도 베푸셨다. 그렇다고 이 도시들이 작은 곳은 아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가버나움인가? 왜 벳새다, 고라신인가?’ 사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수도였던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헤브론, 브엘세바 그리고 지중해변의 가이사랴 등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유리한 곳이 많았다. 그런데 왜 변방이고 소외된 이 갈릴리 마을들을 택하셨는가? 그 답은 마태복음 4:14 이하에서 찾을 수 있다.
마 4:14 /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한 마디로 오래 전부터 메시아가 오시면 사역하실 장소로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곳으로 메시아를 보내시려 하셨을까? 앞의 말씀에서 보듯이 소외된 사람들, 말씀과 은혜의 사각 지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시려 하심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변방이 아니라 중심으로 일어서게 하려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그 많은 사랑을 받고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았다. 중심으로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영적인 어둠 속에 복음의 변방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책망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엡 5:15-17 /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행실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은 악한 시대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현명한 자가 되십시오. 모든 기회를 충분히 살려서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 17) 분별없이 행동하지 말고 주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 비유’가 나온다.
요 15:1-2 /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아버지께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손질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농부시고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시고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농부는 포도나무 가지를 정성을 다해서 보살피고 돌보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지가 좋은 포도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과 벳새다와 고라신에 그렇게 정성을 쏟으신 이유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기대,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게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푸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이렇게 남다른 사랑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농부가 포도나무 가지에 실하고 풍성한 포도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듯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풍성한 열매 맺기 위해 힘쓰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22, 2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 11:22, 24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4)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소돔이 오히려 너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벳새다 그리고 고라신 이 고을들을 저주하신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부터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로마시대의 국제 고속도로라 할 수 있는 ‘비아 마리스’(Via Maris)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통과하는 국제도시로서 이곳에 세금을 거두고 무역을 관장하는 기관이 있을 정도로 크게 발전했던 도시였다.
그러던 중에 주후 746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가 파괴되었다. 그후로 이 도시가 쇠퇴하기 시작했고, 로마가 인근에 더 큰 도시를 새롭게 건설하면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급기야 16세기에 와서는 사람들이 다 떠나고 폐허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1838년에 미국의 성서학자이자 탐험가인 에드워드 로빈슨이라는 사람이 이 지역을 탐사하던 중에 돌무더기 속에 방치되어있던 이 도시를 발견하였고 신약시대의 유적들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가버나움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현재는 유적지로만 남아있다.
이런 형편은 벳새다와 고라신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도시는 현재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예수님 시대에 크게 번성했던 도시였지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로 남아있고, 발굴을 통해 유적지로만 그 의미가 남아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 예언의 말씀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확신케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데 이것을 거절하는 사람을 심판하신다. 기회를 주시는데 그 기회를 날려버리는 사람, 자기중심적으로 살며 하나님의 기대를 외면한 사람들을 심판하신다.
그 심판은 언제 어떻게 임할지 모른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심판이 임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심판이 유예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최후의 심판대 앞에는 서야 할 것이다. 그때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본문의 이 갈릴리 고을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도 돌아서지 않았다. 이 심판의 경고조차도 무시하였다. 그래서 심판을 면할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요나서 말씀이 생각이 난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요나서 3:4에서 요나가 이렇게 외쳤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고 심판을 경고하였다.
그런데 3:5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의 경고를 듣고 돌아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3:10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심판을 철회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중심적 신앙으로 이 심판의 말씀을 외면하면 안 된다. 이 갈릴리 고을 사람들처럼 심판의 경고를 흘려들으면 안 된다. 대신 니느웨 사람들처럼 심판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들어야 한다. 그래서 심판을 면해야 하고 책망을 듣지 말아야 하겠다.
본문의 갈릴리 고을들은 주님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저주의 땅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큰 도전과 경고를 받아야한다.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자기중심적 신앙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중심적 신앙생활로 나아가야 하겠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은 곧 멸망당할지도 모르고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눈물어린 책망의 말씀을 하셨다.
눅 19:41-33 / [예루살렘의 불행] 그 행렬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도성을 바라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 네 앞에 있는데 너는 그 길에서 돌아서 버렸구나. 43) 네 원수들이 진을 치고 너를 에워싸서 사면으로 공격하여 44) 너와 네 자녀들을 멸망시킬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네 원수들은 돌 하나도 제자리에 얹어 두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기회를 네가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화 있을찐저’ 하시는 말씀이 7번이나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시며 야단치셨다. 얼른 보면 이 말씀이 굉장히 부담스럽다. 마태복음 5장 산상보훈에 보면 팔복 말씀이 나온다. ‘복 있을지어다, 복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 ‘저런 사람은 복이 있다’ 하시면서 8번이나 축복해 주셨다. 이처럼 축복의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담도 없고 은혜롭다. 그러나 마태복음 23장 말씀처럼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하시는 책망의 소리를 들으면 정말 부담스럽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축복의 말씀, 칭찬의 소리만 꼭 좋은 것이 아니다. 책망의 소리, 쓴소리도 잘 들으면 우리에게 보약이 되고 생명이 된다. 이런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받아 회개하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예수님의 귀한 말씀들을 마음에 영접하여서 무디어진 우리의 심령을 깨울 수 있기를 바란다.
▶ 우리 신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골 3:1-5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여러분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예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2) 하늘나라의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채우십시오.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3) 마치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참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4) 우리들의 참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빛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 그러므로 죄에 가득 찬 세속적 욕망을 버리십시오. 여러분 속에 파고드는 악한 욕망을 죽이십시오. 성적인 죄, 부정, 정욕, 수치스러운 욕망을 끊어 버리십시오. 이 세상의 금전과 쾌락을 흠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쾌락을 탐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큰 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 있을찐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하시며 물질을 탐하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디모데전서 6:11, 12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물질을 탐하며 살아서는 안 되고 위엣 것, 영적인 것, 하나님의 것, 곧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초대교회 때는 교회 건물도 없었다. 그들은 물질도 없었고 사회적인 지위도 낮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살아 있었다. 그 믿음이 살아있었다. 기도가 살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소수였지만 로마를 복음화 시키고 세계를 복음을 정복하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중세시대 교회는 어떠했을까? 그들은 멋있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가 많은 돈과 토지를 소유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 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금은보석으로 장식했건만 정작 그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높은 자리를 탐하였다. 그때에 그들은 영성을 잃어버리고 부패했다.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악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중세시대에 교회는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성직자들이 가장 타락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물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경건의 능력은 높은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말씀의 열정으로부터 나온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처럼 많은 축복을 받은 것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감당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교회사를 읽어 보면 성도들이 얼마나 성경을 사모했든지 성경사경회를 하면 며칠씩 교회에서 먹고 자고하면서 성경을 공부했다. 저 멀리 평양에서 성경사경회를 해도 목포, 해남, 무안등지에서 쌀을 짊어지고 가서 성경을 공부했다. 그래서 공부한 성경을 자기 교회에 돌아와서 열심히 가르쳤다.
여수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을 갔었는데 가다보면 애양원 병원 옆에 옛날 신학교 자리가 있었다. 거기 유물관이 있는데, 그때는 신학교 성적표가 있다. 그런데 교과 과목이 거의 성경과목이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쭉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신학교 커리큘럼이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한국교회가 너무나 돈을 좋아한다. 목회자들이 너무나 감투를 좋아한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갈수록 정치적이 되고 물질적이 되어 간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늘 한국에 오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한국교회여! 축복을 받을지어다’ 그러실까요? 아닐 것이다. ‘화 있을찐저 한국교회여’ ‘화있을찐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여’ 하시며 책망하실 것이다. 오히려 북한에 핍박받는 지하교회 성도들을 축복하시지 한국교회를 칭찬하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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