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여산 동헌, 백지사터 (순례지/성지)
간략설명:창호지에 달라붙은 숨결
도로주소: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동헌길 13(동헌)
전주 교구의 ‘제2 성지’라 불리는 여산 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즉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여산 땅은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어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다. 일찍 복음을 전해 받은 반면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었던 탓으로 일정한 형장이 없이 마구 처형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박해가 한창이던 조선 교구가 독립을 한 것은 1831년 9월 9일, 그 안에서도 조선인에 의한 자치가 최초로 실시된 곳은 1931년 전주 교구였다. 조선 교구 설정 1백주년을 맞아 전주 교구를 방인 자치 교구로 선물 받았던 것이다. 이는 전주 지방의 신앙이 지닌 깊은 뿌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호남 최대의 신앙 산맥을 이루는 것은 대둔산과 천호산을 기점으로 한다. 일찍이 복음은 이 두 산의 줄기인 금산(錦山), 진산(珍山), 고산(高山)에 전해져 수많은 교우촌들이 산골짜기마다 형성됐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치명일기”(致命日記) 등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5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백지사형이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시키는 처형 방법이었다. 지금도 동헌 앞마당에 백지사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처형장에서는 얼굴에 달라붙은 백지로 인해 숨을 헐떡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천국 영복을 그리며 천주 신앙을 고백한 선조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여산이 품고 있는 성지는 동헌과 옥터, 여산 숲정이와 배다리, 뒷말 치명터 등 곳곳에 널려 있어 어찌 보면 여산 전체가 하나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