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키운 메밀묵
김금자
내 유년의 기억은 낙동강 푸른 물길이 유유히 흘러가던 기름진 들판 위에 머물러 있다. 낮이면 친구들과 흙먼지 풀풀 나는 논둑길을 사방으로 뛰어다녔고, 고만고만하게 자란 보리이삭을 꺾어 피리를 불었다. 밤이 오면 들판 너머 강가에 하얗게 펼쳐진 모래사장은 그대로 우리의 너른 놀이터가 되었다. 특히 음력 보름날의 밤은 축제와도 같았다. 하늘 한가운데 둥실 떠오른 달은 온 세상을 푸르스름한 은빛으로 채색했고, 우리는 그 은은한 달빛을 조명 삼아 밤이 이슥하도록 지치지도 않고 놀았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모래밭에 엎드려 숨을 죽이면, 살갗을 스치는 밤바람조차 달빛을 머금어 포근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때의 달빛은 가난했던 우리들의 가장 너르고 풍요로운 마당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그 시절의 낙동강은 늘 낭만적인 얼굴만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대자연의 위압감은 여름마다 찾아오는 연례행사였다. 제방이 허술했던 탓에 장마철 폭우가 사흘 낮밤을 쏟아지면, 유유히 흐르던 강은 순식간에 누런 이빨을 드러낸 무서운 괴물로 변하였다. 둑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강물은 무서운 속도로 들판을 집어삼켰고, 누런 흙탕물이 논과 밭을 삼켜버리면 온 세상은 이내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바다처럼 넓어졌다. 그 거대한 물결 위로 어디선가 떠내려온 살림살이들과 돼지들이 비명을 지르며 둥둥 떠내려가던 기이하고도 두려운 풍경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살아난다. 자연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했고, 우리는 그 시린 풍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빛의 온기를 빌려야 했다.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는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였다. 물이 빠진 들판에는 악취 나는 뻘흙만 두껍게 쌓였고, 강가에 있던 우리 집의 작은 밭뙈기도 일부가 거센 물살에 허무하게 씻겨 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안 그래도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는데, 한 해 농사까지 완전히 망쳐버렸으니 집안의 가난은 더 깊고 어두운 늪으로 가라앉았다. 밤이 되면 엄마의 깊은 한숨 소리가 얇은 문틈을 타고 안방까지 처량하게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서 듣는 엄마의 한숨은 마치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 소리 같았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의 그 깊은 시름을 깨끗이 지워주고 싶었다. 나는 저녁상 머리에서 아버지를 바짝 졸랐다. “아버지, 우리도 돈 많이 벌어서 저 높은 곳에 좋은 땅 더 사요. 방법이 없을까요?” 어린 딸의 철없는 보챔에 아버지는 담배 연기만 깊게 내뿜으셨고, 엄마는 말없이 굳은살 박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밤새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손재주 좋고 음식 솜씨 뛰어난 엄마가 겨울 한 철 동안 메밀묵을 만들어 팔기로 하였다. 그렇게 우리 집의 눈물겨운 겨울 메밀묵 장사가 시작되었다.
겨울이 깊어지면 마당의 장독대에 서리가 하얗게 앉았다. 엄마는 장날 읍내에서 사 온 메밀을 찬물에 여러 번 씻어 방앗간에서 거칠게 갈아왔다. 진짜 고된 노동은 그때부터였다. 넓적하고 큰 옹가지에 갈아온 메밀을 넣고 물을 부어 치대면, 하얀 거품 같은 앙금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미끌미끌하면서도 차가웠다. 그걸 고운 베 천목에 대고 짜내어 체에 거르는 일은 지독한 육체노동이었다. 아버지가 마당 우물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길어 오면, 온종일 찬물에 메밀을 치대는 엄마의 손등은 금세 잘 익은 대추빛처럼 새빨갛게 얼어붙었다.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며 갈라진 엄마의 손등은 피가 배어 나올 듯 위태로웠다. 손이 시려 호호 불어가며 가끔 아궁이 앞 더운물에 손을 담갔다가도, 이내 다시 메밀을 쥐어짜던 엄마의 거칠고 붉은 손. 나는 가마솥 밑에서 장작불을 지피며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눈이 매워 눈물이 고여도 불꽃의 온기보다 엄마의 손끝이 더 아리게 다가왔다.
엄마는 부뚜막에 걸터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기다랗고 큰 나무 주록으로 가마솥 가득 담긴 메밀 점액을 열심히 저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바닥이 눌어붙어 탄내가 나기 때문에, 묵을 쑤는 긴 시간 동안은 잠시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매운 장작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눈을 찔러 눈물이 흐르는 속에서도, 엄마는 오직 주걱 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저항감과 느낌만으로 묵의 농도를 정확하게 가늠하였다. 그것은 오랜 삶의 경험이 만들어낸 엄숙한 의식 같았다. 마침내 뜸이 잘 든 솥 안에서 가만히 들어 올린 주걱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묵 덩어리의 형상은, 흡사 깊은 겨울날 처마 밑에 얼어붙은 하얀 고드름을 닮아 있었다. 그 신성한 실루엣을 바라보며 정성으로 쑤어낸 메밀묵이 보들보들하게 굳어갈 때쯤이면, 마당에는 어김없이 환한 겨울 달빛이 먼저 와서 낮게 엎드려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밤이 이슥해지면 사위는 고요해지고, 차가운 달빛을 앞장세운 손님들이 하나둘 우리 집 사리문을 열고 모여들었다. “형님, 묵 다 되신니껴?” “아지메요, 뜨끈한 묵 한 사발 하입시더.”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가 시린 마당을 채우며 줄줄이 안방과 건넛방으로 들어섰다. 칼바람이 부는 긴긴 겨울밤, 출출한 허기를 달래줄 야식으로 메밀묵만 한 안성맞춤은 없었다. 네모반듯하게 잘 굳은 탱글탱글하고 구수한 메밀묵을 칼로 탕탕 썰어 대접에 담고, 뜨거운 물로 데운 그 위에 잘 익은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친 것을 올렸다. 그리고 바삭하게 구운 김을 손으로 부숴 고명으로 얹어낸 묵사발의 맛은, 세상 그 어떤 대궐의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은 꿀맛이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감기는 구수함과 김치의 새콤함이 어우러져 추위마저 단숨에 잊게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방 저방 가득 모여 앉아 서로의 고단한 살림살이와 시시콜콜한 세상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담배 연기와 사람의 온기가 방안에 가득 차면 겨울의 가혹함도 잠시 비껴가는 듯했다. 한쪽 방에서는 왁자지껄 신나게 묵 값을 내기 위한 윷놀이가 벌어져 대단한 소동이 일어났고, 다른 방에서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화투패를 바닥에 짝짝 내리치는 소리가 정겹게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 이웃집에서 묵 주문이 들어오면 엄마는 머리에 짚으로 만든 따뱅이를 얹고 묵 채반을 인 채 밤길 배달을 나섰다. 눈이 내려 미끄러운 빙판길이었지만, 하얗게 길을 비추는 달빛에 의지해 걷는 엄마의 발걸음은 장사꾼의 고단함보다는 자식들에게 나은 혜택을 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유독 바쁘고 경쾌했다.
손님들이 방을 다 차지하는 바람에 정작 내가 편히 누워 쉴 방은 없었으나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네 집으로 밤마실을 가기에 딱 좋은 핑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동네 귀퉁이 친구 집에서 또래들과 한바탕 신나게 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에 둥그렇게 뜬 겨울밤 달빛은 시린 바람 속에서도 이상하게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차가운 흙길바닥을 허연히 비추던 그 달빛은 집으로 향하는 내 작은 발걸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며, 어두운 골목길의 무서움을 쫓아내 주었다. 그것은 내 어린 날, 가난했지만 외롭지 않게 해주었던 가장 다정하고 든든한 길동무이었다.
그러나 달빛 아래 활기차던 묵 집의 환한 불빛 뒤편에는, 어린 내 가슴을 언제나 조마조마하게 만들던 서글픈 풍경이 공존하고 있었다. 묵값을 주머니에서 꺼내 꼬박꼬박 치르는 고마운 이들도 많았으나, 당시에는 다들 주머니가 가벼웠던 시절이라 그저 외상 장부에 이름 석 자만 달랑 남겨두고 겨울이 다 지나도록 감감소식이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워낙 사람 좋고 인심 많던 아버지는 대문 밖 길을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이 사람아, 날도 추운데 들어와서 따뜻한 묵 한 사발 들고 가라”며 집안으로 불러 모으기 일쑤였다. 밤새 찬물에 손을 적셔가며 뼈마디가 저리도록 고되게 묵을 쑤고 나르던 엄마의 눈에,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허허 웃으며 공짜로 대접하기만 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야속하기 짝이 없었을 터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썰물처럼 떠나간 깊은 밤이 되면, 부엌문 너머로 낮게 가라앉았으나 날이 선 엄마의 목소리가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메밀 한 가마니라도 보태줬소? 장사랍시고 밤새 찬물에 손 부르터가며 묵 쑤었더니, 죄다 거저 퍼주면 우리는 대체 뭘 먹고 살고 자식들은 어떻게 가르치냐고예!” 거친 고성이 오가는 부모님의 언쟁을 들으며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숨을 죽였다. 돈을 많이 벌어 홍수 걱정 없는 탄탄한 땅을 넓히겠다던 야무진 꿈은 간데없고, 야속한 아버지와 서러운 어머니의 달래지지 않는 시름이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곤 하였다. 이불 속에서 까닭 모를 눈물을 흘리며 나는 빨리 봄이 오기만을 바랐다.
속담에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했으나, 우리 집 부엌문 너머로 밤마다 새어 나오던 눈물 섞인 소동 속에서도 메밀묵의 맛만큼은 겨울이 깊어갈수록 이상하게도 더 깊고 구수해졌다. 철이 들고 세상의 풍파를 직접 겪고서야 비로소 그 깊은 맛의 비밀을 깨달았다. 엄마의 거친 항변은 가난의 모진 굴레를 어떻게든 벗겨내고 자식들만큼은 배불리 건사하고 싶었던 눈물겨운 모정의 외침이었다. 반대로 아버지의 헤픈 인심은 홍수로 함께 삶의 터전을 잃고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웃들의 쓸쓸한 허기를 차마 외면하지 못했던 투박하고도 넓은 정이었다. 엄마는 현실의 단단한 벽을 쌓았고, 아버지는 그 벽 너머로 따스한 다리를 놓았던 것이다.
성경 마태복음 산상설교에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오직 하늘에 쌓아두라”라는 구절이 있다. 평생 교회 문턱에도 가본 적 없고 성경 공부 한번 해본 적 없던 투박한 시골 농부였던 아버지는, 그 종교적인 깊은 진리를 이미 당신의 따뜻한 가슴과 거친 손끝으로 세상에 묵묵히 실천하고 계셨던 셈이다. 이웃에게 베푼 묵 한 사발이 결국 하늘에 쌓인 보물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시린 겨울밤 환한 보름달이 뜨면 지금도 낙동강의 푸른 기억이 메밀묵의 구수한 냄새를 타고 아련히 피어오른다. 밤마다 가난한 우리 집 마당을 허연히 비추던 은은한 달빛은, 실은 두 분이 온몸으로 뿜어내던 따스한 인간미와 서로를 향한 애틋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철없던 소녀를 포근히 감싸주던 유년의 달빛은 이제 반세기의 세월을 넘어, 홀로 걸어가야 할 내 남은 생의 길을 든든하게 비추는 영원한 길동무가 되었다. 오늘도 하늘을 보며 그 구수했던 달빛의 온기를 가만히 음미해 본다.
(20260519)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