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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새벽 6
오후부터 옥상에 나와있던 서현은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밤공기가 시리지 않은 덕택이다.
겨울인데다가 맑은 날이라 별이 잘 보인다.
별 없는 서울 밤하늘이 삭막하다고 해도 오늘같은 날은 그 말이 무색할 정도다.
손전등을 들어 불빛으로 하늘에 그림을 그린다.
별을 쫓아 콕콕 찍어보기도 한다.
비행기 불빛이 반짝이며 지나간다.
- 안녕~ 안녕~ 어디로 가니~
서현은 손전등 불빛으로 비행기를 따라가며 쾌활하게 인사한다.
- 어구.. 목이야.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던지라 목이 뻐근하다.
서현은 고개를 좌우아래위로 움직인다.
옆 집 방에 깜박깜박 불이 켜진다.
- 11시쯤 됐겠네.
옆 집에 사는 사람은 누군지는 몰라도 꼭 11시쯤 들어오곤 한다.
옥상에 나와있다가 그 집 불이 켜지면 시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서현은 기지개를 켜며 허리를 좌우로 돌린 뒤 천천히 방으로 걸어간다.
- 어어, 하진아, 하진아, 다리에 힘 좀 줘봐.
골목에서 들리는 소리에 서현은 걸음을 멈춘다.
- 됐어. 가. 나 안 취했어.
- 야, 안 취하긴 뭐가 안 취해. 너 말 안 들을래? 집에 들어가야지.
집 어디야? 여기 맞아? 야, 야. 유하진.
- 아 됐다니까. 가라니까. 안 취했다니까. 하하. 반가웠다!
- 그래그래 너 안 취했다. 반가웠다. 근데 집 어디냐?
- 어, 나 안 취했냐? 안 취했는데 반가우니까 2차 가자.
- 아 지지리도 말 안 들어, 이눔자식! 다리에 힘 줘!
누가 또 술이 떡이 되게 마셨나보네.
서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집 문을 연다.
갑자기 서러운 울음 소리가 들린다.
- 어어어어엉. 어어어엉. 선주야. 어어어어흐흐흑.
- 독한 것. 이제 우냐.
- 어어어어어흐흐흑. 나 명우 좀 불러줘. 명우 오라 그래. 나 명우 보고 싶어.
서현은 살금살금 옥상 난간으로 걸어가서 골목을 내려다본다.
주저앉은 채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사람을 다른 한 사람이 바라보고 있다.
여자의 울음은 계속 된다.
- 어떻게 그래. 어어어어어어흑. 평생 같이 사랑할 줄 알았는데.
평생 같이하자고 했으면서. 어떻게 명우가 이럴 수가 있어. 어흐흐흑.
- 그래, 울어. 그동안 못 운 거 다 울어. 다 울고 잊어버려. 오늘 다 울고 내일은 다 잊어. 울어.
- 못 잊어. 선주야. 나 명우 못 잊어. 어흐흐흑.. 못 잊어..
- 아...
- 나 명우 앞에 나타나면 안 되는 거지? 어흑.. 그럼 명우 행복하지 않지?
- 휴...
- 어어어어어엉. 어흑. 어흑. 어흐흐흐흐흑. 어허허어어어엉.
선주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5년동안 하진을 알아오면서 이렇게 취해서 흐트러진 모습도 서럽게 우는 것도 처음 본다.
명우와 헤어지고 단 한 번도 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진을 아는 선주는 그녀가 이렇게 울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
하진과 명우를 지켜보면서 선주는 그 둘이 최상의 커플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8년이나 사겼으면 징그럽지도 않냐고 그만 헤어질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을 농담처럼 던졌었지만
8주년 되던 날 가장 많이 기뻐하고 축하해준 사람이 선주였다.
다른 커플들의 귀감이 되었노라고 표창장까지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선주는 늘 하진과 명우가 부러웠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든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내려다보던 서현과 선주의 눈이 마주친다.
깜짝 놀란 서현은 손전등을 꽉 쥔다.
- 앗따거.
서현은 손바닥의 상처가 쓰라려 조그맣게 소리를 지른다.
- 뭐요?
손전등을 쥐면서 스위치를 누른 모양이다.
선주의 얼굴에 불빛이 일렁인다.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 읏, 죄송해요. 보려고 본 게 아니라요.
- 그 형광등이나 치우고 말해요.
- 형광등 아니라 손전등인데요..
- 아무튼 좀 치워요.
- 죄송해요.
서현은 손전등 불빛이 옆으로 향하게 돌린다.
- 안 가요?
여전히 옥상 난간에 붙어 내려다보고 있는 서현을 향해 선주가 버럭 소리지른다.
- 네?
- 구경 났어요?
- 사과했는데 왜 화를 내요. 괜찮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요.
- 아, 진짜. 안 그래도 열 받는데 승질 돋구지 말고 가요, 좀. 가.
- 나 그쪽 친구분 이웃사촌이에요.
- 웃기는 사람이네. 이웃사촌이라서 구경합니까?
- 그 분 집 어딘지 알아요? 나는 알아요. 친구 분 잠드신 거 같은데 어떡할 거예요?
- ....
- 내 사과 받을 거예요, 말 거예요?
- 바, 받을게요.
- 미안해요!
- 괘, 괜찮아요.
서현은 선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쏙 하고 사라진다.
선주는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사과하라는 것도 아니고 사과를 받아달라고 화를 내다니.
선주는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 울다 잠든 하진을 내려다본다.
- 유하진. 그새 뭐 저런 이웃사촌을 사겼냐. 하진아 집에 가자.
선주가 하진의 한쪽 겨드랑이 사이에 자신의 어깨를 끼우고 하진을 일으킨다.
- 명우야..흐흑.. 명우야..
술과 잠에 취한 하진이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일어선다.
- 언니집 열쇠 주세요.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온 서현이 손을 내민다.
언니? 당돌한 것.
- 여기서 찾아봐요. 난 얘 부축하는 것만해도 힘들어요.
선주가 하진의 가방을 불쑥 내민다.
- 그럼 따라오세요.
서현이 가방을 뒤적이며 앞장 서서 걷는다.
*
- 진짜 이웃사촌 맞아요? 사기치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원룸 삼층 복도에서 서현의 등뒤로 선주가 소리를 지른다.
- 앗, 아니라니까요. 언니가 제대로 안 가르쳐줬단 말이에요.
저희 집에서 저기가 우리집이야 하면서 머리로 가리켰단 말이에요. 음, 여기도 아니군.
서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열쇠를 빼낸다.
- 그렇다고 삼층에 있는 집집마다 열쇠 집어 넣어요?
- 할 수 없잖아요. 자기는 친구 집이 몇 층인지도 모르면서!
- 내가 왜 당신 자기요. 흥.
그러는 당신은 이웃사촌이라며. 이웃사촌 집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웃사촌이 뭔지나 알고 이웃사촌이래. 이웃사촌 취소해요.
선주의 말에 서현이 휙 돌아선다.
- 어우 유치해! 그건 언니랑 내 문제예요. 우린 이웃사촌 하기로 했어요.
- 뭐, 유치? 열쇠 이리줘요!
- 이거 왜 이래요. 나 아니었음 언니 집이 몇 층인지도 몰랐을 거면서!
- 언니언니 친한 척 좀 하지 마요.
- 누가 댁한테 언니래요. 언니한테 언니라하지.
- 아.. 진짜.. 시끄럽네.
하진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리자 선주와 서현이 입을 다물며 서로를 바라본다.
- 하진아, 술 좀 깼냐.
- 열쇠 줘..
- 언니, 하,,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여기요.
서현이 열쇠를 내밀자 하진은 선주의 어깨에 올려진 팔을 내려 열쇠를 받아든다.
- 유치하게 애랑 똑같이 싸우고, 잘 한다, 김선주. 그리고 너.
하진이 풀린 눈으로 서현을 바라보자 서현이 움찔한다.
- 너 목소리 너무 커.
- 저 원래 목소리 커요..
- 둘이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시끄러. 짜증나.
하진은 할 말을 끝내고 비틀비틀 자신의 집 현관문으로 걸어가 열쇠로 문을 연다.
- 아.. 언니 집 저기구나. 304호.
서현은 기억해두겠다는 듯 중얼거린다.
현관문이 쾅 닫히고 하진이 사라지자마자 들리는 소리.
- 어허허허헝.. 명우야.. 어어어어어어헝. 어흐흐흐흑.. 명우야.
- 으이그.. 화상.
선주도 중얼거리며 하진의 집으로 뛰어들어가버린다.
혼자 남겨진 서현은 멍하니 복도에 서서 하진의 집 현관문을 바라본다.
현관문이 다시 살짝 열리고 선주가 고개를 내민다.
- 어이, 이웃사촌씨 잘 가슈.
열린 문 틈으로 하진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 피.
서현이 입술을 삐죽이자 선주는 서글한 눈으로 힐끗 웃으며 문을 닫는다.
- 유하진이라고 그랬나?
지적이고 차가운 첫인상이었는데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 우는 얼굴을 보니
서현은 이웃사촌 유하진에게 더욱 정이 가는 것 같다.
서현은 피식 웃으며 슬리퍼를 소리내어 달달 끌며 복도를 걸어간다.
아,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이웃사촌의 가방을 가지고 와버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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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분량이 좀 많았죠.
읽기 부담되셨겠어요. 하하..
고마워요. ^^
그들의 새벽 7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웅웅거리며 귀가 울린다.
하진은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찌푸린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선주랑 만나서 술을 마셨지.
- 나 명우랑 헤어졌다.
- 뭐?
선주의 손에 들린 소주잔이 흔들리며 술이 쏟아졌었다.
하진은 탁자에 쏟아진 말간 소주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었다.
- 명우 결혼한대.
- 뭐?
- 난 괜찮아. 명우한테 미안하지 뭐.
- 병신.
그후로 하진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줄창 술만 들이부었다.
그리고 또?
더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걸어 들어온다.
이윽고 비닐 봉지 포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
눈을 뜨는 것이 힘들다.
겨우 눈꺼플을 들어올리니 눈이 시리다.
- 으...
- 깼냐?
장을 봐왔는지 봉투에서 주섬주섬 재료를 꺼내던 선주가 힐끗 돌아본다.
- 어..
- 속 좀 괜찮아?
- 머리 울려. 작게 말해.
- 이거 먹고 더 자든지. 오늘 일요일이잖아.
선주가 탁자 위에 숙취해소제를 올린다.
하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온 몸이 찌뿌둥하다.
출근할 때 입은 정장 그대로 입고 있다.
- 옷 좀 벗겨주지. 이게 뭐냐.
- 내가 니 옷을 왜 벗기냐. 이거나 마셔.
- 야박하게 굴긴..
하진은 재킷을 벗고 셔츠 단추를 끌르며 선주가 내민 드링크를 받는다.
- 옷 벗기려고 하니까 손대지 말라고 어찌나 우는지 짜증나서 냅뒀다.
- 하.. 그랬어? 울었다고, 내가? 어쩐지 눈이 잘 안 떠지더라. 엄청 부었겠군.
- 부었다 뿐이냐. 니 몰골을 보니 밥맛이 뚝 떨어진다.
선주는 휙 돌아서서 가스렌지에 냄비를 올리고 도마를 꺼낸다.
선주가 쌀을 앉히고 아침 준비를 하는 동안 하진은 욕실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옷을 벗은 채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헝클어진 짧은 머리카락.
반듯한 이마.
울어서 퉁퉁 부은 눈.
날콤한 콧날.
부르튼 입술.
가지런하게 드러나는 쇄골.
봉긋한 젖가슴.
천천히 거울에 비친 자신을 훑어내리다가 볼록한 가슴을 보고는 눈을 감아버린다.
- 네 가슴은 정말 이뻐. 너처럼 이쁜 가슴 가진 여자를 본 적이 없다구. 부러워서 샘 날 정도야.
- 픕.. 다른 여자 가슴 볼 기회가 있었어?
- 얘는~ 목욕탕에서 봤다는 말이지. 너 이 이쁜 가슴 나만 보여줘야 돼. 평생 나만 보여주기야?
- 목욕탕에 가지 말란 말이구나. 하하.
명우는 쿠쿡 웃으며 하진에게 안겨왔었다.
명우의 머리카락에서 나던 샴푸냄새를 정확히 기억해내는 빌어먹을 후각.
명우가 곁에 있는 것만 같다.
하진은 샤워기를 틀고 물줄기로 지난 밤의 땀과 눈물을 씻어내린다.
- 납득할 수 없어. 뜬금없이 헤어지자니.
갑자기 이러는 이유 모르겠어.
그래, 너 요즘 우울하긴 했어.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럼 말 해.
괜히 이런 식으로 투정부리는 거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 안 돼.
- 얘기했잖아. 나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투정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말한 거야.
- 평범? 네가 말하는 평범이란 게 뭔데.
- 나 결혼해. 선봤어. 그 남자랑 결혼 날짜 잡았어.
- 뭐?
- 그게 다야. 나 내일 독일 가. 연주회 끝나고 돌아오면 바로 결혼할 거야. 능력 있고 집안 좋은 사람이야.
- 명우야. 왜 그래.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 나 자신 없어졌어. 나도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 그럼 행복할 거 같아?
- 평범하지 않게 살면서 행복하지 않는 것, 평범하게 살면서 행복하지 않는 것.
어차피 행복하지 않을 거라면 후자를 택하기로 했어.
- 내가.. 내가 널 행복하지 않게 했니?
- 하지만 난 내 아이를 갖고 싶어. 네 사랑만으론 견딜 수 없을 만큼.
하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한다.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을 명우는 원하고 있다.
결코 해줄 수 없는 것을.. 원한다.
-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알아.
하지만 하나를 택하면 하나를 잃게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후회 안 할 거야.
우린 더이상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던 스무살 새내기가 아니야.
우린 이십대 후반이고 나는 조금 더 안정적인 생활을 원해.
한 가정을 만들고 완전히 보호 받고 인정 받으면서 살고싶어.
내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평범하게 친구들과 가족들 얘기를 하고...
나 이제 더이상 견디기 힘들어.
나를 욕해도 좋아.
그늘진 얼굴로, 그러나 하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하는 명우는 확고해 보였다.
-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니.
하진은 떨리는 몸을 진정하려 애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안이 바짝 마른다.
명우의 입술도 파르르 떨린다.
- 나를 잊어.
하진이 눈을 치켜뜬다.
명우의 눈이 젖어있다.
너 정말 나쁘구나. 최명우. 너 정말 잔인하구나.
내가 너를 잊어? 너도 나를 잊을 거야?
최명우. 너 정말 내가 아는 명우 맞아? 이기적이구나. 너 정말..
- 그래. 잊을게. 앞으로 네 인생에 안 나타나면 되는거지? 이게 마지막인 거지?
하진의 말에 명우는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떨군 명우의 긴 목이 슬프다.
그러지 마. 넌 항상 당당하잖아. 고개를 들어.
니가 그렇게 힘들어하면 나는 어떡하니. 나를 위해서라도 고개를 들어.
- 얼굴 들어봐. 마지막이니까, 제대로 보자.
명우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이 결단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창백한 뺨이 안쓰럽다.
하진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던 명우의 눈에서 결국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 미안해..
- 다른 말 해줘.
하진은 손을 뻗어 명우의 눈물을 닦아낸다.
이제 다시는 만져보지 못할 사람이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다.
- 차라리 화를 내.
- 다른 말 해줘.
- ... 바보.
- .....
- ...... 사랑했어. ... 사랑해. 사랑해, 하진아.
- 그래, 그거면 됐어. 오늘까지만 사랑해줘.
샤워기에서 사정없이 쏟아지는 차가운 물에 한기가 느껴진다.
하진은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굳게 눌러놓았던 감정들은 한 번 터지기 시작하자 끝도 없다.
온 마음을 휘두르는 분노와 슬픔과 연민과 안타까움과 그리움.
빌어먹을.
남자였더라면. 내가 남자였더라면. 빌어먹을!
단 한 번도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한탄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진은 지금 자신의 몸이 원망스럽다.
명우가 이쁘다고 말했던 볼록한 젖가슴과 가늘게 휘어지는 허리선의 굴곡.
여체가 아름답더냐.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조차 주지 못하는 이 쓸모없는 몸뚱아리가 아름답더냐.
샤워 타월로 거칠게 몸을 문지르면서 하진은 꺽꺽 울음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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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요일 아침에 이런 글을 올리니 죄송스런 마음마저 들고마는 군요.
쓰면서 가슴이 답답.. 했습니다. (스스로 너무 몰두했나봐 -_-;)
모두 좋은 날 되어요. ^^
그들의 새벽 8
- 여어, 냄새 좋은데?
하진이 젖은 머리를 털며 식탁을 바라본다.
- 냄새만 좋다뿐이냐. 맛은 더 죽여준다. 내가 해장국은 기가 막히게 잘 끓이지. 앉아.
- 애인님 해장국 끓여다 바치느라 솜씨가 늘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하진은 식탁 의자에 걸터 앉아 숟가락을 든다.
국물을 후후 불어 맛을 보고는 맛있게 먹기 시작한다.
선주는 하진의 푹 숙인 머리통을 보면서 들키지 않게 한숨을 내쉰다.
- 그 소문이 거기까지 갔냐. 근데 진짜 나는 사겼다하면 술고래들이냐, 어째.
- 훗, 니 팔자지. 야야 맛있다, 맛있어. 김선주 너 나랑 사귈래? 나한테 시집와라. 이정도 솜씨면 합격이다.
- 이거이 미쳤나..
- 친구에서 애인으로. 좋잖아.
하진이 웃는다.
선주는 하진의 웃음에서 눈물을 본다.
- 밥이나 쳐! 먹으시지. 꿈에도 생각하기 싫다. 이쁜 꽃단장 아가씨들도 많구만.. 농담이라도 싫다, 야.
- 하핫. 하긴 나도 너는 영 재미없다. 너 미진씨랑 사귄지 얼마나 됐지?
- 음.. 100일 좀 지났지, 아마?
- 한창 좋을 때군?
- 큿, 그러냐?
선주도 숟가락을 들어 하진의 식장단을 맞춘다.
못 본 사이 많이 여윈 하진이다.
맛있는 척 꾸역꾸역 먹어주는 하진이 안쓰럽다.
- 그런데 선주야.
- 뭐.
- 우리 커플 여행 가기로 했던 거 못가게 돼서 미안하다.
그렇게 5년 동안 너 애인 생기면 커플 여행 가자고 별렀었는데
꼭 스케쥴이 안 맞거나, 니가 애인이 없거나, 명우랑 내가 싸우거나 했잖냐.
결국은 이렇게 됐네.
- ....
- 어.. 국물 시원하다, 야.
하진은 숟가락 가득 흰 쌀밥을 퍼서 입으로 밀어넣는다.
적막 속에서 그릇에 수저 부딪히는 소리만 울린다.
선주는 뜨겁지도 않은데 일부러 후후 소리를 내어 국을 떠먹고 크게 쩝쩝 소리를 내본다.
그럴수록 밥이 목에 걸리는 것 같다.
선주는 문득 베란다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헛기침을 한다.
- 근데 너 이상한 여자랑 이웃사촌이더라?
- 이웃사촌?
하진이 의아한 눈으로 묻는다.
- 기억 안 나지, 어제?
- 어.. 너랑 술 마신 거 말고는 기억 안 나는데. 어제 엄청 퍼마셨나보다.
- 너 어제 난리도 아니었어, 임마.
니가 자살하고 싶어질까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너희 집 몰라서 헤매는데 어떤 여자가 이웃사촌이라면서 등장해서 집 가르쳐주던데?
- 아, 달밤에 체조?
- 뭐?
- 훗. 그런 게 있어. 맞은편 집에 사는 아가씨 말하는 거 맞지?
- 친하냐?
- 아니. 전에 어쩌다 만나서 얘기 좀 한 거 말고는?
- 내 그럴 줄 알았어. 근데 언니언니 하면서 너한테 어찌나 친한 척을 하는지.
- 하하, 그래? 붙임성이 대단하긴 하더라고.
인터폰이 울린다.
일어나려는 하진에게 선주가 손짓을 하며 걸어간다.
- 누구세요?
- 저예요, 이웃사촌.
인터폰에서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하진의 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서현은 꼴깍 침을 삼키며 손에 쥔 가방을 내민다.
- 언니 없어요? 어제 제가 언니 가방을 들고 가버려서요.
- 아, 그랬군요.
선주가 하진의 가방을 받아든다.
- 하진아, 친절한 이.웃.사.촌. 오셨다. 그만 먹고 나와보지?
속이 받아주지 않아서 먹기 힘든 차에 잘 됐다고 생각하며
하진은 컵을 들어 물 한모금을 마시고 식탁에서 일어난다.
- 아.. 고마워요. 가방 잃어버린 줄도 몰랐네요.
하진이 선주의 옆에 서며 인사한다.
두 여자 앞에 서있는 서현은 난쟁이가 된 기분이다.
자신의 키가 보통쯤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두 여자가 지나치게 크다.
특히, 선주는 하진보다 크고 다부진 체구라 내려다보는 큰 눈이 위압적이기까지 하다.
- 언니, 우리 다음에 만나면 말 놓기로 했잖아요.
어젠 말 놓으시더니 왜 지금은 또 높임말이에요?
- 어제 제가 그랬던가요.
- 네. 너 목소리 너무 커! 그랬잖아요.
- 어제는 실례가 많았군요.
하진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두어번 문지르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 실례는 무슨. 이.웃.사.촌.끼리 뭐 그정도 가지고.
선주가 비꼬듯이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지만 하진은 영 편하지 않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괜찮아요. 언니도 전에 저 도와준 적 있으니 우리 비긴거죠?
서현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하진도 예의상 웃어준다.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가줬으면 좋겠다.
더이상 잘 모르는 사람과 말 섞을 컨디션이 아니다.
- 볼 일 다 봤음 그만 가슈.
서현은 선주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 저는 한서현이에요, 하진 언니.
- 아.. 네.
- 난 김선주.
선주의 말은 아랑곳 않고 서현의 눈은 하진을 향한다.
- 말 안 놓을 거예요?
귀찮은 꼬맹이.
몇 살쯤 되었을까.
스물? 스물 하나?
- 그래, 서현아. 고맙다.
- 네, 그럼.
서현이 인사를 꾸벅하는데 꼬르르르르륵 소리가 천둥번개처럼 울린다.
- 으하하하하. 이거 이웃사촌씨 배에서 난 소리지?
선주가 호들갑을 떤다.
서현은 인사를 하다말고 허리를 굽힌 채로 귀까지 벌겋게 되어 엉거주춤하게 서있다.
하진은 그런 서현을 보니 웃지 않을 수 없다.
- 이거, 내가 실례했네.
가방 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현관에 세워놓고 그냥 돌려보낼 뻔 했잖아.
아침 안 먹었으면 들어와서 먹고 가지.
하진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서현은 천천히 허리를 편다.
- 하, 하, 아침 먹었어요. 배고파서가 아니라 소화되는 소리라고나 할까. 하하.. 저 이만 가볼게요.
여유있게 말을 끝마친 뒤 후다다다닥 뛰어나가는 서현의 등 뒤로 선주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 너 저 친구한테 밉보인 거 있어? 너 아주 무시당하던데?
서현이 나가고 난 뒤 하진은 대충 닫힌 문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 어제 좀 싸웠거든.
선주는 재밌다는 듯 여전히 웃음을 흘린다.
-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너 너무 오버하는 거 같은데?
- 나를 도발한다니까, 네 이웃사촌. 푸흐..
하진은 손을 뻗어 선주의 머리카락을 휘휘 흐트리고는 베란다 쪽으로 걸어간다.
밥 먹여서 보낼 걸 그랬네.
옥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옥탑방이 휑하게 여겨져 하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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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하진이 서현의 이름을 알게됐군요. 후훗
서술식 스토리 위주라기보단 해프닝 위주의 글들이라
더디게 흐르는 것 같죠? ^^
별 진전 없어보이는 (그래도 진전하고 있어요;;) 내용
꾹 참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어요.
그들의 새벽 9
푸른 조명 아래서 담배 연기가 뿌옇게 춤을 춘다.
느릿느릿 끈적한 음악이 흐르는 바의 한 귀퉁이에 앉은 하진은 천천히 맥주를 들이킨다.
발 넓고 사교적인 선주가 친구나 애인을 소개시켜 줄 때를 제외하고는 이반 바에 잘 오지 않는다.
자유로운 스킨쉽이 큰 구경거리가 되지 않는 곳이라서 명우와 단 둘이 가끔 들리기도 했었다.
혼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진은 자신을 향해 조소를 보낸다.
내가 여기에 뭘 하러 온 걸까.
명우와 헤어졌다는 사실이 서서히 피부로 다가오면서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다.
8년동안 자신의 옆을 지켜 준 사람.
당연히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
그러나 예고도 없이 준비 기간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사람.
원망을 하기에는 너무 사랑하는 사람.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만가지의 감정에 휘둘린다.
나 이렇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던가?
견딜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감당할 수 없는 막막함을 어찌하란 말인가.
기다린다는 말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도 할 수 없는 상황.
믿어지지 않는 상황.
모든 것은 끝났다.
그러나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보고 싶다. 명우가 보고 싶다.
너도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거니?
- 혼자 오셨어요?
약간의 비음이 섞인 여자 목소리에 하진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화려한 꽃무늬가 프린트 된 스판 블루진과
어깨가 넓게 파인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병맥주를 손에 든 채 하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 저 앉아도 되죠?
하진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이미 앞자리에 앉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통속적인 말로 섹시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여자다.
하진이 여전히 말이 없는데도 어색하지 않은지 하진을 향해 웃어보이기까지 한다.
- 아까부터 보고 있었거든요. 셔츠가 잘 어울려서요.
뭐랄까, 날카로운 하얀 셔츠 깃과 닮아있는 눈매? 후훗.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계시는지도 궁금하고.
여자는 길게 웨이브진 와인빛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몇 번 빗어내리며 말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지금 이 기분은 뭘까?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기분?
낯선 사람에 대한 거부감?
혼자의 공간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것에 대한 경계?
- 아.. 혼자만의 시간을 제가 염치없이 방해한 건가요? 그만 일어날게요. 미안해요.
여자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진에게 마음이 상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가 하진의 곁을 스치고 지난다.
하진은 여자의 손목을 잡는다.
- 아?
여자는 놀란 듯 하진을 돌아본다.
하진이 여자를 끌어당기자 여자는 넘어지듯 하진의 품에 안긴다.
여자는 갑작스런 포옹임에도 부드럽게 하진의 어깨를 감싼다.
여자가 하진의 곁을 스치고 지날 때 명우가 자주 쓰던 향수냄새가 났다.
하진은 깨닫는다.
여자를 향한 감정은 경계도 낯설음도 귀찮음도 아니다.
지독한 외로움이다.
명우가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외로움.
온몸으로 와닿는 그 텅빈 느낌.
여자가 앞에 앉는 순간 하진은 지독한 외로움을 느껴버린 것이다.
그 감정 자체가 너무 뚜렷하게 온 몸의 감각 속으로 파고들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자가 하진의 뺨에 두 손을 갖다대고 어루만진다.
여자가 눈을 가늘게 감고 다가온다.
하진은 혼란스럽다.
- 이름이 뭐죠?
하진에게 키스를 하려던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며 하진에게서 밀착되어 있던 몸을 조금 띄운다.
여자의 기다란 인조 속눈썹이 불빛에 반짝인다.
- 이름 같은 건 상관 없잖아요?
- 아, 그렇군요. 상관 없..
하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여자의 부드러운 혀가 하진의 입술 사이로 파고든다.
맥주와 담배향이 뒤섞인 타액이 하진의 입속을 헤집는다.
하진은 정신이 혼몽해짐을 느끼며 여자의 관능적인 혀놀림을 따라 혀를 움직인다.
*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여관 창으로 흘러들어 침대를 적신다.
물방울이 창에 닿는 둔탁하고도 맑은 소리가 들린다.
둔탁하고도 맑은 소리..?
하진은 빗방울이 대지를 적시는 소리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돌린다.
엎드린 채 눈을 감는다.
- 하...
여자가 나즈막히 한숨을 내뱉으며 하진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여자는 팔을 뻗어 하진의 등을 쓰다듬는다.
땀에 젖은 축축하고 차가운 팔의 감촉을 느끼며 하진은 눈을 뜬다.
- 당신, 굉장한데?
여자가 속삭인다.
- 비가 내리는 모양이야.
하진의 대답에 여자는 피식 웃는다.
- 당신 마음에 들어. 키, 외모, 매너.. 그만하면 수준급.
성격은 잘 모르겠지만 쿨한 거 같고. 게다가 힘도 기술도 좋으니 말야. 후훗!
-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편안해져. 양수 속에서 잠자는 것처럼.
하진은 다시 눈을 감는다.
여자가 몸을 움직여 하진에게 몸을 꼭 붙이고 등을 팔로 감싸안는다.
여자의 탄력있는 젖가슴이 등에 닿는다.
- 당신, 이름이 뭐야?
-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잖아.
- 난 이제 상관 있어졌는걸?
- 난 두시간 전에 그런 건 상관 없다는 걸 알아버렸어.
여자는 재밌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는다.
- 겁내지 마. 사귀자고 할까봐? 난 자유연애주의자라구. 사랑같은 거 믿는 애송이 아니라구.
여자는 몸을 휙 돌려 침대에 바로 눕는다.
사방은 고요하다.
빗소리만 들릴 뿐이다.
여자가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든다.
- 당신 번호 입력해도 돼?
하진은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는 하진의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찾아내어 자신의 핸드폰에 입력한다.
- 에게? 입력 돼 있는 전화번호가 하나도 없네?
하진의 핸드폰을 이리저리 눌러보던 여자가 작게 속삭였다.
-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가?
- 음, 글쎄.. 익숙한 편..인 거 같은데.
여자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하진이 몸을 일으킨다.
- 왜, 가려구?
대답 없이 침대에서 내려가 팬티를 입는 하진을 여자는 가만히 지켜본다.
길고 단단해 보이는 골격.
가늘고 약간은 넓은 어깨.
부드럽게 솟은 가슴.
군살 없이 탄탄한 작은 엉덩이.
- 새벽 빛에 비치는 당신의 벗은 몸은.. 아름답고도 서글퍼.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든 하진은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여자를 향해 몸을 돌린다.
- 갈게.
여자는 눈을 감는다.
찰칵, 탁.
적막 속에서 빗방울 닿는 소리만 간간히 들려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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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는 것을 견디어 내는 것.
혼자라는 것을 즐기는 것.
어쨌거나 혼자라는 것이 익숙하다는 것은
때때로 진실. 때때로 거짓.
쓰다보니 긴 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담아둔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한꺼번에 쏟아내려는 욕심을 부리는 모양입니다.
여전히 현명하지 못하지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의 새벽 10
여관 앞 한 귀퉁이에서 하진은 담배 한 대를 물고 가늘게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젊은 남녀 커플이 여관 입구로 들어서다 비를 맞고 있는 하진을 힐끗 쳐다본다.
손에 쥔 담배가 빗물에 젖는다.
하진은 절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벽에 비벼끄고 쓰레기 봉투 속으로 던진다.
빗속을 걷기 시작한다.
외로운 영혼들.
하진은 위로 받았다고 생각한다.
자신 역시 그녀를 위로해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혼자 걷는 지금 공허함과 진한 외로움이 밀려든다.
명우야, 너 말고 다른 여자를 안았다.
너에게 길들여져 있던 내 몸은 그녀를 안기에 너무 낯설었어.
하지만 욕망과 사랑은 별개인 것을 오늘에서야 절실히 깨달았다.
너로인해 합일되어 있던 내 육체와 정신은 이미 오래 전에 산산히 분리되었어.
나 망가져 가는 것일까.
- 사랑같은 거 믿는 애송이 아니라구.
여자의 말을 떠올리며 하진은 훗, 웃음을 흘린다.
그래, 사랑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더군.
하진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저장번호 목록을 확인한다.
<02 민혜연>
여자는 1번을 비워두고 2번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시켜뒀다.
하진은 여자의 번호를 지운다.
여자도 자신에게 전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 하진은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택시를 잡는다.
*
새벽 세시를 넘긴 시간.
하진은 뜨거운 커피를 머그컵에 가득 담고 베란다로 나갔다.
비 그친 뒤의 새벽 공기는 청량하다.
맞은편 옥상에서 긴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서현이 손전등을 하늘로 향한 채 옥상에 서있는 것이다.
하진은 두 손으로 머그컵을 쥐며 서현을 바라본다.
저 아이는 늘 잠들지 못하는 건가, 이 시간까지?
아니면 새벽마다 나쁜 꿈을 꾸고는 깨어나는 건가.
하진은 서현이 하늘로 쏘아올리는 빛줄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빛줄기가 천천히 움직인다.
그림을 그리는 건가?
우주를 향해 보내는 메시지라도 되는 건가?
하진은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다.
움직이는 빛줄기를 눈으로 따라가본다.
이윽고 그것이 반복되는 글씨라는 것을 안다.
[하진언니 안녕?]
서현이 쓰는 글씨를 읽은 하진은 약간 놀라며 서현을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언제부터 알았던 걸까.
서현이 하진의 집을 향해 깜빡깜빡 손전등의 스위치를 끄고 켠다.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하진은 재빨리 집으로 들어가 손전등을 찾아 들고온다.
하진이 손전등을 켜자 서현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하진과 서현은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빛줄기로 칼싸움을 하며 새벽의 골목길 위로 웃음을 떨어뜨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전등 싸움에 지친 두 사람은 두 개의 빛줄기가 하늘의 한 지점에서 만나도록 고정한다.
서현도 하진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하진은 천천히 손전등을 움직여 빛줄기를 아래로 내린다.
점점 넓게 퍼지는 불빛은 서현의 얼굴로 향한다.
눈이 부신지 서현이 얼굴을 찌푸리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하진이 서현에게 불빛을 고정시키고 있자 서현은 편안하게 눈을 감으며 미소짓는다.
이마가 동그랗게 이쁜 아이다.
섬세한 콧날을 가진 아이다.
웃음이 맑은 아이다.
작은 어깨를 가진 아이다.
불빛은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손도 작구나.
여위었구나.
슬리퍼를 신은 맨발.
- 안 추워?
하진이 큰 목소리로 묻자 서현은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 야호!
서현이 크게 소리친다.
하진은 서현을 보면서 웃는다.
서현이 손가락으로 손전등 불빛을 가리키고 손전등을 하늘로 향한다.
글씨를 쓸 모양이다.
[잘 자요]
하진도 답을 쓴다.
[너도]
하진이 쓴 글을 읽고 서현은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잠시 베란다에 기대어 있던 하진도 이제 침대로 향한다.
외로운 영혼들이 우주를 향해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서 새벽 하늘은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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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한 사람이 말했어요.
"그 사람을 위로해주고 싶었어. 난 그것이 위로라고 생각했어.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였으니까."
며칠 전 다른 한 사람이 저에게 말하더군요.
"비가 내려. 위로해줘."
제가 대답했죠.
"위에서 해주는 걸 좋아하는 구나? "
"흑. 안 놀아."
푸.. 문득 생각나서 -_-;;
여전히 위로하는 것에 서툰 저는... 물론 뭐든지 다 서툴지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첫댓글 하진이란 이미지 완전좋아요 ~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