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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32권
(조선 중종 25년(1530)에 이행 등이 왕명에 따라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고 개정한 인문 지리서. 55권 25책의 인본(印本).)
金海都護府(김해도호부)
東至梁山郡界四十二里南至熊川縣界四十里西至昌原府界十四里北至密陽府界四十四里距京都八百八十四里
동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42리이고 남쪽으로 웅천현(熊川縣)경계까지 40리이며, 서쪽으로 창원부(昌原府) 경계까지 44리이고 북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
建置沿革(건치연혁)
本駕洛國或稱伽倻後改金官國自始祖金首露王至仇亥至凡十世四百九十一年仇亥降于新羅法興王王待以客禮以其國爲邑號金官郡
본래 가락국(駕洛國)이다. 혹 가야(伽倻)라 하기도 하였는데 뒤에 금관국(金官國)이라 고쳤다. 시조(始祖)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부터 구해왕(仇亥王)까지 무릇 10세(10대), 4백 91년을<왕국으로 내려왔다> 구해왕이 신라에게 항복하니 법흥왕이 객으로 예대(禮待)하고 그 나라를 읍(邑)으로 만들어서 금관군이라 불렀다.
文武王置金官小京景德王改今名仍爲小京高麗太祖降爲府後又降爲臨海縣未幾陞爲郡成宗改金州安東都護府顯宗降爲防禦使
문무왕(文武王)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그대로 소경(小京)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는 부(府)로 강등시켰고 그 뒤에 또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성종(成宗)이 금주 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라 고쳤고 현종은 강등시켜서 방어사(防禦使)로 만들었다.
元宗以防禦使金晅平密城之亂又拒三別抄有功陞爲金寧都護府擢晅爲都護以鎭之忠烈王二年以殺安廉使劉顥降爲縣後陞金州牧忠宣王二年汰諸牧復爲金海府本朝因之 太宗朝改爲都護府 世祖朝置鎭
원종은 방어사 김훤(金晅)이 밀성(密城) 반란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거전(拒戰)한 공이 있다는 것으로써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하고 훤(晅)을 발탁하여 도호(都護)로 삼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2년에는 안렴사(安廉使) 유호(劉顥)를 죽였다는 것으로써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뒤에 다시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을 도태(淘汰)하면서, 다시 김해부(金海府)로 만들었던 것인데 본조(本朝;조선)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태종조에 도호부라 고쳤고 세조조에서 진(鎭)을 설치하였다.
屬縣(속현) 생략
鎭管(진관) 생략
官員(관원) : 府使(부사) 敎授(교수) 各一人(각1명)
郡名(군명) : 駕洛(가락) 伽倻(가야) 金官(금관) 臨海(임해) 金州(금주) 금녕(金寧) 분성(盆城)
姓氏(성씨) : 本府(본부) 金(김).許(허).裵(배).孫(손).宋(송).庾(유).鄭(정):해주에서 왔다. 맹(孟):익(益)이라 한 곳도 있다. 장양(長養)에서 왔음. 太山(태산) 전(田). 太(태)
風俗(풍속) : 생략
形勝(형승) : 생략
山川(산천) : 盆山(분산) 在府址三里鎭山 부 북쪽3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神魚山(신어산) 神一作仙在府東十里 신(神)이 선(仙)으로 된 곳도 있다.
龜旨峯(귀지봉) 在府址三里 부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後漢光武建武十八年三月駕洛九干我刀汝刀彼刀五刀留水留天神天五天神鬼等 稧飮于水濱望見龜旨峯有異氣就視之有紫繩金合而下開視有金色六卵圓如日輪奉置我我刀家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3월에, 가락의 9간(干)인 아도(我刀).여도(汝刀). 피도(彼刀). 오도(五刀). 유수(留水). 유천(留天). 신천(神天). 오천(五天). 신귀(神鬼) 등이 물가에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귀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가서 본즉 자색(紫色) 새끼로 금합(金盒)을 매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합을 열고 보니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금빛 알이 있으므로 아도의 집에 가져다 두었다.
翌日九人咸會又開視六卵剖殼爲六童子年可十五容貌甚偉衆皆拜賀童子日就岐嶷歷十餘日身長九尺衆遂奉一人爲主卽首露王也
이튿날 아홉 사람이 다 모여서 또 열어보니 알 여섯 개는 껍질이 쪼개졌고 여섯 동자로 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 쯤 되었고 용모는 매우 거룩하여, 모두 절하며 축하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나서 10 여일을 지나니 신장이 9척이나 되었다. 무리들이 드디어 한 사람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곧 수로(首露王)이었다.
生于金合因姓金氏國號伽倻新羅儒理王十八年也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東以黃山江西南以海西北以智以山東北以伽倻山爲境
금합(金盒)에서 났다하여 성을 김씨(金氏)라 하고 나라 이름을 가야라 하였는데, 신라 유리왕(儒理王) 18년 때 일이었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자 헤어져 가서 다섯 가야 임금이 되었는바, 동쪽은 황산강을, 서남쪽은 바다를, 서북쪽은 지리산을,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였다.
○首露王在位一百五十八年薨次居登次馬品次居叱彌次伊尸品次坐知次吹希次銍知次鉗知次仇亥相繼爲王有國凡四百九十一年
수로왕이 왕위에 있은지 백 58년 만에 죽고 다음은, 거등(居登). 마품(麻品). 거질미(居叱彌). 이시품(伊尸品). 좌지(坐知). 취희(吹希). 질지(銍知). 겸지(鉗知). 구해(仇亥)가 서로 잇따라 왕이 되었는데, 나라로 있은 지가 무릇, 4백 91년 이었다.
○五伽倻高靈爲大伽倻固城爲小伽倻星州爲碧珍伽倻咸安爲阿那伽倻咸昌爲古寧伽倻
5 가야는 고령(高靈)이 대가야(大伽倻), 고성(固城)이 소가야(小伽倻), 성주(星州)가 벽진가야(碧珍伽倻), 함안이 아나가야(阿那伽倻). 함창(咸昌)이 고령가야(古寧伽倻))였다.
加助山(가조산), 雲岾山(운점산), 明月山(명월산) 등 이하생략
土産(토산) 생략
城郭(성곽) 생략
關防(관방) 생략
烽燧(봉수) 생략
宮室(궁실) 客館(객관) : 전통(正統) 계해(癸亥)년에 부 공해(公廨)가 화재(火災)로 소실(燒失)되어, 부사 박눌생(朴訥生)이 중건(重建)하고 안숭선(安崇善)이 기문하였다.
新增(신증) 영추당(迎秋堂) : 서헌(西軒) 아래편에 있다.
회로당(會老堂) 在府城北 弘治辛亥邑 之父老建 부 성 북편에 있다. 홍치(弘治) 신해(辛亥;1491)년에 고을 부로(父老)들이 건립(建立)하였다.
○金堂馹孫記堂以會老名者 鄕黨父老之所會也 會之何爲 飮射讀法 無非會也
김일손(金馹孫)의 기문에, “당(堂)을 회로(會老)라 이름한 것은 향당(鄕黨) 부로(父老)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여서는 무엇하나, 향음(鄕飮)과 사어(射御). 독법(讀法)하는데 모임 아님이 없다.
堂在府城之北 前十年間 府人金順孫 因故址而建焉 自祖宗朝 建議留鄕者非一 旣設而罷 尋復而又廢
당시 부 성 북쪽에 10년 전에 부 사람 김순손(金順孫)이 옛 터에다가 건립(建立)한 것이다. 조종조(祖宗朝)부터 유향소(留鄕所)로 건설하자고 건의한 자가 한번뿐이 아니었으나 설치하였다가는 파했고, 잇따라 복구(復舊)하였다가는 또 페하였다.
飮射讀法等事 朝廷非不留意 而鄕黨無有任擧者 堂爲巋然之空舍矣
향음과 사어와 독법 등 일을 조정에서도 유의(留意)하지 않음이 아니었건마는, 향당에서 그 일을 맡은 이가 없었으므로 당은 우뚝한 빈집으로 되었을 뿐이었다.
歲己酉春 朝廷慮鄕俗之不古 特復留鄕所 立鄕正 而定令 州府五員 郡四員 縣三員 各推一邑之望 以任其責
기유년(1489) 봄에 조정에서 시골 습속이 예전 같지 않음을 염려하여, 특히 유향소를 복구하고 향정(鄕正)을 정하도록 영(令)을 정하였다. 주(州)와 부(府)에는 다섯 사람, 군에는 네 사람, 현에는 세 사람인데 각자 온 고을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추천하여 그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金海府也 前義城縣令 金先生係錦 前靑山縣監 白啓英 前引儀 裵炯 前參軍 宋叔亨 與吾從兄 進士 金伯堅 實備五員之數 皆一府之望也 鄕有公事 皆於是堂會議焉
김해는 부이다. 그러므로 전 의성현감(前義城縣監) 김 계금(金係錦)선생, 전 청산현감(前靑山縣監) 백계영(白啓英), 전 인의(前引儀) 배형(裵炯), 전 참군(前參軍) 송숙형(宋叔亨)과 나의 종형 진사(進士) 김백견(金伯堅) 등 다섯 사람의 수효에 충수되었는바. 모두 온 부에 명망있는 분이었고 고을에 공사(公事)가 있으면 모두 이 당에 모여서 논의하였다.
府故駕洛之墟 始祖首露王墓 在今西郭門之外 官禁樵木故事 父老具時羞 修祀事 旣撤 鄕人共餕 歲以爲常
부는 옛 가락국(駕洛國)의 유허(遺墟)이다. 그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묘(墓)가 지금 성 서문 밖에 있으며, 관(官)에서 나무하는 것을 금단한다. 옛부터 부로들이 제수(祭需)를 갖추어서 제사하며, 철상(撤床)하면 고을 사람이 함께 음복(飮福)하는 것을 해마다 상례(常例)로 한다.
予金海人也 先世相傳 以爲系出首露 而遠不可詳 每過陵下 嫌於郭崇韜之拜子儀 而不敢自附然 猶隨鄕人之後列 陳俎豆
나도 김해가 본관이다. 선대(先代)부터 서로 전하는 말에, 우리 집 세계(世系)는 수로왕에서 나왔다 하나, 옛일이 아득하여 밝힐 수 없다. 매냥 능(陵) 앞을 지나도, 곽숭도(郭崇韜)가 자의(子儀)에게 배례(拜禮)하던 일[1]처럼 혐의스러워서, 감히 스스로 붙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사 때는> 고을 사람의 뒤를 따라 조두(俎豆;제물 담는 그롯)를 진설(陳設)하였다.
[1] 곽숭도(郭崇韜)는 중국 오대(五代) 때의 후당(後唐)의 재상이었다.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사람인데, 당나라의 유명한 곽자의(郭子儀)를 그의 조상이라고 자칭하고, 그의 무덤에 절하였다 하여 모든 사람들의 비웃었다고 한다.
去年冬 予自道州田墅而來 適値鄕人祭餕之日 大會於是堂 余趍拜父老於堂下 金先生迎謂予曰 此吾鄕人之俗也 相因已久 不奈有妨於故儀乎
거년(1490) 겨울에 내가 도주(道州;지금의 경상북도 청도) 농막(農幕)에서 오니, 마침 고을 사람이 능에 제사한 뒤에 음복하는 중이어서 이 당에 크게 모여 있었다. 내가 당 아래에서 막로에게 배례하였더니, 김선생이 나를 맞이하며 말하기를, “이 일은 우리 고을 사람의 풍속이다. 전해 온 지도 이미 오래이나 옛 도리[義]에 거리낌은 없는가.” 하였다.
予對曰 何妨 自古 帝王有功德者 絶世之後 其土民 莫不立祠 雜出於傳記 如堯舜大禹廟尙矣 後世漢之高祖 光武 蜀先主 皆有廟 齋民有祈焉 有告焉 得以祀之 雖不應經文 而邦人所以懷不盡之思 起千載之敬 在所不禁也
내 대답하기를, “무슨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옛부터 제왕으로서, 공덕 있는 분에게는 세대가 끊어진 뒤에도 그 지방 백성이 사당을 세우지 않은 적이 없었는 바, 전기(傳記)에도 가끔 발견됩니다. 요순(堯舜)과 대우(大禹)같은 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후세로서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광무(光武), 촉(漢)나라 선주(先主)도 모두 사당(祠堂)이 있어서, 백성이 기구(祈求)할 일이 있으면 제사하였습니다. 비록 경문(經文)에는 합하지 못하나, 나라 사람이 다함 없는 사모(思慕)를 품고 천재(千載)에 공경심을 일으키는 것은 금단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嘗考首露王 於後漢建武十八年開國 傳四百年十一世 至末王仇亥 降入新羅 國除 至今千有餘年 王跡熄矣 餘澤渴矣 鄕人猶薦飶芬不怠者 盖首露吾鄕生民之始王 追而報之 不容己者 此固吾鄕之善俗 宜吾鄕之世守也
일찌기 수로왕에 대한 문적을 상고하니,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A.D. 42)에 개국(開國)하여 4백 년, 11세를 전해 왔고, 끝의 임금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 판도(版圖)에 들어간지, 지금 천여 년입니다. 왕국의 자취도 사라졌고 남긴 흔적도 없어졌건만, 고을 사람이 오히려 향기로운 제물을 바쳐서 태만하지 않는 것은, 대개 수로왕이 우리 고을 백성의 처음 임금이었으므로, 추모하여 보답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진실로 우리 고을의 좋은 풍속이니, 우리 고을에서 대를 이어가며 지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先生曰善 國家復留鄕 欲善鄕俗 子以此爲吾鄕之善俗 則此會也 於此堂爲有光矣 吾旣以會老名 子當記之
선생은, ‘좋다 국가에서 유향소를 복설(復設)한 것은 고을 풍속을 착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이미 회로(會老)로써 이름 했으니 자네가 기문(記文)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予起而復曰 今日會此堂者 皆父兄宗族而匪他 其所以講睦者 宜無不至 第一鄕必有一鄕之俗 而鄕俗因循 有善有不善者 其善者 雖不出於國家之典 而不可去 其惡者 雖自來舊習 而決不可存 率一鄕之子弟 化於善 戒於惡 非父老之責乎
내가 일어나서 답하기를, ‘오늘 이 당에 모인 사람은 모두 부형(父兄)과 종족(宗族)이고 딴 분이 아니니, 그 화목하기를 강구하는 바가 지극할 것입니다. 착한 것은 비록 국가 전례(典例)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버릴 수 없으며, 나쁜 것은 비록 전래(傳來)하는 습속이라 하더라도 결단코 남겨 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고을 자제를 거느려서 착하도록 변화시키고, 나쁜 것은 경계하는 것이 부로(父老)책임이 아니겠습니까.
今留鄕 卽古之鄕大夫 三物八刑 所以敎而糾者 自有其事 其或父而不父 子而不子 兄而不兄 弟而不弟 夫而不夫 婦而不婦 不睦者 不姻者 下訐上者 吏漁民者 皆在所察 提撕焉 警覺焉 其甚者 告于有司 驅一鄕之善
지금 유향소는 곧 옛날 향대부(鄕大夫)입니다. 삼물(三物)과 팔형(八刑)[2]으로 가르치고 규찰(糾察)하는 것은 제대로 조건이 있습니다. 혹 아비가 아비 구실 아니하고 자식이 자식도리를 아니하며, 형이 형 구실 아니하고, 아우가 아우 도리를 아니하며, 남편으로서 남편 노릇을 아니하고 아내로서 아내 도리를 아니하는 자나, 화목하지 않은 자,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을 거스리는 자, 아전으로서 백성을 침어(侵魚)하는 자는 모두 규찰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르쳐 인도하고 깨우쳐 깨닫게 할 것이며, 심한 자는 유사(有司)에게 고발(告發)할 것입니다.
[2] 옛날 주(周)나라에서는 시골에서 세 가지 도의, 즉 도의 근본이 되는 지덕(至德), 행실의 근본이 되는 (孝德), 악(惡)과 역(逆)을 알 수 있는 민덕(敏德)을 고유의 근본으로 삼고, 죄를 다스리는 법(法) 여덟가지, 즉 불효(不孝)의 형, 불목(不睦)의 형, 불연(不연;여자로서 동서끼리 불화한 것) 의 형, 부제(不悌)의 형, 불휼(不恤)의 형, 조언(造言)의 형, 난민(亂民)의 형 등이다.
反吾鄕於樸散之後熙 熙爲首露氏淳厖之俗 然後 還就此堂 把一盃酌 太平之春 則非徒一鄕之幸 乃國家之幸也
그리하여 온 고을을 착한 데로 몰아가서, 우리 고을을 질박하고 산만한 데에서 돌이킨 다음이라야 화락하여져서, 수로왕 시대의 순후(醇厚)한 풍속으로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 당에 돌아와서 잔을 잡고 태평춘(太平春;술이름)을 잔질한다면 한 갓 한 고을의 다행일 뿐 아니라, 국가의 다행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前府使 李公蓀 曾充墓田之資 今府使 金公義亨 又得吾鄕之人 凡所以善吾俗者 父老方屬望焉
전 부사 이공손(李公孫)이 일찌기 묘전(墓田)의 밑천을 충당하고, 지금 부사 김공 의형(義亨)도 또한 우리 고을 사람이므로, 우리 고을 습속을 착하게 하는 데에 부로들이 바야흐로 촉망한다.
先是 金兄伯堅 營齋室五架於堂之西夾 有田以供祭用 有室以致其齋敬 而將之以黍稷 首露能不享乎 祭而飮 父老能無樂乎 白首他年 吾亦爲此堂之老矣
이 때 보다 먼저, 김형 백견(伯堅)이 재실(齋室) 5간을 당 서쪽 곁에다 지었다. 밭이 있어서 제용(祭用)에 이바지하고, 집이 있어서 재계(齋戒)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직(黍稷;제물)을 받드니 수로왕이 흠향(歆饗)하지 않으랴. 제사하고 마시니 부로도 즐김이 어찌 없으랴. 후년에 머리 희어지면 나도 또한 이 당 늙은이가 되리라.
遂作延神歌 以與父老 歌曰 紫纓墮地兮 垂統綿綿 九宇無主兮 有隕自天 海上定鼎兮 垂四百年 編戶居民曰 晜雲遠孫 歲時報事兮 父老駿奔 神鴉啼散兮 古木荒原 邊豆靜嘉兮 黍稷其芬 簫鼓鳴兮 不見不聞 神之來兮 如雲醉飽洋洋兮 何不福我元元 我民受賜兮 於以樂康 鶴髮鬖鬖兮 鳩杖鏘鏘 歌舞年年兮 其永無疆
드디어 신(神)을 맞이하는 노래를 지어서 부로(父老)가 함께 노래하였다. 자색(紫色) 끈이 땅에 드리워서, 왕통(王統)을 전해온 것이 면면(綿綿)하였다. 세상[九宇]에 임금 없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다. 바닷가에 도읍 정하여 4 백 년을 내려왔네. 호적(戶籍)에 편입된 주민(住民)은 곤손(昆孫;적파자손)이요, 운손(雲孫;여러 자손). 해마다 그 때에 제사하여 부로가 바삐 움직인다. 고목(古木) 거친 두덕에 신(神)의 가마귀 흩어진다. 반두(邊豆;제기)가 정결하고 서직(黍稷;제물)이 향기롭다. 피리 소리 북소리 울리건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신(神0이 구름처럼 오니, 취하고 배불리 만족하다. 우리 백성에게 어이 복주지 않으리. 우리 백성은 내리심 받자와 즐기고 또 편하다. 흰 머리털이 너풀너풀하며 구장(鳩杖)[3] 소리가 쟁쟁하다. 해마다 노래하며 춤추어서 한없이 영원하리라.” 하였다.
[3]옛날에는 나이 60이 되어야 자기 지골에서 지팡이를 짚을 수 있다. 그 지팡이 머리에 비둘기를 새겨서 다는데 비둘기는 음식한 것을 잘 소화시킨다 하여, 그 늙은 분도 소화 잘하라는 뜻이다. 비둘기를 새겼다 하여 구장(鳩杖)이라 한다.
樓亭(누정)
燕子樓(연자루) : 在虎溪上 호계(虎溪) 위에 있다.
○朱悅詩 鷰子樓亡閱幾春碧紗朱玉已成塵 虎溪鳴咽何時盡 雲散千年不見人
주열(朱悅)의 시에, “연자루 없어진 지 몇해나 되었나. 푸른 사창(紗窓), 붉은 난간이 벌써 티끌 되었네, 호계의 울어예는 물소리 어느 때에 다하리, 구름 흩어진지 천년이라 사람 못 보겠네.” 하였다.
○高麗金德培詩 來管盆城二十春 當時父老半成塵 自從書記爲元帥 屈指如余有幾人
고려 김득배(金得培)의 시에, “와서 분성(盆城)을 맡았던 것도 20년 전이었다. 그 때 부로들이 반수는 진토(塵土) 되었네. 서기(書記)로부터, 원수(元帥)되었으니, 손꼽아 보아도 나같은 이, 몇이나 되리.” 하였다.
○王康詩 伽倻勝事幾經春 寂寞金徽掩索塵 只有招賢臺上月 淸光猶照古今人
왕강(王康)의 시에, 가야국(伽倻國 ) 훌륭하던 일 몇 봄이나 지났나. 금휘(金徽琴;거문고)가 적막한데, 뽀얀 먼지만 덮였다. 초현대(招賢臺) 위엔 다만 달 있어, 깨끗한 빛이 아직도 고금(古今)을 비친다.”하였다.
○鄭夢周詩 訪古伽倻草色春 興亡幾變海爲塵 當時膓斷留詩客 自心淸如水人
首露陵前草色靑 招仙臺下海波明 春風編入流亡戶 開盡梅花慰客情
정몽주의 시에, “옛가야 찾아오니 풀빛 푸른 봄이다. 흥망(興亡)이 몇 번 변해 바다가 진토되었나, 당시에 애끊으며 시 남긴 객은, 본래부터 깨끗한 맘이 물 같은 사람이었네,
指言朱悅忠烈王賞曰悅態醜如思心淸如水
충렬왕이 일찌기 주열(朱悅)을 가리키면서, ‘열이 모양은 귀신같이 추하여도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다.’ 하였다.” 했다.
○七點山前霧靄橫 三叉浦口綠波明 春風二月金州客 正似江南路上行
“칠점산(七點山) 앞에 저녁 노을이 비쳤네. 세 갈래 나루터엔 물결이 푸르구나. 봄 2월 바람 부는데 금주(金州) 길손은 바로 강남(江南) 길을 가는 듯 하다.”
○燕子樓前燕子回 郎君一去不重來 當時手種梅花樹 爲問東風幾度開
“연자루(燕子樓) 앞에 연자(燕子)는 돌아왔는데, 낭관(郎官)은 한번 거더니 다시 안 오며, 그때 손수 심은 매화나무는 몇 차례나 동녘 바람에 꽃 피었던가.”
○李行詩 行到盆城又一春 家家脩竹渟無塵 題詩爲問招賢客 羽扇輪巾幾箇人
이행(李行)의 시에, “길손의 걸음 분성(盆城)에 오니 또 봄이로구나. 집마다 대나무 깨끗하여 티끌이 없네. 시(詩)를 적어 묻노라. 초현대(招賢臺)의 객이여, 우선(羽扇) 잡고 윤건(輪巾) 쓴 이 몇 사람이던가.”하였다.
○駕洛遺墟見幾春 首王文物亦隨塵 可憐燕子如懷古 來傍高樓喚主人
맹사성(孟思誠)의 시에, “가락국 빈 터에서 몇 해 봄을 보았던가. 수로왕 문물(文物)도 티끌뿐일세. 가련한 제비는 옛 일을 생각하는 듯, 다락집 곁에 와서 주인을 부른다.” 하였다.
이하 신증(新增) 생략
淸心樓(청심누) : 남관(南館) 동쪽에 있으며 호계를 걸쳐서 지어져 있다.
梅筠閣(매균각) : 동헌 북쪽에 있다. 지금은 임금당(臨錦堂) 동쪽에 옮겨다 지었다.
新增(신증) 臨錦堂(임금당) : 新增(신증)金馹孫記虎溪之水出自盆山飛鳴㶁㶁流入北郭經婆娑塔縱一城通南郭朝宗于海其淺僅流束蒲而盛旱不渴盖有源之活水也
김일손의 기문에, “호계 물이 분산에서 나오는데 흐르는 소리가 콸콸거린다. 북곽(北郭)으로 흘러 들어서 파사탑(婆娑塔)을 지나며, 옹 성(城)을 질어서, 남곽을 통해 바다에 들어간다. 물이 얕아서 겨우 부들풀[束蒲] 따위를 흘러 보낼 정도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바, 대개 근원이 있는 새 물[活水]이다.
在城中左右堰石以障其溪流空其中而上構高樓曰燕子然樓高而溪潺不相稱也
성 안에는 물 좌우에 돌로 둑을 쌓아서 넘쳐 흐르는 것을 막았다. 그 위에다가 높은 다락집을 지었는데 연자루(燕子樓)라 하고 한다. 그러나 다락집은 높은데 시내는 졸졸 흐르는 물이라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又其下五十步許構一樓曰淸心樓稍低而溪稍渟水聲可及於客枕與水頗宜然未盡其勝 予常爲造物恨
또 그 아래쪽 50보쯤 되는 곳에 한 누(樓)를 지은 것은 청심루(淸心樓)라 한다. 이 누는 조금 낮고 시냇물도 조금 고여서 물소리가 객의 자리에까지 둘려오는 바, 물과 함께 제법 알맞다. 그러나 그 훌륭함을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항상, 조물(造物)을 위해 한스러워하였다.
弘治癸丑春予奉綸音頒諭到府時府使丹陽禹公某館予於新堂堂在燕子淸心之間扁曰臨錦吾友月城李侯宗準所名而書者也
홍치(弘治) 계축(癸丑1493)년에 내가 윤음(綸音)을 받들어, 유지(諭旨)를 반포(頒布)하면서 부에 오니, 그때 부사 단양(丹陽) 우공(禹公) 모(某)가 나를 새 당(堂)에 머무르게 하였다. 당은 연자루와 청심루 사이에 있으며, 임금(臨錦)이라 현판하였는데 나의 벗 월성(月城) 이 종준(李宗準)후가 명명(命名)하고 현판 쓴 것이었다.
予不鮮所名之義宋隆德故宮有臨錦堂元儒有臨錦堂前春水波之句豈非以其波紋如錦堂臨其上而名耶 觀其中流架屋不樓而爽東西有廂溫凉異適曲曲欄干枚枚窓戶玲瓏宛轉
나는 당 이름을 임금이라 한 뜻을 모르거니와, 송(宋)나라 융덕(隆德) 고궁(故宮)에 임금당이란 것이 있었고, “임금당 앞에 봄 물이 물결친다.” 라는 원(元)나라 유사(儒士)의 시구(詩句)가 있는 바, 물 무늬가 비단 같은데 당이 그 위에 임했다는 것으로써 이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 중류에다가 집을 지어서 다락집이 아니라도 시원하고, 동쪽․서쪽에 행랑이 있어, 따스하고 서늘한 것이 알맞게 되어 있다. 굽이굽이 난간이고 곳곳이 창호(窓戶)인데, 영롱(玲瓏)하고 완전(宛轉)하다.
檻下溪流可俯而手掬溪與堂明媚相照 又羅天鵝海鷗數雙而游其波其鳴雝雝聲應棟宇驅而出之始覺其在吾坐下最奇事也
헌함 아래 시냇물은 엎드리면 손으로 움킬 만하며, 시내와 당의 밝고 고움이 서로 비친다. 또 거위와 갈매기 두어 쌍을 물 위에 놀게 하여, 울음이 옹옹(雝雝)하며 소리가 집을 울린다. 그것들을 몰아내니, 비로소 내가 앉았는 자리 밑에 가장 기이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取琴而彈之空聲相應淸和踈越大絃洞洞然益壯小絃鏗鏗然益楚又堂中第一奇也
거문고를 퉁기니 공중(空中)과 소리가 서로 응하여 맑고 화하며 멀리 전해진다. 큰 줄은 퉁퉁하여 더욱 웅장하고, 작은 줄은 갱갱하여 더욱 높은데 또한 이 당의 제일 기이한 것이라.
酒半禹公囑予記予執觴而落之仍報公曰天壤間凡物必有與物相稱不得稱則不得造物之情矣 如草堂茅廬宜於處士而廣廈金屋宜於王孫易此則不稱也
술이 반쯤 되었을 무렵에 우공(禹公)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므로, 나는 잔을 잡고 응낙(應諾)하였다. 이어 공에게 말하기를, ‘천지간에 모든 물(物)은, 물(物)과 서로 어울리는 것이 반드시 있다. 어울리지 못하면 조물의 뜻을 얻지 못한 것이다. 초당과 모옥(茅屋)같은 것은 처사(處士)에게 알맞고, 넓고 큰 집과 금으로 꾸민 집은 왕손(王孫)에게 알맞은 것으로서, 여기에 주인을 바꾸게 되면 어울리지 않는다.
漢有滕王高閣巴有岳陽危樓然後壓洞庭彭蠡之浩渺工部之堂宜於浣花柳州之家宜於愚溪隨其人與其地莫不各有所稱
홍도(洪都)에는 등왕각(滕王閣)[1]이 있었고, 파릉(巴陵)에는 악양루(岳陽樓)[2]가 있었다. 그런 다음이라야 동정(洞庭)과 팽려(彭蠡)[3]의 호묘(浩渺)한 경치와 상대할 수 있다. 두공부(杜工部)의 당은 완화계(浣花溪)[4]에 알맞았고, 유류주(柳柳州)의 집은 우계(愚溪)[5]에 적당하였는 바, 그 사람과 그 지경에 따라 각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1] 중국 강서성(江西省)은 옛날에 홍주(洪州)라 하였으므로, 그 주(州)의 수부동 남창(南昌)을 홍도(洪都)라 하였다. 거기에는 등왕각(滕王閣)이라는 집이 유명하다.
[2] 호북성 악주(岳州)의 옛 지명이 파릉이었다. 바로 동정호(洞庭湖)가에 있는데 악양루(岳陽樓)가 유명하다.
[3] 남창(南昌) 앞에 있는 파양호(鄱陽湖)의 별명이다.
[4]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에 있는 시내인데,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그 시내가에다 초당을 짓고 살았었다. 두공부는 두보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었기 때문이다.
[5] 당나라 문장인 유종원(柳宗元)이 영주(永州)로 귀양가서 우계라는 시냇가에서 살았다. 유주라 함은 그 뒤에 유종원이 유주(柳州)자사로 되었다가 죽었으므로 유주라 한다.
金海古府也 府中多少樓臺館舍沿虎溪而列者不一得禹公構臨錦之堂而始稱噫擧而措之物物皆可稱也然欲其稱非知造物情者不可也
김해는 오래 된 부이다. 부 안에 많은 누대(樓臺)와 관사(館舍) 중에 호계 가에 있는 것이 하나뿐이 아니다. 그러나 우공이 임금당을 지음으로써 비로서 어울린다. 아, 들어서 물(物)에다 두면 물(物)은 모두 어울릴 듯하다. 그러나 꼭 어울리도록 하고자 하면, 조물의 뜻을 아는 자가 아니고는 되지 않는다.
以此堂規制審禹公胸中有許多間架屋室其所以使心匠而運郢斤者其可知之矣未知公能有得於造物之情者乎 吾觀公偃然熊豹之姿
이 당의 규모(規模)로써 우공의 가슴속을 살필 적에, 허다한 계획으로 의장(意匠)을 부려서 영근(郢斤)[6]을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능히 조물의 뜻을 알았던가. 내 공을 보니 언연(偃然)한 웅표(熊豹)의 자질이다.
[6] 영근(郢斤)은 옛날에 석공으로 유명한 사람을 말한다.
早穿楊葉其有幹局有豪傑長城之望屈而爲此府亦天也 高牙大纛乃公之能事而簿書米鹽公亦無不能也 豈非隨事能稱者乎 然則公於造物之情不可謂不知也
일찍 버들잎[楊葉]을 뚫었어라.[7] 재간과 기국(器局)의 장성(長城)같은 기망(期望)이 있었는데, 원통하게도 이 부를 맡았음은 또한 천수(天數)이다. 높은 아문(衙門)에 큰 깃발을 세우는 것은 공의 능사(能事)이려니와, 쌀, 소금 따위 문서를 살피는 것도 공은 능하지 않음이 없다. 어찌 일에 따라 알맞은 이가 아닌가. 그런즉, 공이 조물의 뜻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7]백보(百步)밖의 버들잎을 활로 쏘아서 뚫었다는 말은 무과(武科)에 급제했다는 말로 쓴 것이다.
公其更勵素節毋怠公之宅在漢都王城迎秋門外昭敬殿右斯文趙伯符嘗僦居而停焉
공은 다시 본래의 절조(節操)에 힘써 게으름이 없게 하라. 공의 제택(第宅)이 한양[漢都王城] 영추문(迎秋門) 바깥 소경전(昭敬殿)[8] 바른 편에 있는데, 사문(斯文) 조백부(趙伯符)가 집을 빌어서 살고 있었다.
[8]소경전昭敬殿; 성종5년(1474)에 승하한 성종 비인 공혜(恭惠)왕후 혼전(魂殿)을 말한다.
予於前年訪趙而造其泉石甚勝而苐舍甚隘蕭然若處士之家心知公於泉石癖而産業疏也 今日來觀又知公泉石雖癖而所在如一治苐有制於公私也
내가 전년(前年)에 조사문(趙斯文)을 찾아 갔더니, 천석(泉石)은 매우 훌륭하였으나 가사(家舍)는 아주 비좁아서, 쓸쓸한 것이 처사의 집 같았다. 그리하여 공이 물과 돌[泉石]에 벽(癖)은 있으나 살림에는 등한(等閒)하다는 것을 짐작하였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와서 보고 또 공의 천석벽은 비록 있는 곳마다 한결같으나 집을 짓는 데에는 공(公)과 사(私)가 달랐다는 것을 알았다.
公之堂旣與虎溪稱而予筆力拙奈不足稱乎堂何然金海吾鄕也 吾先大夫與先尊府通家之好雖不稱不敢辭
공의 당이 이미 호계(虎溪)와 어울렸지마는, 나의 문장은 졸렬하여 이 당(堂)에 알맞지 못하니 어이하리. 그러나 김해는 나의 관향(貫鄕)이고 나의 선대부(先大夫)께서 선존부(先尊府)와 통가(通家)한 좋은 의(誼)가 있었으니, 비록 어울리지 않더라도 감히 사양하지 않는 바이다. 하였다
新增(신증) 涵虛亭(함허정) : 在燕子樓北府使崔潤身建引虎溪爲蓮塘築亭其中極淸灑
연자루 북쪽에 있으며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건축한 것이다. 호계 물을 끌어서 연못을 만들고 그 복판에다 정자를 지었는데 매우 조촐하고 시원하다.
○金馹孫記 金官古國也多奇跡今府使崔候强幹爲辨旣新燕子樓凡所以賁飾古國之文物者无所不用 其極直樓之北婆娑塔之南鑿方塘引虎溪之水而匯之築假島於波心以爲漸臺架屋其上摟茅而亭之橫波設略仢{亻勺}種魚種蓮羅水禽鳧鷖鵁鶄之類而對浮沉焉
김일손의 기문에, “금관(金官)은 옛 나라이다. 그러므로 기이한 자취가 많다. 지금 부사 최후(崔候)는 굳센 의지와 재간을 갖추었다. 이미 연자루(燕子樓)를 중수(重修)하였고, 옛 나라의 문물을 빛나게 꾸미는 데에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누 바로 북쪽, 사마탑 남쪽에 네모진 못을 파서, 호계 물을 끌어서 휘몰아 들게 하고, 뭇 복판에는 가짜 섬을 쌍아서 높은 축대를 만들었다. 축대 위에는 집을 지었는데, 띠[茅]를 덮은 정자와 물을 가로질러서 작은 다리를 가설하였다. 고기를 넣고 연(蓮)을 심었으며 물새 따위를 넣어서 오리, 갈매기, 따오기들이 떴다 잠겼다 한다.
以小船載妓樂中流棹歌作凌波之辭侯常邀賓客樂飮而投轄焉人視之若水仙然鏡面澄澄平凝漫皺樓觀城郭峯巒樹木日星雲物莫不倒影於其中而蘸焉
작은 배에다가 기악(妓樂)을 싣고 중류에서 뱃노래하며, 능파(凌波;뱃노리 할 때에 부르는 노래)의 노래를 짓기도 한다. 후가 항상 빈객을 맞이하여 마시기를 즐기어 유숙하게 하니, 사람들이 물 위의 신선같이 보았다. 수면(水面)이 맑아서 편평하게 엉긴 듯, 주름살이 펴진 듯, 누관(樓觀), 성곽, 봉우리, 수목, 해와 벌, 구름들이 물속에 그림자를 거꾸로 잠기지 않는 것이 없다.
其大半畝而渟滀演漾涵混大虛侯請名于左相魚公以涵虛爲命弘治戊午仲夏予旣免艱自道州來糞祖塋暫休于塋傍別墅侯就訪仍邀我入城觀所謂涵虛亭者而記之衰病殘生支離在世山冠野服江湖其適也
뭇 크기는 반 묘(半畝)이나 물이 고여서 얼렁거리며 하늘[大虛]을 잠기게 한다. 후가 좌상 (左相) 어공(魚公;世謙)에게 정자 이름을 청하여 함허(涵虛)라고 명명하였다. 흥치(弘治) 무오년(1498) 중하(仲夏)에 내가 환란(患難)을 면하고 도주(道州)에서 <본부(本府)에> 와서 조상 산소에 소분(掃糞)하면서 잠시 무덤가 별장(別莊)에 쉬고 있었다. 후가 방문하고 이어 나를 맞이하여 들어갔다. 그리하여 함허정을 보고 기문하게 하였다. 늙고 병든 목숨이 부질없이 세상에 있으니 야인(野人)의 복색(服色)으로 강호(江湖)에 노니는 것이 알맞을 뿐이다.
自以怯城市澁毫楮爲辭辭不獲則請候遙記之侯曰諾水性周流無滯而體則本虛虛故能涵物一有潢潦濁流浮苴漂梗於其流而沮其性則安能涵得如許哉 夫人之一心用則動而無窮體則靜而本虛
스스로, 성시(城市)에 출입하는 것이 겁나고 문사(文辭)가 졸하다는 것으로써 사퇴하였다. 그러나 사퇴할 수 없게 되어서는 후에게 후일에 기문 짓기를 청하니, 후가 승낙하였다. <대개> 물[水]의 본성(本性)은 두루 흘러서 정체하지 않으며 체(體)는 본래 허(虛)하다. 허한 까닭에 능히 물(物)을 잠겨 젖게 한다. <그러나> 한번 충충한 장마물과 탁한 흐름에 마른 풀과 나무토막 따위가 떠서, 그 본성을 흐리게 하면, 어찌 능히 저같이 비치게 할 수 있으랴, 대개 사람의 한마음도 용(用)은 움직여서 다함이 없고, 체(體)는 고요하여 본래 허하다.
虛故 具五德而備萬物天地日月皆吾方寸中物也 一有邪思干其方寸則失 本體之虛而喪萬事之用應乎心而達乎政莫非汚下矣
허한 까닭에 오덕(五德)과 만물(萬物)을 구비하여, 천지(天地)와 일월(日月)이 모두 나의 마음 속 물(物)이 된다. 한번이라도 간사한 생각이 마음을 범하면 본체의 허함을 잃어서 만사의 용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마음에 응하여 정사(政事)에 통하는 것이 오하(汚下)하지 않는 것이 없다.
公餘吏散群囂頓息岸巾登亭風月雙淸水涵虛耶虛涵水耶魚公之命名於是爲稱而崔侯樂之亦知其非常流也
공사(工事)하는 여가에 아전들은 헤어져가고, 온갖 시끄러움이 딱 그쳤을 적에 단단한 몸차림으로 정자에 오르면, 바람과 달이 함께 맑다. 물이 하늘을 잠겨 비치는 것인가, 하늘이 물에 잠겨 비치는 것인가, 어공께서 명명한 것이 여기에 어울리게 되며, 최후가 즐거워함도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겠다.
請侯黙坐靜觀澄其心淸其慮以求本體些小査滓不能累吾之胸次由是而天淵飛躍之妙亦可以理會喫緊矣 若夫尙淸虛文風雅務稱譽於過客則非所知也
후에게 잠자코 앉아서 고요하게 보기를 청한다. 그 마음을 맑게 그 생각을 조촐하게 하여 본체를 궁구하면, 사소한 지꺼기라도 나의 가슴 속을 능히 더럽히지 못할 것이며, 여기에서 소리개가 하늘을 날고, 고기가 못에서 뛰는 자연의 묘함[鳶飛魚躍][1]도 또한 착실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청허함을 숭상하고 풍아함을 꾸며서, 지나가는 손에게 기림 받기를 힘쓰는 따위는 알 바 아닐 것이다.
[1]연비어약(鳶飛魚躍)은 만물이 각기 그 자연의 자세에서 즐김을 형용한 것이다.
吾衰且病安能一憑水檻觀天光雲影之徘徊挹其淸而尋活水之源乎 遂書涵虛之景以歸崔侯侯名某字某某鄕人家世有分又倅鄕國義不可不書云
내가 쇠하고 또 병들었으니, 어찌 능히 수함(水檻)에 기대서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물 위에 배회(徘徊)함을 보며, 그 맑음을 잔질하면서 활수(活水;근원이 있는 물)의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2] 드디어 함허정의 경치를 적어서 최후게 돌려준다. 후의 이름은 모(某)이고 자는 모이며, 모향(某鄕) 사람이다. 집이 대대로 교분(交分)이 있으며 또 나의 고을 원이 되었으므로 의리상 적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2]물의 근원이 있어서 항상 흘러가는 것을 활수(活水)라 하는데, 여기서는 도(道)를 물에 비유하여 한 말이니, 활수의 근원을 찾는다는 것은 도의 근원을 찾는다는 말이다.
學校(학교) 생략
驛院(역원) 생략
橋梁(교량) 생략
佛宇(불우) 甘露寺(감로사) : 신어산(神魚山) 동쪽 옥지연(玉池淵)을 임해서 있다. 송(宋)나라 이종(理宗) 가희(嘉熙) 원년(元年)에 중 해안(海安)이 건립하였고, 중 몽암(夢庵)의 기문이 있다. …이하생략… 金剛寺(금강사) : 부 북쪽 대사리(大寺里)에 있다. 고려 충렬왕이 합포(合浦)에 행차할 때, 여기에 와서 놀았다. 불훼루(不毁樓)가 있다. 하륜(河崙)의 기에, “김해는 옛 가락{駕洛;가야(伽倻)}이다. 가락이 신라와 함께 일어났고, 수로왕의 태어난 일은 참으로 기이하며, 내려온 풍습이 아직도 순박한 습속이 있다. 또 등립하기에 좋은 경치도 남방에서 첫째인데, 그 중에서도 금강사(金剛寺) 작은 마루가 제일이다. …이하생략… 龜巖寺(귀암사). 十善寺(십선사). 淸凉寺(청량사) : 모두 신어산(神魚山)에 있다. 離世寺(이세사) : 신어산에 있다. 고려 곽여(郭與)의 시에, “늦은 가을 푸른 바다 천 길 물결인데, 한 잎의 조각 배 만 리 가는 사람일세. 멀리 종소리 듣고 절 찾아 와서, 잠간 풍어(風馭;바람에 날리는 돛대)를 머물러 신선 되고자 한다. 가야국 왕업은 강 물과 연했고, 수로왕 후손은 고을 백성으로 되었다. 남방 옛 도읍을 이제 이미 보았으니 조각 배 돌려, 바다와 산의 봄을 멀리 향하고 갈까나.” 하였다. 雲岾寺(운점사) : 운접산에 있다. 鎭國寺(진국사) . 明月寺(명월사) : 명월산에 있다.
祠廟(사묘) 생략
陵墓(능묘) 首露王陵(수로왕릉) : 在府西三百步 每歲春秋府中父老共會設祭 ○漢獻帝建安四年伽倻始祖首露王薨葬城北納陵傍田三十頃以充春秋祭祀之費
부 서쪽 3백 보 지점에 있다. 해마다 봄 가을에 부중(府中)의 부로들이 함께 모여서 제사지낸다, ○한(漢)나라 헌제(獻帝) 건안4년에 가야국 시조 수로왕이 승하(昇遐)하니, 성(城) 북쪽에 장사하고 능 곁에 있는 밭 30경(頃)을 받쳐서 춘추로 제사하는 비용에 충당하였다.
新羅之季將軍忠至鎭金官城有英規威勢憑藉者假威於將軍奪廟饗而致告祠堂梁折墮於英規頂遂斃焉 忠至懼畵王眞安於屋壁朝夕以祀及三日影流血淚貯於地幾一斗忠至懼而焚之
신라 말에 장군(將軍) 충지(忠至)가 금관성(金官城)을 진수(鎭守)하였다는데, 영규(英規)라는 자가 장군의 위세(威勢)를 빙자(憑藉)하고 제물을 빼앗아서 치고(致告)[1]하였더니, 사당 들보(粱)가 부러지면서 영규의 이마에 떨어져서 영규는 죽었다. 충지가 두려워하여 왕의 진영(眞影)을 그려서 사당 벽에다가 봉안(奉安)하고 조석으로 제사하였더니, 사흘이 되자 진영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에 고인 것이 거의 한 말이었다. 충지가 두려워하여 태워버렸다.
[1]치고(致告) : 말로만 고하는 것
後有群盜謂陵中必藏金銀寶器欲發塚有猛士被甲從陵中出射之中殺八人盜驚走數日復來有蟒 長三十餘尺 眼光如電 自廟旁出 咬殺九人賊皆僵仆而走
그 뒤에 여러 도둑이 있어서 능소에는 반드시 금은 보화를 감추었을 것이라 하여 무덤을 파헤치려고 하니, 갑옷 입은 용맹스러운 병사(兵士)가 능 속에서 나와서 여덟 사람을 쏘아 죽였다. <그리하여> 도둑은 놀라 달아났다. 며칠 뒤에 다시 갔더니,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 빛이 번개같은 큰 뱀이 능 곁에서 나와서 아흡 사람을 물어 죽이므로, 나머지 도둑은 엎어지면서 달아났다.
淳化二年 量田使 趙文善將以陵田減其半屬于民其夕夢神人七八操劍而至云爾有大憝故 欲斬耳文善驚覺得疾宵遁死于道傍
순화(淳化) 2년에 양전사(量田使) 조문선(趙文善)이 능 밭을 반으로 주려서 백성에게 주려하였더니 그 날 밤중에 신인(神人) 7.8명이 칼를 잡고 와서, “네가 큰 죄악이 있으므로 베어 죽이고자 한다.” 하는 것이었다. 문선은 놀라 깨어서 병을 얻어 밤에 도망하다가 길가에서 죽었다.
○高麗文宗時有知州事撰陵銘曰元胎肇啓利眼初明人倫雖誕君位未成中朝累世東國分京鷄林先定駕洛後營
고려 문종(文宗) 때에 주지사(州知事)가 능명(陵銘)을 짓기를, “원태(元胎;천지)가 비로소 열리고 이안(利眼;선악을 가리는 눈)도 처음 밝았다. 사람의 무리는 태어났으나, 임금 자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조정에서는 여러 대였으나, 동국의 갈라져 있는 서울에는 계림(鷄林)은 먼저 정하였고, 가락은 다음에 경영하였다.
自無銓宰 誰察民氓 遂玆玄造 顧彼蒼生 用授符命 特遣精靈 山中降卵 霧裏藏形 內猶漠漠 外亦冥冥 望如無象 聞乃有聲 群歌而奏 衆舞而呈 七日而後 一時所丁 風吹雲卷 空碧天靑.
제대로 맡은 이 없으니 누가 백성을 살피리. 이에 하느님[玄造]이 저 창생(蒼生)을 돌보시어, 부명(符命;명령)을 전수(傳授)하고 특히 정령(精靈)을 보내었다. 산중에다 알[卵]을 내렸으나 안개 속에 형체(形體)를 감추었다. 안쪽은 오히려 막막하여 겉도 또한 어두웠다. 바라봐도 형상 없는 듯 하나, 이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무리는 노래하며 연주하고 무리로 춤을 추어 호소했다. 이레 뒤에 한때를 만났으니 바람 불어 구름 걷혀 공중이 파랗고 하늘 푸르렀다.
下六圓卵 垂一紫纓 殊方異土 比屋連甍 觀者如堵 覩者如羹 五歸各邑 一在玆城 同時同迹 如弟如兄 實天生德 爲世作程 寶位初陟 寰區欲淸 華構徵古 土階尙平 萬機始勉 庶政施行
여섯 개 둥근 알을 내렸는데 한 가닥 자색 끈이 드리웠다. 먼 지방 딴 지역에 집이 나란히 섰고 대마루가 잇닿았는데, 보는 자가 담같이 둘러섰고 국같이 들끓었다. 다섯 사람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한 사람만이 이 성에 남았다. 같은 때, 같은 자취가 아우 같고 형 같았다. 진실로,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낳았고 세상을 위해 법을 만들었다. 보위(寶位)에 처음 오르니 천하가 청명(淸明)하였다. 화려한 구조가 옛 법에 따랐고 흙 섬돌도 오히려 편평하였다. 만 가지 일[萬機] 비로서 힘쓰니 서정(庶政)이 시행되었다.
無偏無儻 惟一惟精 行者讓路 農者讓耕 四方奠枕 萬姓迓衡 俄晞薤露 靡保椿齡 乾坤變氣 朝野痛情 金相其躅 玉振其聲 來苗不絶 薦藻惟馨 日月雖逝 規儀不傾
치우침이 없고 무리를 짓지 아니하며, 오직 한결같고 오직 정(精)하였다. 길 가는 자 서로 양보하고, 농사하는 자가 밭갈이를 사양하였다. 사방이 베개를 편히 하고 만백성이 화평하였다 .잠간 동안에 해로(薤露)[2]가 마르니 춘령(椿齡)[3]을 보전할 수 없었다. 건곤(乾坤)에 기상이 변하니 조야(朝野)에서 마음 아파하였다. 금으로 그 자취를 형상하니 옥이 그 소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묘예(苗裔;후손)는 끊어지지 않아서, 천(薦)하는 제물이 오직 향기로왔고, 세월은 갔으나 의식은 기울지 않았다.”하였다.
[2]해로(薤露) : 해(薤)는 지금의 당파라 하는 것인데, 옛날에 전횡(田橫)이라는 사람을 장사할 때에 장사행렬에 따르던 사람들이, “염교 위의 아침 이슬[薤上朝露]어찌 그리 쉬 마르나[奚以易晞]”라고 노래하였으므로, 후세에서 장송(葬送)의 노래를 해로가(薤露哥)라 한다.
[3]춘령(椿齡) : 춘(椿)은 상상의 나무로 8천년을 산다 한다.
○徐居正詩 金陵往事與誰論 千古猶存首露墳 龜旨曲亡人不見伽倻琴在妙堪聞 銅駝故里山如戟 翁仲遺墟樹以雲百六十年能享國可憐荒壟幾斜曛
서거정의 시에, “금릉(金陵) 지난 일을 누구와 함께 의논하리. 천고에 오직 수로왕의 능이 남았다. 귀지곡(龜旨曲) 없어져 사람 안 보이나, 가야금 남아 있어 묘(妙)한 소리들을 만하다. 동타(銅駝) 옛 마을에 산이 창 같고, 옹중(翁仲 )[4] 빈 터에 나무만 구름 같다. 백 60년 동안 국가를 누렸으나, 가련하다. 거친 무덤에 몇 번이나 저녁 해 비꼈던가.” 하였다.
[4]동타(銅駝)는 구리로 부어 만든 낙타인데 번화하던 서울이 난리를 당하여 다 불타버리고, 그 동타만 남았다는 고사가 있고, 옹중(翁仲)은 무덤 앞에 돌로 만든 사람이다.
許王后陵(허왕후릉) : 在龜旨山東 世傳王妃阿踰陀國王女或云南天竺國王女姓許名黃玉號普州太后邑人祭王陵時共祀
귀지산 동 쪽에 있다. 왕비는 아유타국(阿踰陀國) 왕녀라는 전설이 있고,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왕녀라 한다. 성은 허,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라 부른다. 고을 사람이 왕릉에 제사할 때에 함께 제사한다.
古跡(고적)
首露王宮(수로왕궁) : 遺墟在今府內 지금 부 안에 빈 터가 남아 있다.
望山島(망산도) : 東漢建武二十四年七月許王自后阿踰陀國渡海而至首露王命留天干望於望山島神鬼干望於乘岾見緋帆茜旗自海西南隅而指北神鬼馳奏之王於官西設幔殿候之王后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贄于山靈及至王迎入幔殿越二日同輦還闕立以爲后至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后崩壽一百五十七國人號初乘維舟處曰主浦村解綾袴處曰綾峴旗入解處曰旗出邊在主浦之左至今猶存其名
동한 건무(東漢建武) 24년 7월에 허왕후(許王后)가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바를 건너 왔다. 수로왕이 유천간(留天干)에게는 망산도에서 바라보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岾)에서 바라보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붉은 돛과 꼭두서니 빛 깃발이 바다 서남쪽에서 북쪽을 지향(指向)하는 것을 보고, 신귀(神鬼)가 달려와서 아뢰는 것이었다. 임금은 궁 서쪽에다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왕후는 배를 매고 육지에 올라, 높은 봉우리[高峰]에서 쉬며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서 산 신령에게 예물(禮物)로 받쳤다. 장막 앞에 이르자 왕이 맞아 드렸고 이틀 뒤에는 같은 연(輦)으로 궐(闕)에 돌아와서 왕후로 삼았다. 그 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3월에 후가 승하하였는데, 수(壽)가 1백 57세였다. 나라 사람이 <후가> 처음 와서 배를 대였던 곳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 벗던 곳을 능현(陵峴), 꼭두서니 빛 깃발이 들어온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하는데, 주포촌 왼쪽에 있으며 지금도 그런 명칭이 남아 있다.
왕후사(王后寺) : 舊址在長遊山首露王八代孫銍知王就幔殿合婚之地建寺名曰王后寺後罷寺爲莊
옛 터가 장유산(長遊山)에 있다. 수로왕 8대 손 질지왕(銍知王)이, <그 때에> 장막치고 합혼(合婚)하던 곳에다가 절을 세우고 왕후사라 하였는데, 뒤에 절은 파하고 장(莊)으로 만들었다.
초현대(招賢臺) : 在府東七里小山也 俗傳駕洛國居登王招七點山旵始山人旵始乘舟抱琴而來相與歡戱因以爲名王所坐蓮花石與棋局石臺今存焉
부 동쪽 7리 지점에 있으며 작은 산이다. 전설(傳說)에는 가락국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七點山) 담시산인(旵始山人)을 초청(招請)하니, 담시는 배를 타고 거문고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서로 더불어 기뻐하였으므로 그대로 이름하였다. 왕이 앉았던 연화석(蓮花石)과 바둑판 돌은 지금에도 남아 있다.
파사석탑(婆娑石塔) : 在虎溪邊凡五層色赤班其質良脆彫鏤甚奇 世傳許后自西域來時 船中載此塔 以鎭風濤
호계 가에 있으며 5층이다. 돌빛이 붉게 아롱졌으며 질은 좋으면서 약하고, 조각(彫刻)한 것이 매우 기이하다. 전설에는, 허왕후가 서역(西域)에서 올 때에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 한다.
進禮城(진례성) : 在 府西三十五里有古址新羅時以金仁匡爲進禮城諸軍事
부의 서쪽 35리 지점에 옛터가 있다. 신라 때에 김인광(金仁匡)을 진례성 제군사로 삼았다.
以下省略(이하 생략)
名宦(명환) 新羅(신라) 金仁匡(김인광) 忠至(충지) 高麗(고려) 宋彦琦(송언기) 등 이하 생략
人物(인물)
新羅(신라) 김무력(金武力) : 首露王十世孫 爲新州道摠管 嘗領兵獲百濟王
수로왕의 십세 손으로서 신주도 총관(新州道摠管)이었다.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百濟王)을 잡았다.
김서현(金舒玄) : 武力之子 官至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粱州諸軍事
무력의 아들이다. 벼슬이 소판 대량주 도독 안무 대량주 제군사(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粱州諸軍事)에 이르렀다.
김유신(金庾信) : 舒玄之子 舒玄嘗爲萬弩郡太守 庚辰之夜夢熒惑鎭二星降於己妻萬明亦夢見童子衣金甲乘雲入堂中尋而有娠二十月而生是眞平王建福十二年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舒玄謂夫人日吾以庚辰夜吉夢得此兒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今庚與庾字相似辰與信聲相近盍以命之遂名庾信庾信焉
서현의 아들이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萬弩郡太守)로 있었는데, 경진일(庚辰日) 밤 꿈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제몸에 내려왔다. 아내 만명(萬明)도 금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당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 아기를 배었다. 20개 월 만에 낳으니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이고,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일이었다. 서현이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 밤 길몽(吉夢)으로서 이 아이를 얻었으니, 이것으로 이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예(禮)에 일월(日月)로써 이름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지금 경(庚)자는 유(庾)자와 비슷하고 신(辰)은 신(信)과 음(音)이 서로 같으니 어찌 이름하지 않으랴.” 하고, 드디어 유신이라 이름하였다.
年十五歲爲花郞時人洽然服從號龍華香徒 後佐太宗與唐將蘇定方滅百濟又滅高句麗年七十九卒碑記功後興德王追封爲興無大王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고, 당시 사람이 모두 복종(服從)하여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다. 뒤에 신라 태종을 도와서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나이 79세에 죽으니 비(碑)를 세워서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고, 흥덕왕(興德王)이 추후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봉하였다.
○ 金富軾史論曰 任賢勿貳去邪勿疑觀夫新羅之待庾信也 親近而無間委任而不貳謀行言聽不使怨乎不以 可謂得六五童蒙之吉 故庾信 得以行其志 與上國協謀 合三土爲一家 能以功名終焉
김부식(金富軾)이 사기(史記)를 평론(評論)하면서, “어진 이를 임용(任用)하여 고치지 않고, 간사함을 버려셔 의심하지 않는다.” 한 말이 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親近)하여서 간격(間隔)이 없고, 위임(委任)하여서 고치지 않았다. 모의(謀議)는 실행되고 말은 청납(聽納)되어, 그렇게 하지 않음을 원망하지 않게 하였으니, 육오 동몽(六五童蒙)[1]의 길(吉)함을 얻었다. 할 수 있다. 까닭에 유신이 제 뜻을 행할 수 있었으며, 상국(上國)과 꾀를 합하여 세 나라를 합쳐 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공명(功名)으로 끝마쳤다.
[1]동몽(六五童蒙) : 아랫 사람 말을 믿고 자기의 의사만을 주장하지 않는 것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滅而無聞 若庾信 則鄕人稱訟之至今不亡 士大夫知之 可也 至於蒭童牧豎 亦能知之 則其爲人也 必有以異於人矣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智略)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義勇)이 있었으나, 중국 문서(文書)가 아니면 사라져 없어지고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의 지용(智勇)은 고을 사람이 구전(口傳)하여 지금까지 칭송(稱誦)하여 말지 아니한다. 사대부(士大夫)가 알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마는, 초동 목수(樵童牧豎)도 또한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딴 사람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
김삼광(金三光) : 庾信子 유신의 아들이다.
김원술(金元述) : 三光之弟 法敏王納高句麗叛衆又據百濟故地唐高宗大老命將來討王遣將軍義福等禦于帶方之野敗續 元述欲戰死爲淡凌所止反還京其父庾信曰 元述不惟辱王命 亦負家訓 可斬也 王赦之 元述慚傀 不敢見父 遁於田園
삼광의 아우이다. 법민왕(法敏王)이 고구려의 백성을 받아 들이고 또 백제의 옛 지역을 차지하니,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크게 노하여 장수에게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왕은 장군 의복(義福) 등을 보내어 대방(帶方) 들판에서 방어하였으나 패전(敗戰)하였다. 원술은 싸워서 죽고자 하였으나 담릉(淡凌)이 만류(挽留)하였다. 서울에 돌아오니 그의 아버지 유신이,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家訓)도 또한 저버렸으니 참(斬)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왕이 용사(容赦)하였으나 원술은 부끄럽고 후회되어서, 감히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전야(田野)에 숨어 살았다.
父卒求見母母曰 婦人有三從之義 宜從於子然元述旣不得爲子於其父 吾焉得爲其母乎 終不見焉 元述嘆曰 爲淡凌所誤 至於此極乃入太白山 後唐兵來 攻買蘇川城 元述欲雪前恥力戰有功賞 以不容於父母懼恨不仕以終其身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에게 뵈옵기를 청하니 어머니는, “부인은 삼종(三從)하는 의(義)가 있으니 자식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원술은 이미 그 아버지에게 자식이 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어머니가 될 수 있으랴.” 하고, 마침내 보지 않았다. 원술이 탄식하면서, “담릉 때문에 잘못하게 되어서 이런 극단에 이르렀다.”하고, 태백산에 들어가 버렸다. 그 뒤에 당나라 군사가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니, 원술은 전일의 부끄러움을 식고자 하여 힘껏 싸워서 공과 상이 있었으나,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것으로써 분한(憤恨)스럽게 여겨서 벼슬하지 않고 몸을 바쳤다.
김윤중(金允中) : 庾信之孫 聖德王時官至大阿湌 屬仲秋日 王登月城岑頭眺望 乃與侍從官 置酒命召允中 有諫者曰 宗室戚里 豈無好人 而獨召疎遠之臣 王曰 寡人 與卿等 安平無事者 允中之祖之德也 遂賜允中密坐 言及其祖平生 日晩告退 賜絶影山馬一匹 群臣觖望而已
유신의 손자이다. 성덕왕(聖德王) 때에 벼슬이 대아찬(大阿湌)에 이르렀다. 중추일(仲秋日)에 왕이 월성 잠두(月城岑頭)에 올라서 조망(眺望)하면서, 시종관(侍從官)과 술자리를 벌리고 윤중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간(諫)하는 자가, “종실(宗室)과 척리(戚里) 중에 좋은 사람이 많은데, 어찌 소원(疏遠)한 신하를 부르십니까,”하니, 임금은, “과인(寡人)이 경들과 함께 평안무사하게 된 것은 윤중의 할아버지의 덕이다.”하였다. 드디어 윤정을 <불러서> 가까이 않도록 하고, 그의 할아버지의 평생 사적에 언급(言及)하였다. 날이 저물어 물러감을 아뢰자 절영산(絶影山) 말[馬] 한 필을 하사하니, 여러 신하는 섭섭해 하였다.
김암(金巖) : 允中庶孫 性聰敏 好習方術 少壯爲伊湌 入唐宿衛 間就師 學陰陽家法 自述遁甲立成 呈其師 師憮然曰 不圖子之明 達至此也 自是不以弟子待之
大曆中 還國 爲司天大博士 歷良康漢州太守 後爲執事侍郞
윤중의 서손(庶孫)이다. 성품이 총명 민첩하고, 방술(方述)을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로 있으면서, 가끔 스승에게 가서 음양가법(陰陽家法)을 배웠다. 스스로 둔갑입성(遁甲立成)이라는 책을 저술(著述)하여 스승에게 바치니, 스승이 놀라면서, “자네의 밝게 앎이 여기까지 도달하였을 줄은 요량하지 못하였다.” 하고, 이로부터는 제자(弟子)로 대우하지 않았다. 대력(大歷 )연중에 환국(還國)하여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다. 양주(良州)∙강주(康州)∙한주(漢州) 태수로 지냈고, 뒤에 집사시랑(執事侍郞)이 되었다.
<高麗(고려>
許有全(허유전) : 생략,
金普(김보) : 忠惠王朝拜知密直恭愍王朝轉僉議評理錄燕邸侍從爲一等封金寧府院君
충혜왕(忠惠王) 때에 지밀직(知密直)으로 임명되었고,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전임되었다. 연저(燕邸)에 시종(侍從)한 공이 1등으로 기록되어서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宋天逢(송천봉) : 생략, 金庾(김유) : 생략.
本朝(본조;조선
김요(金銚) : 初名鑌 登第歷集賢殿提學禮曹判書 世宗朝創欽敬閣簡儀臺 銚與金墩皆與焉諡恭簡
처음 이름은 빈(鑌)이다. 과거에 올랐고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세종 때, 흠경각(欽敬閣) 간의대(簡儀臺)를 창설할 적에, 김요는 김돈(金墩)과 함께 참여하였고,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김계희(金係熙) : 登第官至漢城府尹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김극검(金克儉) : 登第又丙戌年重試壯元官至同知中樞性廉介不營産
과거에 올랐고 또 병술년(丙戌年)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뽑혀서 벼슬이 동지중추(同知中樞)에 이르렀다. 성품이 청렴개결(淸廉介潔)하여 살림에 힘쓰지 않았다.
寓居(우거) : 省略,
孝子(효자) : 省略,
烈女(열녀) : 省略,
題詠(제영) : 省略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21권
慶尙道(경상도) 慶州府(경주부)
陵墓(능묘) 赫居世陵(혁거세릉) 味鄒王陵(미추왕릉) 法興王陵(法興王릉) 太宗武烈王릉(태종무열왕릉) 眞興王陵(진흥왕릉) 善德王陵(선덕왕릉) 孝昭王陵(효소왕릉) 聖德王陵(성덕왕릉) 憲德王陵(헌덕왕릉) 興德王陵(흥덕왕릉) 金庾信墓(김유신묘) 在府西岳里 부의 서쪽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金仁問墓(김인문묘) 김양묘(金陽墓)
古跡(고적)
…前略…
財買谷(재매곡) 金庾信宗女財買夫人死葬於靑淵上谷因名之每春月同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于時百奔敦榮松花滿洞府谷口架築爲庵因名松花房
김유신(金庾信)의 종녀(宗女)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어서, 당시 청연상곡(靑淵上谷)에 장사하고 재매곡이라고 이름을 붙이었다. 매년 봄철에 동종(同宗)의 사녀(士女)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연회(宴會)를 연다. 그때는 온갖 꽃이 한창피고 솔 꽃[松花]이 동부(洞府)에 가득하였다. 골의 어귀에 나무로 암자(庵子)를 짓고, 송화방(松花房)이라고 이름하였다.
天官寺(천관사) 在五陵東 ○金庾信爲兒時母夫人曰加嚴訓不妾交遊 …以下略…
오릉(五陵) 동쪽에 있다. ○김유신(金庾信)이 소시(少時)에 모부인(母夫人)이 날마다 엄한 훈계를 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어 놀지 않더니, 하루는 우연히 계집 종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어머니가 교훈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낮이나 밤이나 네가 성장(成長)하여 공명(功名)을 세우고 임금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 네가 천(賤)한 아이들과 더불어 음탕한 방과 술집에서 놀아 작란한단 말이냐.” 하고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유신이 즉시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그 집문을 지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루는 술이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데 말이 전일에 다니던 길을 따라 그릇 창녀(娼女)의 집에 이르렀다. 창녀가 한편으로 반기고 한편으로 원망하여 울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유신이 이미 깨닫고는 타고 온 말을 베이고 안장을 버린채 돌아 갔다. 그 여자가 원망하는 노래 한 곡조를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절은 바로 그 여자의 집이며, 천관(天官)은 그 여자의 이름이다. ○고려 이공승(李公升)의 시(詩)에 “절 이름 천관(天官)은 옛 사연이 있는데, 홀연히 그 유래를 들으니 처연(凄然)하다. 정 많은 공자(公子)가 꽃 아래에 놀았더니, 원망을 품은 가인(佳人)이 말 앞에 울었네, 말은 유정(有情)하여 도리어 옛길을 알았는데, 하인은 무슨 죄로 부질없이 채찍을 더했던고, 다만 남은 한 곡조의 가사(歌詞)가 묘(妙 )하여 섬토(蟾兎)가 함께 잔다는 말 만고(萬古)에 전하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22권
梁山郡(양산군)
東至機張縣界二十三里 至東萊縣界十七里南至同縣界四十六里 至密陽府五十里 至金海府界十八里 北至彦陽界四十一里 距京都九百十六里
동쪽으로 기장현(機張縣) 경계까지 23리이고, 동래현(東萊縣) 경계까지 17리이다. 남쪽으로 같은 현 경계까지 46리요, 서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50리이고 북쪽으로 언양현(彦陽縣) 경계까지 41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백 16리이다.
建置沿革(건치연혁) 新羅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置揷粱州景德王改良州高麗太祖改梁州顯宗置防禦使後元中書省以本國官繁民弊爲言故倂于密城忠烈王復舊本朝太祖朝改今名爲郡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땅을 떼어서 삽랑주(揷粱州)를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양주(良州)로 고쳤고, 그려 태조가 양주(梁州)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이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뒤에 원(元)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본국의 관청은 번거롭고 백성에게 폐가 돤다고 하므로 밀성(密城) 합쳤다가 충렬왕(忠烈王)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삼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26권
淸道郡(청도군)
효자(孝子) 본조(本朝) 金克一(김극일) 金海人性至孝爲母吮疽爲父嘗痢前後廬墓六年有虎乳於墓傍取祭餘飼之如養家畜父有賤妾二人事之如父生時及死並服期年天順甲申事 旌閭門
김해(金海) 사람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서는 종기를 빨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곱똥을 맛보았다. 전후 여묘살이 6년을 했는데, 한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를> 젖먹이매, <극일이> 제사지내고 남저지를 먹이며 가축을 기르듯이 하였다. 아버지에게 천첩(賤妾)이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생시와 같이 섬겼도, <그 들이> 죽어서는 기년(期年)을 복입었다. 천순(天順) 갑신년(1464)에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문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27권
慶山縣(경산현)
東至慶州府界九里 南至淸道郡界二十九里 西至大邱府界二十一理 北河至陽縣界二十一里距京都七百十里
동쪽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9리이고 남쪽으로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 29 리이고, 서쪽으로 대구부(大邱府) 경계까지 21리이며, 북쪽으로 하양현(河陽縣) 경계까지 21리인데, 서울과의 거리가 7백 10리이다.
建置沿革(건치연혁)
本押梁小國 一云押督 新羅祗味王取之置郡景德王改稱獐山高麗初改章山顯宗屬慶州明宗置監務忠宣王初避王嫌名改今名忠肅王以國師一然之鄕陞縣令恭讓王以王妣盧氏之鄕陞爲郡本朝太祖時復降縣令
본래 압량소국(押粱小國){혹은 압독(押督)이라고도 함.}이던 것을 신라(新羅) 지미왕(祗味王)이 이를 취해서 군(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서 장산(獐山)이라고 불렀다. 고려(高麗) 초년에 장산(章山)으로 고쳤고 현종(顯宗)이 경주(慶州)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초년에 임금의 이름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이를 혐의하니, 피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충숙왕(忠肅王)이 국사(國師)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해서 승격시켜 현령(縣令)을 삼았다. 공양왕(恭讓王)이 왕비(王妣) 노씨(盧氏)의 고향이라 하여 승격시켜 군(郡)을 삼았고, 본조(本朝) 태조(太祖)때에 다시 낮추어 현령(縣令)을 삼았다.
名宦(명환) 新羅(신라) 金庾信(김유신) 眞德王時爲押粱州君主昔無意於軍事飮酒作樂州人以爲庸將恨不一戰庾信知其可用於是伐百濟大敗之獲其將八人
진덕왕(眞德王) 때에 압량주군주(押粱州君主)가 되었는데 군사 일에는 뜻이 없는 듯이 <항상> 술 마시는 것으로 낙을 삼으니, 고을 사람들은 용렬한 장수로 알아 한 번도 싸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유신은 <이것을 보고> 그 사람들을 쓸만하다 생각하고, 이에 백제(百濟)를 쳐서 크게 파하고 적의 장수 8인을 사로 잡았다.
金仁問(김인문) 武烈王時 爲押粱州摠管築獐山城以設險錄其功授食邑三百戶
무열왕(武烈王) 때에 압량주총관(押粱州摠管)이 되었을 때 장산성(獐山城)을 쌓아서 요새지(要塞地)를 만들었으므로 그 공을 기록하여 식읍(食邑) 3백 호를 주었다. 본조(本朝)…이하 생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29권
高靈縣(고령현)
建置沿革(건치연혁)
本大伽倻國 詳見金海府山川下 自始祖伊珍阿豉王 一云內珍朱智 至道設智王凡十六世五百二十年 按崔致遠釋利貞傳云伽倻山神正見母主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生大伽倻王惱窒朱日金官國王惱窒靑裔二人卽惱窒朱日爲伊珍阿豉王之別稱靑裔爲首露王之別稱然與駕洛國古記六卵之說俱荒誕不可信又釋順應傳大伽倻國月光太子乃正見之十世孫父曰異惱王求婚又新羅迎夷粲比枝輩之女而生太子則異惱王乃惱窒朱日之八世孫也 然亦不可考 新羅眞興王滅之以其地爲大伽倻郡 景德王改今名高麗初屬京山府明宗置監務本朝 太宗朝改爲縣監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 : 자세한 것은 김해부의 산천 편에 보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대 5백 20년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중[釋] 이정(利貞)의 전기를 살펴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金官國)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곧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라 하였으나, 가락국(駕洛國) 옛기록의 여섯 알[六卵]의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한 것으로 믿을 수 없다. 또 중 순응(順應)의 전기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대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인데, 신라의 영이찬(迎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에게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 하였으나, 그것도 참고할 것이 못된다. 신라의 진흥왕이 그것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으로 하였고,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고려 초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소속하고, 명종이 감무를 두었으며, 본조 태종 때에 고쳐서 현감으로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31권
山陰郡(산음현)
山川(산천) 東山(동산)在縣東三里鎭山 智異山(지리산)在縣西三十里 楡山(유산)在縣南十里 馬淵洞山(마연동산)在縣北十里
王山(왕산) 在縣西十里山中累石爲丘四面皆有層級俗傳王陵云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로 포개서 만든 두덕이 있고, 사면에는 층계로 되었는데 왕릉(王陵)이라는 전설이 있다.
<첨부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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