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참으로 나대는걸 좋아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조용히 없는듯 있기보다는
많이 나대서 존재감을 찾으려고 한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인 국민학교에서도
나의 존재는 희미 했었다.
중학교에서도 그닥 티기 보다는 늘 잔잔한 호수처럼,
그런 존재 였고,
고등학교를 가서도 별로 나를 드러내지 못했다.
대학을 가선 그저 머리가 긴 장발을하고,
술 좋아하고 봉짝을 잘 부르는 그런 아이였고,
2학년 1학기를 끝으로 군대를 갔었다.
이곳에서 난 조금씩 변하기 시작 했다.
적극적으로 주도까지는 아니여도
매사에 긍정적이고, 솔선수범하면서
이것저것 내게 주어진것은 최선을 다했고,
대인관계도 좋아서 모두에게 사랑까지는
아니여도 맡기면 하는 놈 으로 자리잡았고,
동기들 사이에서는 재밋고, 활동적인 놈으로 받아들여졌다.
제대를 하고 1년은 알바를 했다.
아버님이 허리디스크로 집에서 몸조리를 할쯤이여서
학업을 중단하고, 동생이 있던 장안평의
삼우공업사로 자동차 정비업체에서
도색하는 부서로 배치되어 3개월을 일 했다.
이때 일하던 곳은 열악했으며, 대학을 졸업때
논문으로 썻던 최저임금에 대한 기초를 다졌던 곳이고,
호흡기질환으로 군에서 6개월간을 병원을 전전했던
기억때문에 그일을 그만두었다.-칠을하고 침을 벹으면 내가 칠했던 그 페인트가 나와서-
그만두고 놀 순 없어서 상영이매형이 운영하는 라자가구에서
알바를 시작해서 오랜기간동안 했고, 막내의 학비를 지원도 했었다.
1년 후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어렵게 다시 복학했고,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도 타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기도 했고,
군이전보단 대학생활을 조금은 생기있게 했고, 많은 친구들도 만들었다.
난 아마도 군에서 나를 조금은 변화가 좋았고,
졸업하고, 다우여행을 다니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고객들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회사를 대표해서
다니다 보니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기도 했고, 열심히도 살았다.
이 시기에 나의 나댐은 본격화 되어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해서 많이도 불렀고,
외국에 나가서 많은것을 보고 배우기도 했고,
많이도 나댔다.
지금이라고 그 나댐이 줄거나 없어진것은 아니나.
절제를 많이 하고 있다. 살아야 하고, 살아야 하니까...
곧 있어 년말인 12월이 도래 한다.
달력에 행사를 적어보니 꽤 많다.
나의 나댐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난 이곳에서 이렇게 글로만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프다.
그래서 이곳이 너무도 좋고, 좋다.
이곳에서만 만나기를 고대 한다.
즐겁게 잘 지내고 있으니, 욕이나 하지 마라.
열심히 잘 지내겠지하고,
그렇게만 생각해주면 된다.
그러니 부르지 마라.
내가 살이가 나아지면 나오지마라해도 징글징글하게 나갈테니
그전까지는 부르지도 말고, 문자도 보내지 마라 알아서 다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