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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황 막 막(荒 荒 漠 漠), 요 야 천 이 백 리 (遼 野 千 二 百 里)
○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의 많은 분야(分野) 중에서, 가장 뒤떨어진 곳은 『사학계(史學界) 』 라고 한다면 이곳에 종사(從事)하시는 분들이 명예훼손(名譽毁損)으로 본인(本人)을 고소(告訴)할 수 있을까? 또 이러한 주장(主張)이 “명예훼손(名譽毁損)”에 해당(該當)될까? 법(法)이라는 분야(分野)와는 무뢰한(無賴漢)인 본인(本人)으로써는 알 수 없다.
기득권(旣得權) 세력(勢力)을 가진 “사학(史學)”은, 우리 사회(社會)의 모든 분야(分野)로 확산(擴散)되어, 반도사관(半島史觀)은 고착(固着)화되었으며,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주장(主張)하는 영토(領土)와 똑같은 구조(構造)로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 냉정(冷靜)하게 분석(分析)해 보면,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차이(差異)는 무엇인가? 의문(疑問)만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시간(時間)에도 자치단체(自治團體)나, 각종의 이익단체(利益團體), 향토사학(鄕土史學)에서는 이러한 사학(史學)을 확대재생산(擴大再生産)하고 있다. 특히 대중(大衆)에게 많은 영향(影響)을 끼치는 텔레비전 방송(放送)에서는 “증명(證明)되지 않은 조선사(朝鮮史)와 그 영토(領土)에 관한 많은 시대극(時代劇)을 생산(生産)하고 있다.” 시대극(時代劇)을 보면, 거창(巨創)하게 “고지도(古地圖)”까지 등장(登場)시키면서, “증거(證據)나 고증(考證)된 것”처럼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러한 곳에 종사(從事)하시는 분들은,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대한 『지형지리(地形地理), 방향(方向), 토산물(土産物), 영역(領域)의 판도(版圖), 종족(種族)과의 관계(關係)등등에 대한 의구(疑懼)심은 전혀 없는 것 같다.』 당연하듯이 의문(疑問)해소(解消)에 대한 그 어떤 움직임도 없다.
이러한 것들을 매일 접(接)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많은 국민(國民)들은 무슨 생각을 갖고 있을까? 아마도 『옛 조선(朝鮮)의 여러 나라, 근대조선(近代朝鮮), 대한제국(大韓帝國)등은 관련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오직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건국 【建國 : 1948년 8월 15일】 된 것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이전(以前) “일만(一萬)년의 조선사(朝鮮史)” 와는 차별(差別)화 하려는, 별개(別個)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조선【朝鮮 : 고대 조선(朝鮮). 삼한(三韓). 삼국(三國). 고려(高麗). 근대조선(近代朝鮮)등을 포함한 총칭(總稱)】의 강역(疆域)과 도성【都城 : 황도(皇都)/적현(赤縣)신주(神州)/중국(中國)】이 현(現)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그것과 다를지라도 그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나라, 종족(種族), 부족(部族)등의 영역(領域)은 항상(恒常) 유동적(流動的)이기 때문이다.』
○ 왕조(王朝)에서 걸출(傑出)한 지도자(指導者)가 나온다면, 그 영역(領域)과 백성(百姓)들의 삶의 질(質)은 확 달라질 수 있으며, 정사(政事)대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정사(情事)만을 탐하는 자(者)가 나타나면, 백성(百姓)의 삶은 고통(苦痛)과 피폐(疲弊)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으며, 외적(外敵)과 내적(內賊)으로 인한 혼란(混亂)은 결국(結局), 영역(領域)의 축소(縮小)와 천도(遷都)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나라가 망(亡)하는 일까지 벌어지기 때문이다.
영원(永遠)한 일은 없다. 오직 존재(存在)하는 것은 돌고 도는 “자연(自然)의 법칙(法則)” 뿐이다.
● 대륙(大陸)과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지배(支配)했던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의 한 모퉁이 땅에서, 인연(因緣)의 끈으로 이어졌다는 것, 이것이 중요(重要)한 것이다. 『“조선(朝鮮)의 영광(榮光)”을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이 있는 한”, 재기(再起)의 발판은 기회(機會)을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充分)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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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주제(主題)는 “요동벌판(遼野) 1200리”로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朝鮮)의 땅”에 대해 “지형지리(地形地理)적인 면”으로 살펴보자는 뜻이다. 특히 이곳 “요동요서(遼東遼西)” 땅을 말을 타고, 또는 도보(徒步)로 직접(直接) 다녀온 분들의 체험담(體驗談)은, 그 어떤 것들보다 정확(正確)하며, 특히 직접(直接) 보고, 걸으며, 체험(體驗)한 그곳의 지세(地勢)는 무엇보다 중요(重要)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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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 원 직 지(燕 轅 直 指) 1권/ 出 疆 錄 /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 28일 / 요동대야기 (遼 東 大 野 記)
《自王寶臺循山谷而下.行四五里.長谷欲盡.遼東大野.於焉入望 : 왕 보대에서 산골짜기를 따라 아래로 4, 5리를 가니 긴 골짜기가 끝나려는데, 요동(遼東)의 큰 들판이 어느덧 바라보인다. 荒荒 漠漠. 眼 無 障 礙. : 황황막막(荒荒漠漠)하여 눈앞에 막히거나 가리는 것이 없었다. 蓋東自此.西至山海關外.北自醫山.南至濱海. : 대개 동서(東西)로는 여기에서부터 산해 관(山海 關)밖까지 이르고, 남북(南北)으로는 의산(醫 山)에서 시작하여 바닷가에 이른다. 其長廣延袤.不見端倪.到此始知天地之大也. : 그 길고 넓게 뻗친 것이 끝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천지(天地)가 큰 것을 알았다. (중략). 今臨遼野.自此至山海關千二百里間.四面都無一點山.如黏膠線縫.古雨今雲.只是蒼蒼.可作一場. : 지금 요동(遼東)들에 이르니, 여기에서부터 산해 관(山海關)까지 1200 리 사이가 사방으로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어 아교(阿膠)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것 같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비가 내리고 구름이 일어난 일은 오직 창창(蒼蒼)하기만 하니 한바탕 할 만하지.’ 하였다. 》
➊ 요동(遼東) 들판(原)이 얼마나 큰 것인지 1,200 리 거리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 같은 “들판” 뿐이라는 사실(事實)은 지형적(地形的)인 면으로 볼 때, 현재(現在)의 그곳에 있었다는 “요동(遼東)들판”은 될 수 없다. “황황막막(荒荒漠漠)”이란 “거칠고 거친 땅이 끝없이 멀고 아득함”을 말하는 것이니 말이다. 반도(半島)의 북쪽에 있는 북방삼성(北方三省)을 포함(包含)한 중원(中原) 땅엔 존재(存在)하지 않는 땅이다.
➋ 『其長廣延袤.不見端倪.到此始知天地之大也. : 그 길고 넓게 뻗친 것이 끝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천지(天地)가 큰 것을 알았다. 』고 하였으니, 그곳을 직접(直接)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➌ 북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요, 남쪽으로 바다(海)라고 하였으니, 이 글에서 말하는 곳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남쪽지방에서 요동(遼東) 벌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이곳은 “요하(遼河)의 서쪽으로 요서(遼西)지방이다. 요동(遼東)지방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저자(著者)는 요동(遼東)벌판 1,200 리가 산해 관(山海關)까지 이어졌다.』 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산해 관(山海關)가지는 겨우 “300 km”도 미치지 못하는 거리다.
※ 역사서(歷史書)에 보이지 않는 부분(部分)은 바로 이러한 부분(部分)이다. 『요동(遼東)의 들판이 “1,200 여리나 된다.”는 사실은 대륙사서(大陸史書)에서는 존재(存在)치 않으며, 또 그것을 직접(直接)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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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曰.噫.此英雄百戰之地也.所謂虎步龍驤.高下在心.然天下安危.常係遼野.遼野安. : 또 말하기를, 아아, 이곳은 영웅(英雄)들이 온갖 싸움을 하던 땅이다. 이른바 「범이 걷듯 하고, 용이 날 듯하여, 오르고 내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곳이다. 그러나 천하(天下)의 안정(安定)과 위태(危殆)한 것이 항상 이 요동(遼東)들에 달려 있다. 則海內風塵不動.遼野一擾.則天下金鼓互鳴.何也.誠以平遠曠野.一望千里.守之則難爲力.棄之則胡虜長驅.曾無門庭之限. : 요동(遼東) 들이 편안하면 해내(海內)에 풍진(風塵)이 일지 않고, 요동 들이 한 번 시끄러워지면 천하의 징과 북이 서로 울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진실로 평원(平遠)한 광야(曠野)가 한 번 바라보면 천 리나 되니, 지키기에는 힘을 쓰기가 어렵고, 버려두면 호로(胡虜)가 한없이 몰려오지만 오히려 문이니 뜰이니 하는 한계가 없다. 此所以爲中國必爭之地.而雖殫天下之力.守之然後天下可安也. : 이런 까닭으로 중국(中國)이 반드시 다투는 땅이 되니, 비록 천하의 힘을 다하더라도 지킨 연후에야 천하가 편안할 수 있다. 今其天下所以百年無事者.豈能德敎政術.遠過前代哉. : 지금 중국(中國)의 온 천하가 100년 동안 무사한 까닭이 어찌 덕 있는 교화와 정사하는 계책이 전 시대보다도 훨씬 뛰어난 것이겠는가? 瀋陽乃其始興之地.則東接寧古塔.北控熱河.南撫朝鮮.西向而天下不敢動. : 심양이 바로 그 처음 일어난 땅인데, 동쪽으로는 영고 탑(寧古塔)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열하(熱河)를 제압하며, 남쪽으로는 조선(朝鮮)을 어루만지고, 서쪽으로 향한다. 所以壯其根本之術.非歷代所比故也.入遼以來.桑麻翳菀.鷄狗相聞.百年昇平.不得不爲淸室一攢眉云者.眞遼野善評也. : 그래서 천하(天下)가 감히 움직이지 못한 까닭은, 그 근본을 굳세게 한 계책이 역대(歷代)와는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동에 들어서면서부터, 뽕나무와 삼(麻)이 어두침침하게 우거지고, 닭과 개 소리가 서로 들려, 백 년 토록 승평(昇 平)하나, 청나라 왕실을 위해서는 한 번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한 것은 참으로 요동 들판에 대한 좋은 논평이다.》
※ 위 설명(說明)은 중국(中國)에서 이곳 “요(遼)”지방이 가장 중요한 요충지(要衝地) 땅이었다는 것인데, 중국(中國)을 괴롭힌 종족(種族)이나 나라들은,
㉠ 고대(古代)역사(歷史)에서 “숙신(肅愼)”은 중심지인 중국(中國)의 서북(西北)쪽에 있었으며, 흉노(匈奴)는 중국(中國)이라는 중심(中心)에서 북(北)쪽이나 서(西)쪽 간 사이에서 항상 괴롭혔으며,
㉡ 선비(鮮卑)인 모용(慕容)씨나 오환(烏桓)은 사막(沙漠)지대에서 중국(中國)의 변방(邊方)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 글란【契丹 : 거란 = 요(遼)】 역시 중국(中國)이라는 곳으로부터 서쪽과 서북방향에서 중국(中國)을 향해 칼날을 번뜩였으며,
㉣ 5호 족들은 말 그대로 북(北)쪽과 서(西)쪽과 서북(西北)쪽에서 중국(中國)을 향해 달려들어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꿈을 이뤘으며,
㉤ 요(遼)지방이 중국(中國)을 진동(震動)시켰다면, 진시황(秦始皇)은 왜 동(東)쪽 지방과 동북(東北)지방에 “장성(長城)”을 축조(築造)치 않고, 별 볼일 없는 서(西)쪽과 서북(西北)과 북(北)쪽 지방에 수십만(數十萬)을 징발(徵發)하여 장성(長城)을 축조(築造)하였는가?
㉥ 명 청(明淸)시대 역시, 위의 사실(事實)은 똑같다는 것은 역사서(歷史書)가 고증(考證)한다. 동변(東邊)으로부터는 그 어떠한 위협(威脅)도 없었으며, 중국(中國)을 향해 달려드는 침략(侵掠)자들의 기마(騎馬) 역시 없었다는 것이 역사서(歷史書) 내용(內容)이다.
㉦ 시황제(始皇帝)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종점(終點)은 중국(中國)의 서북 변(西北邊) 양산(陽山)에서 그 북쪽으로 꾸불꾸불 이어지다가 중단(中斷)되었다고 하는데, 갑자기 바닷가 산해 관(山海關)까지라고 말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서융(西戎), 흉노(匈奴), 북적(北狄)이란 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중국(中國)을 향해 달려들었다는 것은 역사서(歷史書) 첫 페이지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은 동변(東邊)에서 서(西)쪽으로 질주(疾走)했다는 말은 “사기(詐欺)”다. 개연성(蓋然性)이 없다. 그곳 동변(東邊)에 누가 있었는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북삼성(東北三省)과 그 주위 내몽고(內蒙古)지방 등에 있던 자들은 『3 백만 명』도 되지 않아, 『이곳은 무인지경(無人之境)이었다.』는 기록(記錄)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가?
※ 우린 정보(情報)의 홍수(洪水)속에서 살고 있으나, 그 많은 정보(情報)들이 “진실(眞實)”을 갖고 있을까? 대선이니 뭐니 해 정보(情報)홍수(洪水)속에서 대다수(大多數)가 유언비어(流言蜚語)다. 즉 사실(事實)이나 진실(眞實)을 찾을 수 없는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촌각(寸刻)일 뿐, 대부분(大部分)의 것들이 어떤 목적(目的)을 가진 자(者)들에 의해 뿌려지는 “찌 라 시”임을, 우선(優先) 알아야 “진실(眞實)”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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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동 백 탑 기 (遼 東 白 塔 記) 에서도,
《自關廟迤北里許有白塔.中略.塔高十三層.世稱遼野千里.白塔得野勢三分之一.似近之. : 관제묘(關帝廟)에서 비스듬히 북쪽으로 1리가량에 백탑이 있다. (중략). 탑의 높이가 13층이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요동(遼東) 벌판이 천리(千里)인데 백탑이 들판 기세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하는 것은 그럴 듯하다. 》 이곳에서도 “요야(遼野)가 천리(千里)라고 하였다.
● “노가재”의 연행(燕行)일기(日記)에서도
《稼 記 曰。第 一 壯 觀。遼 東 大 野. : 노가재의 일기. 첫째가는 장관은 요동(遼東)의 큰 들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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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심전 고 제1권/ 연계기정(燕 薊 紀 程) ○무자년(1828, 순조 28) 12월8일 / 요동 벌 (遼 野)
《風寒.二道井五十里午炊.小黑山五十里宿.自一板門以後.遙見點點山勢.出沒隱映於野色迷茫之際.毉巫閭支派也. : 바람이 불고 추웠다. 이 도정(二 道 井) 50리를 가서 점심 먹고, 소 흑산(小 黑 山) 50리를 가서 잤다. 일 판문(一 板 門) 이후부터는 멀리 여기저기 산줄기들이 들 빛이 아득한 어름에 아른거리는 것이 보이니 의무 려(醫 巫 閭)의 지맥이다. 遂 橫 亘 千 餘 里. 爲 北 方 之 鎭. : 드디어 1,000여 리에 가로 걸쳐 북쪽의 진(鎭)이 되어 있다. 一出遼野.風沙撲人.眯目噤口.殆不可堪.而此地尤甚.唐太宗征遼時.馬尾曳柴.攀援以過云. : 한번 요동 벌로 나오니,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사람을 갈기어 눈은 어둡고, 입은 벌리지를 못하여 거의 견딜 수가 없는데, 이곳이 더욱 심하다. 당 태종이 요동을 정벌할 때, 말꼬리에 섶을 끌리어, 그것을 붙잡고 의지하여 지나갔다고 한다. 》
➊ 『의무려산(醫巫閭山)이 1,000 여리에 가로 걸쳐』라는 말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산맥(山脈)으로 동서【東西(동서) 또는 서동(西東)】 방향으로 1,000 여리에 걸쳐 쭉 뻗어있다는 말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해발고도(海拔高度) 867m 인 흔하디흔한 조그만 산이며, 어떠한 “산맥(山脈)”도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연결(連結)되어 험 준(險峻)한 산세(山勢)를 이루고 있는 곳이 없다.
➋ 더하여 이곳은 낮은 산지(山地)와 남쪽으로 바다가 있고, 조그마한 하천(河川)들이 바다를 향해 흐르는 형세(形勢)이기 때문에, 이곳은 메마른 땅이 될 수 없으며, 이곳이 “사막(沙漠)지대”라는 말은 반도(半島) 한양(漢陽) 땅이 “장안(長安)”이었다는 말과 같다.
※ 위 본문(本文)에서 말하는 “요야(遼野)”라는 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오늘날의 하 북 성(河北省) 동쪽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서(河西)지방의 ‘사막(沙漠)지대’를 지칭(指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本文)에서 말하는 지형지세(地形地勢)는 특이(特異)한 지형(地形)으로, 특이(特異) 기후(氣候)와 함께 어울리는 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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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전 고 제1권/ 연계기정(燕 薊 紀 程) / 요 하 (遼 河)
《豆乙非在瀋西百里外.遼河北岸.亦是淸人與明師對壘處. : 두을 비(豆 乙 非)는 심양 서쪽 백 리 밖 요하(遼河) 북쪽 언덕에 있으니, 역시 청나라 사람이 명나라 군사와 대진(對陣)했던 곳이다. 山海關頭萬里長城外大漠中.又有二條長城舊墟.五里置一墩.是分限華夷界. : 산해 관(山海關) 머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에 있는 큰 사막(沙漠)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고, 5리마다 돈대(墩臺) 하나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 一條自建州界起.從淸河撫順等堡.歷開元鐵嶺等衛.由遼河南抵于三河堡.一條自陝西界起.從太原大洞等府.歷大漠逶迤醫巫閭後.過林寧鎭遠鎭寧等堡.抵高平驛. : 한 줄기는 건주(建州)의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 보(淸 河 堡)ㆍ무순 보(撫 順 堡) 등지로 해서 개원 위(開元 衛)ㆍ철령위(鐵嶺衛) 등을 지나 요하(遼河)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 보(三河 堡)에 이르렀고, 한 가닥은 섬서(陝西)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 원 부(太原 府)ㆍ대동 부(大洞 府) 등지로 해서 큰 사막(沙漠)을 거쳐 의 무려(醫 巫 閭) 뒤로 꾸불거리다가 임 녕 보(林 寧 堡)ㆍ진원 보(鎭 遠 堡)ㆍ진 녕 보(鎭 寧 堡) 등을 지나 고평역(高平 驛)에 이르렀다. 極目只有其基.而林寧近處則草莽間.間有粉堞. :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그 터뿐이요, 임 녕(林 寧) 근처에는 풀숲 사이에 분첩(粉堞)이 간간이 있었다.》
※ 위에서 설명(說明)하는 지형지리(地形地理)를 찾아만 낸다면, 조선사(朝鮮史)를 영역(領域)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 산해 관(山海關)를 기준(基準)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 일천(一千)여리(餘里) 정도를 분석(分析)해보자. 현 지형도(地形圖)를 참고해 보면,
㉠ 동(東)쪽 : 요동만(遼東灣)으로, 동쪽지방엔 무엇도 존재(存在)할 수 없는 바다(海)라는 사실(事實)이다.
㉠-㉠ 동북(東北)쪽 : 의무려산(醫巫閭山). 심양(瀋陽)이 있다.
㉡ 서(西)쪽 : 북경(北京) 곧 연경(燕京)이다.
㉢ 남(南)쪽 : 바다(海)에 닿아 있으며, 요동만(遼東灣) 입구(入口)라 할 수 있다.
㉣ 북(北)쪽 : 평 천(平泉)이며, 내몽고(內蒙古) ‘객 랄 심 기’ 지방이다.
●【山海關頭萬里長城外大漠中.又有二條長城舊墟.五里置一墩.是分限華夷界. : 산해 관(山海關) 머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에 있는 큰 사막(沙漠)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고, 5리마다 돈대(墩臺) 하나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 】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산해 관(山海關)의 “북(北)쪽” 또는 “서북(西北)쪽” 그 어디에도 “큰 사막(沙漠)” 지대(地帶)는 없으며, 『이곳 산해 관(山海關)에서 “사막(沙漠)지대(地帶)”는 “서(西)”쪽으로 1200-1,300 km 약 3천리 이상(以上) 【직선거리(直線距離) 구-글 어스】 을 가야 하는 곳에 있다.』 이곳은 하서(河西)지방으로 중원(中原)의 북방 영하 성(寧夏省) 서쪽지대를 말한다.
이곳 대 사막(大沙漠)지대에 두 줄기【이중(二重)으로 쌓아놓은 장성(長城)】 장성(長城)의 옛 유적(遺跡)이 있는데, 『대 사막(大沙漠)에 있는 장성(長城)을 경계(境界)로, 그 북쪽은 이적(夷狄)이요, 그 남쪽은 중화(中華)로 구분(區分)했다.』는 설명(說明)이다.
● 그렇다면 『“산해 관(山海關)”이나, “요동(遼東)벌판”이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나, 이 모두는 대 사막(大沙漠)으로 들어가는 입구(入口)에 있었다.』 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바다에 닿았다. 남쪽은 바다(海)이다.』라는 말의 『“해(海)”』 는, 『내륙(內陸)의 바다 또는 큰 하천(河川)』을 말하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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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海長城.乃是祖龍所築.此兩條長城.未詳肇於何代 : 산해 장성(山海長城)은 곧 조 룡(祖 龍 진시황(秦始皇))이 쌓은 것이지만, 이 두 줄기 장성(長城)은 어느 시대에 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自牛庄抵廣寧二百餘里.大野泥濃.唐朝所謂遼澤.霖䨪則陸地行舟.以是行旅不通. : 우장(牛 莊)으로부터 광 녕(廣寧)에 이르기까지 200여 리 사이는 ‘큰 들판’이 모두 진흙수렁으로서 당조(唐朝)의 이른바 ‘요 택(遼澤)에 장마가 지면 육지로 배가 다닐 지경이다.’ 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행려(行旅)들이 다니지 못한다. / 萬曆間.寧遠伯李成樑聞于朝.大發民丁.自牛庄抵廣寧.築大墻堤.高廣俱數丈. : 만력(萬曆) 연간에 영원 백(寧 遠 伯) 이 성량(李 成 樑)이, 이 사정을 조정(朝廷)에 보고하고 민정(民 丁)을 크게 동원하여 우장(牛 莊)으로부터 광 녕(廣寧)까지 큰 둑을 쌓았는데, 높이와 너비가 모두 두어 길이나 된다. / 堤北坎土處爲壕.壕行船.堤容軌.民甚便之. : 둑 북쪽에서 흙을 파온 곳은 호(壕)가 되었는데, 이 호(壕)로는 배가 다니고, 둑으로는 수레가 다닐 만하여 백성(百姓)들이 몹시 편하게 여겼다. 》
※ 『산해(山海)의 장성(長城)은 시황제(始皇帝)가 쌓은 것이다.』라는 말에서,
시황제(始皇帝) 때 감독관(監督官) “부소(扶蘇)”와 대장군(大將軍) “몽념(蒙恬)”과 그가 거느리던 30-50만 장정(壯丁)과 용공(庸工) 및 인부(人夫)들이 쌓은 장성(長城)은, 『양산(陽山) 북쪽으로 꾸불꾸불 이어지다가 중단(中斷)되었다.』 고 ‘본기(本紀) 및 열전(列傳)’등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때의 장성(長城)은, 하(河)를 벗어난 곳엔 존재(存在)할 수 없으며, 양산(陽山)을 벗어날 수 없다.
감독관(監督官) “부소(扶蘇)”와 대장군(大將軍) “몽념(蒙恬)”과 그가 거느리던 30-50만 장정(壯丁)과 용공(庸工) 및 인부(人夫)들이, 모두 지하(地下)세계(世界)인 유명(幽冥 : 저승)에서 “장성(長城)을 더 쌓았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人間)”이란 동물(動物)은 사후(死後)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곧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 《自牛庄抵廣寧二百餘里.大野泥濃.唐朝所謂遼澤.霖䨪則陸地行舟.以是行旅不通. : 우장(牛 莊)으로부터 광 녕(廣寧)에 이르기까지 200여 리 사이는 ‘큰 들판’이 모두 진흙수렁으로서 당조(唐朝)의 이른바 ‘요 택(遼澤)에 장마가 지면 육지로 배가 다닐 지경이다.’ 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행려(行旅)들이 다니지 못한다. 》는 설명(說明)에서,
“진흙수렁과 요 택(遼澤)”은 차라리 황토(黃土)고원(高原)지대와 그곳을 흐르는 큰 하천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며, 큰 하천(河川)이나 호수(湖水)로 들어오는 지류(支流)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곳에 비가 많이 내린다면 위의 설명(說明)과 똑같은 상황(狀況)이 전개될 것이다.
현재(現在)의 하 북 성(河北省)이나 요 녕 성(遼寧省)등지에서는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 특이지형(特異地形)은 존재(存在)하지 않으며, 역사서(歷史書)의 지리지(地理志)등에도 이러한 곳을 지칭(指稱)하는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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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 원 직 지(燕 轅 直 指) 6 / 인물과 요속 / 요동이서(遼東以西)
《自遼至西.地皆平衍.一風一雨.沙移失路.故往往植柳以識路 : 요동(遼東)에서부터 서(西)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평탄하고 넓다. 그래서 바람이 한번 불거나 비가 한번 오면, 모래가 이리저리 옮겨져서 길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이따금 버드나무를 심어서 길을 식별하게 했다. 》
● 위의 것은 바로 『요동(遼東)의 서(西)쪽【요하(遼河)의 서(西)쪽 지방이다.】 인 요서(遼西)지방(地方)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설명(說明)하는 것이다. 아주 “간 단 명 료(簡單明瞭)한 설명(說明)”으로써, 『요서(遼西)지방의 특이지형(特異地形)을 잘 말해주고 있다.』
『땅이 평탄(平坦)하고 넓으며, 모두 모래(沙) 땅이기 때문에,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모래가 이리 저리 옮겨 다닌다.』는 말은 “모래사막(沙漠)지대의 전형적(典型的) 특색(特色)”이다.
『이렇게 직접(直接) 사막(沙漠)지대를 말을 타고, 일부 종자(從者)들은 걸어서 연경(燕京)을 향해 갔다.』고 했는데, “그곳이 현 북경(연경)이라고 한다.” 면, 『한반도(韓半島)는 중국(中國) 땅이요, 동(東)쪽의 동해(東海)바다는 육지(陸地)가 되어 열도(列島)와 이어져 있어야 하며, 남(南)쪽의 남해(南海)는 육지(陸地)로써 대마도와 제주도(濟州道)까지 모두 땅(地)으로 이어져 있어, 아열대기후(亞熱帶氣候)를 갖고 있어야 하며, 서해(西海) 역시 육지(陸地)로써 험산(險山)준령(峻嶺)의 산악지대(山岳地帶)가 펼쳐져 있어야 한다.』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이러한 사실(事實)들을 몰랐을까? 그들은 기득권(旣得權)세력(勢力)으로 모든 정보(情報 : 서지포함)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를 리 없다. 그저 모르는 척 할뿐이다. 모난 돌은 깨지기 쉬우니 말이다. 『 명예(名譽), 권력(權力), 경제적(經濟的)이득(利得), 기득권(旣得權) 유지(維持)』등을 뿌리친다는 것은, 곧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포기(抛棄)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하(遼河)』 를 기준(基準)으로 『북(北)쪽과 서(西)쪽 지방은, 대 사막(大沙漠)지대요, 유목(遊牧), 이목(移牧)족이 살았으며, 이적(夷狄)이며』, 『남(南)쪽과 동(東)쪽 지방은 풍요(豊饒)로운 농경(農耕)족(族)의 중화(中華)가 있었다.』
● 이곳에서 가장 중요(重要)한 점은 『요서(遼西)지방은 대 사막(大沙漠)지대』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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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도 요 장 군 (度 遼 將 軍)
한서 흉노 전 (漢書 匈奴 傳)에 따르면, 『한(漢)나라 장군(將軍)의 명호(名號)이다. 도요(度遼)는 요수(遼水)를 건넌다는 뜻으로, 한(漢) 소제(漢 昭帝) 때, 도요장군(度遼將軍)을 두었는데, 범 붕우(范 朋 友)가 이를 맡아 요동(遼東)의 오환(烏 桓)을 쳤다. 그 뒤 후한(後漢) 때에도 이를 두어 오원(五 原)에서 흉노(匃 奴)를 방어(防禦)했다. 』고 사가(史家)들이 주석(註釋)편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후한서(後漢書), 신구(新舊)오대 사(五代史), 신구(新舊)당서(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통전(通典)등에도 사가(史家)들의 주석(註釋)을 인용(引用)하고 있다.
이럴 때 “요수(遼水) 또는 요하(遼河)”가 어디에 있는 하천(河川)인가에 대해 더 이상(以上)의 가불가【可不可 : 옳음과 옳지 않음】 를 따질 필요 없는 문제(問題)다.
㉠ 오원(五原) : 중원(中原) 서북(西北)방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있는 지명(智明)이다.【본인(本人) 주(注) / 이곳의 오원(五原)은 서쪽지방에서 1차 이동된 지명으로 판단된다.】
㉡ 도요 영(度遼營) : 요수(遼水)를 건넌 군대(軍隊)가 주둔(駐屯)하는 영(營)이며, 오원(五原) 서북(西北) 근교(近郊)에 있었다.
㉢ 역사서(歷史書) 기록(記錄)으로 보면, 『요수(遼水)=요하(遼河)는 영하 성(寧夏省)을 관통(貫通)하는 하(河)를 칭했다.』 그 서(西)쪽인 『하서(河西)은 곧 요서(遼西)』로 사막지대(沙漠地帶)로 가는 초입(初入)이며, 더 나아가면 서(西)쪽과 서북(西北)쪽 모두 대 사막(大沙漠)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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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잠 곡 【潛 谷 : 김 육 (金 堉)】 유고(遺稿) 제2권 / 영안 위(永 安 尉 : 홍 주원(洪 柱 元)가 북쪽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 醫 巫 連 朔 漠 : 의무려산(醫巫閭山) 북쪽 사막(沙漠)에 연(連)하여 있고 》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의 무려(醫 無 閭) 혹은 어미 려(於 微 閭), 의려(醫 閭), 여산(閭 山)등으로 불린다.
위의 설명(說明)은 작금(昨今)의 우리들에게 비애(悲哀)를 안겨주기에 충분(充分)한 것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 녕 성(遼寧省) 북진(北鎭)현에 있는 해발고도(海拔高度) 867m의 흔하디흔한 작은 산이다. 이곳의 북(北)쪽 멀리에는 대 흥 안 령(大興安嶺)이 있으며, 동북(東北)과 동(東)쪽은 장춘(長春)이요, 심양(瀋陽)이다. 이곳은 농경(農耕)지대로 곡창(穀倉)지대라 할 만큼 농업(農業)이 발달(發達)된 것이다.
그곳 동서남북(東西南北)지방 그 어디에도 특이지형(特異地形)인 “사막(沙漠)”지대를 연출(演出)할 수 있는 조건(條件)을 가진 무대(舞臺)는 없다. 위 글에서는 『“의무려산(醫巫閭山)” 북쪽은 사막(沙漠)과 연이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그 어디에도, 이러한 징후(徵候), 기미(幾微), 과학(科學)의 설명(說明)등은 존재치 않는다. 『이곳 “산(山)”으로부터 서(西)쪽으로 3-4천리를 가면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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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연 원 직 지(燕 轅 直 指) (유관별록) / 천지 산천(天地山川)
《渡鴨江.至瀋陽.直向西南.自瀋至大凌河.稍迤而北.而間或向西.自凌河至山海關.向正南. :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심양(瀋陽)까지는 곧장 서남향(西南向)이요, 심양(瀋陽)에서 대 릉 하(大 凌 河)까지는 약간 비스듬히 북(北)쪽으로 가다가 혹 서(西)쪽으로 향하는 때도 있으며, 능 하(凌 河)에서 산해 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정남(正南)으로 향(向)한다. 》
㉠ 압록강(鴨綠江)에서 심양(瀋陽)까지는 곧장 서남향(西南向)이다. : 압록강【鴨綠江 : 의주 곧 용만(龍灣)에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넌다.】 에서 곧장 서남(西南)으로 가면, 연행(燕行)사신(使臣)들은 곧바로 물귀신이 된다. 그곳은 평양(平壤) 서쪽 바다 한 가운데이기 때문이다.
심양(瀋陽)으로 가려면, 사신단(使臣團)은 북쪽으로 말을 몰아야 한다.
㉡ 심양(瀋陽)에서 대 릉 하(大凌河)까지는 북쪽 혹은 서쪽으로 간다. : 심양(瀋陽)에서 북쪽으로 가면 길은 더욱 멀어지고, 그 북쪽에서 서쪽으로 길을 잡으면 내몽고(內蒙古)의 고원(高原)지대로 향하기 때문에 연경(燕京)으로 갈 수 없다.
제대로 가려면, 『심양(瀋陽)에서 산해 관(山海關) 방향으로 가려면, 곧장 “서남(西南)쪽”으로 가야 한다.』
㉢ 능 하(凌河)에서 산해 관(山海關)까지는 “정남(正南)”으로 간다. : 릉 하(凌河)에서 “정남(正南)”으로 가면, 사신단(使臣團)은 두 번째 물귀신이 된다. 정남(正南)으로 내려가면, 요동만(遼東灣) 바다 속에 빠져 물귀신이 되니 말이다.
제대로 가려면, “서남(西南)”쪽으로 가면 “산해 관(山海關)”에 갈 수 있다.
● 이렇게 사신단(使臣團)의 여정(旅程)길은, 도무지 이해(理解)할 수 없는, 가당치 않은 방향(方向)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성적(理性的)인 판단(判斷)은 사신단(使臣團) 기록(記錄)은 정확(正確)한 것이다. 후대(後代)의 우리가 한없이 어리석게도 엉뚱한 땅에 대못을 박으며 맞느니, 틀리느니 시비(是非)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
3-5천리 서(西)쪽 지방에서 일어났던 당시(當時)의 여행(旅行)길을, 전혀 관련(關聯)이 없는 곳에서 말하고 있으니, 당연(當然)한 결과(結果)이다. 이것은 역사왜곡(歷史歪曲)을 증명(證明)하며, 초유(初有)의 역사(歷史)사기사건(詐欺事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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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노 가 제(老稼齋) 연행일기(燕行日記)> 권 1 : 山川風俗總錄
【노가 제(老稼齊) 연행일기(燕行日記) : 숙종(肅宗) 38년(1712) 임진(壬辰)년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 김창집(金昌集)의 타각(打 角 자벽군관(自辟軍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온 김창집의 아우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의 연행(燕行) 기록이다.】
《自渡江至北京.地皆沙.自入遼野.往來車馬益多.沙益細.乍風輒揚.狀若烟霧.後人不見前人. : 강을 건너 북경(北京)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沙)이다. 요동(遼東) 들판에 들어서면서부터, 오가는 거마가 더욱 많아지는데, 모래 또한 더욱 가늘어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안개처럼 휘날려, 뒷사람이 앞사람을 보지 못한다. 關內尤甚.雖無風日.輪蹄間觸.起者如灰揚.着人衣帽面目.頃刻變色幻形.同行幾不能相識. : 관내(關內)가 더욱 심하여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레바퀴에서 재처럼 휘날리니, 옷과 얼굴에 붙으면 금방 모습이 변하여 동행하는 이도 거의 알아볼 수가 없게 된다. 在鬢髮者.拭之不脫.在口中者.淅瀝有聲.至十襲之籠.重封之甁.亦皆透入.極可怪也. : 그것이 머리나 수염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에 들어가면 바작바작 소리가 나며, 겹겹이 싼 농이나 병 속에도 뚫고 들어가니 괴이한 일이다. 巿肆及人家所置器物.用鷄尾帚.不住拂拭.不然.頃刻積至寸許.北京城大街.皆濺水以浥之. : 시가나 인가에선 물건들을, 닭 꼬리로 만든 비로, 쉴 새 없이 털고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한 치나 쌓이게 된다. 북경(北京)성(城)의 큰 거리는 물을 뿌려 적신다.
㉠ 역사(歷史)통설(通說)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요동(遼東)지방이 시작되며, 요수(遼水)에서 끝이 난다.』 위의 연행사신(燕行使臣)단의 일원이었던 저자(著者)가 체험(體驗)한 기록은, 『요동(遼東)의 큰 들판에 들어서면서부터 모래가 많아지는데, 강(江)을 건너서고부터 “북경(北京)인 연경(燕京)까지”는 그 땅이 모두 “모래(沙)”로 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 모래바람의 위력(威力)은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본인(本人)도 직접(直接) 체험(體驗)한 바 있으니, 위의 저자(著者)의 설명(說明)과 상황(狀況)이 똑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본인(本人)은 근무(勤務)하던 회사(會社)로부터 파견(派遣)되었다는 점과 수백(數百)년이란 시차(時差)와 말(馬)대신 자동차(自動車)로 변해있다』라는 것 일뿐이다.
㉢ 이러한 여정(旅程) 길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으로부터 심양(瀋陽)을 거쳐 하 북 성(河北省) 북경(北京)으로 가는 길이라면, 『18세기 중반, 이곳 일대(一帶)는 천지개벽(天地開闢)으로 인한, 지형지세(地形地勢)의 급격(急激)한 변화(變化)를 맞아, 현재(現在)와 비슷한 지형지세(地形地勢)로 바뀌었다는 설명(說明)이 가능(可能)해야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설명(說明)은 ‘판타지’ 세계(世界)에서나 가능(可能)한 것이다. 따라서 반도(半島)/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는 역사(歷史) 이야기는 판타지와 같다 보아지며, 당시 ‘노가 제(老稼齊)’ 일행의 연행(燕行)사신단(使臣團) 여정(旅程)은, 『중원 (中原 : 중국) 서북방(西北方)의 황하 (黃河 : 요수) 를 건너, 요서 (遼西 : 하서) 땅으로 들어가니, 그 땅이 모두 모래(沙)로 되어있어..........』 이렇게 설명(說明)되어야 올바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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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연 원 직 지(燕 轅 直 指)제1권 / 出 疆 錄 /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 21일
《新遼東城.卽今之遼城也.世傳淸世祖所築.康煕四年.改遼東爲東京.陞爲遼陽州. : 신(新)요동성(遼東城)은 곧 지금의 요성(遼 城)이다. 세상에서 전해 오기를, 청나라 세조(世祖)가 축조한 것인데, 강희(康煕) 4년(1665, 현종 6)에 요동을 고쳐 ‘동경(東京)’이라 하고 요양 주(遼 陽 州)로 승격하였다. 중략(中略). 城周二十里.四面方正.引太子河一派.環以爲濠.城制鮮新.而但無城廊.北距瀋陽.南控渤海.亦一都會處也. : 성의 둘레는 20 리, 사면이 반듯한데 태자 하(太子 河) 한줄기를 끌어다가 둘러 호(壕)를 만들었다. 성의 제작이 신선(新鮮)하지만 성랑(城廊)이 없다. 북쪽은 심양(瀋陽)과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발해(渤海)를 제압하고 있으니, 또한 하나의 도회지이다. 중략(中略).》
㉠ 청(淸) 강희제(康熙帝)가 1,665년에 이곳 “요동성(遼東城)”을 고쳐, 『동경(東京)』 이라 했다면 “청(淸)나라”는 하서【河西 : 요서(遼西)】 로부터 1,500 - 2,000 여리 서(西)쪽 지방이나 서북(西北)쪽 지방에 있었다는 것이며, 청(淸)이 현(現) 중원(中原)대륙(大陸)에 있었다는 역사(歷史)통설(通說)은 거짓이며, 사기극(詐欺劇)이다.
㉡ 『발해(渤海) 역시(亦是) 하서【河西 : 요서(遼西)】 지방(地方)으로부터, 그 서(西)쪽 지방의 남(南)쪽에 있었다.【위에서 보면, 동경(東京)의 남(南)쪽에 발해(渤海)가 있다고 하였다.】 』는 이야기이니, 그동안 대륙사서(大陸史書)로 고증(考證)한 본인(本人)의 주장(主張)인 “내륙(內陸)발해(渤海)”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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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열거(列擧) 및 설명(說明)한 것은, 『조선(朝鮮)의 중조(中朝)』가 중국(中國) 곧 신주【神州 : 적 현(赤縣)신주(神州) = 기전(畿甸) = 전(甸) = 황도(皇都) = 경조지방(京兆地方) =경기(京畿) 】가 장안(長安)과 천수(天水)의 동서(東西) 축선(軸線)에 있었다는 것에 준한 것이다.
몇 백리 정도(程度)의 차이(差異)는 무의미(無意味)한 것이기 때문에 무시(無視)하고자 하며, 앞으로 더 많은 정보(情報)를 찾아내어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의미(意味)를 되새겨 보면서, 기회(機會)는 얻고자 하는 자(者)들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想起)하자.
2012년 12월 16일 :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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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무 선생님 의 글, 항상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문무 선생님의 노고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遼東,遼西를 가르는 遼水는, 盛京疆域考 의 謂之遼海即遼河上源也, 는 요수에 대하여,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기록 입니다. 청의 연경에 아주 가까이 와 있습니다. 연행기에 나오는 蘆峰口 와 그인근 지역을, 모두 자료를 수집하여 알고 있기 때문에, 청의 북경을 찾는일은, 아주 작은 고증만 남겨 놓고 있습니다, 늘 강건 하시고, 평안과 만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