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29일부터 2월 3일 까지 홀로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가마쿠라, 야마가타, 요코하마, 그리고 도쿄가 그 행선지였습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가마쿠라였습니다. 사실, 가마쿠라는 3번째였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단체여행으로 갔던 것이라 차분하게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또 두번째는 가족여행이라서 좀더 차분했지만 역시 다니는 걸음의 속도가 빠르지는 못했습니다. 비로소 이번에 혼자 다니면서 구석구석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한가롭게, 그리고 편안하게 다녔습니다.
"교토에 오는 것은 휴식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습니다. 서울보다는 좀 나을런지 몰라도, 교토에서의 제 생활 역시 여전히 도서관 출입이 주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법보신문』의 탁효정 기자가 언제 제게 묻더군요. "교토가 더 좋아요? 가마쿠라가 더 좋아요?" 제가 어느 곳을 더 좋아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만, 답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그 답이 내려졌습니다.
"가마쿠라가 더 좋다. 하지만, 아직은 교토를 다녀야 할 것같다."
가마쿠라는 많은 정치인, 문인, 예술가, 학자 등이 요양을 하다가 최후를 맞이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차분하고도 적정한 곳입니다. 에도 시대에는 농어촌에 불과했을 정도이니까요. 한 예로, 동지사 대학의 설립자 니지마 죠(新島襄) 역시 40대에 병이 들어 이 곳에서 요양하다가 죽습니다. 그때 니지마는 대불(大佛)을 찾아가서 모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인데 말입니다. 그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마쿠라는 결정적으로 젊은이들이 살기에는 불편합니다. 교토는 고풍스런 한적함과 도시적 기능을 두루 갖춘 곳이지만, 가마쿠라는 도시적 기능을 다 갖춘 곳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도쿄까지 나가야 하지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젊은이들에게는 여전히 그리움의 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리움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마쿠라를 한번 가보면 좋아하게 될 것이고, 또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 믿어집니다. 불교인이라면 더욱더 ---.
2
가마쿠라는 도쿄의 서남쪽에 위치합니다. 도쿄에서 가려면 요코하마(橫浜)나 오후나(大船)에서 요코스카센(橫須賀線)으로 갈아타시면 됩니다. 하차는 기타가마쿠라(北鎌倉)나 가마쿠라 역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오사카나 교토 쪽에서 신간센을 타시고 올라가는 경우에는 오다와라(小田原)에서 하차하셔서 도카이센(東海線)을 갈아타시고 역시 오후나에서 요코스카센으로 다시 한번 갈아타시면 됩니다.
가마쿠라는 바로 "가마쿠라 신불교"라고 말할 때의 그 가마쿠라입니다. 일본의 역사에서는 중세에 무사들이 정권을 잡고서 실권을 휘두르는 시대가 있습니다만, 그 시작이 바로 가마쿠라입니다.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우는 것이지요. 서기 1192년에서 1333년까지 가마쿠라 막부의 시대가 이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마쿠라를 가보면 매우 작은 지역입니다. "이 작은 곳에서 일본 전역을 어떻게 통치하였을까?" 라거나, "왜 하필 이 작은 땅을 골랐을까?" 라는 의문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몇 가지 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천혜의 요새라는 설이 있습니다. 남쪽으로 바다를 면하고 있으며, 나머지 3면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져 있습니다. 그러니, 북쪽의 산정에서 바라보면 마치 부채를 펴놓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외부로 통하는 길을 아주 협소하게 해놓으면 실제로 외적이 침입하기 어렵게 됩니다. 사방의 경계가 대개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겨우 사람이 다니는 좁은 길을 내놓고 마는 정도입니다.
저는 가마쿠라 전역을 한번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아침 일찍 겐쵸지(建長寺) 뒷산을 올랐습니다. "겐쵸지 뒷 산에 있는 암자 한쇼보(半僧坊)에 오르면 가마쿠라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맑고 따스한 아침이었습니다. 겐쵸지 뒤로 약간 급경사의 계단을 조금 오르니 한쇼보가 나타납니다. 아, 그런데 웬 일입니까! 후지산이 손에 잡힐 듯 건너 보이는 것 아닙니까. 한쇼보에서 서쪽으로 후지산이 보였습니다. 맑은 날이면 보이는지 아예 "후지산 전망대"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 후지산이 보입니다."
전화로 중계를 하였습니다. 듣던 대로, 이 한쇼보에서 가마쿠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현재 인구 10만의 도시입니다. 거기에 약 100여개의 사원이 있습니다. 그 모두가 옛절이라는 것입니다. 절이나 신사 중에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이루어진 것은 오직 하나 가마쿠라구(鎌倉宮) 밖에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어디든지 나타나는 절에 들어가면, 그 모두가 역사적 유래와 전통을 갖는 일본불교사의 현장인 셈입니다.
이제 그런 의미에서도 가마쿠라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중세도시, 종교도시 가마쿠라를 어떻게 하면 잘 볼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도시의 중심이 되는 것은 쯔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입니다. 남쪽으로 바다를 향하여 있으며(현재 바다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앞으로는 와카미야 오오지(若宮大路)라는 큰 길이 나있습니다. 모두 가마쿠라 시대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쯔루가오카 하치만구라는 신사가 본래는 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예가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바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말씀드리지요. 가마쿠라가 갖는 매력 중의 하나는 역시 바다가 있다는 점입니다. 해안의 곡선이 아주 이쁩니다. 저는 이번에 네 군데에서 가마쿠라의 바다를 마음껏 즐겼습니다. 첫째, 제일 왼쪽/동쪽에서는 코묘지(光明寺)에서 나오면 코반(交番, 파출소)가 있습니다. 그 옆에 주차장이 있는데요. 거기서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보면 아름다운 해안선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오른쪽/서쪽에서는 이나무라가사키(稻村カ岐)에서 보는 것입니다. 거기는 공원이 있습니다. 멀리 에노시마(江ノ島)도 보입니다. 셋째, 하세데라(長谷寺)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좀 보이는 부분이 적지만 역시 좋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가마쿠라 문학관에서 보는 바다입니다. 이 가마쿠라 문학관 자리는 제 생각에는 일본 제일의 명당이 아닐까 합니다. 가마쿠라를 꼭 가보시고, 가마쿠라 바다 역시 꼭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3
이제 가마쿠라의 절들을 걸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00개나 된다고 하니, 제가 세 번에 걸쳐서 가본 절은 아직도 몇 군데 안 되는 것같습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또 가서 보기로 하고 지금까지 가본 곳을 위주로 하여 일본불교사를 조금이나마 들여다 보았으면 합니다. 편의상 몇 갈래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정토 및 관음신앙 계통입니다. 가마쿠라의 사원이 100개나 된다고 합니다만, 역시 가마쿠라의 대변자는 대불입니다. 일본에서 대불은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이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 도다이지 대불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또 지금 전하지는 않지만 교토에서도 대불이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지은 호코우지(方廣寺)의 대불이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호코우지와 함께 지진으로 인하여 불타버렸다 합니다. 현재 호코우지의 유물로는 대종이 있을 뿐입니다. 이들 두 경우는 모두 국가적인 차원에서 나라의 국력을 기우려서 조성한 대불입니다. 하지만, 여기 가마쿠라의 대불은 그렇지 않습니다. 죠코우(淨光)이라는 스님 한 분의 원력으로 인하여 조성불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가 1243년입니다. 이 죠코우 스님은 정토종 스님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을 모신 것이지요. 관동대지진 때 조금 앞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합장하는 우리를 향해서 약간 고개를 숙여서 맞이해주시는 인상입니다. 도다이지 대불은 대불전(大佛殿) 속에 모셔져 있습니다만, 가마쿠라의 대불전은 역시 불에 타버리고 현재는 그 주초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에도 타지 않고, 비에도 젖지 않은 채"(마사오카 시키의 시) 느긋한 미소를 짓고 계십니다. 그 부처님을 한없이 우러러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정토신앙의 절로서 앞서 말씀드린 코묘지가 있습니다. 료츄우(良忠)이라는 스님이 창건한 절입니다. 좀 떨어져 있고 해서 그런지(그래봐야 버스 타면 금방 갑니다만) 관광객의 발걸음이 적습니다. 그래서 한산하고 한가합니다.
관음신앙의 사원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하세데라(長谷寺)입니다. 11면 관세음보살상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하세데라는 나라에도 있는데요. 원래 이 십일면 관세음보살은 나라의 하세데라에서 조성한 것인데, 그냥 인연터를 찾아가라면서 바다에 띄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 가마쿠라로 오셨다고 합니다. 가마쿠라 하세데라가 된 것입니다. 이 절에는 그 입구에 늘어선 지장보살로도 유명한 절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일본 사람들이 "너무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미타불이 더 높고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부처님을 보좌하시는 분으로 배웠잖아요? 그렇지만, 여기 하세데라는 십일면관세음보살님을 모신 법당이 더욱 중심적이고 큽니다. 그것은 사찰의 연기가 그렇다고 보면, 또 굳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저에게 "너무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바로 아미타불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특히 지장보살님 앞에 다양한 관형사(冠形詞)를 붙입니다. 예컨대, 수자(水子)지장보살 등입니다. 그런 영향이 있어서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하세데라에서는 아미타불을 "액제(厄除)아미타불"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아미타불은 미래의 우리를 구제할 부처님 아닙니까. 그런 미래의 부처님마저 다 현세로 불러내서, 지금 당장의 우리의 액운을 제거해달라고, 그런 부처님이 여기 계시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너무 부처님을 우리 편의대로 모시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씁쓰레 하였습니다. 현재의 액제를 담당하는 수많은 존상들을 모시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바쁘지 않은 발걸음이라면 가마쿠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는 스기모토 관음(杉本寺)도 찾아 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선종 사원입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선종 역시 매우 흥합니다. 이때는 주로 송나라에서 들어오신 스님들이 활약을 많이 하는 시대입니다. 정말 많은 스님들이 송나라에서 건너오시고, 또 일본 스님들도 많이 건너갑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란케이 도류(蘭溪道隆, 1225-1278)인데요. 바로 겐쵸지의 개산(開山)이 됩니다. 이 분은 고생도 참 많이 하십니다. 당시 일본은 몽고로부터 두번에 걸친 침략을 받는데요.(이 이야기만 나오면 숨고 싶어집니다. 우리 고려군이 당시 함께 일본으로 치고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중국에서 오신 스님이 일종의 첩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시고 이 겐쵸지를 열어서 임제종 건장사파의 개조가 되는 것입니다. 겐쵸지에는 현재도 선수행을 엄격하시는 수행자들의 공간을 따로이 확보해 놓고 있으며, 일반 재가인을 위한 참선법회도 다양하게 열고 있습니다. 이 겐쵸지에는 "제창(提唱)대각국사어록"이라 현판을 붇여놓았더군요. 대각국사는 바로 란케이 도류스님 호입니다.
이 겐쵸지를 정점으로 하여 오산(五山)이 형성됩니다만, 그 두번째가 엔가쿠지(圓覺寺)입니다. 이 엔가쿠지의 수행풍토에 대해서는 다치하라 마사아키(立原正秋)의 소설 "겨울의 유산"에 다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엔가쿠지에는 근래 금북홍천(今北洪川)이라는 선승이 있었는데, 그 밑에서 참선을 하신 분이 바로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1-1945)입니다. 그 금북홍천의 법을 이은 것이 샤쿠 소엔(釋宗演)인데요. 우리 학명(鶴鳴)스님과 법거래를 하기도 하는 분입니다. 이 샤쿠 소엔 밑에서 참선을 하였던 분으로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나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등이 있습니다. 특히, 스즈키 다이세츠는 샤쿠 소엔 스님이 시카고 종교회의에 가실 때에 모시고 가서 통역을 하는 것이 인연이 되어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엔가쿠지 경내를 요코스카선 철도가 통과합니다. 그 철로를 건너서 왼쪽으로 조금 가시면, 도케이지(東慶寺)가 있습니다. 이 절에서는 두 군데를 보시길 권합니다. 하나는 박물관입니다. 거기서 옛날 이 도케이지가 가케고미데라(우리 말로 하면, 뛰어들어가는 절. 피난사, 정도 될까요.)였음을 나타내는 사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에도 시대에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여성이 이혼을 하고 싶으면 이 도케이지로 쫒아들어가면, 그 안에서 피난을 허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정을 하여 돌려보내기도 하고, 합의이혼을 시키기도 하고, 아니면 강제이혼을 시키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권한을 에도막부로부터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비구스님 절이지만, 당시에는 비구니 스님 절이었기에 그러한 전통이 있게 된 것같습니다. 또 하나 찾아봐야 할 것은 납골묘원입니다. 일본의 어느 절이든지 대개 납골묘원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스즈키 다이세츠, 니시다 키타로, 와쓰지 데츠로(和*哲郞1889-1960), 그리고 이들을 후원했던 이와나미 문고의 창립자 이와나미 다케오(岩波武雄)의 묘석을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저는 이분들이 대개 대학자거나 많은 공로를 쌓은 인물이라서 "보통의 사람들 묘와는 뭔가 다른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똑 같았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가족묘와 똑같이 작은 모습, 그 묘석의 크기가 한 40-50센치 정도나 될까요. 정말 참으로 진리를 안다 함은 죽음의 의례를 평범하게 치룬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았습니다.
선종 사원 중에 꼭 소개하고 싶은 것은 죠묘지(淨妙寺)입니다. 가마쿠라 오산 중에 아마도 제일 마지막이라 하는 것같습니다. 작은 절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참으로 작고 아름다운 선종정원이 있습니다. 일본은 정원이 아름답고, 그 정원을 가꾸는 기술 역시 선종사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가 그 정원미학의 창시자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가 건립한 교토의 텐류지(天龍寺)도 좋지만, 역시 선종정원의 백미가 교토의 료안지(龍安寺)라고 하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봅니다. 그 료안지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조용하게 간직하고 있는 정원이 가마쿠라 정묘사에 있었습니다.
희천암(喜泉庵)이라는 암자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현재는 다실로 이용되고 있더군요. 거기 들어가시면 말차를 한 잔 사 드셔야 합니다. 500엔 내시고 주문하시면, 차를 내옵니다. 말차 한 잔 드시면서 작은 정원을 바라다 보십시오.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나무도 있습니다. 그 물 떨어지는 소리도 한번 들어 보십시오. 가능하면, 홀로 가십시오. 두 사람이 가면 그 적정의 미를 즐기는 데 방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글로 다 전할 수 없고, 말로 다 묘사할 수 없는 세계가 거기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느끼는 진리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사찰로는 임제종의 에이사이(榮西, 1141-1215)가 지은 쥬후쿠지(壽福寺)같은 절도 있습니다만, 찾아가 봐도 볼 만한 것도 없고 그렇습니다. 절 입구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요.
셋째, 일련종 사원입니다. 니치렌(日蓮, 1222-1282)은 가마쿠라에서 바다를 건너 있는 치바현 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쪽에서 출가하여 히에이잔(比叡山)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가마쿠라로 진출합니다. 그리고는 외치기 시작하지요. 그냥 네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정열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혼탁하고 나라가 어려운 것은 법화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 법화경
의 가르침은 "남묘호렝게쿄(나무묘법연화경)" 여섯 글자에 모두 담겨있다. 그러니, "남
묘호렝케교"를 외워라.
이렇게 외칩니다. 그가 서서 외치던 그 곳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찾아 가 볼까요? 쯔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난 찻길을 조금 걸어가시면 호카이지(寶戒寺)가 나타납니다. 그 호카이지를 끼고 우회전하시면, 즉 호카이지 앞으로 해서 남쪽으로 쭉 벋은 작은 길(1차선 길)이 나타납니다. 이 길 이름이 '고마치오오지(小町大路)'입니다. 이 고마치 오오지를 걸어서 내려오다가 오른쪽에는 묘류지(妙隆寺)가 있습니다. 이 절은 니치렌의 후예 닛신(日親, 1407-1488)스님이 얼음 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신심을 시험했던 연못이 있는 절입니다. 이 닛신스님에 대해서는 제가 번역한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133-134쪽)에도 소개되어 있지요. 정권측으로부터 억압을 받지요. 하긴 그 수난의 시작은 니치렌부터 숙명적으로 시작됩니다만 ----. 하여튼, 묘류지를 나와서 조금 더 남쪽으로 걸어가시면 "니치렌 대사 네거리 설법지"라고 하는 표석이 서있는 작은 절이 나옵니다. 절이라기 보다는 터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비석들이 있습니다. 다시 그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혼가쿠지(本覺寺)가 나옵니다. 그 절은 니치렌의 유골의 일부가 묻혀있는 절입니다.
니치렌과 인연이 있는 도량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세데라를 들어가는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골목이 하나 있는데요. "니치렌이 입정안국론을 바친 곳"이라는 표지가 서있습니다. 코오소쿠지(光則寺)입니다.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의 집필과 막부에의 제출은 법화경의 신앙을 국가권력으로부터 인가받아서, 그 가르침을 국가적 차원에서 전파하려고 하였던 시도라고 저는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치렌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만들었던 가르침의 패러다임으로부터 가장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교는 한 개인의 구제로부터 나아가 전체 사회나 인류의 구제를 지향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니치렌은 애시당초 한 사회나 한 국가의 구제를 집단적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종단과의 마찰은 물론 국가권력과의 마찰 역시 불가피한 것으로 봅니다. 세속권력은 종교 자체가 권력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러니 탄압이 있게 되고, 그에 맞서서 순교의 열정으로 자기 종교를 지키는 행위들이 이어집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매우 숭고한 신앙의 열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힘이 오늘날까지 일본불교의 주류 속에 존재하고 있으나, 종교 자체의 권력화를 통한 자기 종교의 구현이라는 점이 역사 속에 부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시대의 침략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 일련주의였으니까요.(일련주의는 그 앞장을 섰던 국주회의 사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국주회에 대해서도 역시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 184-186쪽 참조.)
다시 이야기를 코우소쿠지로 돌리지요. 그 절에서 니치렌은 바로 이 『입정안국론』을 당시 막부의 신관리였던 자기 신도에게 전해줍니다. 그 관리의 이름이 光則이었는데, 나중에 절을 만들게 됩니다. 이 절은 꽃으로 뒤덮여 있는 작은 절인데, 뒷 산에는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니치렌이 유배를 가게 되는데, 그때 제자인 니치로(日朗)이 그 동굴 속에 연금되었다고 합니다. 하세데라 역에서 전철을 탈 수 있습니다. 그 노선이름이 에노덴(江ノ電)인데요. 에노시마까지 가는 전철입니다. 그 에노덴을 타시고 에노시마까지 가게 되면 류코우지(龍口寺)가 있습니다. 이 절은 권력으로부터 니치렌이 죽을 뻔했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탄압의 현장이지요. 이 인근에서는 유일하다는 오층탑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입정안국론』을 집필한 안국론사(安國論寺)가 있지만, 아직 제가 가보지 못해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율종사원입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 율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때 율종은 에손(叡尊, 1201-1290)이 세운 진언율종을 가리킵니다. 나라 사이다이지(西大寺)가 총본산입니다. 그 사이다이지 에손의 고제자에 닌쇼(忍性, 1217-1302)가 있습니다. 나라에서 활동하였습니다만, 에손 교단의 전국적인 확산정책의 하나로서 관동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잠시 이바라키현의 미무라데라(三村寺)에 계시다가, 가마쿠라의 고쿠라쿠지(極樂寺)로 오시게 됩니다. 이 고쿠라쿠지는 하세데라에서 걸어 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하세데라역에서 에노덴을 타시면 한 정거장입니다.(190엔) 지금은 작은 절입니다만, 가마쿠라 막부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습니다. 여기서 닌쇼스님이 한센병환자를 구제하는 나숙(癩宿)을 채려놓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요. 지금도 당시에 환자들 먹일 약을 짓던 맷돌이나 죽을 담았던 돌솥 등이 남아있습니다. 닌쇼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도로공사나 항만설비 등을 직접 하게 되는데요. 여기에는 그러한 기술자 집단을 닌쇼스님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막부로부터의 지원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의 저자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교수는 당시의 진언율종이 본래는 둔세승 교단이었지만, 가마쿠라 막부의 '관승'화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고쿠라쿠지에서 하세데라로 걸어올 수 있는데, 산 하나가 잘라져서 통로(2차선)가 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가마쿠라로 들어오는 네 경계 중의 하나가 되는 곳인데요. 이 공사 역시 닌쇼스님이 했다는 비석이 서있습니다.
율종사원으로 잊을 수 없는 것은 지금 요코하마에 해당하는 가나자와(金澤)의 쇼묘지(稱名寺)입니다. 이 절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애시당초는 정토종 사원이었지만 진언율종의 사원이 됩니다. 현재 가마쿠라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지만, 버스가 다닙니다. 당시에는 넓은 뜻에서 가마쿠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로 하루 날을 잡아야 하는데요, 가나자와(金澤)문고를 함께 보시려고 한다면 시간을 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절 그 자체로서는 극락세계를 구현한 정토정원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볼 만하지는 않습니다만 -----. 닌쇼의 스승 에손스님이 막부의 초청으로 관동에 내려와서 머무른 사원입니다.
4
대개 이 정도입니다. 가마쿠라역 관광안내소에서 가마쿠라 시내 지도를 하나 얻으시고, 또 "버스의 일일승차권" 파는 영업소를 물으셔서 그것을 구입하시길 바랍니다. 세번 이상 타시면 이익입니다. 550엔인데요. 좋은 점은 에노덴을 탈 수 있으며, 사원 등에서 입장료를 낼 때도 활인이 되거나 뭔가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그 두가지만 구비하시면 준비는 다 된 것입니다.
어디서 자면 좋을까요? 저는 하세 유스호스텔(하세데라역에서 걸어서 3분 정도, 12명 정원, 1일 3000엔, 조식 300엔, 석식 700엔)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가마쿠라의 옥의 티는 좀 물가가 비싼 느낌입니다. 외식 식비가 좀 비싸니까요. 유스호스텔에서 반드시 식사를 예약해서 드시길 빕니다.
이 하세 유스호스텔에서 저는 대만의 한 변호사가 쓴 가마쿠라 여행수상록 『한가히 가마쿠라를 걷다(漫步在鎌倉)』를 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대만사람들이 더러 오신다고 합니다. 한국사람들은 별로 오지 않는다고요.
"이제 우리도 가마쿠라에 좀 가봅시다."
나라, 교토와 더불어 일본의 불교문화를 흠씬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나누고, 느낌을 나누게 되기를 빕니다. 그런 뜻에서 이 글을 씁니다.
2007년 2월 10일
|
첫댓글 일본불교사 공부방 제4호에 실린 글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