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은 뛰어난 플루트 연주자였다. 궁전 앞에선 대왕이 플루트 연주자였음을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듯 악사가 플루트를 연주한다. 상수시로 가기 위해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은 베를린은 몰라보게 깔끔해져 있었다. 파리나 런던만 보고 온 사람이라면 어수선하다고 하겠지만. 통일 직후인 1991년 여름, 두 번째로 이 도시를 찾았을 때만 해도 연방정부 건물들을 새로 짓느라 곳곳에 크레인이 서 있었고, 도로와 철길을 닦느라 여기저기 파헤쳐져 어지러웠는데 그런 광경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래 전 분단 시절,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었던 베를린에서 최근 10여년 동안 가장 변화가 많았던 곳은 낡은 건물들을 헐고 새로운 건물이 대거 들어선 동베를린 지구다. ‘그곳에 가면 철학자 아니면 우울증 환자가 된다’던 말은 이제 옛말이 돼버렸다. 그 중에서도 프로이센 제국이 온 정성을 다해 조성한 운터 덴 린덴(‘보리수 아래’란 뜻) 거리가 시작되는 브란덴부르크 문은 밤이 되자 조명을 받아 환히 빛나는 게 마치 ‘베를린의 봄’을 말해주는 듯했다. 다시 시작하는 베를린, 다시 하나된 독일을 확인시켜주는 그 광경이 ‘왜 우리는 아직도 저러지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으로 다가와 분단국에서 온 여행자를 울적하게 만든다.
분단 전까지만 해도 변두리에 지나지 않던 서베를린은 여행자들이 머물기 좋은 지역으로 변했다. 값싼 호텔과 레스토랑이 대거 들어선 데다 교통이 편리해서다. 교통의 중심지는 줄로기셔가르텐(동물원) 주변. 독일 고속철도 ICE는 물론 지상철(S-Bahn)과 지하철(U-Bahn), 그리고 수많은 시내버스가 이곳을 기점으로 들고난다.
줄로기셔가르텐 역에서 열차로 40분을 달려 도착한 포츠담은 인구 15만의 작은 도시지만 찾는 사람은 무척 많았다. 주위에 상수시 궁전 등 볼 것이 많아서 그러할 것이다. 역에서 내린 사람들 대부분은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정류장에 줄을 섰다. 그렇게 20분을 더 달리면 상수시 궁전에 닿는다.
버스가 멈춘 곳은 상수시 궁전 앞. 맞은편에 체칠리엔호프 궁전이 있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상수시행이었다. 체칠리엔호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등 세 거두가 만나 일본에 항복을 요구하고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한 ‘포츠담 선언’이 채택됐던 곳이라 우리로선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장소다.
우아한 로코코식 인테리어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를 뚫고 궁전 안으로 들어가 만난 건물은 검은 기와지붕과 그 아래의 연노랑 벽, 거기에 촘촘히 박힌 아래위로 길다란 유리창, 지붕 한가운데 볼록 솟아 있는 작은 녹색 돔 등이 화사하면서도 안온한 느낌을 줬다. 벽을 장식하려 아담을 비롯한 여러 인물상을 역동적으로 묘사해 다이내믹한 인상을 줬으나 위압적이진 않다. 건물이 높으면 위압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낮은 대신 좌우로 아주 길었다. 무려 97m나 됐다.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궁전 안을 보고 정원 구경에 나서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먼저 내부 관람을 위한 입장권을 샀다(건물 밖은 무료 입장). 그런데 내부는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도 더러 보였다. 알고 보니 30분 단위로 20여명씩 입장하되 관람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건물의 손상이나 사진촬영을 막기 위해서인 듯했다.
가이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만 들려줄 뿐 질문이 없는 한 영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오는 관광객보다는 자국민과 이웃 프랑스인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보여줬다. 내가 찾았던 시간에도 동양인의 용모를 한 사람은 나뿐이었으니 아직은 지명도가 낮다고 볼 수밖에 없다. 포츠담은 옛 동독 땅이라 통일을 이룬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 알려지지는 않은 곳이다.
가장 먼저 안내된 원형의 ‘대리석 홀’은 천장이 아주 높고, 바닥에는 기하학적 문양과 식물 문양이 잔잔하게 새겨져 있었다. 벽을 지탱하는 기둥 또한 머리 부분이 식물 형상인 코린트식이었다. 거기에 타원형 천장에서 길게 늘어뜨려진 샹들리에와 조각들이 어우러져 여행객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든다. 여성적인 우아함을 드러내는 로코코 스타일이 전체 인테리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로코코의 고향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실내장식이 대표적인 예다. 그것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로 퍼져나가 실내장식은 물론 건축과 조각에까지 응용됐던 것인데, 가볍고 정교하며 우아하고 고상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로코코란 용어 또한 인조동굴을 장식하는 데 쓰인 조가비를 뜻하는 프랑스어 ‘로카유(rocaille)’에서 유래했다.
다음으로 찾은 왕의 거소는 접견실과 음악감상실, 플루트 연주실, 서재, 침실, 도서관, 화랑(갤러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조와 분위기는 방마다 달랐다.
접견실은 대형 화장대처럼 생긴 벽난로와 그림들, 벽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황금빛 식물 문양과 섬세하기 짝이 없는 의자와 탁자, 소파, 액자, 샹들리에, 괘종시계, 거울과 같은 가구 또는 비품 등으로 잘 정돈돼 있었다. 그곳을 지나 마주친 음악감상실의 인테리어는 인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가이드도 음악감상실에서 시간을 오래 끌었다.
천장 한가운데에는 황금빛 실로 거미줄을 쳐놓았다. 그 주위로 포도덩굴을 그렸다. 역시 황금빛인 포도 가지는 오선지처럼 생긴 그물 위로 기어오르는데, 그 끝이 살아 있는 듯 하늘거린다. 한쪽에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꽃마차를 끌며 노닌다. 동심을 자극하는 덩굴들의 잔치는 몇 개의 그림이 걸려 있는 그 아래의 벽으로도 이어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벽에 부착된 식물 문양의 커다란 거울에 비쳐져 두 개, 세 개, 네 개로 곧장 복사된다는 사실이다. 꿈속을 헤맨다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까. 로코코 스타일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왕은 피아노와 악보대가 놓여 있는 이 방에서 음악을 감상하고 때때로 악상을 떠올리곤 했다. 저녁식사를 끝낸 다음엔 따끈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대단히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인 것 같다. 권력을 가졌으니 이렇듯 넘치는 ‘끼’를 주체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그는 대단한 자제심으로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음악감상실에 이어서 나타난 것은 플루트 연주실이다. 궁정화가 아돌프 멘젤이 그린 ‘플루트 연주’(1750)란 작품을 보면 왕은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검은 망토 차림으로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는데, 앞에선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가 그에 맞춰 연주하고 있고 등뒤에선 왕의 여동생들이 음악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런 정경을 보면 왕은 독주가 아니라 실내악 형태로 연주하길 좋아한 듯하다. 왕은 특히 고요하고 느린 아다지오에 천재적 소질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질은 음악에서도 그대로 발현된 듯 보인다.
침실 곁의 도서관
궁정화가 아돌프 멘젤이 그린 ‘왕의 테이블 토크’. 자유스런 분위기가 읽혀진다. 대왕이 책을 읽거나 생각에 골몰했다는 서재에선 두터운 책들로 서향(書香)이 묻어났다. 천장에는 빛을 발하는 태양이 조각돼 있었다. 황금빛 학문이 태양처럼 우리의 삶에 빛을 비춰준다는 의미를 나타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안내책자를 보니 비밀결사조직인 프리메이션의 상징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그 조직과 대왕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설명해놓지 않아 궁금증만 불러일으켰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짐은 국가’라고 한 루이 14세와는 대조적으로 ‘짐은 국가의 제1 공복(公僕)’이라고 했다. 그래서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재위 중 그는 여러 차례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렇지만 전쟁을 할 때도 선전포고 없이는 절대 공격하지 않았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여러 차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나기도 했으나, 하늘의 도움이 있었는지 큰 피해를 당하지 않고 사지(死地)에서 벗어나곤 했다.
그의 재위 46년 동안 국토는 7만4000㎢에서 11만4000㎢로, 인구는 220만명에서 580만명으로 불어났다. 프로이센이 독일의 맹주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계몽군주로 자처한 대왕은 대학살이나 대역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문하지 못하게 하는 등 범법자를 처리하는 데도 남달리 관대했다고 한다.
침실은 서재와는 달리 장식이라곤 몇 개의 그림과 거울, 시계뿐이라 아주 단출했다. 분위기도 화려하고 우아한 로코코 대신 네오 클래식풍이라 중후한 맛이 났다. 천장 또한 그에 걸맞게 침묵을 지켰다. 침대 앞으로는 두터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외부로부터의 모든 자극에서 벗어나 숙면하고픈 왕의 의도가 읽혔다. 그래서일까. 그는 바로 이 침실에서 1786년 8월17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킨 것은 그가 직접 밥을 먹여 키우다시피 한 두 마리의 영국산 위핏 개였다고 한다.
서재와 침실 곁에는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장서가 꽂혀 있는 도서관을 침실 옆에 둘 만큼 왕은 책을 좋아한 모양이다. 이런 이유로도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조직에서건 최고책임자가 되면 참모들이 적어 올리는 보고나 정보에 의존해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런저런 행사에서 하는 연설도 미리 작성된 문장을 그대로 ‘대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결국 ‘인의 장막’에 가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인데,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늘 책을 가까이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볼 때 프리드리히 대제는 침실 곁에 도서실과 서재를 두었으니 그 길을 제대로 걸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대왕이 상수시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왕의 테이블 토크’라고 불렀다. 그리고 왕의 식탁에 초대받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라 사고의 지평 또한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왕의 독서 가이드이자 여행 동반자였던 프리드리히 폰 비펠트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 상수시의 토크보다 격조 높은 사교 모임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대왕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제왕으로서가 아니라 참석자의 한 사람이 되어 즐겁고 유쾌하고 위트에 넘친 대화를 주고받았다. 말 그대로 가슴을 열고서. 예술과 문학, 철학, 종교, 역사, 전쟁, 의학, 과학 등 모든 영역을 넘나들며 몇 시간이고 토론을 벌이곤 했다.”
멘젤이 그린 ‘상수시의 테이블 토크’란 그림(현장에서 복제화를 팔고 있다)을 보더라도 참석자들은 대왕의 앞인데도 굉장히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게 확인된다. 대왕은 격식 파괴자였던 모양이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철학, 신학, 역사, 과학 등등의 구분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삶의 모든 면을 한꺼번에 살피고 진단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편의상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눴을 뿐이다. 그러므로 학문의 분류가 학문의 목적에 우선할 수는 없다.
대왕은 그런 인위적인 분류 장벽을 헐고 모든 분야를 두루 넘나들었으며, 유럽 최고의 지성이자 계몽주의 사상을 가진 인사라면 국적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계몽주의가 융성했던 프랑스 인사가 초청되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왕은 지성들과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번민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게 틀림없다. 상수시의 모든 것이 그걸 위해 디자인됐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픈 사람이 있으면 포츠담으로 불러 상수시의 영빈관에 묵게 했다. 그 대표적인 인사가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1694∼1778)다. 대왕이 18세 연상의 볼테르와 교유하기 시작한 것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36년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면서였다. 대왕은 ‘프랑스 문화와 예술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프랑스의 것이면 무조건 좋아했다. 그러니 볼테르를 존경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스스로 볼테르를 ‘북방의 솔로몬’이라 칭했을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곳 포츠담에서는 누구나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독일어는 군대에서나 쓸 뿐이다”며 볼테르를 상수시로 초대했던 것이다. 실제로 대왕은 사무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프랑스어로 말하고 글을 썼다. 애인 샤틀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뒤라 마음이 울적했던 볼테르는 그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 1750년 7월 이곳에 와서는 3년간 머물렀다. 영빈관의 네 번째 방인 ‘볼테르의 방’이 바로 그가 머물던 곳이다.
왕비를 데려가지 않은 까닭
6개의 테라스로 된 상수시 궁전의 정원. 파리 교외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과 똑같은 구조다. 대왕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궁전의 ‘대리석 살롱’으로 볼테르를 불러서는 창 밖으로 정원과 테라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함께하곤 했다.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시절이었고 상수시 또한 절정기였다. 볼테르의 등장으로 테이블 토크의 좌장은 볼테르가 도맡다시피 했다.
그러나 너무나 섬세한 성품을 지녔던 탓일까. 대왕은 볼테르가 쓴 시에 자주 사소한 트집을 잡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볼테르는 3년간의 포츠담 생활을 정리하고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그 일은 프리드리히나 볼테르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으나 그렇다고 의가 상할 정도는 아니었던지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떠나가자 왕의 테이블 토크는 시들해졌다.
볼테르의 방은 그렇게 화려하진 않으나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한 분위기다. 천장과 벽면, 그리고 샹들리에가 조각이나 그림이 아니라 드라이 플라워로 꾸며놓은 듯하다. 그래서 형태뿐 아니라 색상도 자연의 그것이었다. ‘꽃의 방’이란 별명이 붙어 있는 이 방에선 그 흔한 황금빛도 자취를 감췄다.
상수시 궁전은 크지 않다. 왕의 여름 궁전이기 때문이다. 왕은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서 이곳으로 왕림할 적에도 왕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를 떼어놓았다. 왕비를 대동하지 않은 데는 21세 때 착한 아들 노릇을 한답시고 아버지가 맺어준 처녀와 결혼했기에 정을 나누지 못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을 것이다. 이는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던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개인비서 몇 명만 거느리고 와서는 지성과 지인들을 불러 환담을 나누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했다. 궁전에 왕의 주방은 있지만 왕의 가족들이 머물 공간은 마련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상수시 궁전에서 숲속으로 난 길을 1.5km쯤 걸어서야 만날 수 있는 신궁전. 불빛이 감도는 화사한 로코코 양식이다. 궁전 앞은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처럼 6단으로 된 테라스와 둥근 못이 차지하고 있다. 그곳으로 내려가는 입구는 두 마리의 스핑크스상이 지키고 있고, 거기에선 왕실 악사 복장을 한 남자가 플루트를 연주한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플루트 연주자였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면서 그가 펼쳐놓은 플루트 박스에 얼마간의 돈을 던져준다. 테라스에선 포도나무와 삼각형의 상록수가 자라고, 테라스 아래의 못 주위는 하얀 대리석 조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건물과 테라스, 정원은 분명 프랑스식이지만, 조각만은 그리스식이다. 독일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그곳을 벗어나자 곧 자연 그대로의 숲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 속에도 금박을 입힌 화려한 중국궁과 조각분수와 특이한 건축물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눈요깃거리로 절대 부족하지 않다.
숲은 아주 넓다. 온종일 궁전에서 보낼 생각이었기에 드넓은 숲속을 한 바퀴 돌았다. 아니, 돌지 않을 수 없었다. 숲속으로 난 길 끄트머리에 붉은빛이 감도는 화사한 또 하나의 로코코 양식 궁전이 있어서다. 그것이 ‘신(新)궁전’이라 불리는 것인데, 상수시를 본 사람들은 물론 휴식차 나온 베를린 시민들은 친구와 가족, 연인과 함께 또는 유모차나 개를 끌고선 그 길을 걷는다.
權三允 ●1951년 출생 ●한국외국어대 무역과 졸업 ●중동지역 등 60여개국 여행 ●저서 : ‘차도르를 벗고 노르웨이 숲으로’ ‘문명은 디자인이다’ ‘세계문화유산’ ‘나는 박물관에서 인류의 꿈을 보았다’ 등
신궁전은 빤히 눈에 보이는 데도 좀체로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1.5km가 넘는 길이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신궁전에서 웨딩 포토를 찍느라 애교스런 자세를 취하는 예비 신혼부부들을 만나게 됐다. 웨딩 포토는 우리나라에서만 성행하는 줄 알았는데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로이 인생을 출발하는 그들에게 번민 없는 나날이 계속되기를 빌면서 나도 한 커트 찍었다. 그때 내 입에선 ‘상수시’란 말이 튀어나왔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토록 갈망했던 그 상수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