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버린 사내
1
상식적인 잣대로
배신을 말해서는 안 되고
참회도 그렇다
참회는 결과가 아니고
해결책도 아니다
참회는 삼단논법의 진리가 아니고
변증법도 아니다
어용 노조위원장 퇴진!
지부장 직선제!
탄가루로 뭉친 함성을
끝까지 외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참회에 짓눌릴 일은 아니다
2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의 고문에 굴복해
동료를 거짓으로 고발했다고
제 그림자 속으로 숨은 그가 안타까워
나는 눈물을 흘린다
고문의 아픔을 견딜 수 없고
협박의 공포를 이길 수 없기에
그의 포기를 옹호하는 것이다
그를 배신하게 만든 것은 광부의 정체성이나
양심 부족이 아니다
고문받는 동료들의 소용돌이 신음도
사면초가의 포기도 아니다
네놈이 주동자지?
네놈이 돌을 던졌지?
어디서 눈깔을 치켜떠!
고문하는 군인에게 굴복당한 그는
수치심보다 억울하다
참회보다
용서보다 억울하다
3
죄와 벌로 그를 협박할 수 없다고
광부들의 눈물을 태울 분노가 삭지 않았다고
나는 그가 버린 말을 집어 든다
군홧발 아래에서 녹슨 그의 분노가
깃발처럼 펄럭인다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1
갱 속에서 착취당하던 광부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싸운 일을 알지 못했다
돌멩이를 유일한 무기로 삼은 형편도 몰랐다
불법 사장에게 맞섰다가
군인들에게 잡혀가
밤낮으로 고문당한 불법도 몰랐다
광부들의 신음도
소문도
뉴스도
사북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2
그때 아버지는 사북에 있었는데
왜 그 일을 말해주지 않았을까?
분이 끓어올랐지만
몸이 떨리게 두려웠기 때문일까?
군인들에게 고문당하거나
개새끼로 취급당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라고
동료 같은 시간에 맡긴 것일까?
3
어떻게 군인이 광부를 고문할 수 있을까?
어떻게 따뜻한 저녁밥 같은 얼굴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떨게 했을까?
어떻게 광부는 죽어도 상관없다고 짓밟았을까?
나는 먼 도시에서 공단의 제철소를 바라보며
실습시간마다 긴장하는
어린 고등학생이었다
맹문재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사북 골목에서』『기룬 어린 양들』『사과를 내밀다』『책이 무거운 이유』 등. 전태일문학상, 윤상원문학상 등 수상. 현재 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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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버린 사내(창작21)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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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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